그대를 처음 만나던 날.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하였다.
처음 본 순간... 그대를 雪花 라 일컬으니 너는 내게 스며들어와 하얀 '눈꽃' 이 되었다.
쿵쿵-
"계십니까~"
대문 밖에서 들려오는 낯선이의 목소리에 마당을 정리하던 하인이 급히 뛰어나갔다.
그 모습에 누마루에 걸터앉아 신을 신던 쑨양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대문을 열고 상체만 내민채 잠시 이야기를 주고 받는가 싶더니 손에 하얀 시전지를 들고 돌아선다.
그 모습을 줄곧 바라보던 그는 하인의 손에 들린 시전지에 눈길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마당을 가로질러 나갔다.
"나으리 앞으로 서찰이 왔습니다요~"
하인이 내민 서찰을 받아든 쑨양은 곱게 접힌 편지를 만지작거리다 천천히 펼쳐냈다.
그 안에 얌전히 적힌 글씨를 눈으로 읽어내려가던 그는 그대로 편지를 접어 품속에 넣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오는 날로부터 이틀이 지난, 기다리던... 기다리지 않았던... 설화에게서 보내진 답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대로 멈춰서서 멍하니 서있던 그는 마당을 마저 정리하고 있는 하인을 불러세웠다.
"전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방으로 와주시오."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전하고 다시 안채로 향하는 그의 뒤를 따라 하인도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관청에서 돌아올때쯤 모두 집을 비우시오."
"...예...?"
하루동안 집을 비우라는 그의 말에 하인은 동그래진 눈으로 나으리를 바라봤다.
뜻을 알 수 없는 그의 명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입만 벙긋거리던 하인은 자신의 앞에 놓이는 돈주머니를 보고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 앉았다.
"집살이 하시는 분들 모시고 좋은 구경이나 다녀오시오. 부담은 갖지 않아도 되오."
"아니 갑자기... 저녁은 어쩌시고... 집을 모두 비우면 나으리께서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실 터인데."
"그건 걱정마시오. 내 앞가림은 혼자 할 수 있소."
"아니 그래도..."
눈앞의 돈주머니를 집지도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던 하인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번쩍 고개를 들어 나으리를 바라봤다.
"혹, 집에 누가 오시기라도 하십니까요...?"
"...........!............"
"중~요한... 그치만 감추고 싶은...?"
어느새 궁금함이 가득한 얼굴로 입가에 미소까지 지어보이는 하인의 표정에 쑨양은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럼 더더욱 곁에서 수발을 해야하는데..."
눈치만 슬금슬금 보며 자꾸만 캐물으려는 하인의 농에 쑨양은 그의 앞에 둔 돈 주머니를 급히 집어들었다.
"이 돈은 아낙에게 주도록 하겠소. 자네는 저~멀리 심부름 보내버리고."
"에?!"
"나가보시오."
"아이고~나으리 아닙니다! 마침, 병약한 어머니를 뵈러 갈까... 하던 참입니다요! "
저멀리 심부름 보낸다는 말에 허둥지둥 변명을 해대는 하인의 모습이 재밌는지 쑨양은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이고
돈 주머니를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잘 다녀오시오.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오."
하인의 어깨를 두드려 준 쑨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자신의 뒤를 따라나와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하인에게 밝게 웃어준 그는 목화를 신고 천천히 마당을 가로질러 밖으로 향했다.
"오늘..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에 어느새 웃음이 사라지고 어두운 그늘이 내려앉는다.
경대 앞에 앉아 곱게 분칠을 하는 그의 손이 무겁기만 하다.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화장을 마무리한 그는 바닥에 놓인 비단 주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툭툭-
문에 느껴지는 손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방안으로 들어서던 금옥이 곱게 단장을 한 그의 모습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떠올렸다.
"그런 모습으로 어딜 가려고 하오?"
여인보다 더 고운 모습에 넋을 놓은것도 잠시,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해가 진 밤에 어딜가려나 싶어 금옥은 걱정이 밀려왔다.
"나으리 댁에 가야하오. 약속이 되어 있소."
"이 밤에? 그러다가 김재호가 풀어 놓은 사내에게 붙잡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오."
"장옷으로 단단히 싸매고 가면 되오. 며칠 별일 없는것을 보면... 괜찮을거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어보이고 다시 경대를 향해 돌아서 앉는 그를 따라 금옥도 그 곁에 다가가 앉았다.
"못보던 옷인데... 아유~ 곱기도 해라.. 자네한테 너무 잘 어울리오."
그의 몸에 딱 맞게 맞추어진 옷을 바라보며 금옥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찌 사내가 여인의 옷을 이리도 아름답게 소화해낸단 말인가.
가채를 매만지는 그를 한없이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던 금옥은 그 옆에 놓인 비단 주머니를 발견하고 호기심에 집어 들었다.
"이건 뭐요?"
"비녀요... 옷과 함께 나으리가 보내신 듯 한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머니에서 비녀를 꺼내든 금옥은 곱고 예쁜 모습에 입을 떡 벌렸다.
한눈에 봐도 값 비싸보이는 비녀를 이리저리 보던 금옥은 이것을 골랐을 나으리의 모습이 상상되어 소리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점잖은 양반이 여인네들 장신구 좌판 앞에 서서 우왕좌왕했을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웃던 금옥은 왜 웃느냐 묻는 태환에게 손사래를 쳐보이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비녀를 들어 태환의 가채에 장식해주었다.
"곱소. 참으로 곱소~ 어찌 이리도 자네에게 잘 어울리오? 꽃 비녀를 한 자네의 모습도...
이것을 골랐을 나으리의 마음도... 참으로 예쁘고 곱소."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금옥을 바라보던 태환은 경대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반짝이는 비녀를 바라보던 그는 금옥의 말처럼 자신을 위해 이것을 골랐을 나으리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 한켠이 시려왔다.
"말하지 않을거요..? 정말 이대로 만족하오..?"
조심히 물어오는 금옥의 목소리에 태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지만... 자신의 마음도 그와 다를것이 없지만... 태환은 자신이 없었다.
"...나는...말할 수 없소. 그저... 나으리가 떠나시는 날까지.. 그 이후에도 좋은 기억으로 남길 바랄뿐이오."
애써 웃음 지으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나으리에게 갈 채비를 마쳤다.
금옥이 챙겨준 장옷으로 얼굴을 꽁꽁 싸맨 태환은 칼바람을 맞으며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를 마주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보여야 할지... 그가 자신에게 하려는 말이 무엇일지 걱정되었지만...
그에게 가는 이 길이 태환은 행복했다.
그를 볼 수 있음에... 그가 아끼는 이 모습으로 그를 만날 수 있음에 태환은 한없이 기뻤다.
잰걸음으로 그의 집앞에 다다른 태환은 장옷을 걷고 다시 한번 옷매무새를 단정히 바로 잡았다.
인기척 하나 없는 대문 앞에 서서 천천히 목소리를 가다듬고 문을 두들기자 발소리가 가까이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문이 열리고 그곳엔 하인이 아닌, 그가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반가움은 찾아볼 수 없는 어딘지 모를 낯선 표정의 나으리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그의 손짓을 따라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찌 나으리께서 문을 열어주십니까."
설화의 물음에 쑨양은 대문을 굳게 닫고 여인을 지나쳐 안채로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집안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적막했다.
자신과 나으리를 빼고 그 누구의 인기척 하나 들려오지 않는 텅빈 집.
별다른 답없이 앞서 걷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설화도 천천히 걸음을 떼어 그의 뒤를 쫒았다.
호롱불이 흔들리는 방안에 서로를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둥근 소반 위에 놓인 찻잔만 만지작거리는 그의 어두운 표정에 설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앉아만 있을뿐이었다.
평소답지 않은 낯선 눈빛, 행동... 설화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혹, 청으로 떠나기전 자신에게서 정을 떼려 이러는 걸까...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을 잊어달라 부른건가 싶어
설화는 땀이 베이는 손을 치마자락 위에 올렸다.
"그대의 오라버니."
"..............."
찻잔만 매만지던 그의 입술에서 갑자기 새어나온 목소리에 설화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치신 곳은 괜찮으십니까."
여전히 시선은 마주치지 않은 채로 감정없는 목소리를 내는 그에게 설화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나으리께 감사하다고... 전해달라 했습니다."
그 답에 그제서야 그의 시선이 설화를 향했다.
"고우십니다. 옷도... 비녀도."
웃음기 하나 없는 그의 칭찬에 설화는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입을 떼었다.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이리 귀한 선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손을 단정히 모으고 고개를 숙여보이는 설화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천천히 흔들린다.
[상상했던대로 고우십니다.
비단을 고를때에도...비녀를 고를때에도... 그대의 이 모습이 그려져 더없이 기뻤습니다.]
차마 입밖으로 내지 못한 그 말을 삼키고 쑨양은 천천히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불안한 눈빛으로 줄곧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의 시선이 느껴져 쑨양은 더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저는 곧 청나라로 돌아갑니다."
"................."
설화의 입장에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이기에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마주했다.
하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나으리의 시선에 설화는 급히 시선을 거두고 떨리는 손을 움직여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올렸다.
"하여, 그대가 함께 갔으면 합니다."
"..........!!!............"
찻잔을 들어올리던 설화는 그 뒤를 이어 나온 생각지 못한 그의 말에 너무 놀라 그대로 찻잔을 놓쳤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내용물이 그대로 자신의 손을 덮쳤지만 설화는 그 고통도 느끼지 못하였는지 그대로 얼어붙었다.
"괜찮으십니까..!"
발갛게 데인 손이 아프지도 않은지 멍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에 쑨양이 급히 몸을 일으켜 손을 잡아 끌었다.
데인 손등을 감싸고 축축하게 젖은 소매 밑단을 걷어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하려던 그는 곧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대로 멈춰 설화를 바라보았다.
붉은 실로 새겨진 이름 하나.
그 눈빛에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온 여인은 나으리의 손끝이 머물고 있는 소매 밑단을 발견하고 급히 내렸보았지만...
이미 그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고 있었다.
"나...나으리..."
"..................."
믿고 싶지 않았던... 부정하고 싶었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간 그는... 절망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감추려하는게 무엇인지 묻고 싶었지만... 굳이 그 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손등에서 손을 떼어내고 그가 다쳤던 팔에 손끝을 댄 쑨양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꽉 움켜쥐었다.
"..으..읏...."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벌어지며 느껴지는 통증에 설화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와 함께 고운 살구빛 저고리 위로 스미는 붉은 핏자국.
"...아니길..바라였는데..."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천천히 내뱉는 그의 말에 설화는 가슴이 쿵..하고 떨어져내림을 느꼈다.
자신의 팔에서 손을 떼어내고 짙은 눈썹을 찡그리는 그를 바라만보던 설화는 급히 손을 뻗어 나으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 손을 끌어 자신의 가슴께에 가져다 대었다.
"저는...저는 나으리가 생각하시는 여인의 몸이 아닙니다. 속이려 했던것은 아닌데..아니, 말할 수 없어서..."
덜덜 떨며 눈물만 한없이 떨구는 설화를 원망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쑨양은 천천히 그의 손을 떼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흔들리는 걸음으로 방문앞에 선 쑨양은 말없이 한참을 서있다가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설화는...태환은... 그제서야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며 바닥으로 무너져내렸다.
얼굴은 이미 엉망이 되었다.
더이상은 흘릴 눈물도 남아있지 않았다.
자신이 저지른 죄임을 알기에 홀로 두고 사라진 그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위태롭게 흔들리다 서서히 꺼진 호롱불.
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한없이 그를 기다릴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것일까.
밤이 지나고 어스름한 새벽의 빛이 방안을 물들일쯤,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변명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잘못했다 용서 한번 빌지 못하고... 긴긴 시간을 혼자 남겨져 무너지는 가슴을 쳐댔다.
붉게 충혈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떠올린 태환은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시선을 두고 마른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어찌하여 하찮은 제게 마음을 주신 겝니까... 저는 어찌하여 감히 나으리를 마음에 품었단 말입니까.
.....처음으로 마음에 품은 정인이... 왜 나으리이신겁니까.
이리 될 줄 알았으면서...왜 아직도 이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인지...
안되는 줄 알면서도... 저를 두고 가버리신 나으리를 기다리는 제 마음을........어찌하면 좋습니까...
저는..... 저는 왜..... 사내인것입니까............................"
속눈썹에 스미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꼭 깨문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가채에 장식된 꽃 비녀를 빼 소반 위에 올렸다.
"이렇게라도 하여 나으리를 향한 제 마음을 놓을수만 있다면... 이 비녀에 제 마음을 두고 가겠습니다..."
빛을 잃은 비녀와 함께.. 빛을 잃은 그의 까만 눈동자에서 뜨거운 눈물이 떨어져 바닥을 적신다.
설화.
그가 꽃이라 불렀던 여인이... 그의 안에서 천천히 시들어가고 있다.
***
안녕하세요~흰둥이입니다.
드디어 20화!!
의도했던건 아닌데..20화에서 일이 빵터졌네요...
이제 두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드릴수 있는 말은...
전 해피엔딩을 참! 좋아합니다ㅎ
늘 응원해주시는 많은 분들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좋은 하루 보내시길...뽕!
★ 오늘의 메인은 설화의 진실에 상처받은 아련 쑨양? 일까요? ㅎㅎ
내용中.. 손을 끌어 가슴에 가져다대는 장면은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 나왔던 장면입니다.
신윤복이 정향에게 자신이 남자가 아닌 여인임을 고백하던 장면에서 나왔던 모습이지요..
그 당시에 굉장히 인상 깊게 봐서... 제 글에 써먹어봤습니다;;; 반대의 입장으로...ㅎㅎㅎ
아는 분들이 계실것 같아 미리 밝혀둡니다! ★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 ![[쑨환] 雪花 (설화) 20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3/8/d/38d5c4f83159e91b5e84a2a10ed79b2d.jpg)
조진웅 "제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