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와 여고생
w. 꽃
나는 이제 아이와의 생활에 꽤나 익숙해졌다. 아이와 함께하지 않았던 지난 이십 칠년간이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만큼, 나는 지금에 완벽히 적응했다. 이제, 오히려 내쪽에서 아이가 떠나버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했고, 원고 작업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아이와의 대화는, 나도, 그리고 아이도 모르게 내 원고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글은 오롯 아이로 인해 쓰여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나는 점점 당연해져 가는 일들이, 아이에겐 불편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나는 아이와 함께한지 몇주가 지나서야 비로소, 아이도 작지만 엄연한 여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선, 첫째로, 아이에겐 변변한 옷이 없었다. 처음 입고 온 교복이 전부였고, 남자 혼자 지냈던 내 집에 여자를, 그것도 어린아이를 위한 옷은 있을리가 만무했다. 내가 몇번이고 쇼핑을 권유했지만, 아이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새 옷 사기를 포기한 나는, 내 옷중에서 그나마 가장 작은 것이라도 입혀 보려 시도했고, 그 역시도 아빠 옷을 빼앗아 입은 아이 같은 모습에, 둘이서 배를 잡고 웃기도 했다.
아저씨, 나는 교복이 좋아요.
왜?
그걸 입으면 진짜 학생이 된 기분이거든요.
아이가 이렇게 뜻을 종잡을 수 없는 말로 끝을 흐릴 때면, 나는 으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장난 인형 마냥,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나는 부끄럽게도, 여자에 대한 상식은 전무했고, 따라서 아이의 생리 생각도 전혀 하지 못했다. 하루는 자고 일어난 아이가 이불로 몸을 돌돌 감싼 채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연거푸 물어도 대답할 생각을 않고 눈동자만 굴리다가, 저 혼자서는 도저히 안되겠던지 생리대좀 사와요! 하고 외쳐댔다. 아이보다 더욱 민망해진 나는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채 허둥지둥 집 밖을 나섰고, 등 뒤에서 들리는 '울트라 중형' 따위의 소리는 전혀 듣지 못했다. 그 날 하루 내내 아이에게 구박을 받은 것은 물론이요, 바보같은 내 모습에 며칠간 스스로를 자책했다.
아이와 함께 있으면 항상 이런식이었다. 그 애 앞에서는 십년의 나이차가, 체격 차이가 무색하리만큼 나는 어린 꼬마 남자애가 되고, 아이는 스물 두어살쯤 먹은 어른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어린 남자아이는 짗궂은 누나의 농담에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는 수 밖엔 없었다. 특히나 이런 모습이 두드러질때는, 내가 아이에게 실수-사실 실수랄 것도 아니다- 할 때 밖엔 없었다. 내가 아이에 관한, 그러니까 이름이나 사는 곳, 가족관계를 물을 때면, 아이는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한없이 원망하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다, 이내 자리를 떠나 버리고 말았고, 아이의 기분이 풀어질때까지, 나는 엄마에게 떼를 쓰고 혼이 난 아이처럼 조금 전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곤 했다. 하지만 그 후회도 오래 지속되지 못해, 내 못난 머리는 금새 망각해 버린 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 만에 또 그런 잘못을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아이와 나의 관계는 시시때때로 변했다. 어떤 때는 어른과 아이였다가, 또 하루는 오빠 동생, 어떤 날은 소설가와 비평가가 되며, 서로에게 조언하기도, 질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맹세코, 나는 아이와 여자와 남자로서의 관계였던적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남이보면 분명 정상이 아니라 생각할만한 우리 둘 사이는, 불안정하게 지속되고 있었다.
| COMMENT |
이번 편은 내가 봐도 너무 지루하다ㅠㅠ 04 부터는 빠른 전개일거에요! ...아마도... |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
현재 못입는 사람은 평생 못입는다는 겨울옷..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