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와 여고생
w. 꽃
아이는 그 날 이후로 몹시도 대담해졌다. 샤워도, 빨래도 내가 잠든 새벽에서야 우렁각시마냥 몰래 몰래 하던 아이는, 이제 그간의 수줍음을 모두 잊은 듯, 사내 아이 같이 행동했다. 원고 작업을 하다 굳은 몸을 깨우려 차 한잔 하려고 방 문을 열면, 아이는 샤워를 마치고 실 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눈부실 만큼 순수하고 새하얗게 웃으며 나에게 안겨왔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부끄러운 나의 의사는 묵살한 모양이다. 내가 더 놀라 큰 타올로 황급히 몸을 감싸는데, 아무리 불편해도 교복을 고집하던 그 전의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그것도 거추장스러워했다. 자꾸만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안을 활보하는 아이는,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지만, 그것과는 반대로 피끓는 청춘의 몸을 가진 나는,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단단해진 아래를 들키지 않으려 방 문을 잠그고 애국가를 몇번이나 불렀는지, 아이는 아마 모를 테다. 아이가 변한 모습은 그 뿐만 아니다. 이제 우리 둘의 사이를 어른과 미성년자가 아닌, 완전히 여자와 남자의 관계로 인지했는지, 아이의 사랑 고백에는 거침이 없었다.
아저씨.
응.
사랑해요.
그래.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
이렇게 안쓰러울 만치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에서는, 부모의 부재가 만든 아이의 어두운 면이 보이는 것 같아, 작은 이마에 입술을 맞추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이런 나의 본심은 모른채, 오직 그 표현 방법이 불만족스러운 듯이 보였다. 아이의 불만은 그것이었다. 왜 사랑한단 말을 내 입으로 해주지 않느냐는, 나는 항상 대답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단 한번도 내가 먼저, 그리고 내 입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않았다. 나에게 이것은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이미 내 온 마음과 몸으로 아이를 향해 표현했고, 구태여 말로 해야만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는 그것이 어느 것 보다 중대한 문제인듯, 자꾸만 나에게 요구했다. 나에게 구지 원인을 묻자면, 이것은 윤리적인 문제다. 나는 그럴 만한 용기가 없었다. 언급했다시피 나는 몹시도 비겁하고 겁많은 사람으로서, 내 감정을 확실히 하기가 두려웠다. 열 살이나 어린 아이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 다는 것은 나에게 대단한 죄 의식을 불러 일으켰고, 확실히 이것이 사랑인지도 긍정하기 어려웠다. 그저 잠깐의 혼란스러움이라고. 나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세뇌시키며 상황을 벗어나기에 바빴다.
그것을 제외하면 아이와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아니, 솔직해지자면 눈물겨울만치 행복했다. 나는 내 짧은 인생 중 그 어느 날보다 즐거웠고, 하루하루 맞이하는 아침에 감사했으며, 삶의 이유와 의지를 되찾았다. 나에게 있어 아이는, 믿을 수 없을만큼의, 나에게 주어지기에는 너무나도 과분한. 말도 안되는 행운이었다.
***
길었던 여름의 끝자락에 내 원고 작업은 끝이 났다. 아이에게 낯선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지 말라는, 자질구레한 말들로 몇번이고 안전에 대해 주의를 주며, 나는 출판사에 원고를 전하러 나왔다. 아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책에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내 이번 소설 속 주인공 여자인 '그녀'의 모델은 오로지 아이였다. 이야기의 결말까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그녀'의 모습은 아이와 몹시도 닮았다. 내 글을 찬찬히 읽어보자면 마치 아이의 하루를 보는 것과 같았다. 때문에 나는 전작과 다르게, 결말을 새드 엔딩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소설 속 '그녀'와 '그'는 영원한 행복을 맞이하며 끝이 났다. 그것이 그동안 내가 추종하고 선호했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일지라도. 그렇게 내 두번째 소설은 끝이 났고, 이제 출판만을 앞두었다. 출판사에서는 몹시 마음에 들어했지만, 그것으로 독자의 반응을 예측하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이제 그 소설의 흥행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이와 나의 이야기가 책으로 출판될 테고, 곧 첫판본이 나에게 올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중요하다. 그때 쯤에, 나는 아이에게 글쓴이 부분에 내 이름이 박힌 책을 건네며, 내 정체에 대해 고백할 생각이다. 나는 제법 잘나가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과장 섞은 자랑과 함께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예쁜 옷을 사러 갈 것이다. 옷방으로 쓰던 내 방을, 아이의 방으로 예쁘게 꾸며 줄 테다. 그래, 이 책만 출판하고 나면. 집에 가는 길에 산, 아이를 위한 초코 케이크가 든 손이 가벼웠다. 기뻐할 아이의 모습에 실없이 웃음이 터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문 손잡이를 돌리자 스르륵 문이 열렸다. 진아? 아이의 목소리를 기대하며 안으로 들어갔지만 대답 대신 나를 반기는 것은 깨진 꽃병이다. 발이 다칠까 신발을 신고 집 안으로 들어서는데, 그 안은 더욱 난장판이다. 온갖 식기는 산산히 부서져 바닥을 굴렀다. 서랍장과 옷장은 활짝 열린 채 어지럽혀져 있었고, 몇 안되는 귀중품과 현금이 사라졌다. 유리란 유리는 모두 깨졌다. 도둑이 든 건가. 아이는 괜찮을까. 넓지 않은 집안 곳곳을 뒤졌는데, 아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돈도, 옷도, 모든 것을 가져가도 상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편이 좋았다. 내 가장 소중한 보물을 빼앗기는 것 보다야, 무엇이든 좋았다. 미친 사람처럼 아이의 이름을 반복해 부르며 온 집안을 헤집었다.
진아, 진아. 어딨어. 진아···.
소리 지를 여력도 없었다. 제발 아이의 안전만 확인하길 바랐다. 어디에서 다쳤는지 왼 팔에 박힌 유리조각 사이에서 피가 흘렀다. 제발, 제발···. 아이의 옷은 어떻게 되었지? 문득 든 의문에 아이가 쓰던 방으로 달려갔다. 교복이 사라졌다. 내가 사준 모든 옷은 그대로였다. 집을 나설 때까지, 아이가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잠옷은, 난장판이 된 집안과 대비되어, 이상하리만치 단정히 옷걸이에 걸렸다. 옷장에 걸린 잠옷을 꺼내는데, 주머니에서 흰 종이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어딘가에서 찢은 듯 한 꼬깃 꼬깃 접힌 작은 종이를 펼치니 '135' 라고 적힌 숫자가 있었다. 백 삼십 오···? 아이와 어떠한 교집합도 없는 알 수 없는 숫자였다. 종이를 반대로 돌리자 분명한 아이의 필체로 한 마디가 적혀 있었다.
'미안해요'
다리의 힘이 풀렸다. 더러운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팔에서 떨어진 피가 바닥을 젹셨다.
***
내 두번째 작품은 흥행을 거두었다. 전과 달리 당당히 베스트 셀러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재기에 성공했다는 긍정적인 언론사들의 평과 함께, 무수히 많은 인터뷰와 사인회 요청이 쏟아졌다. 그리고 나는 모든 외부 활동을 일절 거부했다. 출판사에선 나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몹시도 아쉬워 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몹시도 밝은 내 글에 비해, 내 마음은 한없이 절망적이었다. 아이의 본가에도, 아이의 학교에도, 그 어디에서도 아이의 행적을 찾을 만한 단서는 전무했다. 아이은 정말 말 그대로 '사라졌다'. 때문에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기쁜 모습으로 성공을 논하며 내 책을 홍보할 자신이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집을 깨끗히 치웠다. 깨진 식기들은 모두 하나도 바꾸지 않고, 똑같은 것으로 하나 더 샀다. 사라진 것도, 부서진 유리도. 모두 똑같은 디자인의 새것으로 바꾸었다. 끔찍한 그 날의 기억만 아니라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것 만큼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래, 모든 것이 똑같았다. 단 하나, 아이가 없는 것만 제외하고. 예전, 아이를 보냈을때와는 다르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밥도 잘 먹고, 청소와 빨래, 설거지도 꼭꼭 챙겼다. 모두가 아이를 위해서였다. 언제든 집에 돌아와도 어색하지 않도록, 초라하게 변해버린 내 모습에 실망하지 않도록, 술도 마시지 않고, 수염도 깎았고 외모에도 신경썼다. 그렇게 기쁜 희망을 안고 오전을 보내다가, 밤이 되면 휘몰아치는 절망감에 빠졌다. 오늘도 아이는 오지 않는구나. 정말로 사라져버렸구나. 영영 돌아오지 않을 셈이구나. 나는 이제서야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었는데, 내 모습을 봐줄 아이는 없구나. 스스로를 자책하다가 아이를 원망하고, 신에게 분노했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되면 새로운 희망에 들떠 웃는 생활을 반복했다.
135
나는 아직 이 숫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무의미한 숫자일 리는 없었다. 아이의 행동에 헛된 부분이라곤 없다. 하루의 일부분을 그 숫자에 대해 생각하며 보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내 핸드폰 번호를 아는 이는 몇 없었고, 연락하는 이는 더더욱 없었다. 아이일까. 또 기쁜 상상을 하며 환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작가님이시죠? XX잡지의 기자입니다. 이번 선생님의 재기작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는데요,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 아.
이별에 따른 다른 양상을 보인 남녀간의 고뇌를 다룬 이전의 작품과는 다른, 완벽히 새로운 문체와 내용입니다. 문학적 변화를 가져다 준 영감의 대상이라도 있을까요?
전작과는 변화를 일으킨 문학적 영감의 대상···. 전작과는 다른···. 다른···.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서재로 달려가 내 첫번째 소설을 찢을 듯이 뒤졌다. 백 삼십 오. 백 삼십 오···!
힘없이 책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책과 함께 쓰러져 나는 오열했다.
백 삼십 오 페이지의 첫 문장은 작중 인물인 여인의 대사로 시작했다.
'나를 기다리지 말아요.'
BGM - Girl friend (Wonder Gir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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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 아즈씨만만세님, 승민님, 나비님, 사과님, 감귤님, 레더라님, 연필님, 구자농민님, 격한님, 아찌님, 댕열님, 기억님, 수제비님, 워너비달달님, 베가님, 기성용 하투뿅님, 바나나맛우유님, 초코똥님, 애봉이님, 미시오님. 독자님이 있어 행복합니다.♥♥ 죄송해요....너무너무 늦어버린 꽃입니다! ㅠㅠㅠ 사실 그 이후로 머리를 쥐어짜내도 만족할만한 글이 나오지 않아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어요. 기다리시는 독자님들이게 이런 똥 글을 드리다니ㅠㅠㅠㅠ 다시 한번 제 실력에 대해 실감하게 된 계기였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 앞으로 더 더 노력하는 꽃 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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