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락비/직경] 사과우유 2화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d/6/c/d6cee2d754336fa7051b5d51585076dd.jpg)
사과우유
요즘 박경은 사과우유를 만드는 일에 쓸데없이 열 내고 있었다. 물론 사과우유야 만들기는 쉽다. 대충 믹서기에 사과를 갈아서 우유와 섞으면 끝! 이니까. 그런데 경이가 만들려는 건 그런 간단한 게 아니라 좀 특별한 사과우유다. 사과와 우유의 맛이 절묘하게 조합되어 혀에 닿기만 해도 천사의 나팔소리가 울리는 천상의 주스가 자신의 최종 목표라나 뭐라나. 단순히 사과를 갈아서 우유와 섞으면 맛이 충돌해서 진짜 먹을 게 못된다. 그래서 박경은 사과를 끓여보기도 하고 우유와 다양한 비율로 섞어보기도 하는 둥 아주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실험의 결과물은……
“자, 먹어봐.”
……그대로 내게 테스트하고 있었다.
나는 거북스러운 얼굴로 박경이 내미는 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우중충한 회색빛에 정체모를 거품이 뽀글뽀글 올라오는 그것은, 하아, 정말 음식 쓰레기의 결정판이었다. 구슬픈 얼굴로 경이를 애달프게 응시했지만 녀석은 끝끝내 이 폭탄을 권하기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굽히지 않는다.
“예감이 좋아. 오늘은 진짜 성공할 것 같아.”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잖니, 무뇌충 오이새끼야.
그 때 이후로 박경은 보충수업 날마다 자기가 손수 만든 사과우유를 가지고와 내게 내밀었다. 사과우유의 맛은 둘째치고, 나는 그런 경이의 부탁을 차마 몰인정하게 거부할 수가 없다. 내가 착하기 때문… 인 것 같지만 사실 그런 게 아니고 사과우유가 없다면 경이와 나 사이의 접점이 아주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요즘 일방적으로 경이가 나를 피해다니는데, 유일하게 먼저 찾아올 때가 바로 이 사과우유와 관련된 일이었다.
“우지호, 빨리 먹어.”
게다가 저번에 지나가는 말로 한 내기 때문에 경이가 더 사과우유에 집착하고 있었다. 별건 아니고 내가 사과우유를 제대로, 누구나 인정 할 수 있을 정도로 맛있게 만들기만 한다면 경이의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기로 약속 했었던 것이다. 별 것 아닌 일에 정성을 쏟는 녀석이 기특해서 그냥 던진 말인데 그렇게나 절박해질줄이야. 정말 박경은 10년을 사귀어도 꿍꿍이속을 알 수 없는 놈이다.
“아으으… 경아, 이걸 꼭 먹어야해?”
“어.”
“진짜?”
“응.”
“리얼리?”
“리얼리.”
“경아, 다시 잘 생각해ㅂ…….”
“닥치고 먹자 지호야.”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천하의 사악한 놈! 나는 눈물을 머금고 병뚜껑을 열고 조심스럽게 코로 가져가 보았다. 일단 무향(無香), 아무런 냄새도 없었다. 그러나 방심할 수 없다. 박경이 사납게 나를 째려보고 있는 것 같긴 해도 나는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천천히, 슬로우 모션으로 불쾌한 용액에 내 혀를 약 1mm정도 담가 보았다.
으음, 으으으음, 으으으으음.
아무 맛도 안 난다. 뭐지, 성공인가? 나는 길게 혀를 뺀 채로 경이를 응시했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이 좀 부담스럽긴 해도 사과우유가 성공이라고 추호의 의심도 않하는 표정이다. 조, 좋아. 박경 너만 믿는다! 나는 눈을 꾹 감고 남자답게! 용기있게!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어때? 괜찮아? 맛있어?”
“…….”
꾸불텅 꾸불텅 식도를 타고 흘러가는 차가운 액체가 소름 끼치도록 생생히 느껴진다. 동시에 아주 비리고 쓰고 시큼한, 도저히 언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괴상망측하고 역겨운 향이 고추냉이처럼 내 코를 찔러온다. 가만히 있는데도 세상이 제멋대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 상쾌한 느낌은… 그래, 롤러코스터를 쉬지 않고 100번 정도 탄 기분이다.
하악, 토…할…것…같…… 우우우욱!
결국 난 어제처럼 다시 냅다 화장실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식초를 넣는 게 아닌데, 아깝다. 또 실패야.”
등 뒤로 들려오는 경이의 목소리에 복도에 그대로 쏟을 뻔 했다는 건 안비밀이다, 박경 이 씹새끼야아아!
***
변기에 내 사랑스러운 위액을 욱욱 내뱉고, 물로 입안을 몇 번 씩이나 가글하고, 1년 치 욕을 실컷 (마음속으로) 박경에게 쏟아준 뒤 나는 암모니아의 고향지인 화장실을 떠나 다시 반으로 돌아갔다. (임신으로 입덧하는 모든 여성분들 존경합니다) 비틀비틀. 속이 된통 뒤집어지고 나니 기운이 쏙 빠져서 걷기도 힘들다. 걸음마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불안정한 걸음으로 복도의 양쪽 벽에 쿵쿵 부딪치며 가니까 지나가는 애새끼들이 나를 무슨 정신병자 보듯이 쳐다본다. 확 그냥, 다들 눈 안 깔아? 내가 이 모양만 아니면 니들 다 황천길이야.
“편지?”
“네, 형. 효과 직빵이에요!”
“근데 그건 너무 진부하고 또…….”
“아니에요 대박. 제가 보증 할게요. 걔랑 사귄 게 바로 그 덕분이라고 누누이 말…….”
어떻게 괴롭혀야 박경이 고통스러워할지 잔뜩 고민하며 반에 오니까, 경이와 지훈이랑 둘이 서로 고개를 딱 붙이고는 은밀한 밀담을 소곤거리고 있었다. 저런 못된…! 감히 나는 멍멍이만도 못한 취급을 하며 쌩 무시하더니 새파란 후배랑은 신나가지고 짝짝꿍 놀아나고 있다. 박경의 이중성에 절로 치가 떨리는 순간이었다.
“나도 끼워줘.”
부루퉁해서 둘 사이에 딱 나타나니까, 경이랑 지훈이 엄청 당황해서 급하게 뒤로 물러섰다. 박경 놀라니까 눈 더 커지는 것 봐. 푸핫. 진짜 저러다가 눈알 튀어나오는 거 아냐? 별 이상한 걱정을 하는데 지훈이가 잔뜩 긴장한 채로 내게 물었다.
“혹시 대화 들으셨… 어요?”
듣긴 뭘 들어? 내가 귀신도 아니고 쪼그맣게 꽁시랑 대는 걸 어찌 듣는다고.
“아니. 뭔 얘기했는데.”
내 대답에 박경이 안도했다는 듯 대놓고 크게 숨을 몰아 쉬었다. 표지훈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얼굴에 다행이라고 써있는 거 다 보인다. 니들… 설마 나 험담했다거나 뒷담 했다거나 깠다거나 치사하게 따 시킨다거나 등등, 그런 거 아냐? 경이와의 십년지기 우정을 곰곰이 되짚어 보면 절대로 의심 간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둘을 노려보자 뭔가 찔리는게 있는지 표지훈은 곧 수업종 친다고 쏙 자기 반으로 가고 박경은 피곤하다며 책상에 누워서 숙면을 취한다.
뭐지 이 반응들…….
오늘도 나의 번뇌는 깊어져만 간다.
***
“쯧, 신성한 학교에 만화책이라니.”
어제 사약 맛 사과우유를 마신 뒤로 집에 가서 내내 설사와 구토로 고생하고 말았다. 하루종일 그놈의 사과우유 때문에 기가 쪽 빨린 채로 학교에 도착해 보니 어떤 놈이 책상 위로 대놓고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작게 중얼거렸는데 용케 내 목소리를 듣고 녀석이 고개를 휙 돌린다. 두꺼운 뿔테안경을 쓰고 여드름이 덕지덕지 얼굴을 뒤덮는 오타쿠를 연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용모가 출중하다.
“우지호, 좋은 아침.”
…어라? 한술 더 떠서 내 이름도 알고 있다.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괜히 호감이 뭉클 솟아올랐다. 일단 사람이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니까 말이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씩 웃었다.
“헤이, 와츠유얼네임?”
“저번에 알려 줬잖아.”
그랬었나? 미안하네. 멋쩍게 웃고 녀석의 명찰을 빠르게 살펴보니 김유권이라고 적혀있다. 아, 어디서 들어 본듯한 친근한 이름이긴 하다. 김유권, 김유권. 몇 번이고 입안으로 곱씹으면서 외우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유권에게 말을 붙였다.
“뭔 만화책을 그렇게 열심히 봐?”
만화책 본다고 비아냥거리긴 했지만, 실은 나도 중학교 때 알아주는 열렬한 만화 덕후였다. 주로 즐겨 보던 장르는 액션물이랑 스포츠. 특히 원피스랑 블리치를 꽤 좋아했었다. 내가 아는 만화책인가 싶어서 기웃기웃 대니까 김유권이 아주 묘한 미소를 지었다.
“비엘.”
“엉?”
“이거 비엘이라고.”
비, 비닐 아니 비엘? 그건……! 뭐지.
처음 듣는 해괴한 용어에 인상을 팍 쓰며 고개를 갸우뚱하니까, 김유권이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이거 몰라? 하며 되묻는다. 그까짓거 좀 모를 수도 있지, 존나 비엘 모른다고 무시하는 거냐! 유권은 무슨 나를 희귀한 멸종 위기 동물 보듯이 해서 나는 버럭- 있는 짜증 없는 짜증 모두 내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안 그래도 아파 죽어가는 환자에게 말이야, 자리로 오는 내내 김유권의 낄낄 거리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내 심기를 뒤틀었다.
“경아 뭐해?”
더러운 내 심리를 대변하듯 가방을 콰앙- 책상위로 내팽겨 치고 오늘따라 뻣뻣하게 굳어서 등허리를 쫙 펴고 있는 내 짝궁 경군에게 인사를 건넸다. 뭐 때문인지 몰라도 박경은 잔뜩 긴장한 채로 나를 돌아 보았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한가득이다.
“안, 녕, 우, 지, 호.”
뚝뚝 끊어 말하는 목소리 톤이 딱 로봇이다. 오늘 컨셉은 그거냐? 박경은 당최 알 수 없는 놈이다. 박씨 가문 유전자만의 종특이성인건가. 심각하게 고뇌하고 있는데 문득 좀 전 일이 떠올라서 조심스럽게 박경에게 물어보았다.
“너 비엘 알아?”
“켁! 뭐, 뭐?”
모르면 모른다고 하지 그렇게 체할 건 없잖냐. 갑자기 목까지 시뻘개져서 핏줄까지 올라오는 경이를 보고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럼 그렇지. 지호님이 모르시는 걸 한낱 서민에 불과한 박경이 아는 게 더 이상하다. 자기의 무식함이 들통날까봐 계속 기침만 연발하는 박경을 보고 나는 측은한 눈빛을 던져주었다. 됐다, 집에 가서 이 엉아가 찾아보마.
♡ |
망가리 / 마가레뜨 / 금귤 / 쮸
님 감사합니다 ㅠㅠㅠㅠ! 제가 인티는 처음이라 암호닉이 뭔가 익숙하지 않고 그르네여..헿☞☜
아 정말 소설은 밤에 쓸게 못되나 봅니다^^^^^^^ 야자끝나고 졸린 정신으로 멍하니 쓰니 이게 참...ㅎㅎㅎ..ㅎㅎ...
어쨌든 이번편도 재미있었으면! 좋겠습니다 ㅠㅜ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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