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켄] 세브란스에서 생긴 일 上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7/0/1/7012ecbc986a7951fd0b771cb825979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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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빈은 보기 싫게 꼬여있는 청진기와 각종 구급약품들을 곁눈질로 훑어보면서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지하실 옆 창고 안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이 쓰레기 같은 빈 껍데기들은 흡사 중동 지역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모래사막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모래사막은 오늘 아침 최 선배가 지시한 새로운 신종 지랄이었다. 이 많고 많은 의료기구들을 하나 하나 이름순에 따라 수량 코드 번호로 정리를 해 보고를 하라고 했다. 씨발. 무식하게 커다란 덩치에 선량한 목소리로 저를 조근조근 채근하던 목소리가 떠올라 홍빈은 무의식적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물론 당사자 앞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왜냐, 이홍빈은 이제 막 레지던트 1년차였고, 이제는 그 면전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릴 정도로 싫은 최 선배는 3년차였다. 그래, 3년차. 해병대조차 진즉에 눈물을 삼키며 떠나버린다는 그 3년차. 인생이 인생이 아니라는 그 레지던트 3년차. 그러니까, 그에게 홍빈은 힘 없는 일개 후배일 뿐이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호출하여 잡다한 일을 떠맡길 수 있는 존재였다. 그건 이 바닥의 아주 좆같은 룰이었고, 레지던트로 지내는 모두가 겪는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두터운 먼지층이 일렁였다. 순간 솟구치는 짜증에 거칠게 머리칼을 헤집던 홍빈이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참을 인을 곱씹으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자, 참아. 참자, 홍빈아. 언젠가 최 선배 앞에서 지친다며 눈물로 제 고통을 호소했을 때, 그럼 의사 되기가 뭐 그렇게 쉬운 줄 알았냐며 비아냥스럽게 저를 다그치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그 목소리는 상당히 거만했고, 비웃음이 그득했으며, 듣기에 거북했다. 내가 병원에서 이 짓거리 하려고 코피 터져가며 수능 준비를 했던 게 아닌데. 홍빈이 찹작한 심경을 애써 짓누르며 창고 바닥에 무릎을 굽히며 앉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최 선배를 향해 존경 담은 갸륵한 마음으로 신랄한 언어 구사를 뇌까렸을 때, 홍빈은 눈 앞에 강아지를 닮은 얼굴로 해사하게 웃고 있는 남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간호과. 신입. 이재환. 홍빈의 눈이 빠르게 돌아갔다.
“아, 저기. 정형외과 최 선생님이 차트 기록을 좀 부탁하셔가지구요. 일 좀 도와드리러 왔어요.”
“…아, 네에…….”
“근데 괜찮으세요? 얼굴에 뭐가 많이 묻었는데….”
최 선배. 나이스. 홍빈의 시선이 집요하게 재환의 웃음을 따라갔다.
[홍켄] 세브란스에서 생긴 일
上
병원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자는 제안을 뿌리치고 원무과로 달려온 재환이 불과 몇 분 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시키며 얼굴을 붉혔다. 창고 안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던 남자는 병원에서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던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 선생의 부탁으로 알게 된 그의 이름은 낯설고 생소했다. 차라리 한 번 쯤 들어봤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렇게 마주치게 된 초면의 남자는 신물이 올라오게 잘생겼고 과도로 조각을 해놓은 것처럼 정교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나중에는 의사가 된단다. 말로만 듣던 엄친아가 바로 제 눈앞에 있었다. 문득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 고 생각한 재환이 밝은 얼굴로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을 때, 재환은 분주하게 돌아가는 그의 눈동자를 느끼며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떠올려야 했다.
남자는 끈질긴 시선으로 제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말 실수를 했나? 평소 나사가 하나 빠졌다며 주로 헐랭하다는 평을 들어왔던 재환이라 잠시 그렇게 생각해봐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러나 재환이 어색하게 웃으며 왜 그러시냐는 물음을 던졌을 때도 남자의 집착 어린 눈빛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재환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원무과에서 어제 하다 그만 뒀던 의료보험 서비스에 오차 범위를 붙여 환자들의 병원비를 마저 청산해야 했고 점심시간 전까지는 환자들의 혈당 체크도 끝내야 했다. 게다가 오후에는 소아청소년과에서 접수를 도와야 했다. 저번 달에 있었던 공개 채용에서 아슬아슬한 커트라인으로 간호 근무를 시작한 재환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신입이었다. 그런 재환에게 남자의 이유 모를 눈빛을 받을 여유 따위는 없었고, 그저 빨리 창고 정리를 마치고 최 선생과 만난 뒤 남은 일과를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재환은 여전히 제게 끈질긴 시선을 보내고 있는 남자에게 햇살 같은 웃음을 보여주고서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뭐부터 하면 될까요?’
‘번호요.’
‘번호요? 아, 죄송한데 제가 의약품 코드 번호는 잘 몰라서요. 번호 기록은 제가 하고 확인은 선생님께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 그 번호 말고요.’
에? 순간 저도 모르게 바보 같은 소리로 되물은 재환이 멍청하게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름이 홍빈이라던, 준수하지만 어딘가 예쁘장한 구석이 있는 얼굴을 가진 레지던트는 꽤나 개구진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빠르게 교차되는 시선에 울렁거리는 가슴께를 느낀 재환은 여전히 정신이 나간 얼굴이었다. 잘빠진 홍빈의 턱선이 갑작스럽게 제 얼굴 앞으로 들이닥쳤고, 그건 말 그대로 엎어지면 입술이 닿을 법한 몹시도 짧은 거리였다. 재환이 놀라 사색이 되어 한 걸음 뒷걸음질 치면 홍빈이 두 발자국 더 앞으로 다가오는 것으로 둘의 사이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뜨겁게 붙어오르는 숨결이 느껴졌고 와중에도 남자의 얼굴은 뒤에서 후광이 비치고 있는 것처럼 반짝거렸다. 재환이 바싹 마른 목울대 안으로 긴장에 젖은 침을 삼켜 넘겼다.
‘이름이 예쁘네요. 재환아.’
‘네, 네?’
‘나 재환 씨 번호 알고 싶어요.’
홍빈의 얄쌍한 눈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이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재환이 당황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며 데구르르 눈알을 굴렸다. 잘못 들었겠지? 생각하고 애 같이 웃으며 남자의 품을 빠져나오려는 찰나, 홍빈은 짐짓 엄한 표정으로 더욱 세게 재환의 몸집을 포박시켰다. 본의 아니게 그 품에 갇힌 꼴이 된 재환의 얼굴이 부끄러움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홍빈의 완력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낑낑거리며 손톱으로 긁어보아도 도무지 그 팔은 열리질 않았다. 재환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홍빈을 올려보자 그는 번호를 주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다는 아주 신기한 조건을 늘어놓았다. 이 쯤 되니 재환은 그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나 잘생긴 사람이 무슨 득을 보겠다고 제 번호를 가지려 하는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은 남자였다. 보통 동성에게 연락처를 구하려는 남자는 드물고 그것을 어떠한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은 더 더욱 드물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재환은 슬며시 겁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가 하얀색 아이폰의 키패드를 내밀고 있는 홍빈이 다시 한 번 부드럽게 웃었다. 어쩐지 악마의 사자를 닮은 웃음이었다. 재환은 대충 열 하나의 번호를 찍어주고는 남자의 품을 벗어나 맹수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달음박질을 하며 창고 안을 뛰쳐나갔다. 뒤에서 점심을 사겠다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깡그리 무시했다.
재환이 가파른 계단을 마구잡이로 올라오느라 부족했던 호흡을 토해내며 헝클어진 앞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겼다. 아, 맞다. 최 선생님 보고서……. 재환은 잊고 있던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떠올리고 혼자 망연히 웃었다. 그러나 홍빈에게 다시 돌아가기는 죽어도 싫었다. 이제 잘리는 건 시간 문제였다. 요즘 같은 취업난에 또 어디서 일 자리를 구하지. 다들 점심을 먹으러 간 모양이었다. 혼자인 원무과가 유난히도 쓸쓸했다. 재환은 입맛을 다시며 원무과 컴퓨터에 앉았다. 어쨌든 잘리는 건 나중의 문제다. 오늘 끝내야 할 업무는 언제까지나 재환 자신의 몫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막 워드 프로그램을 실행시켰을 때, 재환은 불길한 인기척을 느끼며 빼꼼히 고개를 들었다.
“글쎄, 재환 씨가 준 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없는 번호라는 거 있죠.”
“아, 저, 그…….”
“그래서 받으러 왔어요. 진짜 재환 씨 번호.”
“…….”
“아까 목걸이에서 봤는데 여기서 일하는 것 같더라고요.”
왜 슬픈 예감은 한 번도 틀리질 않는 걸까. 재환은 절망했다.
“와, 밥도 안 먹고 일하는 거예요? 완전 일벌레네, 일벌레.”
“…….”
“근데 재환 씨 손도 되게 예쁘다. 꼭 여자 손 같네. 깨물어 주고 싶어.”
재환은 이제 일이고 뭐고 그냥 나불거리는 홍빈의 입을 틀어 막아버리고 싶었다. 예쁘게 생글거리고 있는 홍빈의 보조개가 시야에 들어왔고, 재환은 그저 피곤하게 눈가를 주물렀다. 인공 눈물을 넣지 않아 뻑뻑한 렌즈 테두리가 검은색 동공 안에서 시큰거렸다.
“저 핸드폰 없어요.”
“거짓말 마요. 아까 주머니에 갤럭시 들어있는 거 내가 다 봤어.”
“……선생님은 왜 제 번호를 가지고 싶으신 건데요?”
“그거야.”
“…….”
“첫눈에 반해서.”
맙소사. 재환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 얼굴은 곧 경악에 물들여졌고, 후에 가서는 어이가 없음에 하얗게 창백해졌다.
“나랑 같이 해야 될 일도 있잖아요.”
“…그거 그냥 저 혼자 하게 해주시면 안 돼요? 네? 선생님은 쉬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네? 그렇게 해요.”
“번호 주면.”
“…….”
“근데 아까처럼 또 이상한 번호 주면, 나 여기서 그냥 재환 씨 입술에 뽀뽀할래요.”
사악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바라보며 재환은 다시 한 번 절망했다.
결국 그는 재환의 진짜 열 하나의 번호를 받아내고 재환이 있는 원무과를 빠져나갔다. 한 차례의 폭풍과도 같았던 그와의 사투가 끝이 나자 재환은 멍청히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번호를 줬다고?”
“네.”
답지 않게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는 택운을 밉지 않게 쏘아보던 재환이 꾸물거리며 안전벨트를 찾았다. 곧 손에 잡힌 안전벨트를 쭉쭉 늘리며 제 옆구리에 끼워 넣은 재환이 잔뜩 입술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럼 뽀뽀를 하겠다는데 어떻게 해요. 불퉁하게 중얼거리자 택운은 아까와는 다른 가벼운 웃음으로 재환을 쳐다봤다. 차키를 꽂아 넣으며 액셀레이터를 밟는 택운의 옆선을 잠시 멍하게 바라보던 재환이 이내 진동이 울리는 주머니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발신자는 모르는 번호였다. 각진 액정 위엔 익숙함 없는 열 하나의 번호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누구일지 안 봐도 뻔해 재환은 그냥 도로 핸드폰을 야상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소아청소년과 정 선생은 착했다. 뭣도 아닌 일개 간호사의 퇴근길까지 챙길 줄도 알고. 업무 때문에 가끔씩 들리게 되는 소아청소년과엔 두 명의 주치의가 있었는데 사실 재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택운의 첫인상은 썩 좋은 편이 아니라 불과 일주일 전까지도 그다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늘 딱딱하게 굳어있는 안면근육과 자칫 잘못 들으면 분노가 서린 것 같은 얇은 미성의 목소리. 그런 택운의 모습은 사교성이 좋은 재환마저도 쉽게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그런 재환의 마음을 바꿔 놓은 건, 심각하게 업무가 밀려있었던 지난 주의 일이었다.
망했다. 를 연발하는 재환의 얼굴엔 핏기가 걷혀 있었다. 그야말로 산 송장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재환의 곁으로 다가온 것은 다름 아닌 정 선생이었다. 택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재환에게 왜 그러냐 물었었다. 재환은 잠시 얼버무리다가, 바이러스를 먹어 한글 파일이 죄다 깨져버렸다며 울상으로 칭얼대었다. 그런 재환을 언뜻 안쓰럽게 바라보던 택운은 홀짝이던 커피 믹스를 옆에 두고 날렵한 손놀림으로 백신 패치를 다운 받아 손쉽게 파일을 복구시켜 주었다. 그 순간 택운을 바라보는 재환의 시선엔 존경심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역시 의사 선생님은 다르네요! 라며 제법 해맑게 웃던 재환이었다. 그 이후로 재환과 택운은 부쩍 잘 붙어 다녔고, 심지어는 병원 식당에서 일주일 내내 같이 점심을 먹기도 했다.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다 말고 조용한 목소리로 택운이 물었다. 안 받아도 돼? 그 물음에 재환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받지.”
“모르는 번호에요.”
“그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안 받겠다는 거예요.”
꽤나 단호한 음성으로 재환은 말했다.
“그나저나 취향 한 번 독특하네. 너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니.”
“……지금 그거 욕이죠.”
택운은 고요하게 미소 지으며 재환을 쳐다봤다. 다 왔어, 내려. 그 말에 재환은 서둘러 안전벨트를 푸르며 차체를 빠져나갔다. 조심히 가세요. 환한 웃음으로 말하는 재환을 짐짓 뚫어져라 쳐다보던 택운이 알았다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넓지 않은 원룸의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재환은 곧바로 시체처럼 침대 위로 널부러졌다. 피곤해. 이불에 파묻혀 뒹굴거리던 재환이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을 꺼내어 잠금 화면을 풀었다. 헐. 부재 중 전화 13통. 언제 봐도 깨끗하고 투명한 갤럭시의 액정은 거품을 물 정도로 충격적인 사실을 별 것 아닌 것처럼 무덤덤히도 알려주고 있었다. 사방으로 흔들리던 재환의 동공이 갈 곳을 잃고 헤매었다. 재환은 덜덜 떨리는 오른손으로 차근히 최근 통화 목록 목차를 살펴보았다. 역시 재환의 예상을 엎을 반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13통 모두 모르는 번호였고, 같은 번호였다. 재환은 좌절스러운 마음에 와이파이를 키면서도 헛웃음이 터지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곧 수신이 잡혔고 와이파이가 터졌다. 카톡 알람음이 울렸다. 놀랍게도 노란색의 팝업창은, ‘134개의 새로운 메세지가 있습니다.’라며 재환을 조롱했다. 설마, 아니겠지. 에이. 설마. 재환은 여전히 헛헛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했던가? 그래, 지금 이 순간 설마가 우리의 이재환을 잡아버렸다. 그것도 아주 기세 좋게.
재환은 두 눈으로 보고도 차마 믿기가 어려운 현실에 무차별하게 쏟아져 내리는 멘탈 붕괴 현상을 경험했다. 134개의 카카오톡 중 2개는 택운에게서, 3개는 친구인 원식에게서, 그리고 나머지는 죄다 이홍빈이라 쓰여 있는 채팅방에 존재하고 있었다. 일단 재환은 놀란 심신을 가라앉히기 위해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택운이 알려준 방법으로 심호흡을 하고나니 심장이 한결 편안해진 것 같기도 하다. 그 와중에 또 한 번의 카톡이 날아왔다. 택운이었다. 그러나 지금 정신이 반 쯤 날아가 있는 상태인 재환은 택운의 카톡을 신경 쓸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그저 멍하니 액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환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뜨며 이홍빈의 129개의 채팅을 확인했다. 왜 전화 안 받아, 가 삼십 개 정도였고 전화 받아, 가 약 백 개 정도였다. 재환은 홍빈의 무서운 집착에 치를 떨며 핸드폰 배터리를 분리시켰다.
내일은 제발, 마주치지 말게 해주세요. 홍빈은 재환에게 믿지도 않는 하나님을 찾게 만들었다.
“좋은 아침.”
“아, 네. 안녕하세요.”
재환은 저의 얼굴을 보며 밝게 인사를 건네는 여 간호사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서둘러 컴퓨터로 시선을 박았다. 하루 종일 이렇게 숨어 있으면 마주칠 일 없겠지? 마스크에 털모자에 거의 중무장을 하고 온 재환에게 감기라도 걸렸냐며 여 간호사는 꽤나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물음에 아니라며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젓던 재환이 복도에서 익숙한 인영을 발견하고서 작게 손을 흔들었다. 하얀 가운을 걸친 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다가오는 사람은 택운이었다.
택운은 대뜸 재환의 어깨를 붙잡고서 물었다.
“무슨 일 났어? 꼴은 왜 그래?”
“에? 뭐가요?”
“어디 아파?”
“아… 아니요. 그냥, 또 그 사람 마주칠 것 같아서 나름 위장하고 온 건데…….”
머쓱하게 웃어버리는 얼굴에 택운은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걱정했잖아. 연락도 안 되고.” 그제야 재환은 어제 택운의 카톡을 떠올려냈다.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려는 것을 제지한 택운이 가볍게 재환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이따 보자. 그러곤 택운은 다시 반대편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재환은 작아져가는 택운의 인영을 바라보다 이내 다시 원무과 컴퓨터에 시선을 돌렸다. 어디 보자, 오늘 업무가……. 촘촘하게 짜여진 스케쥴러와 차트를 번갈아 바라보던 재환이 제 등허리를 툭툭 건드리는 손길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안녕?”
재환이 뜨악하며 재빨리 고개를 내렸지만, 홍빈은 끈질기게 재환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이 좋아 보이네요. 혹시 사귀는 건 아니죠?”
“……누, 누구요.”
“누구긴. 방금 지나간 그 분.”
아마 그는 택운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단 거지. 재환은 일 초에 수만 가지의 생각을 하며 홍빈의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잘생긴 그의 얼굴은 뻔뻔하게도 활짝 웃고 있었다. 재환은 땀이 차기 시작하는 손바닥을 제 허벅지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제 얼굴을 쳐다보며 갑자기 미간을 좁히던 홍빈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마스크를 벗겨내었다. 재환은 어벙벙한 표정으로 홍빈을 올려다봤고, 그런 재환을 바라보는 홍빈의 표정은 아직도 유했다.
“예쁜 얼굴을 가리고 있길래.”
“…….”
“아, 어쩜 이렇게 예쁘게 생겼을까?”
재환은 제 볼을 늘리며 만지작거리고 있는 홍빈의 움직임에 굳어가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옆에서 경악스러운 얼굴로 이 모든 정황을 지켜보고 있는 동료 간호사들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그저 재환은, 따뜻한 그의 손바닥에 잠시 넋을 잃었다.
“어제 연락은 왜 안 받았을까. 난 또 진짜 무슨 일 난 줄 알았잖아요.”
“…….”
“이따 점심 같이 먹어요. 내가 여기로 올게. 응?”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재환을 홍빈은 사랑스럽게 바라보다 이내 걸음을 돌리며 찬찬히 계단 밑으로 사라졌다. 붕 뜨려는 마음을 애써 무겁게 가라앉힌 재환이 차가운 손바닥에 핸드크림을 펴 발랐다.
점심시간까지 흐르는 시간은 왜인지 빨랐다. 재환이 출근 뒤 처음으로 한 일은 오류가 났다는 환자들의 인적사항을 체크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론 혈압 수치가 낮게 나온다는 환자를 처치실에 앉히고 다시 한 번 혈압 체크를 했다. 그게 다인데 점심시간으로 흐르는 시간은 너무나도 빨랐다. 초조함에 다리를 떨던 재환이 멀리서 걸어오는 인영에 화색을 하고서 달려갔다. 택운은 갑자기 달려오는 재환에 당황하며 뛰면 다친다는 핀잔을 줬다. 재환을 세 살 먹은 애로 여기는, 그것도 나름의 직업병이었다.
“선생님. 빨리 가요, 빨리. 네?”
“왜 그래?”
“제발. 사정이 있어서요. 그 사람 오기 전에 내려가야 돼요.”
대강 사태를 파악한 택운이 알았다며 재환의 손을 이끌었다. 엘리베이터를 탈까 생각하다가 마주칠 것 같아 관뒀다. 이윽고 병원 식당이 있는 지하까지 뻗어있는 계단을 이용해 식당에 도착한 둘은 최대한 조용한 움직임으로 식권을 뽑았다. 재환은 그저 자신 때문에 바삐 움직여야 하는 택운을 죄송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뭐야, 재환 씨. 둘이 진짜 사귀는 거예요? 이젠 아주 나 몰래 밥도 같이 먹으러 내려오네.”
“…….”
“뭐. 상관은 없어요. 내가 뺏으면 그만인 거니까.”
생각해보니까 그 쪽이 더 재밌을 것 같기도 하네요. 여유 넘치게 웃어버리는 홍빈의 앞에서 재환은 꿀을 따다 먹은 벙어리가 됐다. 난잡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재환은 택운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택운이 먼저 무거운 목소리로 선수를 쳤다.
“사귀든, 말든. 그건 그 쪽이 상관할 바 아니죠.”
“왜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저, 선생……”
“내가 좋아하는데 당연히 상관해야지.”
재환은 어지럽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그만 질끈 두 눈을 감아버렸다.
... |
그냥 소아청소년과 정 쌤이 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ㅅ;... (도망) 그나저나 마음대로 짤랐더니 분량 진짜 짧네옄ㅋㅋㅋ 후... 제가 뭐 그렇죠... 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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