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락비/범권] 구원 07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3/1/a/31ae9e5a205b667cc11dc544823082e6.png)
* * *
빠르게 집에서 멀어져가는 민혁을 확인한 그녀가 느리게 미소를 지었다.
"가요"
차문을 닫고 나온 세영의 뒤로 연장을 든 장정둘이 따라붙는다. 민혁씨 나를 너무 우습게 봤어. 애써 돌아왔는데 그런식으로 반겨주면 내가 너무 비참해 지잖아. 안그래?
잠기지 않은 현관이 힘없이 열렸다. 오늘은 남아있는 그의 모든것을 모두 없애버릴 참이었다. 아무것도 없으면, 내게 돌아올지 누가알아? 긴 웨이브머리를 쓸어 넘기던 그녀가 손짓하자 남자둘이 들고 온 드럼통을 바닥에 들이부었다. 책상위에 있던 노트북도, 떨어트려 구둣발로 짓이겼다. 마지막으로, 구경이나 할까? 싶어 방을 둘러보던 그녀가 서재앞에 멈춰 섰다. 여기가 가장 잘 타버리겠지. 닫겨있던 문을 열다가 흠칫, 뒤로 물러선다.
"... 누구야"
느리게 눈을 깜박인 권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누구냐고, 날카롭게 묻던 그녀의 시선이 그의목에 걸린 방울에 멈췄다. 반쯤 풀어헤쳐진 흰 와이셔츠와 깨진 와인병, 소파위에 늘어져있던 그가 몸을 일으킨다. 소리를 지를 새도없이 다가온 유권이 그녀의 팔목을 움켜잡고 끌어당겼다. 반항할틈도 없이 그의 품에 안겨버린 세영이 몸을 비틀자 그녀를 안고 뒷머리를 음미하듯 쓸어내린다. 풀린 눈으로 입술을 귀에 바짝 가져다댄 그가 오로지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뺏기지 않아..."
그녀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남자들에게 팔이 꺾인 유권의 뺨이 벽에 사정없이 쓸렸다. 와인향이 지독히도 풍겼다.
굽이친 도로를 히터도 키지 않은채 운전해왔다. 다시 돌까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핸들을 꺾진 않았다. 그냥..그냥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매일과 같이 웃어줄까..? 생각하며 가다가 멀리서 보이는 검은 연기에 급브레이크를 밟아 끽 하고 도로한복판에 재효의 차가 멈춰섰다. 분명 그의 집 쪽이 확실한데...제 눈을 의심하던 재효가 다시 빠르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홉시반, 게이트만 뚫어져라 쳐다본지 삼십분째였다. 뭔가 잘못되었다. 이제는 사람도 드문드문 들어왔다. 천천히 한번 더 공항을 살피던 민혁이 공항직원을 발견하고 뛰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아홉시에 도착하기로 한 캐나다비행기...혹시 연착되거나 취소되었습니까?"
숨을 고르며 묻자 그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오늘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는 오후 네시쯤되야 도착합니다. 연착기록은 없구요"
감사합니다...대답한 민혁이 뒷걸음질 치다가,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뭔가 확실히, 잘못 되었다.
*
그녀는 꼭 '그녀'를 닮았어요. 나를 상처 입히는 것 마저도. 날이 밝아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햇볕에 산산 조각난 유리조각이 눈부시게 빛나네요. 따뜻한 요람인줄 알았는데, 또 다른신의 구렁텅이였습니다. 매일같이 나른한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고, 나를 어루만져주고, 함께 뒤엉켜 사랑을 나누던 아름다운 안식처가 깨지고 더럽혀졌어요. 그가 돌아온다면, 정말 슬퍼하겠죠. 이제 그는 사랑할것이 보다 많아졌습니다. 초라한 나만을 바라볼 여유가 되지 않아요. 나는 과분한 사랑을 받았기에 벌을 받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모든게 제자리로 돌아갈 시간이에요.
*
바닥에 쓰러져있던 유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현관으로 걸어나갔다. 발치에 툭, 걸리는 무언가가 있다. 멍청한 그녀의 지포라이터, 그제서야 유권이 일어난 것을 발견한 그녀가 라이터를 켠 그를 보곤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다.
"너 미쳤어!? 바닥에 기름안보여?!!"
눈을 느리게 깜박인 유권이 고개를 갸웃, 하다가 켜진 라이터를 거실로 던져버린다.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인 거실에 주방 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여느때보다 처절했다.
쿵, 현관문을 닫고 나온 권이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한다. 살을 애는 추위에 발바닥이 시린 감촉, 아직 녹지않은 눈이 파리하게 질린 유권을 방해하는 듯. 하염없이 걷던 그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붉게 타오르는 오두막을 돌아다 봤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택시를 타고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맞다,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바보같은 나는 낌새가 이상해도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한숨을 쉬고, 창가에 기대어 이마를 짚었다. 밀려오는 편두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다. 지금까지 잘 유지되어왔던 10여년간의 평화로움이 그녀에 의해서 철저하게 부숴졌다. 아마 그 메시지도, 그녀의 계략이었겠지. 중요한것은 갈피를 잡을수 없는 그녀의 복수심이었다.
얼마나 더 나를 골려야 만족할까.
생각하다가 답답한 공기에 창문을 내린다. 멀리보이는 새카만 연기에 민혁이 미간을 구겼다.
여자비명소리에 재효가 달궈진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려다 앗! 하고 손가락을 떼어냈다. 깨진 창문에선 이미 불길과 연기가 쏟아져 나오고, 2층이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겉옷을 벗어 눈 속에 굴린 그가 후드지퍼를 올리고 모자를 쓴채 창문을 뛰어넘으려다 뒤를 돌아다 봤다.
민혁이 얼음을 깨고 물 양동이를 뒤집어 몸을 적신다. 벙찐 재효를 뒤로하고 뒷문을 부순 그가 순식간에 까맣게 그을린 한구의 시체와 두 명의 남녀를 밖으로 끌어냈다. 잘 지어진 원목의 집이 재만 남을 기세로 활활 타올랐다. 마른기침을 해대는 그녀를 거칠게 일으킨 민혁이 눈을 똑바로 맞추고 물었다.
"네 년도 철저하게 짓밟고 뭉개줄테니까 목닦고 기다리고 있어. 우리 권이는 어디갔어"
"...몰라...난...몰라"
그녀를 내팽게 친 민혁이 한 번 더 몸을 적셨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부서진 뒷문으로 발길을 옮기는 그가 세영의 울부짖음에 멈춰섰다.
"민혁씨!!!거기...거기 없어...혼자 나갔어...정말이야!! 믿어줘...겁만 주려고했는데...그랬는데 걔가..."
등을 돌려 그녀에게 다가선 민혁이 소름끼칠 만큼 표정 없는 얼굴로 뺨을 내리쳤다. 그가 젖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고양이를 찾으러 사라질때까지, 재효는 옆에 서서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다. 어렴풋이 알수가 있었다. 유권, 말하지 않아도, 민혁이 그고양이를 온전히 사랑한다는것이 느껴져서 할말을 잃었다. 내가 낄 틈이란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서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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