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03
아오....아오!
쿵쿵 차문을 내려친 형사가 머리를 쥐어뜯는다. 이놈이 아냐... 두 번째 잠입수사. 모두 잘못짚어버렸다.
풀어줘.
귀찮은 듯 경찰들에게 손짓을 한 그가 차에 올라탔다. 대체 그는 어디로 증발해 버린걸까. 증거도 없어, 길가에 깔리고 깔린 CCTV에도 옷자락하나 찍히지 않았다. 계속해서 자신이 하던 일을 생중계하던 그가, 이렇게 사라져 버렸을 리가 없다. 보통 찾아달라고 별 생쑈를 다하는 놈들이나 하는 짓을 다해놓고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범인을 아는데, 증거도 없고 범인도 없고...죽었으면. 시체라도 발견돼야지...한숨을 쉬던 형사가 담배를 빼어 물곤 지포라이터를 켠다. 덕분에 수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채 난항을 고스란히 겪고 있었다. 같은 부대의 동료들과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사진을 꺼내보았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나 잔인하게 만들었을까. 다타버린 담배를 다시 한 번 깊숙이 빨아드리고 튕겨버린다. 오기로라도 그를 꼭 잡고 말겠다. 꼭 잡아서 죗값을 치르게 하겠어. 중얼거린 지훈이 창문을 올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검은색 그랜저가 유유히 건물을 빠져나간다.
▷
상처가 잘 아물고 있는 것을 확인한 민혁이 샤워를 끝내고 욕실 문을 열었다. 오른쪽 침실엔 한쪽손이 침대기둥에 묶인 그가 얌전히 리사의 털을 빗겨주고 있었다. 열쇠를 꺼낸 그가 다가가 수갑을 풀었다. 리사를 보는듯했던 유권이 고개를 들어 풍겨오는 향기를 맡았다. 사라진 불가리향, 좋았는데...이젠 화약 냄새나 피 비린내도 사라지고 없었다.
상처는 괜찮아요? 묻는 말에 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아, 응. 하고 대답을 했다. 목소리를 들은 유권이 생긋 웃는다.
방금, 고개 끄덕였죠?
...그런건 또 어떻게 아는거야?
글쎄요...바람이나..그냥 느낌이라고 하는게 더 맞는 것 같네요.
귀신같이 예민하네.
수갑을 챙겨 거실로 이동하는 그를 따라 걷다가 문득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그런데 낮에는 왜 이렇게 풀어주는 거에요?
좋아할 것 없어, 자고 있지 않을 때는 풀어놔도 무슨 일이 있던지 널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이러는 거야.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나는 이제 딱히 도망칠 생각도, 반항할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왜일까? 고개를 갸우뚱 한 유권이 아무 말 않고 멈춰선 그의 등에 코를 쿡 박아버렸다.
아파라...갑자기 멈추면 어떡해요...
그냥 멈춰봤어.
얄밉게 제 할일을 하러가는듯 한 그를 흘겨보는 시늉을 했다. 그나저나 태일이 형은 잘 있으려나. 언제 한번 들른다고...했던 것 같기도.
분양받은 리사도 볼 겸 밖에서 만나자고도 했는데,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그의 칼질소리를 듣고 약속을 거절했다. 이사 올 때에도 도와주러 오지 못한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것 같던 그가 신경 써서 한 말이었을 텐데...어쩔 수가 없었다. 보이진 않지만 민혁은 통화내용을 귀 기울여 듣고 있겠지. 허튼소리를 하면 들고 있는 칼이 흉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렇게 느슨한 것 같다가도 다시 보면 공과 사가 확실한 사람이니까.
...어, 그래. 그럼 잘 지내고 있어.
말하던 서운한 목소리. 이쪽은 미안한맘이 태산일 뿐...
사실 이젠 통화하기 전에 뒤통수에 총구가 와 닿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통화하는 데에 불편함이 사라졌다고 말하기도 뭐했다. 밖을 나가는것도, 누군가 오는것도. 그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을 테니까.
▷
어? 사료 세일하네. 카트를 끌고 유유히 장을 보던 태일이 졸린 눈을 비볐다. 이번 해 11월쯤엔 마무리지어야하는 논문은 아직 초장인데도 수면시간을 줄여야 할 정도로 빡셌다. 방학이라 망정이지 학기가 시작되면 또 얼마나 바빠질까. 스트레스. 내려오는 안경을 올린 그가 대형견용 사료포대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뭐가 그리 바쁜지 김유권은 매번 전화할 때마다 번번이 약속을 거절했다. 원래는 가까웠던 서로의 집을 제 집 드나들듯이 했던 사이인데, 요즘 들어 조금 거리를 두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바보같이 또 집에만 틀어박혀 우울해하고 있는건 아니겠지. 걱정과 괘씸함이 한데 섞여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휴대전화의 잠금을 푼 태일이 최근기록을 눌러 유권의 이름을 찾다가 멈춰 선다. 카트를 반쯤채운 먹을거리. 아직 요리는 힘들 그를 생각해 스팸과 라면을 몇 개 더 집어넣곤 휴대폰을 그냥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이 녀석, 오늘은 기습방문이다.
카트를 밀고 카운터로 향하는 그가 어느새 논문의 스트레스는 말끔히 잊어버린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멍하니 총과 나이프를 닦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손은 계속 일주일이 넘도록 운동량이 평소보다 적었던 리사에게 인형을 던지고 물어오는 것을 받는 작업을 하고 있는 채였다.
원래 총은 매일 닦아야 해요?
응. 정말 필요할 때에 못 쓰는 경우가 생길수도 있거든.
정말 필요할 때가 언젠데요?
...그런게 있어.
언제쯤 제대로 대답하줄까...속으로 궁시렁대던 그가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총을 닦던 민혁이 일어나 책상위에 놓인 휴대폰을 가져다준다. 빤히 그를 바라보자 이태일. 하고 말해주는 목소리에서 헤이해진 긴장감을 읽어 내렸다. 조심스레 휴대폰을 건네받은 그가 통화버튼을 당긴다.
...여보세요.
나야. 지금 너희 집 엘리베이터.
눈을 끔벅인 유권이 뭐, 뭐라고..?묻자 태일이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이제 내린다.
올려놓은 볼륨키. 태일의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튀어오른 민혁이 총과 나이프를 챙기고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벽장과 침대 밑을 번갈아보던 그가 침대 밑으로 몸을 날렸다. 딩동-. 울리는 초인종에 당황한 유권이 우왕좌왕하자 인터폰을 타고 태일의 재촉아닌 재촉이 들려온다. 제대로 숨은거 맞겠지? 도어락을 더듬고 오픈키를 누른다. 열린 문으로 찬바람이 훅하고 들어왔다. 추워 추워, 들리는 태일의 목소리가 퍽이나 반가웠다. 얘가 리사야? 안녕 리사. 들고 있던 마트봉지를 유권에게 넘겨주곤 태일이 쭈그려 앉아 그를 쓰다듬었다.
어...어쩐 일이야?
우리가 언제 무슨 일이 있어야 만났나? 마트 갔다가 생각나서 먹을 것 좀 사왔어. 요즘 장은 보냐?
하는 물음에 어...어,응..하고 바보같이 대답해버린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느낌. 그건 침실의 침대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민혁도 마찬가지였다.
점심은 먹었어? 나 배고파. 라면도 사왔으니까 좀 끓여주라. 그 정도는 이제 안 데이고 할 수 있지?
소파에 풀썩 주저앉은 그가 주위를 둘러봤다. 정리 잘해놨네.
고개를 저어 정신을 차린 유권이 봉지 안에 있을 라면을 찾곤 냄비를 꺼냈다.
물을 받는 그의 모습을 확인한 태일이 습관적으로 티비를 켰다. 방은 두개고, 거실도 꽤 넓고... 딱 필요한 것만 갖춰진 이상적인 집이었다. 근데 대낮에 커튼은 왜 친거야? 일어서서 커튼을 걷어버린 그가 집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유권은 라면을 끓이고 있으면서도, 티비 소리에 묻혔다 들렸다하는 태일의 소리에 완전히 정신이 팔린채 귀를 기울였다.
통과, 통과! 혼자서 합격점을 매기던 그가 마지막 남은 침실의 전등을 켰다. 정돈된 침대에 앉아 있다가 벽장문을 열었다. 침대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민혁이 옆으로 보이는 태일의 발, 열리는 벽장소리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shit. 저기 숨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벽장문을 닫으려다 응? 하고 다시 문을 열었다. 잘 개어져있는 검은 가죽자켓 하나. 인덕션 앞에서 라면을 끓이던 유권을 확인한 태일이 자켓을 집어 들었다. 김유권 사이즈가 아닌데? 미간을 찌푸린 그가 옷을 펼쳐 침대위에 올린다. 주머니에 삐져나온 뭔가를 죽 당기자 엉켜있는 군번줄이 딸려 나왔다. 그 밑에서 모든걸 보고있던 민혁이 망했다...중얼거리고 싶은 입술을 씹었다. 아니, 애초에 나는 왜 숨어야하지? 당장이라도 유권을 묶어놓았던 의자에 태일을 묶어버리고 싶은맘이 굴뚝같다.
대체 뭐야...
갑자기 이제까지의 유권의 의미심장한 행동들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설마..오마이갓...이러지마.. 다시 한 번 유권을 확인한 그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사를 오고 얼마 후부터 잘되지 않던 연락. 만나자고하는 족족 선약이 있었지. 그러고 보니 아까 엄청 당황한 눈치던데...원래 당황 같은거 안했는데...벽장 속에는 낯선 남자의 옷이있고..점차 혼돈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화장실 선반위에 하나씩 더 올려져 있던 면도기와 칫솔이 퍼뜩 생각난다. 그냥 칫솔과 면도기를 바꿔서 헌것을 올려놓았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는데...아니 보통 바꾸고 나면 버리지 않나? 설마설마 하는 생각이 점점 확신에 차고 있었다. 아니야...이건 아니야... 중얼거리던 태일이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3년 동안 알고 지냈던 동생이 동거하는 사람이 생겼다니...그게...그게 남자라니...
멘붕에 빠져버린 태일이 형, 라면 다됐어요. 하는 유권에 목소리에 재빨리 자켓을 다시 벽장에 쑤셔 넣고는 나,나가! 하고 침실을 벗어났다. 침대 밑에서 태일의 목소리를 듣고있던 민혁이 신이시여...하고 지끈거려오는 이마에 손을 올렸다.
유권이 라면을 먹는 태일의 앞에 앉아 분위기를 파악하려 애썼다. 사실은 민혁이 알아서 숨을 줄은 몰랐달까? 여유롭게 앉아 있다가 데자뷰처럼 태일을 제압하는걸 손도 쓰지 못하고 느끼고 있어야하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순간 스쳤었는데...아직까지 얌전히 숨어있는 그에게 감사했다. 그러니 아무일이 없을 때 어서 태일이 라면을 먹고 나가기만 하면 되는일이었다.
라면을 젓가락으로 집던 그가 맞은편식탁에 앉아있는 유권을 다시 한 번 보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우물쭈물하던 태일이 가까이 몸을 기울이더니 작게 속삭였다.
니 취향은...내가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으니까...고민같은거 있으면 바로바로 말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유권이 재차 물어보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난 논문자료 정리해야 해서 이만 갈게! 하고 순식간에 나가버린 태일이 있던 자리를 유권이 멍하게 바라보았다.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 까지 민혁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옷을 털고 밖으로 나왔다. 후...하고 물을 들이킨 민혁이 다시 침실로 들어와 벽장문을 열었다. 자켓을 꺼내 없어진 물건이 없는지, 사진과 6개의 군번줄을 만져보았다. 정말 엿같은 경험이었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침실 문 앞에 다가와 있던 유권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숨어줘서...고마워요..
너 좋으라고 그런거 아냐. 일이 복잡해질 까봐 그런 거니까 안 고마워해도 돼.
다시 자켓을 개어서 벽장에 넣는 그의 소리를 듣고 있던 유권이 몰래 웃었다.
▷
기괴할 정도로 텅 빈 사무실을 둘러보던 지훈이 맞은편소파에 앉았다. 이 바닥에선 소문난 녀석이라더니, 어디서 또라이 냄새가 진하게 풍겨 오는 것 같기도 하고.
보통 이런 사람들 심리가 어떻습니까?
질문이 난감 할 정도로 포괄적이네요. 낸들아나?
...하?
삐딱하게 앉아 사탕을 씹으며 웃고있는 그가 보인다. 얄미울 정도로 맨질한 피부, 날라리마냥 물을 뺀 금발의 머리에 아니꼬운 시선을 쏘았다. 수사에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을까하고 찾아온 내가 바보병신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차가운 사무실문고리를 잡자 뒤에서 끈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확히 궁금한게 뭐야? 이민혁이 지금 어디에 있을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뭐 이딴거?
흘긋, 뒤를 확인한 지훈이 한숨을 쉬곤 다시 소파로 와 앉았다.
뭐 집히는게 있긴 합니까.
눈을 감고 뭔가를 생각하는듯 하던 지호가 책상위에 올려진 모레시계를 들어 뒤집는다. 회갈색의 모레가 잘록한 허리를 통과하자 붉은빛으로 변해 쏟아져 내려온다. 그 움직임을 눈으로 쫓던 지훈이 뭔가를 말하려는 듯이 달싹거리는 입술에 집중했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하...그래...뭘 기대한 내가 호구지...
목젖을 치고 올라올 뻔 했던 욕짓거리를 삼키고 사무실을 벗어난다. 프로파일러 우지호는 소파에 앉아 낄낄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새 그의 손엔 지훈의 지갑에서 빼낸 명함이 팔랑팔랑 거리고 있었다. 명함을 주머니에 쑤셔넣은 그가 잘 닦은 쌍안경을 가방에 넣고는 사무실을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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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환기를 하지 못한 탓에 부쩍 공기가 안 좋아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태일이 잠깐 걷어놓았던 커튼은 다시 꽁꽁 닫힌 채였다. 답답하다...꼬리를 흔드는 듯 한 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은 유권이 티비를 켜놓은 채 주방에서 칼질을 하고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아저씨...환기도하고...이불도 좀 털면 안될까요? 답답해서...
우물쭈물 말을 얼버무리는 유권을 돌아다본 그가 안 돼, 하고 대답하려다 옷 곳곳에 붙은 털을보곤 다시 생각에 잠겼다.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니 신경 쓸 것도 배로 늘었다. 계획을 이탈한지는 한참이지. 한숨을 쉰 민혁이 대신 10분 안에 끝내. 하고 사각지대로 몸을 옮겼다. 미소가 번진 유권이 겉옷을 입고 커튼을 걷었다. 꼭꼭 잠겨있던 베란다 문이 끼억끼억 열린다. 1월의 찬바람이 훅 하고 폐를 씻어 내린다.
침실에 있던 이불을 걷어 베란다 난간에 올린 유권이 혼자서도 일을 척척해냈다. 민혁은 그저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없어도 그는 하루 종일 혼자 집을 지키고 있을까? 매일 이런 하루라면 사는게 지루하기 짝이 없겠군. 시계초침을 쫓는다.
이불을 다 털어낸 유권이 창문을 닫고 하얀 커튼을 쳤다. 민혁이 사각지대에서 걸어 나와 칼질을 하던 칼을 들었다. 좀 살 것 같다. 하고 그가 소파에 푹 누워버린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민혁은 만들던 요리를 계속 이어나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깜박거리다 고개를 돌렸다. 좀 좁은 듯 한 침대에는 서로 손목이 수갑에 이어진 채 누워있는 둘이 있었다. 유권이 고른 숨소리를 내뱉는다. 잠시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한쪽 손목의 수갑을 풀어 내린다. 침대가 흔들리지 않게 내려온 민혁이 조용히 벽장문을 열어 입고왔던 가죽자켓을 집어 든다. 침실문을 닫은 그가 어느새 따라 나와 있는 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쉿, 검지를 입에 가져다댄 후, 넣어뒀던 열쇠를 리사의 목줄에 끼워 넣었다.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겉옷을 털고 일어난 민혁이 현관문을 열었다. 새벽의 시린 바람이 속을 후벼 파는 느낌이었다. 옷매무새를 다듬은 그가 계단을 내려가며 태워버린 지도를 머릿속에 그렸다.
택시에서 내린 그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깃을 내렸다.
이곳부터는 걸어가는게 낫겠지. 사람과 cctv가없는 골목을 골라 15분정도 걷자 익숙한 주택이 보였다.
아직 방치되어있는 집의 벽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차다. 바다에 흩뿌려진 그녀도 이만큼이나 차가울까. 접근금지 테이프를 피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세 잔뜩 쌓인 먼지. 그녀와의 아름다운 기억을 회상하기도 힘들만큼, 집안은 황량하고, 또 캄캄했다. 남겨놓았던 증거들을 되짚어본다.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죄다 긁어가서 남은게 없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나를 찾지 못하는걸까. 심증도 있고, 증거도 깡그리 가져갔다. 대체 왜? 뭔가 이상하다. 지극히 고의적인 책략일거라는 확신이 강해진다. 경찰들이 이런 바보같은 짓을 할리는 없고, 누구지? 찬바람과 어둠만이 가득 들어차있는 거실을 둘러보다가 침실로 발길을 돌렸다. 닫혀있던 문을 열자 훅하고 캐캐묵은 냄새가 풍겨온다. 문고리를 잡고 선 그가 열려있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방안을 둘러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헤집어놓은 거실과 달리 침실은 오히려 누군가 말끔히 정리를 해놓았다고 해도 될 만큼 말끔했다. 수면등에 잔뜩 앉은 먼지를 손으로 닦아본 민혁이 무심코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Damn it. 욕짓거리를 내뱉었다. 전등이 있어야할 곳에 새카만 피가 굳어있는 밧줄이 매달려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생각나 뒷걸음질을 쳤다. 창백하다 못해 시커먼 얼굴빛의 그녀가 스쳐 저도 모르게 음식물을 게워내 버린다. 침을 뱉은 그가 비틀비틀 걸어가 그녀가 매일아침 화장을 하던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깨어진 화장품들 위에는 못보던 쪽지가 접혀져 있었다.
여긴 너무 추워요, 자기.
어떤 새끼야. 이런 지독한 장난을 치는게. 쪽지를 발기발기 찢어버린 민혁이 벽을 쾅 내려찍었다. 거칠게 아래서랍을 열어보자 불타다만 재들이 훅 올라왔다. 뭐지? 타다만 물건들을 손으로 헤집는다. 날짜가 적힌 cctv 녹화본, 사진, 살인에 쓰였던 증거물들 몇가지와 수사기록들. 모두 그을린 채였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다.
기시감에 주위를 둘러본 그가 침실 문을 닫고 집밖으로 걸어 나와 누군가 있는것은 아닌지 다시 주위를 살폈다. 샛길을 향해 발길을 돌린 그가 돌연 멈춰 섰다. 방금 약한 구둣발소리가 들린건... 내 착각인가? 총을 꺼내며 몸을 돌린 민혁이 방금 나온 침실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을 보곤 총구를 내려놓았다. 말도안돼...불투명한 침실의 유리창안쪽으로 저와 마주보고 있는듯한 검은 인영이 비쳤다. 뒤이어 안쪽에서 보드마카로 뭔가가 죽죽 그어진다.
As you sow, so you reap
(뿌린 대로 거둔다)
다시 창문을 겨냥하던 민혁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돌아서 빠르게 장소를 벗어난다. 뒤에선 번지기 시작한 불길로 집에 타닥타닥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블락비/범권] 선이없는경계 03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b/2/7/b27d46b3e849f85746f8645d213aecdd.jpg)
눈을 뜨니 수갑이 풀어진 상태였다. 뭔가 허전한 느낌에 습관처럼 그의 자리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구겨진 이불만 남겨진 채. 거실에서 들려오는 뉴스소리에 오늘은 일찍 일어난건가, 유권이 혼자 중얼거리다 몸을 일으켰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컵을 조심스레 집어든 그가 다른 손으로 정수기레버를 찾았다. 물을 마시고 발밑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을 리사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고 보니...깁스를 한 발이 괜찮아졌는지 병원에 한 번 더 가봤어야 했는데...컵을 내려놓은 유권이 쭈그려 앉아 리사의 깁스한발을 끌어당겨 확인하려하자 낑낑 앓는 소리가 들렸다. 이걸 어쩌지...잠시 고민하던 그가 일어서서 민혁이 있을 소파에 다가가 오늘따라 말을 아끼는 그를 부른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부탁을 들어줬으니..이것도 되려나?
...아저씨, 뭐 좀 물어봐도 되요?
뭐?
소파에 누운 채 새벽의 일을 되새겨보고 있던 민혁이 제 앞에선 그를 올려보았다.
..리사 발에 금간게 잘 붙었나 검진해봐야 하는 날이에요... 병원에 가봐야 하는데...
안 돼.
단칼에 잘라 말하는 목소리에 움찔, 그러다 다시 말을 이었다.
제 말좀 들어보세요..리사의 앞발이 제대로 낫지 않는다면 전 리사를 다시 교육소로 보내야 해요...
이야기를 듣다가 미간을 구긴 그가 상체를 일으켜 소파에 바로 앉았다.
그래서 혼자 나가겠단 이야기야?
딱히 방법이 없는걸요...
한숨을 쉰 민혁이 그를 마주보고 섰다. 찬 바깥바람냄새, 그리고 가죽자켓. 고개를 갸웃한 유권이 쏘아붙이는 듯 한 그의 목소리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편하게 해주니까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은데 넌 인질이야. 난 연쇄살인범이고. 난 나갈수없어, 혼자 나가는 너를 또 어떻게 믿지?
그건 알아요...물론 아는걸요...하지만 리사는 병원에 가야해요...더 안좋아지거나 다시 헤어지게 되면 어떡해요...
내가 알바 아냐. 머리가 복잡하니까 말 좀 그만 시켜줄래? 다시 의자에 묶이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
...뭐라구요?
되묻는 유권의 상처받은듯한 눈동자에 민혁이 한숨을 내쉬며 가려진 커튼으로 걸어갔다. 조금열린 틈사이로, 밖이 보였다. 유권이 멍하니 서 있다가 흐르는 눈물에 놀라 뺨을 닦았다. 꼬리를 흔들던 리사도 가만히 옆을 지키고 있었다.
...매정하다.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리사는...리사는 정말 소중한데...
행여 그가 볼까 뒤돌아선 유권이 리사와 침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 애꿎은 눈을 베개로 푹 눌러버렸다. 아직 커튼사이로 밖을 보고선 민혁이 고개를 저었다. 답지않게 초조해져서...바보같이. 흔들리던 유권의 눈동자가 떠올라 눈을 감아버린다.
총구를 다 닦고 설거지를 처리한 민혁이 멍하니 있다가 머리를 헝클어버렸다. 세 시간이 넘도록 유권은 침실에 틀어박힌 채였다. 그래...리사는 소중하지...수건을 내던진 그가 침실 문앞에 다가가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하...깊을 한숨을 쉬고 머리를 쓸어 올리곤 짧게 노크한다. 방안에선 아무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단단히 삐져버린 걸까. 허리에 손을 짚은 그가 말을 꺼낸다.
한 시간 반 안에 돌아와.
눈을 가리고 있던 유권이 베개를 휙 치우고 급하게 문을 열려다 쿵 이마를 박아버렸다. 아야..아파라...손잡이를 더듬어 문을 연 그가 진짜죠!? 정말로?! 재차 확인하자 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느 때보다 환하게 웃어 보이는 유권의 모습에 그가 졌다. 하고 생각한다. 벽장문을 열어 옷을 만져보기 시작한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외출이 이렇게나 기분 좋았던 적이 있었나? 아무렴 어때. 그 어느 때보다 즐겁게 나갈 준비를 하는 그를 보던 민혁이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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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깡님, 해바라기님, 바게트님, 우동님, 치코리타님 암호닉주셔서 감사합니다!
좀늦었죠 ? 항상 두편을 써놓고 한편을 올리려다보니 조금씩 늦어지네요 ㅜㅜ 좀더빨리올수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목도생겼네요 ! 많이 사랑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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