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와 여고생
w. 꽃
핸드폰 알람이 아닌 머리맡 창가로 들어오는 자연광에 눈을 떴다. 덜 깬 잠에 몽롱한 눈을 비비며 시간을 확인하려 침대를 더듬는데, 말캉하고 부드러운, 무엇인가가 잡힌다. 으응··· 뒤척이는 소리에 잠이 확 깬다. 아직 한참 꿈속을 헤매는 아이는, 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가락에 찔린 볼이 기분 나쁜 듯이 미간을 찌뿌리고, 몸을 내 쪽으로 돌린다. 미안,미안. 내 말소리에 곤히 자는 아이를 깨울라, 입모양만으로 사과의 말을 내뱉고 다시 이불을 덮어주자, 그제서야 밉게 찡그린 인상을 풀고 다시 잠에 빠진다.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일어나려던 몸을 다시 아이 쪽 방향으로 뉘인다. 새근새근, 작은 숨소리가 기특하다. 이 작은 아이는 어디에서 뚝 떨어졌을까. 이 아이는 나를 울렸다가, 웃겼다가, 행복하게 만들기도 하고, 미치게도 만든다. 앙 다문 입술로는 내게 사랑을 갈구했다가도 잔소리를 늘어놓기 일쑤다. 그리고 아이의 눈은··· 아, 아이의 눈이 보고프다.
이제 일어나 바보야.
큰 곰이 사람을 덮치는 모양새로, 아이의 작은 몸위로 올라가 양 볼과 입술, 이마를 구분할 수도 없게 애정 담은 입맞춤을 퍼부었다. 이씨···! 달콤한 휴식을 방해받은 아이는 화를 내며 이불을 뒤집어 썼지만, 나에겐 지금 이 상황이 잠보다 달콤하다. 아이의 갈색빛이 도는 눈동자가 보고 싶다. 진아, 네 눈이 보고싶은걸? 눈을 보여줘··· 응? 이불 위로도 남부끄러운 애정을 쏟아내자, 아이가 졌다는 듯이 이불을 들추고 잔뜩 성이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요! 내 눈! 왜 자는 사람을 깨워요! 미워 죽겠어!
그리고는 발로 내 배를 걷어 차고 쿵쿵거리며 주방으로 나간다. 저 꼬마애가 차봤자 얼마나 아프겠느냐만은··· 이건 정말 아프다. 혼이 난 배를 붙잡고 침대에 쓰러졌다. 저 작은 몸에서 저런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가 도대체 의문이다. 저 못된 계집애, 앞으론 밥도 안줄거라며 마음속으로 원망의 말을 뱉었다가, 금방 도로 물렀다. 아니, 그래도 삼시 세끼 밥은 꼭꼭 먹여야 한다. 저렇게 마르고 가녀린 체구는, 내가 한대 쥐어박기도 미안할만큼이 아닌가. 간식에 야식까지 챙겨 먹이고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르면 그때서야 마음껏 괴롭히리라! 이제 져주지 않을 거라는, 나 혼자만의 흐뭇한 상상을 하며 아이가 있을 주방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 또 다시 행복한 아침이다.
***
나 보지 말고 밥 먹어요, 밥!
알았어, 먹을게. 소리지르지마···.
으휴, 또 큰 소리다. 목소리 톤도 높은 애가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면, 나로서는 잔뜩 주눅이 드는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어렸을 때 부모님 말도 지지리 안듣고, 고등학생 때는 학주 무서운줄 모르고 교칙이란 교칙은 있는대로 어기고 살았던 내가, 한 뼘 짜리도 안되는 요 꼬맹이한테는 왜 이렇게 못해보겠는지가 의문이다. 아이의 흰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억지로 젓가락을 옮기는 데, 그 틈 사이에도 아이가 보고싶다. 하루 종일 품안에 껴안고 아이만 바라보고 싶을 정도로, 나에겐 이 일분 일초가 아까운데, 아이는 그렇지 않은지 작은 손으로 야무지게도 밥을 먹는다. 저는 내가 좋지도 않은가, 샐쭉 입을 삐죽꺼리며 퉁퉁거리다 다시 반찬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가 만든 달걀말이, 아이가 만든 된장국··· 아이는 참 음식을 잘한다. 내가 해줄거라며 실컷 허풍을 떨었다가도, 나는 서투르게 일을 그르치고 아이가 뒤처리를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 이후로는 음식은 아이의 몫이 되어버렸다. 숟가락을 든 채로 또 아이의 얼굴만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아이가 내 뜨거운 시선을 눈치챘는지 빈 밥그릇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당연하죠! 뒤에서 들리는 말은 또 얄밉다. 정말이지, 미워 죽겠다. 얼굴만큼 말이라도 좀 예쁘게 하면 얼마나 좋아. 아무리 내가 얻어 먹는 입장이라지만, 이런 눈칫밥은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혼자서 궁시렁거리며 반찬을 치우다가 고무장갑을 끼웠다. 아이는 자기 방으로 공부하러 간 모양이다. 아이는 내 조심스런 권유를 딱 잘라 거부하고,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절충안으로 검정고시를 보기로 타협한 뒤로는, 저렇게 열심이다. 저 딴에는 이름난 대학에 들어가, 나에게 손벌리지 않고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으며 국문학과를 다닐 거란다. 물론, 아이가 대학에 간다면 나로서는 피를 쏟아서라도 역사에 길이 남을 소설을 써내가며 아이의 공부 뒷바라지를 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책상 앞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거나, 대학에서 나보다 멋지고 훤칠한 나쁜 놈들을 만날 상상을 하면, 괜한 말을 뱉었는가 하는 후회를 하루에도 수 백번씩 되풀이했다. 나와 비교도 못할, 그런 늑대같고 쓰레기같은 나쁜 놈들에게 있는 욕, 없는 욕을 퍼붓고 나니 설거지가 끝났다. 슬며시 진의 방 문을 열었다.
··· 진아. 설거지 다 했어.
잘했어요.
상으로 뭐 없어?
나 공부하고 있는거 안보여요?
에라 미운 것. 하는 행동, 말 한마디가 다 밉다.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또 입이 쭉 나온다. 너 미워! 어린애같이 한마디를 내뱉고 거실로 나와 TV를 켰다. 시끄러운 TV소리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아이의 공부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까 볼륨을 점점 올렸다. 시끄러워요! 아이의 고성이 울린 뒤에야 울상이 되어 TV를 껐다. 미안 TV야. 오늘도 내가 지고 말았어. 하지만 이건 진짜 진게 아니야. 내가 져준거라고. TV도 아이의 편인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미워 죽겠다. TV도, 검정고시도, 국문학과도, 대학교도. 무엇보다 저 열일곱살짜리가 가장!
찻물이 끓는 동안, 푹신한 침대에 누워 좋아하는 시집을 읽으니 또 스르르 기분이 풀린다. 일찍 일어난 탓에 나른하게 감기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물이 끓는 소리에 몸을 반쯤 일으키는데, 작게 문이 열리며 그 사이로 아이가 들어온다.
아저씨···.
왜.
마음속으로는 먼저 나타나 준 아이의 모습에 싱글벙글 좋아 죽겠는데, 한번이라도 아이를 이겨 보려 아까의 미운 모습을 재차 떠올렸다.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을 뱉어놓고, 나는 또 혼자 전전긍긍이다. 아이가 나가버리면 어쩌지? 또 소리지르면 무서운데, 나한테 실망하거나 울어버리진 않겠지? 아이 앞에서 나는 또 한참 작아진다. 하지만 아이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입가에 미소를 띈 채 나에게 다가와 내 몸 위로 누웠다. 제법 무거워진 체중에 잘 먹인 보람이 있었다며 좋아지는 기분을 꾹 억누르며, 아직도 화난 표정을 유지했다.
뭐야. 무거워 비켜.
··· 나 공부 열심히 했는데. 상으로 뭐 없어요?
아, 이번에도 내가 지고 말았다.
***
조수석에서 잠든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속도를 낮췄다. 화요일 아침의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소설을 출간한 뒤 휴식기를 갖고있는 소설가와, 자퇴서를 제출한 고등학생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여유로움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절대 잠들지 않을 거라며, 휴게소에서 산 감자를 손에 꽉 쥔채로, 창 밖을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던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정신없이 잠들었다. 커브길이 나오자 아이의 머리가 흔들릴까 걱정되면서도 안전 운전을 그만 둘 수는 없기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시선은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마음은 아이의 안위에만 향했다. 피곤할텐데 깨우면 안되는데···. 아이는 나와의 여행에 새벽 댓바람부터 일어나 도시락을 쌌다. 사먹으면 된다고 몇번이나 잠을 잘 것을 청했지만, 언제나처럼 아이는 고집 불통이었다. 피곤하지 않다고 억지를 부리더니, 예상대로 이런 사단이 난 것이다. 바다 하나에 신이 나다니, 역시 아직은 영락없는 어린 애다. 불안한 예감은 늘 틀림없이 맞았다. 아이는 어느샌가 일어나 재잘재잘 떠들었다.
잔거 아니야, 잠깐 생각할게 있어서 그랬어!
그래, 그래 알았어.
치, 진짜 안잤는데···. 작게 변명하는 아이가 귀엽다. 품안에 넣고 화를 낼때까지 입맞춤을 퍼붓고 싶은데 이놈의 운전이 문제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길 바라는 마음에 속도를 올렸다. 아저씨. 응? 내가 뭐가 좋아요? 한참 잠잠하나 싶었는데, 생뚱맞은 질문을 뱉었다. 뭐가 좋으냐니. 이런 바보같은 질문이 어디있나. 저가 좋은 이유를 말해보라는게 말이 되는가. 갑자기 들이닥친 어이없는 물음에 뭐라 할 말도 없이 벙 쪄 있으니 아이가 또 재잘거린다. 얼굴도 안예쁘고, 성격도 안좋고 키도작고 몸도 볼품없이 마르고, 가슴도 작은데···.
너라서.
응?
한 진아. 너라서 좋아.
입가에 지어질 미소를 억지로 참고 있을 아이의 모습이 안봐도 눈에 선하다. 한참 말이 없던 아이는 크게 소리쳤다. 이백 팔! 아아, 젠장. 하필 이럴 때에. 아이는 나와의 수수께끼를 즐겼다. 내 책은 언제 읽었는지, 나와 함께 산 이후부터 하고픈 말이 있거든 저렇게 뜻모를 숫자를 툭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책들 중 어딘가의 페이지를 펼쳐 아이가 하고픈 말을 찾아내야 했다. 내가 그만두자며 몇번이고 애원할때면, 아이는 말했다. 오십 이! 이제 페이지까지 외워버린 52쪽의 대사는 '싫어요'. 내 책은 언제 읽었는지도 의문인데, 그 많은 인물들의 대사는 어떻게 외웠는지. 그렇게 아이가 숫자를 던지면, 나는 아이가 말한 페이지를 넘기면서 책을 쓴 작가, 그러니까 나 자신을 죽일만큼 원망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다음 소설에는 인물에게 어떠한 대사도 주지 않으리라! 그러나 이렇게 운전 중에는 당장 책을 펴 볼 수도 없고.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 죽겠는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진이 말한 숫자를 잘 암기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208··· 208···. 너라서 좋다는 말은 다 취소다!
바다에 도착하자 아이는 튕기듯 문을 박차고 나갔다. 지금 까지 열심히 운전한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은지, 생전 처음 본다는 바다가 나보다도 좋은 모양이다. 그래도 이번 한번은 용서해 주리라. 너그러운 아량을 베풀고, 안전 벨트를 풀자마자 나는 책을 뒤졌다. 208페이지의 여자의 대사는,
··· 사랑해요.
***
아이가 입지도 않은 겉옷을 챙기며 차 문을 잠그고 아이 쪽으로 향했다. 이름 없는 모래사장에는 아이와 나, 우리 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겨울 바다가 춥지도 않은지 아이는 벌써 양말도 벗어 던지고 파도 앞에서 물장구를 치며 까르르 웃었다. 데려오길 참 잘했다. 몇시간의 수고가 행복해지는 순간이다. 나를 발견한 아이가 손을 흔들며 달려온다.
추운데 옷도 안입고. 발은 안시려워?
아저씨, 바다 너무 예쁘다···.
네가 더 예뻐. 마음속으로 수줍은 고백을 하고서 아이를 품에 안았다. 이제서야 갈증이 해결된 기분이다. 아이가 품에서 나오려 버둥거리는데, 두 팔에 힘을 주며 억지로 놓아주지 않았다. 이럴 때면, 내가 아이보다 크다는게 참 다행이다. 나오기를 포기했는지, 작은 팔로 내 허리를 감싸며 아이가 품 속에서 속삭였다.
고마워요.
그말 말고.
···사랑해요.
나도 너무 너무 사랑해 진아···.
한 겨울의 바다는, 세상 어느 곳 보다 따뜻했다.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BGM - Good Time(owl city) 암호닉 : 아즈씨만만세님, 승민님, 나비님, 사과님, 감귤님, 레더라님, 연필님, 구자농민님, 격한님, 아찌님, 댕열님, 기억님, 수제비님, 워너비달달님, 베가님, 기성용 하투뿅님, 바나나맛우유님, 초코똥님, 애봉이님, 미시오님, 워더님, 다현님, 잉여님. 느무느무 감사했어용 ㅠㅠ 다음편은 본편보다 더 재미있을 작가의 말과 메일링이 올라옵니다! 신알신 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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