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와 여고생
w. 꽃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사람의 마음을 신랄하게도 흔들어놓았던, 더 이상의 소나기는 이제 없다. 책의 열기도 사그러들고, 영원히 푸르를것만 같던 잎들도 숨겨왔던 색으로 물들었다. 오랫동안 갇혀있던 긴 옷들도 다시 빛을 받았다.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많은 것들이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오랜만에 고향에도 다녀왔고 잊어버린 친구와 다시 연락을 시작했다. 동창회에 나갔고 인터뷰도 수락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남으로써 굳게 닫아놓았던 내 세계의 문을 조금씩 열어가는 것을 허용했다. 심지어 몇 년동안 한결같이 좋아했다며 고백해오는 내 애독자를 만나 멋진 저녁도 함께했다. 애프터는 정중히 거절했지만, 자랑스러울만치 아름다운 여성임에는 틀림없었다. 나는 하나씩 스스로 배워나갔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 혼자서도 슬프지 않는 방법, 자신을 꾸미는 방법. 아이와 함께한 내 여름은 황홀했고, 아이가 사라진 내 가을도 그렇게 제법 즐거웠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자기 전 현관문을 잠그지 않는 것을 잊은 적이 없었다. 혹시나 아이가 새벽에라도 돌아올까, 기쁜 기대에 잠자리에 들고 아침이 밝으면 아이의 방을 열어보았다. 텅 빈 방안의 적막과 마주하면서도, 나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이는 기필코 다시 돌아올것이기에. 그것은 희망이 아닌 확신이었다. 내 몫의 차를 끓일 때면, 아이의 것도 잊지 않았다. 밥을 먹을때에도, 내 건너편엔 항상 따뜻한 아이의 음식이 준비되어있었다. 내 옷을 살때면 아이의 옷도, 아이가 있었다면 해주고 싶은 모든 것을 해주었다. 누가 보면 손가락할지 모르겠으나, 내 나름의, 아이에 대한, 그리고 나에 대한 배려였다. 그렇게 점점 아이의 방에는 부재의 시간만큼의 물건들이 쌓여갔다. 일주일에 하루는 아이의 집에 가는데에 허비했다. 일주일마다 익숙한 계단을 몇번이고 오르내려도, 아이의 추운 집에는 뜯겨 나간 벽지 뿐이었다.
또 하나 고백하자면, 나는 내 신작을 단 한번도 다시 읽지 않았다. 드문 인터뷰나 사인회에선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가며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표지와 뒷 배경 외에, 나는 그 안의 어떠한 한 줄의 글귀도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 인생 최고의 기억들로 쓰여진, 아름답기 그지없을 내용을, 나 혼자서는 다시 읽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빛 바랜 졸업 앨범을 들추며 옛 친구들을 상기하듯, 추억을 되짚는 과정만 같아, 미룰 수 있는 한 최대한 미루었다. 언젠가 아이가 오면 이불 속에서 조곤조곤 읽어 주리라. 그렇게 항상 즐거운 다짐 뿐이다.
그렇게 나의 가을은 속절없이 흘러만 갔다.
* * *
오늘 전국은 대체로 춥겠습니다. 영하의 날씨가 계속 되는 가운데, 일부 지역에서는 함박눈이 내리는 곳도···
삼 년 같았던 삼 개월의 가을이 떠나갔다. 이제, 거리에는 예수의 탄생 축하를 준비하려는 사람들로 가득찼다. 얼마 전까지 단풍이 가득하던 가로수는, 부끄러운 가지에 반짝이는 전구들을 감았다. 저마다의 방법으로 온통 붉게 물들어가는 가게들이 몹시도 예쁘다. 거리의 중심 광장에는 거대한 트리가 세워졌고, 맨 위층 꼭대기에 별을 다는 모습을 보려는 사람들이 몰렸다. 진아, 너도 어디에선가 보고있니.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물음은, 허망하게 공중으로 흩어졌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이 붉은 색과는 반대로 차게 식었다. 하아ㅡ. 무의식적으로 뱉은 한숨이 뿌옇게 흐려지며 존재를 알렸다. 비라도 쏟아질것만 같이 어둑한 하늘에, 한 손에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계절을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해는 야속하게도 금방 저물었다. 문을 잠그지 않는 것을 잊지 않으며, 집에 들어서자 마자 아무렇게나 옷을 벗어 놓고, 따뜻한 욕조 물에 몸을 맡겼다. 손 끝이 따끔거리고 두 눈은 뻑뻑했다. 몹시도 무겁고 나른한 몸이다. 진아. 하루에 한번씩 무의식적으로 뱉는 이름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언젠가 그 아이를 망각하는 날이 올까봐, 그런 두려운 상상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도록 툭, 이름을 뱉어 놓고 머릿속으로는 아이의 외관을 그렸다. 작은 키, 하얀 피부, 크지 않은 눈, 삐죽 나온 입술, 탐스러운 목덜미, 작고 아담한 젖가슴과 허리, 그리고 부러질듯한 발목. 가끔씩 흐릿해지는 모습으로 기억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때면, 물밀듯 밀려오는 자괴감과 한심함에 몇시간이고 아이를 떠올렸다. 진아.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대상에 익숙해지며, 오늘도 하루가 지난다.
열두시 오분. 날짜상으로는 온 세상이 축복하는 크리스마스. 덜 말라 물기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강 털며 옷을 입었다. 불을 켤 생각은 않은 채로, 어둠에 눈이 적응하기를 잠시 기다린 뒤에 암흑 속에서 케이크를 찾아 촛불을 켰다. 아이가 좋아하는 달달한 흰 생크림. 아이는 행동이며 말투는 애늙은이였으나, 입맛은 영락없는 어린이였다. 커피도 먹지 못하고, 채소도 좋아하지 않았다. 볶음밥을 먹을 때면, 항상 투정부리며 젓가락으로 당근과 양파를 골라내어, 때문에 키가 크지 않은 것이라며 나에게 잔소리를 들은 것도 몇번이었다. 그래도 내가 해준 음식이라며, 두 손가락으로 코를 잡고 독이라도 먹는 듯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억지로 삼키는 모습이 또 어찌나 귀여워, 일부러 채소만 골라 먹인 적도 있었다. 아이를 추억하며 후ㅡ, 촛불을 껐다.
우리가 맞이하는 첫 번째 성탄절이야. 너는 미성년자니까 술은 안되겠다. 그렇지?
레드 와인을 마시며, 아이의 자리에 놓을 찻물을 끓였다. 커텐을 열어보니 어느샌가 바깥엔 흰 눈이 내렸다. 아이가 좋아하는 생크림같았다. 너도 있었다면 참 좋았을텐데. 괜찮아. 내년엔 함께 할테니까. 설핏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물이 다 끓었는지 차 주전자에서 보글보글 소리가 났다. 가스불을 끄고 아이가 좋아하던 찻잔에 물을 부었다. 똑똑ㅡ 문소리가 났다. 누구··· 차가운 문고리에 몸을 떨며, 무신경하게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 서있는건 내 시선보다 한참 아래에서야 정수리가 위치한 작은 여고생이었다.
안녕, 아저씨?
··· ···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손 끝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몇 달동안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이 순간만을 상상했는데, 정작 닥쳐오니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종잡을수가 없었다. 눈, 코, 입, 손··· 내 기억과 하나도 다른 바가 없었다. 밖은 눈보라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와 어깨 위에는 눈송이가 수북히 쌓였다. 얇은 옷 탓에, 아이의 두 귀와 양쪽 뺨이 안쓰러울 정도로 붉은 기가 돌았다. 하아ㅡ 아이의 긴 한숨에 흰 입김이 뿜었다. 아이가 아찔할만큼 새하얗게 웃으며 눈 앞에 종이를 들이밀었다. 상단에 큼지막하게 '가족관계증명서' 라고 쓰인 아래에는, 한 진아(韓 珍娥) 외에는 누구도 없었다. 어안이 벙벙하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멍청하게 서있었다.
그동안 조금 바빴어요. 미안해.
많이 아팠고, 많이 슬펐고, 많이 울었어요. 아이는 담담한 세 마디로 자신의 삼개월을 표현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작은 어깨를 손으로 감싸고 아이의 머리를 가슴팍으로 끌어당기며 품에 안았다. 품 안에 들어오는 작은 몸은 그대로다. 안고있어도 안고 싶은 갈망도 그대로다. 잊혀지지 않는 목소리도 그대로다. 그래도 의심되고 의심되었다. 진짜일까, 진짜 우리 진일까. 차디 찬 몸을 데우려 몇번이고 작은 등을 부볐다.
그리고 지금, 많이 행복해요.
··· ···사랑해.
놀란 아이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아저씨··· 다가올 아이의 말을 입술로 막았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누구의 것일지 모를 타액이 오가며, 아이의 볼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한 손으로는 아이의 머리칼을 헤집고, 한 손으로는 허리를 붙잡으며 아이의 몸을 터질듯이 껴안았다.
아, 아이가 돌아왔다.
신이시여, 더 없이 완벽한 성탄절 선물이네요.
BGM - Sunday Morning(Maroon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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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 아즈씨만만세님, 승민님, 나비님, 사과님, 감귤님, 레더라님, 연필님, 구자농민님, 격한님, 아찌님, 댕열님, 기억님, 수제비님, 워너비달달님, 베가님, 기성용 하투뿅님, 바나나맛우유님, 초코똥님, 애봉이님, 미시오님, 워더님. 첫 눈 보셨나요? 여기는 독자님을 향한 제 사랑만큼 펑펑 쏟아지네요!
이렇게 09편은 똥글로 끝나 버렸습니다...하얗게 불태웠어요... 다음 10편은 마지막 회!ㅠㅠㅠㅠㅠㅠ 마지막인 만큼 제 영혼까지 끌어모아 달달함을 보여드리려 노력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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