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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염 04

: 어둠(Darkness)



뉴스 화면이 끝나고 앵커가 서류를 정리하기까지.

우리는 시간이 멈춘 듯 서 있었다.




?”

 

 

 

“심아, 그럴 만한 일이 있어.”

 

 

 

난 굳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으니까, 사실이라고 하지 말아 줬으면 했다.

 

불길한 느낌을 애써 지우고 싶어서 나는 개그 프로로 채널을 돌려 버렸다.

 

무의미한 말과 몸짓이 오갈 때마다 나는 애써 눈물을 참아야 했다.

 

 

 

그 사람, 죽였구나.

 

 

 

그건 명백했다.

 

네가 그런 짓을 저지른 데에는 네 말마따나 이유가 있을 거라며 난 되지도 않는 합리화를 했다.

 

난 이미 너를 맹신하고 있었다.

 

너는 나를 파멸로 이끌 테지.

 

파멸로 가고 싶다고 한 나 때문에.

 

 

 

 

그날 새벽, 우린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천사의 도시로.


우리와 잘 어울리는 타락의 절벽으로.


로스앤젤로스도 별다를 게 없었다.


그곳도 범죄가 만연해서 다행이었다.


난 다시 마약 딜러가 되었다.


갱들과 친하게 지내는 내 모습은 마녀의 그것과 별다를 게 없었다


매일 어딘가로 나가는 나를 너는 몰랐다.


약 판 돈으로 기숙학교에 집어넣어 버렸으니까.

 

 

 

마약을 판돈으로 캘리포니아의 집 한 채와 삼 층짜리 작은 건물을 샀다.


건물은 세를 놓아 그 돈으로 먹고 살았다.


언제까지 그 평화가 지속될 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나는 착하게 살고 싶었다.


이토록 나쁘게 살았는데, 조금쯤은 착하게 살아도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제 그만 했으면 하고 바랐다.


내 바람은 언제나 어긋났었다.


이사한 집은 고요하고 한적했다.


욕실이 딸린 침실 두 개, 거실, 식당, 주방, 서재, 다용도실.


밖에는 수영장과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지독히도 한가로운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우리는 차를 마셨다.


입안에 감도는 커피의 쓴 맛은 인생과도 같아서, 나는 시럽을 넣지 않았다.


불쑥 네가 말을 꺼냈다.




", 모델이 되고 싶어."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이었다.


친구들과 어찌어찌해서 쇼에 다녀왔나 보다.


런웨이에서 무표정으로 걷던 그들의 삶이 자기와 닮았다고 했다.


너도 그렇게 빛나고 싶다고 했다.


내가 너를 너무 어둠에 가둬 놓았니, 민형아.




"그렇게 빛나면 모든 게 드러나지 않을까?"




"밝게 빛나는 만큼 그림자는 어두우니까요."




난 유명한 디자이너인 하일러와 계약하기로 했다.


그는 마리화나를 파티 호스트에게 배달하다가 만난 사람이었다.


계약금은 나와의 티 타임이었다.


그는 돈이나 마약보다 나를 원했다.


왜였는지는 모른다.


그는 정중하게 날 다뤘다.


내가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처럼 대해주는 사람은, 그리고 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어쨌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도대체 언제 내게 처음이란 단어가 의미 있었을까.


내게 처음은 어딘가 있을 끝을 의미했다.

 

 

 

크리스마스 저녁이었다.


앞으로 학교 끝나면 모델 수업 받으러 가라는 말에 넌 기뻐했다.


너는 너무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뒷말을 삼켰다.


날 판 돈이야.


그게 나쁜 일일까.


난 내가 나빠져서 너를 꽃피울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다.

 

 

 

 

 

 

 

새해가 되었다.


이번 해에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 주세요.


TV로 멀리 떨어진 한국의 보신각 종소리를 들으며 나는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다.


담배를 싫어하는 너 때문에 불은 붙이지 않은 채였다.


도어락 해제 소리가 들리고 네가 들어왔다.


볼이 발갛게 상기된 채였다.

 

 

 

“심, 이르지만, 어른이 된 거 축하해요.”




네가 수줍게 내민 건 네 볼처럼 물든 분홍색 장미 꽃다발과 제비꽃 향수였다.


난 늘 그 향수를 뿌렸다.


생각해보니 돈이 생기면 그 향수를 샀었다.


이유는 몰랐다.


그저 그 향이 좋았다.


너처럼.

 

 

 

이거 내가 쓰는 거잖아?”

 

 

 

“심이는 그게 제일 잘 어울리니까.”




머리 하나는 차이나는 네가 고갤 숙여 귓속말을 했다.


더운 숨결에서 제비꽃 향기가 났다.


어쩌면 내 볼은 붉어졌을지도 몰라.


너는 하일러 밑에서 모델 일을 했다.


그는 계약서대로 꾸준히 너를 쇼에 세웠다.


나는 몸과 마약을 파는 것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나는 남는 시간에 글을 썼다.


대필부터 라이트 노벨까지.


몸을 판 저녁이면 더더욱 닥치는 대로 썼다.


글쓰기라는 행위는, 어릴 적 책을 읽으며 느꼈던 현실과의 괴리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다.

 

 

 

 

 

어느 날 저녁, 초가 하나 꽂힌 생크림 케이크가 내 앞에 놓였다.


서툰 것으로 봐서 네가 구운 것일 터였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대형 에이전시와 계약하게 되었다는 네 말에 잘되었다고, 잘 된 거라고 빌고 믿었다.


난 범죄를, 내 일을 그만뒀다.


너는 팬이 생겼다.


기념일이면 우체통에 주인모를 편지들이 쌓이고 선물들도 도착했다.


나는 질투를 느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아주 잘 알면서.

 

 

 

 

난 절차를 밟아서 주립대학에 다니기 시작했다.


바깥세상은 무서웠지만 널 보며 맘을 다잡았다.


너는 밝게 빛나는 사람이니까, 너와 함께하려면 나 또한 빛나야 했다.


법학과와 영문학과를 복수 전공했다.


공부는 때가 없었고 늦은 학구열은 무서웠다.


이렇게 공부해서 뭘 할지는 몰랐다.


사람을 더 죽이지만 않으면 성공한 인생 아니었을까.


나는 시험기간이면 코피를 쏟고 에너지 드링크를 달고 다녔다.


때마침 처음 내놓은 범죄 스릴러 소설인 사막의 밤이 잘 팔렸다.


출판사에서는 시리즈 계약을 하자고 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점차 우리의 관계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너의 인터뷰 중의 질문에는 으레 애인이나 동거인에 대한 질문이 한두 개쯤 섞여 있었다.


너는 그저 예의 묘한 웃음을 짓기만 했다.




 

세상에는 우릴 두고 난잡한 소문이 떠돌아도 우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린 더 더럽고 비참하게 자라났어.


우린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깨끗하지 않아.


차라리 그만큼 깨끗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제발 닥쳐.


내가 항상 했던 말이었는데.


물론 인터뷰에서 이러진 않았어, 민형아.



 

, 심아. 할 말이 있어요.”



 

한참 플롯 작업을 하고 있는데 네가 서재에 들어왔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나는 글 쓸 때 방해받는 걸 싫어했고, 너 역시 그걸 알고 있었다.


네 얼굴이 어두워 난 본능적으로 자판을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 민형아, 민형아?”

 



내 재촉에도 한참이나 네가 머뭇거렸어.



 

모델들이 들어가 사는 빌라가 있어요.

기획사 소유인데…….”



 

, 짧은 탄식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네가 기어이.



 

같이 들어갈래요?”




빛으로 나아가려고 하네.


어둠 속 안온히 잠들었던 네가.


알고 있다.


그곳으로 들어가면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그들이 나와 너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관계를 궁금해 할 거고,


우리 둘 다 상처도 받고 울기도 할 거라는 걸.


언제 비밀이 밝혀질지 모르는 우리의 작은 성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을 거라는 걸.


너는 다 알고 있었다.


어쩌면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는 내가 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거예요.

심이한테도 좋은 환경일 거고요.”



 

나는 새로운 사람을 싫어해.


너도 알지.



 

“심,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요.

단지 난 심이가 살기 더 편하지 않을까 해서…….”



 

난 흐린 뒷말을 안다.


노력했어요.


너의 노력은, 예를 들면 마녀를 발코니에서 밀어버린다던가 하는 어둡고 음울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나는 망설였다.



 

약속해 줘.

나쁜 일로 날 기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나는 너의 깊고 어두운 동공을 보면서 희열을 느꼈다.


너는 나를 위해서 살인도 공모한 범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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