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해서였을까,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세게 안아준 것이 처음이여서 그런걸까. 그 날은 술에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머리 속에 선명하게 기억되어 있었다. 처음보는 얼굴, 처음 보는 눈빛. 나는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아이에게 조금 두근거렸다는 것. 이것만큼은 잊으려고 애를 썼지만, 이것 또한 잊을 수가 없었다.
옆 집 동생
그 날 이후, 다니엘은 평소와 똑같았다. 만나면 반갑다고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인사하고, 아무렇지 않게 내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아무렇지 않았던 게 한 번 의식되기 시작하니까 계속 신경이 쓰인다. 그러다가, 나만 신경을 쓰는가 싶어 그 뒤로는 신경쓰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 다니엘이 챙겨주는 건 잘 했으니까. 그냥 그러려니, 싶었다. 점점 날씨가 더워질 무렵, 오늘도 출근하러 집을 나섰는데 이 시간에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는 옆 집 문이 열리고 아침 대신인지 입에 뭔가를 물고 멍 때리며 나오는 다니엘과 마주쳤다.
" 어? 너 왜 벌써 나가? 수업 없잖아? "
" 수업은 없는데, 동아리 연습 가요... "
" 이 시간에? "
" 그러게요. 뭔 연습을 아침부터 한다고 부르는지... "
" 이번에 너도 공연 나가? "
" 뭐, 후배들 있는데 내가 뭐하러 해요. 이제 도와주기만 해야지. "
맞다, 다니엘이 예전부터 춤은 잘 췄어서 댄스 동아리에 들어가서 공연도 했었다는 게 기억이 났다. 자기는 추지도 않으면서 아침부터 학교 가는 모습에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아침잠도 많은 놈이 도와준다고 가는게, 너는 참, 착하다. 늘, 그렇게 남을 도와주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그 날도... 아, 나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생각을 떨쳐내려 손을 들어 다니엘의 등허리를 소리 나게 짝, 때렸다.
" 아, 아! 누나야! "
" 정신 차려. 잠 좀 깨고 학교 가. 가다가 넘어질라. 누나 먼저 간다. "
일시적인 감정이다. 그래, 일시적인 감정이다. 일시적인 감정, 이어야 한다.
*
그 날 이후로도 아침 출근 시간에 제법 다니엘을 자주 만났다. 나올 때마다 자기는 잠도 덜 깼으면서 내가 먹을 걸 하나씩 가지고 나오기도 했다. 뭐, 음료라던가, 빵이라던가. 아니, 잠을 더 자던가, 지가 먹던가. 하여간, 귀엽다니까. 오늘도 주스를 하나 받아 회사에 출근해서 책상 위에 얹어놓고 일 할 준비를 하는데 대리님이 지나가시면서 넌지시 말을 거신다.
" 여주씨. 요즘, 좋은 일 있어요? "
" 네, 네? "
" 아니, 요즘따라 되게 기분 좋아보이길래. 무슨 좋은 일 있나 싶었죠. "
무슨 좋은 일이라니, 시선을 돌리다 컴퓨터 옆에 놓여 있던 거울을 봤는데 내 입꼬리가 싱긋,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뭐람. 누가 보면 내가 강다니엘을 좋아하는 줄 알겠네. 쓸데없는 생각을 휘휘 없애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일을 했을까, 여주씨. 나를 부르는 부장님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켜 부장님께 갔다.
" 여주씨, 오늘 외근 나가야겠어. "
" 네? "
" 아, 별 일은 아니고 내가 저번에 뭘 좀 부탁 받았었는데 오늘 급하게 필요하다고 해서. 그 대신 오늘은 외근 갔다가 바로 퇴근해도 좋아요. "
" 헐, 네. 바로 하겠습니다. "
외근이라고 해서 완전 쫄아있었는데, 바로 퇴근이라니. 위치를 들어보자 회사에서도 얼마 걸리지 않은 곳이었다. 외근 끝나고 오랜만에 쇼핑이나 좀 해야지. 돈을 벌기만 벌고 쓰지를 못했다니까. 점심시간 끝나자 마자 짐 싸들고 바로 회사를 빠져나와 맡기신 물건을 전달한 후 시내로 나왔다. 우와, 이렇게 좋을 줄이야. 여유롭게 쇼핑을 해볼까? 오랜만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충동구매를 하기 시작했다. 양손이 쇼핑백으로 가득 찼을 때, 순간, 다니엘 학교가 이 근처였음이 떠올랐다. 음... 밥이나 한 끼 사줄까. 뭐, 밥 한 끼 사주기로 약속 했으니까. 근처 벤치에 앉아 다니엘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누나? 지금 일 하는 시간 아니예요?
" 그렇긴 한데, 외근 나와서 일 끝나고 바로 퇴근하래서. 지금 시내에 나와 있는데, 바빠? 밥 사줄게. "
- 아니, 전혀 안 바빠요. 하나도 안 바빠요. 누나 지금 어디예요?
" 아, 여기 너희 학교 가는 방향 쪽에 그 벤치 많은 곳. "
- 15분, 아니 10분만 기다려요. 금방 갈게요.
다급해진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뚝 끊겼다. 뭐가 그리 급할까. 올 동안 음악이나 들어야겠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기다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급한 발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음악을 뚫고 들리자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다니엘이 숨을 크게 헐떡이며 내 앞에 서있었다.
" 야,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뛰어왔어? 아직 노래 3개도 못 들었다. "
다니엘이 숨을 고르는 동안 휴대폰과 이어폰을 정리하고 몸을 일으켜 잔뜩 샀던 쇼핑백을 들려는데 큰 손이 불쑥 나와 내 짐들을 전부 들어버린다. 돌아보자, 나를 보며 눈을 접으며 웃는다.
" 누나가 오래 기다리는 거 싫어서요. 빨리 오고 싶었어요. 저 잘했죠?"
네 웃음에, 온 세상 빛이 너를 뒤덮는 것 같다.
*
뭐 먹고 싶냐며 물어보고 또 물어봐도, 누나 먹고 싶은 거 먹어요. 나는 아무 거나 다 잘 먹어요. 라며, 단호하게 말하는 다니엘에 결국 근처 일본 가정식 식당에 들어왔다. 음식을 주문하고 앉아 있는데 아까부터 계속 웃고만 있는 다니엘에 손을 뻗어 아프지 않게 꿀밤을 때렸다.
" 웃지마, 임마. 웃다가 정들어. "
" 아, 그러면 계속 웃어야죠. "
어쭈, 이제 맞먹겠다 이거지? 다니엘을 흘겨보자 입을 가리고 크게 웃는다. 혼자 좋아 죽는다, 아주. 뭐가 그리 즐거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오고 먹기 시작하는데 밥 위로 고기 한 점이 올라온다. 이게 뭐지? 의아함에 고개를 들며 바라보자,
" 누나야 고기 좋아하잖아요. 편식쟁이. "
라며 내 반찬에 있던 콩자반을 전부 가져가버린다. 나 콩 싫어하는 거, 아직 알고 있을 줄이야.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 속을 돌아다니지만 무시하고 앞에 있는 밥만 열심히 먹었다. 음식을 삼킬 때마다, 그 감정들도 삼켜지길 바라면서. 딱히 아무 말 없이 밥만 먹었던 것 같다. 어느 새 식사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계산을 먼저 하러 나가는데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다니엘. 물론, 내 짐은 다 지가 들고 있다. 내 건데, 왜 지가 들어. 무겁게.
" 누나, 잘 먹었어요. "
" 다음에 또 사줄게. 다음에는 진짜 니가 먹고 싶은 걸로. "
" 에이, 다음에는 내가 사줄 건데요? "
" 너 돈 벌면 니가 말 안 해도 얻어 먹을 거야. "
가게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가려다 목이 마른 느낌에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영문도 모르고 졸졸 따라오는 다니엘. 마치, 대형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기분에 피식 웃었다. 자, 오늘만 풀코스로 쏜다. 뭐 마실래? 내 물음에 한참 고민을 하다가 갑자기 든고 있던 내 짐을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닌가. 당연한 거지만 갑작스런 행동에 얼떨결에 짐을 받아들었다. 받기 무섭게,
"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랑 아이스 바닐라 라떼 하나요. "
" 오늘은 내가 쏜다니까? "
" 그럼, 누나가 다음에 또 사주면 되잖아요. "
음료를 주문하고 그대로 계산해버린 후 내 짐을 다시 그대로 들고 가버린다. 아까와 같은 감정이 다시 피워오른다. 아니야, 아니야. 목이 타는 느낌에 나온 음료를 바로 입으로 가져다 댔다. ... 이거 아메리카노 맞아? 왜 이렇게 달지. 시럽을 넣었나. 어느새 멀리 가버린 다니엘을 뒤쫓아갔는데, 손이 없어 음료를 못 마실 것 같은 다니엘의 모습에 입 앞에 빨대를 가져다 대었다. 흠칫, 놀라다 다시 환하게 웃으며 음료를 마신다.
시내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우리 집이지만, 날이 지면서 선선해진 날씨에 걸어가기로 했다. 나와 다니엘이 걷는데, 이렇게 조용하고 어색한 적이 있었나? 저벅저벅, 또각또각. 집 근처 골목에 들어서자 나와 다니엘의 발걸음 소리만 들려왔다. 계속 목이 타는 느낌이 멈추지 않아 음료만 계속 마셨고, 언제 다 마셨는지 얼음 소리만 들려왔다. 적당히 선선한 바람,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 모든 것이 적당했는데, 나만 적당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집 앞에 도착해서야 나는 내 짐을 다시 돌려받을 수 있었다.
" 오늘 짐 들어줘서 땡큐. "
" 밥 잘 먹었어요, 누나. "
" 야, 밥 사달라고 했으면 메뉴 정도는 정해서 와. "
나 들어간다. 몸을 돌려 도어락을 열려고 하는 그 순간, 조금 낮은 목소리가 울려펴졌다.
" 메뉴가 뭐가 중요해요. "
다시 몸을 돌려 다니엘을 바라보자, 내 쪽으로 다가와 내 앞에 서는 다니엘이다.
" 누구랑 먹었냐가 중요하지, 메뉴는 안 중요해요. "
" ... ... "
" 나는 뭘 먹었어도 좋았을 거예요. 누나랑 먹었으니까. "
" ... ... "
" 그니까 메뉴는 너무 신경쓰지 마요.. "
" 다음에 또 데이트 해요. 그 때는 누나가 좋아하는 매운 음식 먹으러 가요. 그 때는 내가 다 살게. "
" ... ... "
" 푹 쉬어요. "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고 먼저 집으로 들어가는 다니엘.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털썩, 주저앉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에는 져버렸다. 몽글몽글한 마음을 애써 무시해왔는데, 결국에는 온 몸을 잠식해왔다. 너는 어느 새, 내 마음 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걸 애써 외면했던 나는, 인정해버렸다. 나는, 너를ㅡ 좋아한다.
잠깐만요ㅇxㅇ |
안녕하세요, 댕뭉이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글을 많이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댓글 읽으면서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더라구요. 감사합니다! 사실 어제부터 2편을 쓰다가 버튼을 잘못 눌러서 글이 올라가 버렸어요. 읽으려고 오셨던 독자님 정말 죄송합니다ㅠㅠ 최대한 빨리, 최대한 열심히 써서 왔습니다! 오늘 시험을 망쳐버려서, 분량 조절 실패했어요...ㅜㅜ 시험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오늘이 마지막 프요일이라는 것이 중요하죠. 마지막 프요일, 저는 맥주와 함께 할 예정이랍니다 하하 독자님들께서 픽하신 모든 멤버가 데뷔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도 읽어주신 모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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