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팀장님, 선 한 번 봐보실래요? "
뜬금없는 과장님의 물음에, 정작 당사자인 영민이는 가만히 있는데 내가 마시던 커피가 목에 걸려 켁켁 거렸다. 그런 내 등을 두드려주려는듯 자연스럽게 내 등에 닿았던 영민이의 손이 잠시 움찔 움직이다 이내 스르륵 떨어졌다. 나 역시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리고 갑작스럽게 그의 손이 내 등에 닿자 눈에 띄게 흠칫 놀라며 헛기침을 연달아했다. 다행히 이런 우리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였지만 영민이가 대답이 없자, 과장님이 부담갖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허공에 저으며 다시금 입을 여셨다.
" 이번 기회에 여자 한 번 만나봐요. 임 팀장님이 어디가 부족해서 아직도 애인을 안 만들고 그래요? "
" ... . "
" 우리 김 팀장님도 만나는 사람 있다고 하는데, 임 팀장님도 있어야죠. "
그 김 팀장이 만나는 사람이 이 임 팀장인걸요. 나는 속으로만 할 수 있는 말을 삼키며 괜히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영민이를 힐끔 쳐다봤다.
이게 다 홧김에 내가 남자친구가 있다고 (그것도 아주 잘생긴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다고) 영민이가 박상무님께 말해서다. 그 뒤로 임팀장도 애인 사겨야하는 거 아니냐고, 자리를 마련해주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나버렸으니까. 대답을 생각하는 모양인지 영민이는 옅게 웃는 얼굴로 제 손에 들린 커피잔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의 반응이 긍정적이라고 생각하셨는지 과장님이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엄청 예쁘고 참한 아가씨예요. 사진 보여주면 마음 바뀔텐데.' 라 말을 하셨다. 조용히 내 커피를 마시며 그런 과장님을 한 번, 그리고 여전히 마땅한 대답을 생각하는 영민이를 한 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 임 팀장님 애인 있어요, 과장님. "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 말투며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리고 반응 역시 기대 이상으로 뜨거웠다. 같이 점심 식사후 옥상에서 때아닌 티타임을 가지고 있던 디자인팀과 홍보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게 우르르 쏟아지는 시선은 두 가지로 나뉘어졌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고 있냐는 물음이 담긴 시선들과 임팀장이 정말 애인이 있냐는 놀라움이 담긴 시선들. 딱 그렇게 두가지로.
내 옆에 서있던 영민이의 시선이 내 옆 얼굴에 닿는게 느껴졌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핸드폰을 든 채로 굳어계시던 과장님은 전자의 시선을 던진 무리였는지 내게 물으셨다.
" 김 팀장님은 그걸 어떻게 아세요? "
문득 이 상황이 굉장히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때 영민이가 뭐라고 했더라.
" 그야─ 봤으니까요. "
" 정말요? 어땠어요? "
" 예쁘시던데요? 애인분이. "
또 한 번의 술렁거림.
그리고 그런 술렁거림을 비집고 들려오는 영민이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영민이에게로 쏟아졌다. 목격자도 나타났겠다, 이제 당사자가 말해보라는 그런 시선들이였다. 이번엔 나도 영민이를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아주 짧게 마주바라본 영민이의 눈엔 웃음이 담긴 동시에 다정함 또한 가득 담겨있었다.
" 김 팀장님 말이 맞아요. "
" ... . "
" 제가 눈이 좀 높아서, "
" ... . "
" 여자친구가 예쁘거든요. "
... 필사적으로 노력해야했다.
스리슬쩍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단단히 끌어내리기 위해.
친절한영민씨
: 사내연애의 묘미.
" 자, 잠시만─ "
출근길, 아침에 회사 엘레베이터에 몸을 싣는 건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
엘레베이터가 매번 지하 주차장에서부터 올라오는 바람에 1층에서 엘레베이터 문이 열릴때마다 만원인 상황이 반복되어서 도저히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두 번을 어물쩡거리다가 엘레베이터를 타지 못했고, 출근시간의 끝이 슬슬 보이기 시작해서 결국 막 도착한 엘레베이터에 내 몸을 어거지로 밀어넣었다. 그러자 발 디딜 틈이 없는 엘레베이터는 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만원임을 알렸다.
맨 마지막에 발을 올린 사람이 나였기때문에 여기저기서 눈치를 주는 눈빛이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다음 거 탈걸. 민망함에 후회를 했다. 출근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그 누구도 내릴 것같지가 않아서 결국 내가 엘레베이터 밖으로 다시 튀어나왔다. 몸을 다시 엘레베이터 쪽으로 돌리자, 엘레베이터 문은 일말의 미련도 없이 닫히다가, 다시 열렸다. 내가 내렸기때문에 누가 내릴 필요도 없는데 뒤이어 누군가가 내리려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오는게 보였다.
이젠 물이 빠져 갈색에 가까운 붉은 머리카락.
임팀장이였다.
" 같이 올라가요. "
약간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한 임팀장은 어느새 웃는 얼굴로 같이 올라가자며 손을 뻗어 다시 엘레베이터 상향 버튼을 눌렀다.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이 나는 내심 좋으면서도 어떻게 반응할지를 몰라 고개를 살짝 들어올려 천천히 숫자가 떨어지고 있는 엘레베이터 층수를 확인했다. 그런 나를 따라 엘레베이터 층수를 확인하던 임팀장의 손가락이 불쑥 내 눈앞에 나타나더니 딱─ 하는, 엄지와 중지 손가락이 마찰을 해 내는 경쾌한 소리를 냈다.
마치 저를 봐달라는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리자, 바로 임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 평소보다 늦게 출근 했네요? "
" 아, 그게 오늘 아침에 버스를 한 번 놓쳤거든요. "
그 순간 도착한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임팀장이 손으로 엘레베이터 문을 막으며 다른 손으론 내게 들어가라는 듯 손짓했다. 같이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던 다른 직원들이 탈때까지 그러고 있던 임팀장은 마지막으로 엘레베이터 안으로 들어와 내 곁으로 와 섰다. 아까와 비교해서 비교적 한산한 엘레베이터 안은 여느때처럼 조용했다. 고층에 부서가 위치한 디자인팀과 홍보팀 직원은 나와 임팀장밖에 없었는지, 5층을 채 넘기기도 전에 엘레베이터 안은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 출근 시간인데 배차 간격이 안 짧아요? "
" 네, 이상하게 그 버스만 배차 간격이 20분이예요. "
아까 하던 대화의 주제가 둘만 남으니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러고보니 정말 이상할정도로 내가 타는 버스만 배차간격이 길었다. 다른 버스들은 5분마다, 심지어는 3분마다 오기까지 하는데 내가 타는 버스는 20분이였다. 출근시간이든, 퇴근시간이든 상관없이 20분. 그래서 버스 한번만 놓쳐도 오늘처럼 출근시간이 간당간당하게 되버려서 한번은 놓쳐도 괜찮을 정도로 일찍 집을 나와야했다. 이게 내가 회사에 일찍 출근하는 이유였다.
나도 모르게 임팀장에게 하소연을 하듯 내가 타는 버스의 불만점을 늘어놓다가, 문득 엘레베이터의 문을 통해 그와 시선이 맞닿앗다.
임팀장의 큰 눈이 절반이 될 정도로, 그는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 그랬어요? 그래서 일찍 출근했었던 거구나. "
" 팀장씩이나 되서 늦는 것보단 일찍 나오는게 좋으─... 왜 그렇게 웃어요? "
" 귀여워서 그래요, 김 팀장님이 투정부리는 거 처음 봐서. "
그와의 연애를 이제 2주일 남짓 이어가는 동안 깨달은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임팀장은 표현에 있어서 직설적이고 거침이 없다는 거다. 그런 임팀장에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을 했는데 괜히 딴청을 피우게 되는 걸 보니 아직 멀었나보다, 저 아닌 척 능글맞은 직설화법에 익숙해지려면. 투정이 아니라 하소연이라고 별 것도 아닌 걸로 트집을 잡자, 바로 하소연하는 거 처음봐서─라고 능청스럽게 정정하는 임팀장에 결국 웃었다.
그리고 엘레베이터는 벌써 12층, 서로의 부서가 있는 곳에 멈췄다. 엘레베이터 문이 스르륵 열리고, 우리는 나란히 엘레베이터에서 내렸다. 출근시간이 벌써 5분정도 지나서, 원래라면 빠르게 내 부서 내 자리를 찾아 걷고 있을 걸음이 오늘따라 유독 느렸다.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내 느린 걸음에 맞춰 조금 앞서 걷던 임팀장의 걸음도 천천히 느려져 자연스럽게 내 옆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그럼 나랑 같이 출근 할래요? "
" 네? "
눈을 도륵 옆으로 굴렸다. 임팀장은 밥 먹었냐고 물은 사람처럼 평온한 표정이였다. 같이 출근하면 내가 편하기는 할 터였다. 아침마다 잠과 싸우고, 시간에 쫓겨 버스 정류장으로 바삐 걸어갈 필요가 없을테니까. 장난으로 묻는 건가 싶어서 눈을 가늘게 떠 임팀장을 힐끗 쳐다보았지만, 진심인 것 같았다.
" 나랑 같이 출근해요, 여주씨. "
" ... 그럼 임팀장님이 너무 불편하시지 않아요? "
나는 분명히 괜찮다고 거절을 하려고 했다. 당연히 민폐니까. 임팀장이 항상 날 데리러 와주고 데려다줘서 그가 어디 사는 지는 몰라도, 날 데리러 오면 임팀장은 자신의 평소 출근시간대보다 일찍 나와야할게 분명했다. 디자인팀만큼이나 야근이 잦은 홍보팀인데 임팀장이 괜히 더 일찍 일어나야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게 미안해서 거절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아침에 제일 먼저 보는 사람이 임팀장이였으면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래서 내가 의식하기도 전에, 내 입은 애매한 물음을 내뱉고 있었다.
누가 들어도 나는 같이 출근하고 싶은데─ 하는 답정너스러운 물음이였다.
" 출근하는 길에 여주씨 동네를 지나쳐서 불편하지 않아요. "
" ... . "
" 회사에서 자주 못보니까, 그렇게라도 얼굴 보고 싶어서 그래요. "
" ... 그래도─ "
" 그리고, 아침에 제일 먼저 보는 사람이 여주씨면 내 기분도 좋아질 거 같고. "
꽤 진지하게 말을 이어가던 임팀장은 결국 장난스럽게 마지막 말을 덧붙이며 내게 한쪽 눈을 찡긋여보였다. 나랑 같은 생각을 했다는게 좋아서, 슬쩍 웃자 그걸 놓치지 않고 '웃었으니 같이 출근하는 거죠?' 물어오는 임팀장이였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내가 들어줄때마다, 임팀장은 환하게 웃곤 했다. 지금도 그는 금방이라도 입이 귀에 걸릴 것처럼 웃고 있었다.
그렇게 느리게 걸었는데, 어느새 갈림길 마냥 서로 갈라서야하는 지점에 다다랐다. 디자인부서는 오른쪽, 마케팅부는 왼쪽에 위치해서. 월급의 노예로서 일하는 게 즐거운 사람이 어딨겠냐만은 정말 일하기가 싫었다. 차라리 같은 부서면 얼굴이라도 가끔 힐끔대기라도 할텐데, 아예 부서도 다르니. 임팀장도 나와 크게 다르진 않은지 쉽사리 걸음을 떼지 않았다.
" ... 이제 일하러 가볼까요? "
" 그래야죠, 팀장 둘이서 나란히 늦은 것도 모자라 여기서 농땡이 피우면 눈치 보일 것 같아요. "
서로 그렇게 시간을 하염없이 낭비하다가, 결국 우리 팀 직원이 내게 인사를 하며 부서로 돌아가는 걸 보곤 내가 먼저 일하러 가자며 운을 뗐다. 한숨을 푹 내쉰 임팀장이 이번엔 저에게 인사를 하는 홍보팀 직원에게 마주 인사를 해주며 또다시 장난스럽게 내 물음에 대꾸를 했다. 각자 부서로 가자고 말을 해놓고서도, 계속 서로를 쳐다보느라 먼저 걸음을 옮기는 사람이 없었다. 큰일이다. 나도, 임팀장도 서로 팀장이라는 직급을 달고서 이렇게 일하러 가기 싫어하고 있으니.
그게 조금 웃겨서 웃고 있으니, 영문도 모른 채로 날 따라 웃던 임팀장이 제 왼 팔에 차여진 시계를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 김 팀장님, 우리 벌써 15분이나 늦었어요. 어떡하죠? "
" 이제 진짜 일하러 가요. 안그러면 일 엄청 밀릴 것 같아요. "
내게 어떡하냐며 묻는 얼굴은 조급함이라던가 걱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융통성도 있고, 항상 여유로운 모습만 보이는 임팀장이라 그의 어떡하냐는 물음은 농담에 가까웠다. 아침부터 빡세게 일하는 사람도 없기도 했고. 이 시간대의 우리팀 직원들은 네이버나 개인 핸드폰을 몰래 보며 잠을 깰 시간이였으니 내가 늦어도 신경 쓸 사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내가 그에게 나중에 보자는 인사와 함께 손을 흔들며 천천히 발걸음은 떼자, 그제야 임팀장도 내게 짧게 마주 손을 흔들어보이다 자기 부서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나도 이제 내 부서로 걸어가는데, '여주씨─' 하고 임팀장이 날 불러세웠다. 그래서 다시 뒤를 도니, 임팀장이 장난끼가 다분히 보이는 비장한 표정을 지은 채로 내게 주먹을 쥔 팔을 들어올려보이더니 이내 화이팅 하는 자세를 짧게 해보였다.
입모양으로 ' 오늘도 화이팅해요' 라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는 건 덤이였다.
그 큰 덩치로, 이러는 게 너무 귀여워서 결국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런 나를 따라 웃던 임팀장이 다시 내게 손을 흔들어보였고, 이번엔 정말 각자 자기 부서로 향했다.
***
" 헐. 설마 이게 오늘 마신 커피예요? "
" 네? 아─, 네. 저도 몰랐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마셨네요. "
결제 서류를 내게 넘기면서도 이 사원의 눈은 빠르게 내 책상 위에 쌓여져있는 종이컵을 세고 있었다. 우리 부서에서 제일 어리고, 성비 불균형이 특징인 디자인 팀에 있는 둘 있는 남직원중 하나인 이대휘 사원이 걱정의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렇게 커피를 많이 마시면 집가서 잠도 제대로 못잘 거고, 피곤이 계속 될거라는 게 그의 말이였다. 그런 그의 말을 들어주며 결제 서류를 확인하다가 나도 탑을 이룬 커피컵을 눈으로 대강 세어보았다.
7잔까지 세다가 그냥 포기했다. 일 시작한지 이제 반나절 지났는데, 한 시간에 한잔도 아니고 그 이상을 마셨다는 사실을 회피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모니터를 보는 시간이 많은 일의 특성상 눈이 너무 자주 피로감을 느꼈다. 해야할 일은 계속 많으니까 그 피로감이 불러오는 졸음을 깨려 애쓰다보니 커피를 자주 찾게 되었다. 커피가 식욕도 떨구게 하는지, 또 점심을 거른게 생각이 났다.
" 그나저나 팀장님 손목도 자주 아프세요? "
" 손목이요? "
" 요즘 결제 확인 받으러 올때마다 매번 손목 돌리시길래요. 손가락도 자주 주무르시고. "
내가 끼니를 거르는 걸 항상 걱정하고 유일하게 싫어하는 티를 내는 임팀장 생각을 하고 있는데, 대휘씨가 대뜸 손목이 아프냐고 물어왔다. 그제야 내가 결제 서류를 들지 않은 오른쪽 손목을 스트레칭하듯 돌리고 있는 걸 알았다. 손목이 자주 욱씬거리고, 손가락이 뻐근함을 느끼는 건 하루의 절반이상을 마우스를 잡고 딸깍 거려서 생긴 직업병이였다. 그래서 먹쩍게 웃어보이는 내게 자주 스트레칭도 해주고, 또 병원 검사도 한 번 받아보라는 말을 덧붙이는 대휘씨였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여보이고 다시 결제 서류를 그에게 돌려줬다. 그 뒤로 갑자기 협업하는 다른 기업에서 대대적인 수정을 하자고 제안을 해오는 바람에 수정 사항을 확인하고, 또 내가 수정했으면 하는 부분들을 정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들 마음 속에 사표 하나씩은 안고 산다는데, 지금 딱 그 마음속에 잠들어있는 사표를 꺼내고 싶었다. 한숨을 푹 내쉬는데, 갑자기 내 오른 손목을 누군가 잡아왔다.
깜짝 놀래서 내 손목을 잡아빼려다가, 내 손목을 잡은 상대가 임팀장인 걸 알아차렸다. 세상에. 누가 옆에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내가 정신이 없었구나. 한숨 돌릴 겸 의자를 임팀장 쪽으로 돌렸다. 그는 내 손목을 잡고 조심스런 손길로 손목과 손 이곳 저곳을 눌러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사지를 해주는 거였다. 또 손목을 돌리고 있었던 모양이였다.
" 10분씩이나 여주씨 뒤에 서있던 거 몰랐죠? "
" ... 진짜요? "
" 너무 집중하고 있어서, 말걸기도 미안할 정도였어요. "
" ... 그래도 그냥 말고 말 걸지 그랬어요. "
어느새 나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로 그의 손길에 내 손을 맡겼다. 뻐근하던 손목이 조금 풀리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여기가 회사라는 공간인 걸 깨닫고, 급히 다시 손목을 빼내려는데 내 생각을 읽은 사람처럼 임팀장이 ' 퇴근 시간 지나서 사람들 없어요. ' 라며 내 걱정을 종결 시켰다. 나는 곧장 눈을 모니터로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8시를 향하는 시간은 확실히 퇴근 시간이 지났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 밥은요? "
" ... 음. "
" 또 안 먹었죠. "
이상하게도 나는 임팀장에겐 거짓말을 못 한다. 그래서 대충 먹었다고 둘러대도 될 것을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으니,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가 다시 펴졌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화났다기엔 애매한 표정이였지만, 언제나 내겐 웃는 (그것도 다양하게 웃는) 모습만 보여준 임팀장이라 이 상황이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원래 웃는 낯인 사람일 수록 안 그런 얼굴을 보이면 더 어색하고 냉하게 느껴지기 쉽상이였다. 그게 딱 지금의 임팀장이였고. (나중에서야 그가 고민과 걱정을 동시에 할때 이런 표정을 짓는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런 그의 표정과는 다르게 내 손을 마사지해주는 그의 손길은 여전히 조심스럽고 또 부드러웠다.
" 일 다 끝나려면 오래 걸려요? "
" ─아니요, 이거 마지막만 수정해서 보내주면 끝나요. "
" 그럼 끝나고, 뭐라도 가볍게 먹으러 갈래요? "
그는 어느새 내 근처에서 놀던 의자 하나를 끌고와 내 옆에 앉아있었다. 내가 일을 마무리 할 수 있게 손을 놓아준 그에게 내가 '그럴까요?' 라고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자, 그는 '그래요, 그럼' 이라고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뭐라도 먹게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는지, 그의 표정은 풀려져있었다. 그렇게 내가 일을 하기 위해 마우스를 잡자 날 방해하기 싫었는지, 그는 내가 모니터를 바라보는 내내 침묵을 유지했다. 그런다고 내 신경이 그에게 쏠리지 않는 건 아니였기에, 혹여 임팀장이 심심할까봐 내가 침묵을 깨는걸 택했다.
" 저 원래 오늘 일찍 집가도 괜찮은 날이였거든요? "
" 네. "
" 근데 갑자기 퇴근 시간 가까워져서 협업하는 업체가 대거 수정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나 참, 같은 디자인 하는 사람들끼리 그게 만만한 일 아닌 거 알텐데 내일 아침까지 마무리 해줬으면 좋겠대요. "
" 여주씨가 무리하고 있을만 했네요. 업체가 너무했다, 그쵸? "
내 말마다 자상하게 맞장구를 쳐주는 그에 나도 모르게 장황하게 하소연 늘어놓고, 또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철없는 모습을 예고도 없이 보여준 것 같아서 민망해서 입을 딱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수정한 부분을 확인하고 협업중인 기업 메일로 전송을 할때까지도 나는 그러고 있었다. 모니터에 켜놓았던 모든 창들을 닫은 뒤 컴퓨터를 끄고 다시 고개를 임팀장쪽으로 돌리자, 그는 턱을 괸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다 했어요? "
" ... 네? 네. 다 했어요. "
" 그럼 천천히 퇴근 준비하고 와요, 전 엘레베이터 잡으러 가있을게요. "
마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날 간지럽히는 그의 눈빛에 잠시 넋을 놓을 뻔 했다. 이렇게 임팀장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나를 흔들어 놓는다. 그는 자기가 앉아있던 의자를 원래 있던 곳으로 갖다 놓은 뒤, 엘레베이터가 있는 복도로 걸어나갔다. 딱히 퇴근 준비라고 할 것도 없어서, 확인이 필요한 서류 몇 개만 집어 가방에 넣은 뒤 복도로 걸어나오면서 부서 불을 껐다. 금방 깜깜해져서 옅게 켜진 복도등을 따라 빠르게 걸었다.
엘레베이터 두 대가 오가는 곳에 오자, 팔짱을 낀 채로 엘레베이터 층수를 확인하고 있는 임팀장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발걸음을 낮춰 그를 놀래켜줄 계획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그의 등을 툭 치기도 전에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김이 팍 샜다.
" 어떻게 알았어요? "
" 엘레베이터 문으로 다 보였어요. "
그의 등만 바라보느라 거울처럼 반사가 되는 회사 엘레베이터를 생각을 못했다. 임팀장은 멍해진 내 표정을 보며 결국 소리내어 웃었다. 졸지에 매일 내 빈틈을 쉴틈없이 임팀장에게 보여주게 된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다 같이 웃었다. 팔짱을 푼 임팀장은 내 손을 찾아 잡았다. 그의 손을 맞잡아주면서도 나는 괜히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 CCTV 빼고는 아무도 몰라요, 여주씨. "
" 네? "
" 우리 연애하는 거, 저 CCTV 빼고는 아무도 몰라요. "
그런 나를 옆에서 바라보던 그가 뜬금없이 한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되묻자, 그는 손가락으로 우리 머리 위에서 붉은 빛을 깜빡이는 CCTV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그 CCTV를 힐끔 쳐다봤다. 그러고보니 회사 곳곳에서 서로 마주보며 대화를 하고 웃는 모습, 아니면 가끔씩 이렇게 스킨십을 하고 있는게 저 CCTV엔 다 담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것도 조심해야하나. 그때 나를 따라 CCTV를 힐끔 쳐다본 임팀장이 살짝 허리를 낮춰 내게 속삭이듯 말을 했다.
" 남모르게 하는 사내 연애의 묘미라고 해야하나, 그런게 이런 거래요. "
" ... . "
"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데, 정작 회사 카메라는 알고 있는. "
" ... 그러게요. "
" 우리 사내연애라는 걸 하고 있는게 맞나봐요, 여주씨. "
그의 말을 들으며 다시 CCTV를 쳐다보았다. 사내 연애라는 단어가, 이렇게 간질거리고 몸이 괜히 베베 꼬여지는 단어였던가. 아니면, 그 단어를 말한 사람이 임영민이라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나는 CCTV에 고정했던 시선을 열리는 엘레베이터 문을 습관적으로 막고 날 안으로 이끄는 임팀장에게로 옮겼다. 지하 3층을 누르는 그를 눈으로 쫓다가 시선이 부딪혔다. 우리는 자주 서로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곤 했다. 그냥, 그마저도 좋아서.
그러다가 오늘 그가 늦게 퇴근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워낙 야근 하는 걸 싫어해서 일을 빨리 끝내는 편인 그가 왜 지금 나랑 같이 퇴근을 하게 된 건지.
" 임팀장님, "
" 네, 김 팀장님. "
" 어쩌다가 지금 퇴근 하게 되신 거예요? "
" 그러게요. 내가 왜 지금 퇴근할까요? "
말장난처럼 되려 내게 되물어오는 임팀장이였다. 나는 장난 치지 말고 말해달라는 의미로 그런 그를 흘겨보는 척을 했다. 흘겨보는 나를 못 본 척 하던 그가 잡고 있던 내 손을 들어올려보였다. 그게 내 질문에 대한 답인 것 같았지만, 설명이 없어서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음표를 가득 띄운 채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나를 키 차이때문에 내려보던 임팀장이 결국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이럴려고 퇴근 안했어요. "
" ... 네? "
" 퇴근 핑계대면서 데이트 하려고. "
허─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내 입에서 나옴과 동시에 광대가 올라온게 내 눈으로 보일정도로 얼굴 가득 미소가 지어졌다. 가끔 연애하다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긍정적인 의미로 '못 살겠다' 라는 말이 나오는 타이밍이 있는데, 내겐 지금이 그 타이밍이였다. 이런 귀여운 생각을 한 사람이 임영민이여서인지, 아니면 임영민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푹 빠져버린 나때문인지는 몰라도 '못 살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말을 태연하게, 능청스럽게 한 임팀장은 급 부끄러움이 몰려왔는지, 나처럼 웃는 얼굴로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며 나와 눈이 마주치는 걸 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느때처럼 내 눈에 들어온 빨개진 귓볼.
" 다 말해놓고 왜 부끄러워해요─ "
" 그러니까요. 뻔뻔하게 웃고 있으려했는데 그게 안되네. "
" 데이트 하러 가는데, 나랑 눈 안 마주 칠 거예요? "
그가 장난 칠때는 내가 그의 눈을 피하고, 내가 장난을 칠때는 그가 내 눈을 피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럴 것 같아서, 싱글벙글 웃으며 괜히 그에게 더 끈덕지게 내 눈을 안 볼거냐며 그와 눈을 마주치려고 까치발도 들어보고 이래저래 장난을 치는데, 갑자기 그와 눈이 마주쳤다. 높이가 있는 구두를 신은 채로 까치발을 들다가 잠깐 삐끗해 옆으로 넘어질 뻔 한 걸 그가 빠르게 잡아준 바람에.
내 허리를 꽉 잡아당긴 그와 서로 놀래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꽤 긴 시간동안 눈이 마주쳤다.
" ... . "
" ... . "
'지하 3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그 소리가 얼음땡의 '땡!' 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허리를 감싸고 있던 그의 손이 떨어졌고 기우뚱 서있던 나도 몸의 균형을 찾아 바로 섰다. 예상치 못한 스킨십은, 언제나 우리 둘을 묘한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내릴 타이밍을 놓친 엘레베이터는 문이 닫힌 채로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고, 임팀장이 바로 팔을 뻗어 지하 2층을 눌렀다. 여전히 그 묘한 분위기가 환기가 되지 않아 어색히 서있다가, 지하 2층에 도착해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기 전 엘레베이터 문으로 다시금 눈이 마주쳤다.
나나 임팀장이나 한 눈에 보일 정도로 빨개진 얼굴이였다.
그 모습이 분위기 환기가 될 유일한 것인 것 마냥 나와 임팀장은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이번에도 엘레베이터 문이 닫힐라 잽싸게 내리면서도 우리는 웃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그 묘한 분위기를 낯간지러워하면서도 계속 잡고 있던 손을 꽉 잡은 채로.
그냥, 그 분위기마저 좋아서.
*
주저리 |
안녕하세요, 드래곤 수프입니다. 주 2회 연재한다고 해놓고, 시간을 보니 일요일 업데이트가 물건너 간 시간이네요...ㅠㅠㅠ 그럼 이번 주에 세 편 올리면 되겠네요, 그쵸? (...) 혹시 금요일에 코엑스 갔다오신 독자님들 계시나요? 코엑스에 저녁 먹으러 갔다가 세운이 무대를 보고 왔거든요. 아니, 듣고 왔다고 해야할까요...ㅎㅎ 도저히 인파를 뚫고 들어갈 자신이 없어서ㅋㅋㅋ 먼 발치에서 노래 부르는 거 듣다가 왔습니당. 노래도 잘하고, 목소리도 좋고. 세운이도 빨리 데뷔했으면 좋겠어요. 댓글을 읽다가, 가끔 제 글로 입덕을 했다거나 영민이가 더 좋아졌다거나 하는 댓글을 가끔 마주하게 되는데 감사해요. 정말 과분한 칭찬인 것 같아요..ㅠㅠ 그리고 꾸준히 정주행 하러 오신다는 독자님들이 계셔서 글 올리는 주기를 줄이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잘 안되네요. 그래도 이번주엔 꼭 세 편으로 와서, 정주행 할 틈이 없게(?) 부지런해지겠습니다. 시험 기간인 독자님들은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랄게요! 항상 댓글도 남겨주시고, 긍정적으로 '친절한 영민씨'를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다음편에서 뵙겠습니다.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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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그_냥의 부드러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