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닉 '-^♡ → 노을/섹도
따라다니긴 해도 사생은 아닌데? (이틀) |
시끄럽게 우는 알람이 짜증날 듯 하지만, 경수는 울리는 알람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드디어 아침이구나..!' 1초가 훨씬 더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잠이 들었던 경수는 힘껏 스트레칭을 했다. 익숙하게 책상 위 달력을 쳐다보자, 빨간색 펜으로 정신없이 적어 둔 백현의 스케줄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번 사극 단역에서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 경수는 더 열심히 스케줄을 쫓아다니는 중이다. 오늘은 한 화장품 회사에서 열어준 백현의 팬싸인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싸인회 시간은 3시라고 하지만, 덕후의 기본 자세는 부지런함이란 신념을 갖고 있는 경수는 미리 가있기로 결심했다. 참, 이미 백현의 팬클럽 회원 내에선 엄청난 지분율의 소유자인 경수는 다른 사람들처럼 싸인회 당첨에 목숨걸며 전전긍긍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다 해결해 주곤 했다. 그래서 오늘도 여유롭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입고 갈 옷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이렇게 따라다니다 보면 중간에 급작스레 현타가 올 때도 있었지만, 그냥 '팬심이야~' 라며 넘기곤 하는 경수였다. 방금 전에도 살짝 '내가 예전에 여자친구 만나러 나갈 때 이렇게 신경쓴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시 후 만날 백현을 위해 곱게 접어서 하늘 위로 날려버렸다. 전날 잠을 푹 잔 덕에 보송한 얼굴이 맘에 들어 계속 거울을 보았다.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빙글빙글 돌던 경수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아! 하고 멈춰섰다. 얼마 전에 백현이 인터뷰에서 좋다고 언급했던 향의 향수. 살까 말까 고민했지만, 독한 맘을 먹고 거금을 투자해 샀다. 사자 마자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자, 다른 팬들이 부럽다는 댓글을 달아왔다. 봤냐, 덕후들아? 너희들은 날 따라올 수 없어.. 괜한 자부심에 불타오르던 경수였다. 심장 부근과 손목, 목에 향수를 바른 경수는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고쳐 맨 뒤 집을 나섰다.
"아, 오빠! 여기에요!"
멀리서 손을 흔드는 익숙한 얼굴의 여학생 곁으로 다가갔다. 미안, 오빠가 아직 니 이름은 못 외웠어.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핀잔을 주는 학생에게 미안하다며 멋쩍게 웃어보였다.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니 싸인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아, 아까 옷 입으면서 시간을 너무 많이 썼나..? 자신의 신념에 한 줄기 금이 쫙 간 것을 느낀 경수는 애써 자신을 위로하며 멘탈을 정리했다. 아, 오늘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얼마 전 라디오 출근 길에 만났던 백현을 회상했다. 그날따라 날씨가 너무 차가워서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장갑을 다시 꺼내서 꼼지락 거리던 중이었다.
"어, 경수씨!"
갑자기 들려오는 백현의 목소리에 놀라 장갑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추워서 콧물을 훌쩍이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애써 해사하게 웃으며 백현을 반겼다. 하지만, 이미 추위에 덜덜 떠는 자신을 보았던 듯 작게 웃었다. 경수는 그게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쪽팔리게..
"추운데 뭐하러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네? 아.. 출근길..흐.." "출근길? 그런 건 뭐하러 봐요. 어차피 오늘 라디오 들을 거 아니에요?" "네.." "그럼 안에 들어가 있지 왜요?" "아뇨..뭐..그냥.."
차마 거기서 출근길 대포가 제일 예쁘더라구요~ 라고 외칠 수 없었던 경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허허 웃었다. 백현은 경수의 반응에 좀 의아하긴 했지만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추워요. 들어가세요." "네.."
하고 백현이 돌아서자, 경수도 이제 그만 들어가야지 라며 발길을 떼려 했다. 그때, 백현이 몸을 다시 돌려 자신이 쓰고 있던 털모자를 벗어 경수의 머리에 씌웠다. 놀란 경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아무 것도 못한 채 백현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팬들도 놀라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 아 시발 존나 부럽다..! 존나 쓰던 털모자..' 를 하염없이 외치며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 셔터를 미친듯이 눌러 댔다. 백현은 민망한지 눈을 가늘게 휘어뜨리곤 갈 길을 갔다.
"감기 걸려요."
다시 생각하니 다시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경수는 혼자 발을 동동 구르며 얼굴을 매만졌다. 많은 여자들 사이에 혼자 남자인 것도 튀는데, 거기에 이상한 행동까지 하니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지금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너네 변백현이 직접 씌워 준 변백현이 쓰던 모자 있냐? 있냐고!!!! 경수 옆에 서있던 경수를 챙겨준 여학생이 슬슬 경수의 진상을 참을 수 없게 될 때 즈음, 싸인회가 시작되었다. 덕분에 경수의 정신도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여학생은 감사함에 눈물이 날 뻔 한 것을 참고, 경수를 버리고 혼자 갔다. 진짜 버려질세라, 급히 발걸음을 빨리 해 행사장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사람 진짜 많아.."
왜 이렇게 늦게 걷는거야? 저 멀리 작게 보이는 백현을 빨리 보고싶은 마음에 괜히 투정을 부려댔다. 최근 인기가 늘어난 백현은 예전 (도경수가 팬질을 시작할 때 즈음) 보다 행사에 참여하는 팬들 수가 두 배 이상 늘어났다. 그에 따라 경수도 '내 백현' 을 빼앗긴 기분에 언짢은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을까, 어느 새 백현은 자신의 코 앞까지 와있었다. 이 사람 다음에 나야..! 근데 이 여자 왜이렇게 안비켜? 앞 여자를 실컷 째려보다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괜히 헛기침을 하며 백현의 앞에 와서 섰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 "아, 그…모자 감사했어요…!" "아녜요, 감기는 안 걸리셨죠?" "네!" "언제 돌려주실 거에요?" "…ㄴ…네?" "모자요. 그거 되게 아끼는건데."
아니, 얘 지금 장난치는건가..? 아니 장난이라고 하기엔 표정이 너무 진지한데.. 순식간에 혼돈의 카오스로 들어간 경수의 멘탈은 헤어나오지 못하고 깊은 고뇌에 빠졌다. 모자를 돌려주자니 아깝고 (사실은 눈물나고) 그렇다고 안돌려주자니 예의가 아니고… 잃어버렸다고 할까? 그러면 더 좋지 않게 볼 듯 한데.. 아 어떻게 하지?
"농담이에요, 뭘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요?'
아놔 씨발.. 이새끼 지금 나 가지고 논거야? 살짝 기분이 더럽긴 했지만 백현이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웃었다. 사실, 정색할 뻔 했지만 자신을 보며 웃고있는 백현이가 너무 예뻐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크, 뒷사람이 화내겠다. 얼른 싸인 받고 가야지.
"아, 놀랐잖아요… 싸인 빨리 해주세요. 뒷사람 기다려요…" "네, 오늘 계속 계실거에요?" "아뇨, 오늘은 가는 거 못 봐요…" "아…왜요…?" "음…시간이 좀 부족할 듯 해요…" "알겠어요 그럼… 잘가요."
허리를 숙여 꾸벅하고 인사를 하고 줄을 나왔다. 싸인 용지를 확인하니, 항상 보던 백현의 정갈한 싸인과 함께 「P.S.모자 잘 쓰고 다녀요, 감기 안걸리게. 오늘도 추워 보이네요. 감기 조심해요~」라고 써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아, 내새끼.. 글씨도 어쩜 이렇게 예쁘게 잘 쓸까.. 괜한 뿌듯함에 종이를 안고 미소짓는 중에, 저 멀리서 (백현의 차 옆에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백현의 매니저가 눈에 들어왔다. 좋았어, 오늘 만큼은 꼭…!
"형-!!!"
매니저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커피를 손에 들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경수가 보였다. 경수가 건네는 커피를 받아 들자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에 너무 감사할 뿐이었다. 나 추운 건 어떻게 알고, 이자식..
"형 추운데 여기서 뭐해요, 차에라도 들어가시지.." "어떻게 그래, 백현이 언제 끝나는 지도 모르는데…" "형이 고생이네요…" "너는 춥지도 않냐? 멋 부리다가 얼어 죽어." "헤헤, 괜찮아요." "저 놈이 뭐가 좋다고 이렇게 따라다니냐?" "그냥요."
아무래도 백현보단 백현의 매니저와의 대화가 더 잦았기 때문에 매니저와 어느새 굉장히 친해진 경수다. 경수가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하자, 매니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사실 경수의 계략이다.)
"왜, 할 말 있어?" "아…있긴 한데…" "왜? 뭔데?" "사실…부탁이에요." "오- 부탁? 뭔데? 말 해봐." "아니…들어주시기 곤란할 것 같아서…" "뭐길래 그렇게 뜸 들여. 괜찮아, 말 해." "형……곤란하시겠지만……"
"백현씨 번호 좀 줄 수 있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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