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비가 그친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습한 공기의 어두운 골목길에 섰다. 오렌지 빛의 낡은 가로등이 군데군데 생긴 물웅덩이를 비추고 있었다. 저 멀리서 찰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저번 꿈과 같이, 어린 남자아이가 지나칠 것이고, 그 앞에는 또 다른 남자아이가 뛰어오는 남자아이를 낚아채 바닥에 눕힐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현은, 남자아이의 얼굴이 궁금해 발걸음이 가까워질 즈음 뒤돌았지만 거의 다 허물어질 것 같은 벽만 존재했다. 의아함에 고개를 돌리니, 남자아이는 백현의 앞을 지나치고 있었고, 꿈속에서 백현은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남자아이의 옷깃을 낚아채 순식간에 바닥에 눕혀 그 위로 올라탔다.
평소의 제 손과는 달리 작은 손이, 남자아이의 목을 있는 힘껏 조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백현이 말이다. 무슨 상황인지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남자아이의 목을 조르고 있을 때,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남자아이의 발버둥이 점점 멈춰지고 있었고, 제 자신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처음 꿈에서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제 자신이었다면, 이번에는 남자아이의 목을 조르는 또 다른 남자아이가 되어있었다. 백현은, 제 밑에 있는 남자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쩐지 목을 조르는 손에는 힘이 풀어지질 않았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남자아이의 발버둥이 멈춰져갈 즈음, 백현은 발작하듯 잠에서 깨어났다. 축축한 느낌에 눈가를 쓱, 부비니, 물기가 묻어졌다. 꿈에서 보던 작은 손과 대비되는 현재의 제 손이, 어색하게 느껴져 남의 손을 보듯 한동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 작은 남자아이의 가느다란 목을 조르고 있었다니. 식은땀과 함께 뒤섞인 눈물이 어색해, 백현은 동이 틀 때까지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소년을 위로해줘
w.BM
조금은 멍한 기분으로 수영장을 찾았다. 수영 슈트로 갈아입고 물에 발을 담구고 앉아 연습곡을 고르는 동안에도 꿈속에서의 기억이 생생해 멍하니 있었다. 차갑고 부드러운 수면 위에 비치는 제 얼굴을 보다가, 손으로 물살을 휘저어 형체를 없앴다. 강하게 일어난 물살이 잠잠해지니, 수면 위로 제 얼굴과 더불어 수중 발레 코치와 경수의 얼굴이 같이 비췄다. 백현은 고개를 들어 제 뒤에 서있는 코치 경수를 번갈아 보았다. 백현의 시선이 경수에게로 향하자, 경수는 죄 지은 사람 마냥 고개를 푹 숙였다. 매서운 눈초리로 경수를 보고 있을 즈음, 백현의 머리 위로 코치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오늘부터 연습 시간 나누기로 했어. 수중 발레 선수가 두 명이 되었으니, 수영장도 둘이서 같이 사용하라는……”
“뭐라고요?”
“전학생 경수도 수중발레 선수야. 우리 학교엔 수영장이 하나뿐이니 연습 시간을 나눠서 같이……”
“싫어요.”
“백현아.”
“싫습니다. 제가 왜 저 새끼랑 수영장을 같이 써요? 여긴, 엄연히 따지면 제 수영장입니다.”
“그건 네 혼자 수중 발레 선수일 때 이야기고,”
“싫다고요! 제가 왜 저딴 더러운 새끼랑 수영장을 같이…”
“변백현!”
“그, 그만 하세요!”
코치와 백현의 언성이 높아져 수영장 벽을 울릴 때, 그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경수가 외쳤다. 경수의 말에 백현과 코치는 말을 멈추고 동시에 경수를 보았다. 경멸어린 백현의 시선이 제게 닿자, 경수는 목을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수영장에 메아리치던 목소리들이 가라앉자, 순식간에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똑, 똑, 똑. 어디선가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가, 방과 후에 학교 근처 체육관으로 갈게요. 가느다랗게 떨리는 경수의 말에, 백현은 조금 더 매서운 눈으로 경수를 보았다. 코치는 백현과 경수를 번갈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변백현, 네 나이가 몇인데 떼를 써. 어? 좋게 수영장 같이 써.”
“이 새끼가 체육관 쓴다잖아요, 뭐 하러 나가서 연습한다는 애 말려요? 도경수, 너 코치님 이랑도 잤나 봐? 능력도 좋아, 전학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몇 명 째야.”
“변백현!”
“꼴사납고,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얘랑 절대 수영장 같이 못 씁니다.”
빠르게 말을 마친 백현이 두 사람을 지나쳐 탈의실로 들어갔다. 트레이닝복을 꺼내 입으면서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 사물함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강한 파열음과 함께 저릿한 고통이 동반했다. 경수가 전학 온 뒤로 연습이 제대로 된 적이 없는 것 같아, 백현은 경수가 더욱 더 원망스러웠다. 도대체 왜, 저딴 새끼가 전학 온 걸까. 자꾸만 제 자신을 괴롭히는 경수의 상처가 가득한 시선이, 날카롭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숨을 천천히 내쉬며 흥분을 가라앉히고 헤드셋을 써, 음량을 최대로 높인 뒤 수영장을 나왔다.
주변의 소음은 들어올 틈도 없이 웅장한 콘트라베이스의 선율이 울렸다. 낮게 깔리는 진동음과도 같은 선율을 귀에 담으며 묵묵히 교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어가고 있을 즈음, 제 어깨를 붙잡는 손길에 짜증스러운 몸짓으로 헤드셋을 벗으며 뒤를 돌아보니, 찬열이 숨이 가쁜 듯 상체를 숙여 헉헉 거리고 있었다.
문득,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하다고 말하던 찬열이 떠올라, 뒤에서 얼마나 제 이름을 부르며 따라왔을지 생각하니 미안해져서 백현은 곧바로 표정을 풀고 상체를 숙여 찬열을 살폈다. 찬열은, 몇 번 천천히 심호흡을 하더니 곧 원래의 안색을 되찾고는 환하게 웃으며 백현을 보았다.
“내가, 뒤에서 얼마나 불렀는데. 너 또 음량 엄청 키워놓고 있었지?”
“어, 응. 미안해. 좀 괜찮아?”
“응 괜찮아, 이 정도는 뭐 견딜 만 해. 그나저나 지금 연습할 시간 아닌가?”
“아…… 음, 연습이 잘 안 되어서.”
백현이, 찬열의 시선을 피하며 말끝을 흘려 말하자, 찬열의 큰 눈이 가늘어지며 백현을 보았다. 흐음. 잠시 백현을 보던 찬열이, 백현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멀뚱히 찬열을 올려보고 있으려니, 찬열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피아노 연주 안 들은 지 꽤 되었지?”
“어? 어어… 그렇지.”
“오랜만에 들려줄게. 내 연주 꽤 비싸, 알지? 가자.”
긴 다리로 휘적휘적 사람들 사이를 헤쳐 음악실로 향하는 찬열을 따라가며, 백현은 오늘 하루 중 처음으로 편안하게 미소 지었다. 찬열이 괜히 자타공인 해피바이러스라 불리는 것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찬열의 연주를 다 듣고 난 뒤에, 찬열은 남아서 조금 더 연습한다고 하기에 혼자서 교실로 올라오니 점심시간이 막 시작되었는지, 교실을 비롯한 복도가 텅 비어있었다. 백현은 그것이 나름 다행이라 여겨지며 방금까지 찬열이 연주하던 곡을 흥얼거리며 복도 끝에 있는 제 교실로 향했다. 찬열 덕분에 기분이 좋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제 반 앞에 서있는 낯익은 형체에 발걸음을 멈췄다. 교실 앞에 서있던 형체가 줄곧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백현을 보았다. 교실 앞에 있던 형체가, 경수임을 확인한 백현의 표정이 한순간에 구겨지며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경수를 못 본 척 지나쳐 교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등 뒤에서 경수의 작은 목소리가 백현을 붙잡았다.
“저기, 백현아.”
백현이 짧게 한숨을 내뱉고선, 뒤를 돌아 차가운 시선으로 경수를 보았다. 그 시선에, 경수가 흠칫 놀라 움츠렸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백현을 보았다. 큰 눈동자가 가만히 고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에, 백현이 픽, 조소를 흘렸다. 백현의 웃음에 경수가 오롯이 백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할 말이 있어.”
“별로 듣고 싶진 않은데.”
“너, 나… 기억 안 나?”
“뭐?”
“기, 기억… 안 나냐고…….”
“허 참, 갑자기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는데, 너 같은 거 남자애들한테 다리 벌려주는 더러운 새끼로는 기억나지.”
“…….”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네 얼굴만 보면 혐오스러워서 토 나올 것 같거든.”
“저, 백현아…….”
“내 이름 부르지 마, 더러우니까.”
또 다시, 상처가 가득한 시선이 백현에게로 꽂혔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백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경수의 슬리퍼 위로 침을 뱉고는 교실 문을 소리 나게 닫으며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문가에 기대어 선 백현은, 상처가 가득했던 시선을 지우려 머리를 세차게 내저었지만 점점 더 선명하게 뇌리를 스쳤다. 더불어 겨우 잊었던 추악한 과거가 떠올라, 머리를 부여잡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 마세요, 제발! 잘 못 했어요, 제가 잘 못 했어요! 잘 못 했어요, 하지 마요. 제발…….’
주저앉은 백현의 눈앞에, 상처 입은 눈동자의 어린 꼬마가 손을 마주 모아 싹싹 빌며 울고 있었다. 상처가 가득한 어린 남자 아이의 몸을 보며, 백현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한 사내의 더러운 구둣발이 남자 아이의 마른 등에 내리 꽂힐 때마다, 백현은 흠칫 놀라며 남자 아이에게로 손을 뻗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남자 아이의 등에 생기는 푸르뎅뎅한 멍 자국을 어루만졌다. 남자 아이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서 벌벌 떨며 울고 있었다.
잘 못 했어요, 살려 주세요… 아버지…… 아버지! 제발…….
남자 아이의 흐느낌과 더불어, 백현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떨어지는 순간, 형체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발길질을 받아내던 남자 아이는, 열여덟 끝자락의 소년이 되어있었다.
BGM. 쇼팽 녹턴 1번 Nocturne No.1 in Bb minor
소년을 위로해줘 에 등장하는 소년들을 전부 다 과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요. 아니면 현재의 상황이 안 좋다라던가. 인물관계가 복잡한 만큼 소년들의 과거도 복잡하달까요... 그래서 조금은 느리게 굴러갈 수도 있지만, 마음같아선 머릿속에 떠오른 만큼 후다닥 끝내고 싶기도 해요. 이번 편은 백현에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언급된 편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억하실 분이 있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첫 번째 편에서 자신과 닮은 경수의 상처받은 시선이 싫었다, 라는 대목이 일종의 복선이었는데 모르셨겠죠...^_T 제 표현력의 한계라서...ㅎ 어쨌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시거든 스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설명 드릴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막 이해가 되시진 않을 거예요... 아마 이야기가 더 전개되어야겠죠.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기에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봐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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