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연인
GOT7 - Let Me
눈을 떴다. 창 밖으로 엄청난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 걸 보니 사이판에 오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는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과장님이 있었다.
다행이다. 일어나 보니 집은 아니어서. 혹시 꿈이었다면 집에서 또 출근해야 할 줄 알고 걱정했는데 그게 아니라 천만 다행이었다.
몸을 움직이는 나를 느낀 건지 과장님도 으으, 하고 짧게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나는 쪽, 하고 과장님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랬더니 눈도 제대로 못 뜨던 과장님이 화들짝 놀라며 정신이 든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소리 내어 웃으며 굿모닝, 하고 인사했다.
"잘 잤어요?"
"......"
우웅, 하며 손을 들어 눈을 비비는 과장님이다.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순수하고 아이같은 모습이다. 그게 사랑스러워서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잘 잤어? 하고 물어오는 목소리가 꾸욱 잠겨 있다. 나는 응, 저도 잘 잤어요. 대답했다. 과장님은 아침 먹으러 갈까? 하고 물어왔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늦은 시각. 그도 그럴 것이 어제(도 아닌 오늘) 거의 해가 뜰 때가 다 되어 눈을 감았으니 많이 자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훅 가버렸다.
오늘은 마나가하 섬에 가서 스노클링 하기로 한 날. 조식을 얼른 먹고 짐을 챙겨 섬에 가는 페리를 타야했다.
"와아, 조식 진짜 빵빵하다-"
세수와 양치질만 얼른 하고 1층 식당으로 가서 조식을 먹기 시작했다. 조식이 잘 나오기로 유명한 호텔이라 내심 기대한 건 있었지만 이렇게 잘 나올 줄이야.
호텔도 잘 골라준 과장님의 안목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접시에 음식을 담았다. 과장님은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음식을 구경했다.
왠지 대형견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것 같은 기분. 등 뒤로 닿아오는 포근하고 따뜻한 숨이 좋았다. 많이 자지는 못했어도 컨디션은 최고다.
"잘 먹겠습니다!"
"저도요."
"많이 드세요, 과장님."
"과장님 싫어.
나 여기에서 과장님 안 할 거야."
습관적으로 나온 과장님이라는 호칭에 짐짓 굳은 얼굴을 하고 과장님 안 할 거라고 이야기하는 과장님. 아니 오빠.
나는 미안미안, 하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네- 오빠- 하고 불렀다. 그랬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다. 휘어지는 눈꼬리가 예쁘다.
샐러드로 가볍게 한 접시, 빵 종류를 가득 담아 묵직하게 한 접시를 싹 비우고 나니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과일을 안 먹을 수는 없어서 마지막으로 과일까지 먹었다.
전투적으로 열심히 먹었더니 배가 빵빵해졌다. 통통, 배를 치며 아- 배부르다- 했더니 과장님이 뿌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네. 하는 말도 잊지 않는다.
"얼른 바다 가고 싶다-"
"얼른 갈까?"
"아니, 천천히 가요. 시간 많으니까.
난 우리 둘이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은데."
무의식 중에 진심이 나와버렸다. 내가 이런 간질간질한 말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있던가. 잘은 모르겠지만 몇 번 없었던 건 확실하다.
과장님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나도. 하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연스레 올라가는 입꼬리가 사랑스러웠다. 끝을 모르고 점점 더 좋아진다. 큰 일이다.
과장님은 다 먹었어? 일어날까? 하셨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과장님께 닿기까지를 기다리던 과장님은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으... 많이 먹어서 안 되는데. 하면서 울상을 지었더니 이렇게 하려고 많이 먹인 건데? 하신다. 연애하면 살이 찐다는 어떤 연구 결과가 떠오르면서 나는 더 울상이 되었다.
이따가 래시가드도 입어야 되는데 음식에 눈이 멀어 너무 많은 걸 내 뱃속에 저장해둔 게 아닌가 싶다. 후회가 밀려왔다.
"저녁 때까지 다시 안 들어올 거니까 웬만한 건 챙겨 가야겠어요."
"응."
"선크림.. 선글라스... 모자.. 수건... 그리고 또 뭐 필요하지?"
자그마한 크로스백을 들고 이런저런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짐 드는 건 저가 하겠다며, 내게 제 가방을 내밀며 필요한 거 다 넣으라고 한 과장님의 말은 또 한 번 감동이었다.
이리저리 호텔방 안을 돌아다니며 더 챙겨야 할 게 없는지를 보고 있는데, 과장님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옷을 벗으시는 거다.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 가만히 얼어버렸다. 눈에 들어오는 등판이 매끈하다.
"........."
"..........."
꿀꺽, 목을 타고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내가 갑자기 조용해진 걸 느낀 건지 과장님이 내 쪽을 슬쩍 본다.
나는 아무것도 못 봤다는 표정을 지었어야 했는데 실패해버렸다. 다 봐버렸어요, 하는 표정으로 과장님을 보고 있으니 당연히 걸릴 수밖에 없는 거다.
과장님은 웃으며 왜? 하고 물었고, 나는 아... 아니. 어... 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못 찾았기 때문이다.
과장님은 아직 옷을 안 입은 상태로, 한쪽 손에 분홍색 셔츠를 들고 가만가만 내게 걸어왔다. 나는 한두 걸음 정도 뒷걸음질 쳤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창 밖으로부터 빛은 쏟아지는데 눈 앞에는 살색이 가득하니 눈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그러고는 내 앞에서 분홍색 티셔츠를 입는 과장님.
살색으로 가득하던 시야가 분홍색으로 덮여지긴 했지만 왠지 더워진 게 분위기가 후끈후끈했다. 손을 들어 부채질을 했다.
"왜."
"........"
왜, 하고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물으시는데 심장이 쿵쾅쿵쾅 아주 난리를 친다. 으으... 제발. 아직 훤한 낮이다, 낮. 아니 낮도 아닌 오전인데.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눈을 꾸욱 감았다 떴다. 너무나 가까이에서 과장님의 달큰한 숨소리가 느껴지고, 뭐지, 이대로 마나가하 섬은 안녕인 건가... 하면서 초조해 하는데,
과장님이 갑자기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어떡하냐, 진짜. 귀여워서."
"아으... 놀랐잖아요."
"왜 놀라?"
"아니... 그냥... 섬 안 갈 줄 알고..."
"섬을 왜 안 가?"
"....어..... 아니....."
나를 놀리는 게 재밌어서 놀려먹고 있는 게 틀림없다. 분하지만 잠깐 동안 음란마귀가 꼈던 것도 사실이긴 했다. 괜히 부끄러워져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하하, 하고 웃는 과장님의 웃음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나갈까? 하는 목소리에 네에... 하고 말꼬리를 늘였다. 과장님의 한 쪽 어깨에는 크로스백이 걸쳐져 있다.
과장님을 앞장세워 방 키를 뽑고 문을 닫았다. 쿵쾅쿵쾅 정신없이 뛰어대던 심장은 조금씩, 조금씩, 제 원래 속도를 찾아갔다.
-
"바다다!!!!!"
관광객이 듬성듬성 들어찬 자그마한 페리를 타고 15분쯤 들어가니 마나가하 섬이 보였다.
마나가하 섬은 사이판의 작은 무인도 중 하나인데, 바다가 예쁘고 스노클링 같은 액티비티를 할 수 있어서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했다.
해변은 끝에서 끝까지 걸어도 채 20분이 안 될 만큼 작은데, 그 자그마한 데에서 오는 소소한 매력이 마나가하 섬을 찾는 이유라고 했다.
다행히도 오늘은 관광객이 엄청 많은 편은 아니라 그래도 여유롭게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풍경과 과장님을 한 폭에 담기 위해 이리저리 카메라를 돌려가며 셔터를 눌렀다.
"와- 모래 좀 봐봐요 오빠! 엄청 곱다. 그죠?"
나는 햇볕을 가리려고 챙이 넓은 밀짚 모자를 썼다. 그리고 바다가 예쁜 곳에 왔으니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과장님이 입은 분홍색 티셔츠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과장님은 내게서 카메라를 받아 들어 여기저기 신나서 뛰어다니는 나를 찍어주었다.
밀짚모자가 날아가지 않게 잡고 포즈를 취해보기도 하고, 브이를 들고 웃긴 표정을 지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카메라를 셀카모드로 돌려서 과장님 옆에 꼭 붙었다.
"같이 찍어요.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을 외치고 셔터를 누르는데 볼에 뭔가 말캉한 게 와서 닿았다. 이것은..... 이것은.......?!!!
벙 찐 나를 두고 아무렇지 않게 앞장서서 걸어가는 과장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찍힌 사진에는 내 볼에 입맞추는 과장님과 웃는 내 모습이 담겼다.
....예쁘다.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꺄아, 어떡해. 어떡해. 하면서 부끄러워하다가 부지런히 과장님을 쫓아갔다.
달려가서 과장님의 허리를 안았더니 한껏 웃으며 내 어깨를 안아오는 손길이 이제는 거의 자동이다.
걸음걸음마다 모래가 너무 고와서 발이 푹푹 빠졌다.
말 그대로의 에메랄드 빛 바다가 정말 예뻐서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사진에 과장님과 바다를 함께 담고 싶어서 또 멀찍이 떨어져서 걸어보기도 했다.
워낙 키도 크고 몸선도 예뻐서인지 아무렇게나 찍어도 사진이 잘 산다. 누구 꺼길래 이렇게 멋있을까... 하면서 또 남몰래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한동안 해변에서 산책하고 노닐다가, 이제는 바다에 들어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스노클링 장비 대여소로 향했다.
깊은 데까지 들어갈 생각은 아니었고 대강 중간 정도의 수심에서 물고기를 구경하려는 계획이었다.
나와 과장님은 잠깐 탈의실에 들러 래시가드를 갈아입고 나오기로 했다. 나는 안 탈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타지 않으려고 꼼꼼히 선크림을 발랐다.
"오....."
한참 선크림을 바르고 이제는 됐다 싶어 나왔는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과장님이 보였다. 까리한데- 하는 말이 절로 나올 만치 멋진 모습.
래시가드를 입은 모습은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조금은 어색했는데, 어색하다기에는 또 너무 잘 어울려서 놀랐다.
와, 이쁘다. 완전 잘 어울려요! 하는 내 말에 쑥스러운듯 눈가를 긁적이는 과장님... 아니 오빠. 솔직히 이 모습은 오빠라고 해야 해.
내가 나오는 걸 기다리는 동안 오빠가 미리 스노클링 장비를 빌려놓은 터라, 나는 장비를 받아들고 몸에 장착했다. 딱, 딱, 소리를 내며 구명조끼가 잠겼다.
나란히 구명조끼를 입고, 두 손에는 오리발과 스노클을 챙겨서 해변으로 걸어갔다.
비장한 표정으로 오리발을 신고, 목에는 스노클을 걸고 입수. 몸에 닿아오는 바닷물이 미지근했다. 적셔지는 기분이 좋아서 웃으며 오빠를 쳐다봤다.
조금씩, 조금씩 수심이 깊어지기 시작해서 목에 걸어둔 스노클을 얼굴에 썼다. 어느 정도 더 걸어갔더니 잠수를 하지 않고는 안 될 정도의 깊이가 되었다.
"이제 많이 깊어요!"
"응. 조심해. 무서우면 나 잡아."
사실 나는 수영을.... 잘했다. 초등학교 때에는 학교 대표로 수영대회에 나가서 상도 탄 적이 있는, 나름 수영 유망주였다.
하지만 비염을 사시사철 달고 다닌 터라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는 수영을 관뒀지만.. 그래도 물은 좋아했다.
물 속에서는 거의 인어공주라던 박지훈의 말을 과장님이 기억하고 계실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뭔가 무서운 척을 하고 싶었다.
물도 깊겠다, 구명조끼도 입었겠다... 무서운 척을 한다고 해서 큰 일 날 것까지야 없었기 때문에 괜히 겁을 내면서 과장님을 안고 꼭 달라붙었다. 어미에게 붙은 코알라처럼.
그러면서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에게 인사도 해보고, 스노클을 쓴 과장님을 마주보며 웃기도 하고.
물 속에서 첨벙첨벙, 단 둘이서만 물놀이를 하고 있으니 신나면서도 설렜다. 그래서 괜히 더 과장님을 꼬옥 안았다.
과장님은 아마... 내가 물이 무서워서 꼭 달라붙어 있는 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저는 사실 수영선수 출신입니다. 그치만 오늘은 비밀로 할게요.
한참 물고기를 보다가, 다리를 움직여 조금씩 수영을 해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멀리까지 쭈욱 나아갈 수는 없었고 제자리에 맴도는 정도였다.
과장님은 수영도 잘했다. 널찍한 어깨가 괜히 나온 건 아닌 것 같았다. 운동하는 모습을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웬만한 건 다 평타 이상인듯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물 속에서 놀다 보니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래저래 많이 움직이긴 했는데 먹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조식을 그렇게 먹어놓고 먹은 게 없다고, 양심도 없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서도... 하하하.
"오빠! 배고파요! 우리 밥 먹어요!"
물고기들과 인사하기에 여념이 없는 과장님께 들리도록 크게 소리를 냈다. 물에 있던 과장님이 빼꼼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스노클을 쓰고 물 밖으로 나온 모습이 귀엽고도 웃겨서 웃음이 터졌다. 과장님은 알았어. 나가자. 하고 앞장섰고, 나는 걸어가는 척하면서 다리를 움직여 헤엄을 쳤다.
깊은 물 무서워하는 척은 오늘까지만 하고, 내일 워터파크에 가서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놀아야겠다. 내숭은 어려운 일이라는 걸 새삼 이렇게 느낀다.
예쁜 척과 연약한 척도 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된다. 나 같은 성격에는... 어려워. 어려워. 안 돼.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
물 밖으로 나와서 해변에 위치한 자그마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의자에 구명조끼와 스노클을 걸쳐두고, 자리에서 콩콩 뛰며 물을 털었다.
입에 미소를 걸친 채 나를 바라보는 과장님을 향해 나도 웃었다. 물 떨어지라고요.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과장님이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봤다. 수제버거로 나오는 햄버거가 맛있어 보여서 하나를 콕 집었다. 과장님은 음료는? 하고 물어왔다.
나는 음.... 맥주? 하면서 눈을 크게 떴고, 과장님은 한 잔만 해. 하셨다. 나는 그럼요- 하며 넉살 좋게 말했다.
"와, 잔 예쁘다-!"
햄버거보다 맥주가 먼저 나왔다. 생맥주로 시켰는데 길쭉한 잔이 예뻤다. 감탄하며 빤히 바라보고 있자, 과장님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왜요? 하는 눈빛으로 과장님을 봤더니, 예뻐서. 란다. 쑥스러워서 얼굴을 붉혔더니 하하, 하고 소리내어 웃으신다. 그쪽도 잘생겼네요, 뭐.
물에 들어가느라 틀어올린 머리카락을 풀었다. 찰랑, 하면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 닿았다. 살살 물기를 털며 햄버거를 기다렸다.
몇 시쯤 되었으려나. 햇볕이 워낙 강하니 아침이고 오후고 계속 해가 방긋방긋 떠있다. 내리쬐는 햇살과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기분 좋게 웃었다.
"짠-"
"맛있게 먹어요."
"네- 오빠도."
잔과 잔이 부딪혔다. 맥주를 한 번 들이키니 캬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와서 눈을 꼬옥 감았다 떴다. 시원하고 맛있었다.
두어 번 더 맥주를 들이켰을 때쯤 시킨 음식이 나왔다. 과장님은 내가 시킨 햄버거에서 치즈와 같은 토핑이 추가된 메뉴를 고르셨다.
왠지 내가 시킨 것보다 맛있어 보여 와아... 하면서 낮게 탄성을 냈더니, 먹어볼래? 하면서 잘라주신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이런 느낌인가.
점심이라기에는 늦고, 저녁이라기에는 이른 시간. 열두시에 점심 먹고, 여섯시에 퇴근하면 저녁 먹고 하는 느낌이 아니라 진짜 휴가를 오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규칙한 식사가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함께하고 있는 사람이 좋아서 더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 오빠 왜 볼 빨갛지?"
"나? 빨개? 근데 너도 빨개."
"저도요? 진짜?"
한참 햄버거와 맥주를 번갈아서 먹고 마시다가, 과장님의 얼굴을 올려다 보니 볼이 발그스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빨개질 만큼 많이 마시지도 않았지만 원래 빨개지는 스타일도 아니었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빨갛다는 소리를 듣고 스노클에 얼굴을 비춰보니 볼이 불타고 있었다.
왜지? 하면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날씨가 더운 데다 빈속에 맥주부터 부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다.
결국에는 둘 다 불타는 고구마가 되어 서로를 보면서 한참을 웃었다. 태양 아래 얼굴이 익은 것도 있겠지만 어쨌든, 발갛게 익은 모습이 귀엽고도 우스워서.
맥주잔도, 햄버거 접시도 깨끗이 비운 후에는 레스토랑 앞에 자리한 비치베드에 누워 부른 배를 두드리며 쉬었다. 쏴아, 쏴아, 치는 파도와 스스스, 하며 부는 바람을 느꼈다.
배 부르고 등 따수우니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과장님과 조곤조곤 수다를 떨다가 깜빡 졸아버렸다. 얼마나 졸았는지 모르겠지만 눈을 뜨니 모로 누워 내 얼굴을 감상하는 과장님을 볼 수 있었다.
"나 지금 애 키우는 것 같아."
"응?"
"깨우고 먹이고, 놀다가 먹이고, 다시 재우고."
"...그렇네... 그래서 애 키우는 소감이 어떠세요?"
"얼른 키워서 데리고 살아야겠다, 뭐 그런거?"
그러면서 무장해제 웃음을 지어 보이는데, 쿵, 하고 심장에 무리가 온 것도 온 거지만, 저는 다 컸습니다!!! 하는 씩씩한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까봐 걱정됐다.
혹시라도 그럴까봐 손을 들어 입을 막고, 남사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니 소리를 내어 웃는 과장님이다.
과장님은 이제 시내로 돌아갈까? 저녁에는 시내에서 놀자. 하셨고 나는 이제 슬슬 가야 덜 피곤하게 시내에서 놀 수 있겠다는 생각에 네! 하고 일어섰다.
그렇게 스노클링 장비는 다시 반납. 무서운 척하며 과장님 옆에 꼭 붙어있던 마나가하 섬 바다도 안녕. 발이 쑥쑥 빠지는 모래 위에서 나 잡아봐라- 했던 해변과도 안녕을 고했다.
-
시내는 생각보다 소소했다. 자그마한 쇼핑몰이 몇 개 있었고, 크고 널찍한 빌딩은 거의 없었다.
여기저기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자취를 감춰서 땅거미가 졌다. 해가 사라지니 낮보다는 확실히 좀 시원해졌다.
과장님은 티셔츠를 사려는 모양인지, 쇼핑몰에 가서도 티셔츠를 주로 보길래 한두 벌 정도 사가려는가 보다 하고 가만히 지켜봤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게 없는지 첫 번째 쇼핑몰에서도, 두 번째 쇼핑몰에서도 구입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두 번째 쇼핑몰에서 나와 조금 더 걸으니 큼지막한 옷가게가 하나 보였다.
과장님은 저기 가보자. 하면서 그 가게를 가리켰고, 나는 과장님의 뒤를 따라갔다.
앞선 두 개의 쇼핑몰보다 확실히 옷의 종류도 많았고, 퀄리티도 좋았다. 과장님은 이리저리 다니며 티셔츠를 보았고, 나는 가만가만 과장님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보더니 마음에 들었는지 한 벌을 들어보인다. 나는 가까이 가서 오빠가 입으려고요? 하고 물었다. 대답이 곧장 떨어지지 않아 과장님의 얼굴을 살폈다.
"...우리 커플티."
쇼핑을 힘들어하는 성격이라 세 번째까지 오니 내심 힘든 마음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고르려고 했던 게 우리 커플티였다니. 듣자마자 힘든 게 싹 녹아버렸다.
커플티 찾으려고 그렇게 꼼꼼하고 깐깐하게 본 거였어? 하는 생각에 과장님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과장님은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날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뻐요. 좋아요. 과장님의 얼굴에는 금방 화색이 돌았다. 애 키우는 기분은 나도 느끼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과장님은 점원을 불러 사이즈를 이야기했다. 점원은 금방 나와 과장님의 사이즈에 맞는 재고를 가져다 주었고, 그걸 받아 든 과장님은 가벼운 걸음으로 계산대로 향했다.
"입고 가자, 이거."
계산을 마친 옷을 내게 건네주는 과장님이다. 나는 이 상황이 웃기기도 하고, 그런 과장님이 재밌기도 해서 군말 않고 옷 입어보는 곳으로 향했다.
과장님이 고심 끝에 고른 티셔츠는 살짝 톤다운된 분홍색으로, 큼지막한 프린트가 있는 옷이었다. 커플티라고 말하지 않으면 커플티인지 모를 만한 힙한 느낌의 옷.
톤이 다운되어서 그런지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고루 잘 어울리는 옷이라 과장님의 안목을 칭찬하게 되었다. 입어보니 내 마음에도 들었다.
입고 나온 과장님 또한 사랑스러웠다. 하루종일 얼굴만 보면 웃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또 싫지 않았다.
점원은 나란히 커플티를 입은 우리를 보며 웃었고, 우리는 그렇게 손을 잡고 옷가게에서 걸어나왔다.
호텔로 향하는 발걸음. 나는 그냥 가기는 조금 심심해서 과장님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소원 들어주기 할까요?"
"그래."
가위, 바위, 보! 하면서 야심차게 주먹을 냈는데, 과장님이 가위를 내서 내가 이겼다. 야호! 하면서 방방 뛰며 좋아했더니 과장님이 뭐 하려구. 하면서 웃는다.
나는 음.... 글쎄요... 하면서 고민하다가, 여기서 저-기까지 업어주기? 라고 말하면서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을 가리켰다. 한 200m 정도 될 법한 거리였다.
과장님은 알았어. 하고 내 앞에 등을 내보였고, 나는 과장님의 목에 팔을 걸친 채로 아까 물 속에서처럼 꼬옥 매달렸다. 분명히 더운 날씨인데 불쾌하지가 않았다.
"무거워요?"
"아니. 솜털같아."
"거짓말...."
"맞아."
거짓말이 맞다며 웃는다. 나도 웃겨서 과장님의 귓가에서 웃음소리를 냈다. 과장님은 간지러운듯 몸을 살짝 떨었다.
가만 보면 간지러움을 많이 타는 것 같다. 나는 과장님을 좀 놀리고 싶어졌다. 쪽, 하고 고개를 내밀어 과장님의 볼에 입을 맞췄다.
"....놀래라."
"놀랬어요?"
"응..."
놀랬다고 답하는 게 귀여워서 또 쪼오옥, 이번에는 좀 더 길게 입을 맞췄다. 움-마, 하고 입맞추는 소리를 냈다.
볼이 뜨끈해진 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나를 업고 있으니 어찌 할 수는 없어 머리를 도르륵, 도르륵 굴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 뒷통수가 귀여워서 또 뒷통수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랬더니 너. 하는 낮은 목소리가 따라온다.
"왜요?"
"...이거 감당할 수 있어?"
사뭇 진지하게 물어오는 통에 슬쩍 겁을 먹을 뻔했으나 그런다고 가만히 있을 성격은 못 돼서, 당연하죠. 하면서 이번엔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도발이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가리켰던 건물 앞에 다다랐고, 나는 약속대로 과장님의 등에서 내려야 할 때가 왔다.
너른 등에서 내리자마자 과장님은 얇은 눈매를 하고는 나를 바라봤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과장님을 올려다봤다.
과장님은 손을 들어 내 턱을 살짝 감싸더니,
"그럼 빨리 가자. 나 급해."
라고 말했다. 과장님의 손이 내 손목을 잡고 끌었고, 달리는 과장님의 뒤를 따라 나도 달렸다.
따뜻하게 물기를 머금은 사이판 시내의 공기가 볼을 스쳤다.
부끄럽지만 부끄럽지만은 않은, 우리는 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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