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 * *
흑, 흐흑..
흐느끼는 소리에 눈이 뜨였다. 또 시작인가. 움직이지 않는 몸을 뒤척여보려 애썼다. 어렴풋이 보이는 새카만 발. 아마도 나를 찾아온 그녀겠지. 눈앞에 흔들리던 발이 멈춰 섰다가 괴로운지 발버둥을 쳤다. 그녀의 다리사이로는 계속해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곧 식어버린 양수에 퉁퉁 부은 아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지도 몰랐다.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다. 그다음에 그 파리해진 얼굴을 내게 들이밀고 묻겠지. 왜 오지 않았냐고, 어째서 지켜주지 않았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계속해서 똑같은 질문을 되물으며 목을 옥죄는 그녀의 한을 고스란히 받아주는 것, 그것뿐이었다. 정말로 숨이 막혀서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쯤 목을 놓아주는 그녀는 악몽과 함께 찾아오길 1년. 그래서 회의감에 빠졌다가도 다시 그때의 일이 어제일 같이 생생해져, 광기에 휩싸여 동료의 사지를 잘라버리지. 마치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 같은...
있는 힘껏 목을 졸라오는 그녀가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ㅇ....
...ㅇ저...
...아ㅈ...
...ㅇㅈ씨...
...아저씨...
아저씨
벌떡, 소파에서 몸으로 일으킨 그가 식은땀을 닦았다. 기어코 열이 오른 머리를 흔든다. 아저씨? 들려오는 소리를 쫓아가자 유권이 있었다. 다소 지쳐 보이는 그가 마른입술을 적시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리사...리사에게 밥줄시간이에요...
그 이름에 잠시 가만히 있던 민혁이 묵묵히 '리사'라고 적힌 밥그릇을 들고 사료를 퍼 담았다. 굳게 닫혀있던 침실 문을 열자 리사가 뛰쳐나오려다 고정된 목줄에 당겨져 켁켁 마른기침을했다.
너도 목마르지?
거실로 걸어 나온 그가 정수기에 컵을 올려 물을 받았다. 아무래도 잠을 편히 자지 못한 모양이군. 하긴, 의자가 편하지만은 않지. 힘겹게 눈을 올려 뜨는 유권의 입에 물잔을 가져다 대자 천천히 물을 마시기 시작한다. 한잔을 금세 마셔버린 그가 거실에 이어진 주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설마 아침을 준비하는 건가? 설마...하는 생각을 더하기도 전에 달그락 거리는 식기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미간을 찌푸린 유권이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적잖이 당황해 버린다.
...왜...
...
... 왜 이러는 거에요...?
민혁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김치볶음밥을 한 숟가락 떠서 코앞에 가져다 댔을 때, 정말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유권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는 말없이 숟가락을 들이밀 뿐이었다. 유권은 체념한 듯 한입, 두입 받아먹기 시작한다. 포만감이 어느 정도 느껴질 때 쯤 등을 돌리는 그가 느껴졌다. 목소리는 나이가 많아도 30대중반, 하지만 도통 직업을 가늠 할 수가 없는...
유권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잠들어 오후에서야 눈을 뜬 민혁이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짚었다. 좋지 않아...소파 앞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유권을 보다가 구급상자를 찾아 열었다. 덧나기 시작한 상처를 보곤 한숨을 쉰 그가 붕대를 풀고 한 번 더 소독했다. 이런 걸로 안된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군용 나이프에 깊게 베인 어깨가 쓰라렸다. 염증약이라도... 다시 한 번 상자를 뒤져봐도 기껏해야 감기약, 해열제, 소화제...이런것들. 이젠 제 기능을 완전히 수행하지 못하는 오른쪽어깨를 만지작거렸다.
...다쳤어요?
나른한 미성에 고개를 돌렸다.
소독약냄새가 나네요...
후...한숨을 쉰 민혁이 이마를 짚고는 몰라도 돼, 하고 대답한다.
다쳤는데...열이 나면...감염된거 아닌가요?
...열이 있는건 어떻게 알았지?
가까이 왔을 때...뜨거워서...
소파에 기대어있던 민혁이 뭐가 웃긴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른거 알아낸건 없어? 하는말에 그가 고개를 젓는다.
☎RRRRRR
갑작스레 울리는 전화소리에 민혁이 풀어졌던 표정을 굳인 채 총을 꺼내들고 걸어놓은 유권의 겉옷에서 휴대폰을 찾았다. 위협적인 쇳소리에 그가 몸을 움츠렸다. 철컥, 뒤통수에 바짝붙여진 총구의 차가운 느낌에 마른 입술을 축였다. 휴대폰을 쥐고 있던 그가 액정에 뜬 이름을 읽었다.
이태일?
형이에요...친한 형
평소처럼 해
잔뜩 곤두선 살벌한 목소리에 아랫입술을 깨문 유권이 그가 귓가에 대준 휴대폰에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누구세요.
나야, 동물병원은 잘 다녀왔어?
응. 택시타고...깁스2주정도만 하고 있으면 괜찮아 질거래.
다행이네. 아직 못갔으면 같이 가주려 했지. 살만한가봐. 밥은 잘 해먹고 있나?
요즘은 잘 챙겨먹어, 형은 좀 덜 바빠?
...아니, 논문 완전 다 갈아엎고 장난아냐. 잘 살고 있으면 됐다. 시간날 때 들를게.
응...나중에 봐.
허무하게 끊긴 전화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뒷머리에 바짝 붙어있던 총구가 떨어지는 오싹함에 몸서리를 쳤다.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뺨에 잠깐 스친 손이 확실히 뜨겁다는 것 빼고. 항생제는 처방받아야 할텐데...사놓은 염증약이 있었나? 생각하던 유권이 한숨을 쉬었다. 이사 오기 전에 필요없어 보이는 것들은 모두 처리하고 왔으니 있을리가. 별수 없이 소파에 눕는 그의 소리가 들린다. 나도 남 걱정할 때는 아니지. 리사와 붙어있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한 번씩 벽을 긁는 소리가 들리면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리사의 이상한행동에 좀 더 귀 기울여 대처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멍하니 생각해본다.
#
으...
앓는 소리에 유권이 눈을떴다. 몇시? 새벽?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는 그가 묶인 손을 꼼지락거렸다. 이젠 감각도 없어...
그는 하루 종일 뉴스를 보거나, 의자에 묶인채인 나와 말을 하거나, 이따금씩 리사와 내게 밥을 차려주곤 총과 쇳소리가 나는것들을 닦는게 일과였다. 대체 왜 여기 있는걸까. 나는 얼마나 더 이렇게 있어야 하는거야... 그것보다. 씻고 싶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 하마터면 탄식을 내뱉을 뻔했다. 저 상태라면 나는 다시 잡을 수 있어도 리사가 달리는 속도는 따라잡기 힘들겠지. 리사는 또 어떻게 풀어주지?
의자를 흔들어보던 유권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뭐가 어디있는지도 모르면서 뭘 해보겠다고...
그가 뒤척이는 소리를 듣는다. 모르긴 몰라도 많이 아픈가보네...또 악몽..? 곰곰히 생각하던 유권이 그를 부르려다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미안...미안해 리사...
옅은 신음소리에 섞여 나오는 이름은 분명히 '리사' 였다. 침실에 묶여있는 리사는 아닐테고, 사람이름인가? 여자? 한동안 그가 웅얼거리는 말을 듣고 있던 유권이 뒤척이는 그를 불렀다.
...저기요, 아저씨...
...아저씨...
어느새 멎은 앓는 소리. 예컨대 그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왜
형편없이 갈라지는 목소리, 저 정도로 아프면 ..그냥 있으면 안되는거 아냐..?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운이 없다. 분위기를 꿰려 눈치를 보던 유권이 말을 꺼낸다.
씻고 싶어요...
한숨, 기다려. 하는말에 얌전히 고개를 숙이자 슥슥, 테이프들이 잘리는 소리가 들렸다. 팔과 다리까지 장시간 고정되어 있던 터라 감각이고 뭐고 되찾기도 전에 주저앉아버린다. 저리다...뜻대로 가눠지지 않는 몸이 팔을 끌어올리는 그의 힘에 의해 일으켜졌다. 그의 생각을 가늠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냉정한듯하면서도 이렇게 허무하게 허용해주는 일이 잦다는 것. 이럴거면 대체 왜 묶은거야. 절뚝거리며 딸려온 곳은 욕실앞인 듯 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주위를 더듬어 세면대를 찾았다.
...샤워할건데...문은...
열어놓고해.
쭈뼛쭈뼛,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꼼지락대던 유권을 보곤 민혁이 한숨을 쉬었다.
...대신 뒤돌아 있을게...
아니..난 아저씨가 뒤돌아있는지 알 수가 없는걸...가만히 있던 그가 하는 수 없이 옷을 벗어나갔다. 샤워기를 튼 그가 몸을 뒤덮는 따뜻한 물에 몸이 노곤해짐을 느낀다. 하지만 울리지 않는 물소리에 열린 문이 느껴짐이 묘하게 수치심을 자극했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뒤돌아 있는게 맞겠지. 자꾸만 신경 쓰이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일부러 재빨리 샴푸칠을 하고 바디워시로 몸을 씻어 내린다.
자, 하는 목소리에 힉,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버렸다.
...네?
샤워가운, 여기 있다고.
아...감사합니다...
작은방에 개켜져 있었을 텐데. 언제 다녀 온거지? 고개를 갸우뚱한 유권이 샤워가운을 두르고 걸려있는 수건을 집어 머리를 턴다. 사박사박, 들리는 그의 걸음걸이가 유달리 느릿하게 거실로 이동했다. 가운을 추스르고 욕실을 나오던 유권이 반사적으로 눈을 굴렸다.
여기서 침실까지 3미터정도, 그리고 현관까지 달려가 문을 여는데까지 4초정도면 충분할까? 그는 열이 심하고, 반응도 느려졌을지도. 리사만이라도...훈련이 되어있으니까 누구라도 데리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겠지. 아니, 꼭 그래야했다.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을 수는 있는 건가...모든 건 달리는 방향을 잘 잡아 벽에 부딪치지 않고 완벽히 이뤄져야했다. 이 이상 시간을 끌면 그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라. 아직 이쪽으로 오는 소리가 안 들렸지? 일단 해보자. 지금이 아니면...
제대로 계산하고 침실로 발을 옮긴 유권이 문고리를 소리없이 잡고 심호흡을 했다.
악...!
쿵, 하고 문에 뺨이 쓸린다. 손목이 뒤로 꺾어져 숨이 절로 가빠졌다. 대체 언제 온거야? 한계치까지 비틀어지는 손목에 한쪽 손으로 벽을 긁었다.
잘못...잘못했어요!
잔뜩 화가난듯한 그가 침실 문을 탁하고 여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그대로 침대에 처박혀버린 채 똑바로 돌려져 손목을 아프게 잡힌다. 옆에선 묶여있는 리사가 맹렬히 짖고 있었다.
너...허튼짓하면 죽여 버린다고 했지.
얼굴에 닿아오는 숨이 여전히 뜨거웠다. 아,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거지...정말로 머리가 뚫린 채 죽어버리는 걸까...?두 눈을 꼭 감은 채 한동안 손끝을 파들파들 떨었던 것 같다. 당장에 목에 칼이 들어오든, 머리에 총구가 겨눠지든 할 줄 알았던 유권이 아무소리도,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아 눈을 떴다.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던 손에 힘이 풀린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민혁이 그대로 쓰러져버린다. 그를 밀치고 일어난 유권이 묶여있는 리사의 매듭을 풀기위해 손을 뻗었다. 단단히 매듭지어져있는 고리를 한참 해매다 풀곤 벽을 짚었다. 하네스가 아니라 목줄의 길이를 가늠하지 못한 유권이 어깨를 부딪치며 현관으로 향했다. 이젠 정말 도어락을 누르고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되는데...
탈출을 앞둔 유권이 차마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뒤를 돌아다봤다. 그 자리에 멈춰서있는 유권을 보곤 리사가 현관을 앞발로 박박 긁는다.
뺨을 핥아 내리는 축축한 느낌에 끙, 하는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젠장...언제 정신을 잃었지.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이런 식으로 노출되버려 허무하게 잡힐수는 없어. 몸을 일으키려던 민혁이 옷에 쓸린 상처가 아려와 고통을 호소했다. 잠옷을 벗고 상처를 확인한다. 붕대를 감아 놓은곳보다 넓게 붉어져 있는 상처가 보였다.
잠깐만..잠옷? 침대위에 널브러진 옷가지들과 방금 벗어놓은 잠옷을 들어올리자 옆에서 리트리버가 왈! 하고 짖었다. 상황파악이 되지않아 잠시 멍해져있던 그가 어이가 없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 미친거 아냐?
마침 뭔가를 들고 들어오는 유권을 올려다본다. 일어났어요? 죽그릇을 들고 천천히 다가온 그가 조심스럽게 침대위에 트레이를 올렸다. 더 가관인건 숟가락 옆에 놓인 캡슐약 두개. 균일하지 않게 잘린 야채들. 침대에 걸터앉은 그의 손가락에 감겨진 밴드가 보였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게지.
너 바보야?
체념한듯한 그의 목소리에 유권이 잘게 고개를 저었다. 무릎에 고개를 올린 리사를 쓰다듬던 유권이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서 접힌 사진을 꺼낸다.
이거 사진맞죠...리사...라는분인가..
서투른 야채죽을 휘휘 저어보던 민혁의 손이 멈췄다.
잠결에 말하는걸 들었어요. 제 리트리버는 아닐테고...그래서 저희집에 온건가요? 그녀를 찾으려고...?
...요즘 인질들은 오지랖도 넓지...오늘한짓을 후회하지 않길바래...난 여기서 이동할생각은 없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유권을 그가 재미있다는 듯 바라본다.
도어오픈버튼을 누르고 십 센치 가량 문을 열었던 유권이 다시 천천히 문을 닫고 침실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었다. 외출준비를 하는듯한 그를 올려다보던 리사가 하네스를 물고와 앉는다. 겉옷까지 입고 가방을 물어오라고 시킨 유권이 케인과 지갑이 잘 들어있는지 확인하고 휴대폰을 찾았다. 대체 어디둔거지...책상 위 여기저기를 손으로 쓸어보던 그가 휴대폰이 종료되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배터리가 다 됬겠구나... 하는 수없이 하네스만 채우곤 손잡이를 잡는다. 약국까지, 잘 다녀올 수 있겠지?
사실은 다녀오고 나서는 그가 깨어있거나 사라져버렸으면 어쩌나 생각했다. 하지만 잠잠한 침실, 침대 옆에 선 유권이 고른 숨소리를 듣곤 안도했다. 조심스레 뺨에 손을 대본 그가 식은땀을 많이 흘리는 그의 겉옷지퍼를 찾아 몸을 더듬었다. 다 못 갈아입힐 줄 알았는데 낑낑대며 어찌저찌 옷까지 갈아입힌 후에는 정말 내가 미친게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도 했다. 자켓을 정리하던 중 툭하고 뭔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못찾는거아냐? 바닥을 더듬어보던 그가 반으로 접힌 종이와 목걸이들이 엉켜있는 뭉치를 주웠다. 각인이 새겨진 목걸이가 여러개의 군번줄이라는걸 알아내기가 어렵진 않았다. 빳빳한 종이의 감촉, ...리사..하고 앓는소리를 내던 그의 목소리가 겹쳐들렸다. 사진? 사진인가? 그녀가 누구길래...
첫 만남의 화약 냄새, 총을 가지고 있는 이유며 손위에 있는 군번줄까지, 모든 정보가 조금씩이나마 퍼즐이 맞춰지듯 착실하게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군인이었구나. 옷가지와 물건들, 총과 나이프까지. 살벌한 물건들을 책상위에 대충 올려놓곤 냉장고를 열었다.
아직 요리는 자신 없는데. 리사의 사료와 물을 먼저 챙겨준 유권이 야채들을 만져보고 서투르게 죽을 끓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약을먹고 한동안 침대에 누워있던 민혁이 거실로 걸어 나왔다. 소파에 앉아 리사를 씻기기 시작한 유권을 빤히 쳐다본다. 열어놓은 욕실 문을 보며 총알을 확인한다. 유권의 눈에서 아무것도 읽을수가 없어서, 조금 답답했다. 습관적인 미소, 저런 부류의 애들이 꼭 한 번씩 이해가 안가는 행동을 하긴 하지. 꺼진 핸드폰을 대신 충전기에 꽂은 민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구급상자를 꺼냈다. 붕대를 풀고 열은 많이 내렸지만 진물이 나기 시작한 어깨를 거즈로 눌러 닦았다. 살이 갈리는 끔찍한 느낌이었다. 이를 악물고 염증을 모두 닦아낸 민혁이 다시 붕대를 감자 리사를 다 씻긴 유권이 드라이기를 들고 거실로 걸어 나와 콘센트를 찾았다. 가만히 그를 보고 있던 민혁이 콘센트 구멍을 찾으려 헛손질을 하고 있는 그에게서 코드를 뺏어 꽂는다.
감사합니다...
말하는 유권의 목소리를 듣다가 다시금 뉴스를 켰다. 마침 티비엔 그가 저질러놓은 참혹한 잔상의 조각들이 조립되지 않은 채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긴, 그렇게 많은 인원이 움직이는데 비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뉴스소리를 엿듣고 있던 유권이 계속해서 그가 같은 내용의 뉴스를 보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3일만의 쾌거. 마치 어느 정도까지 일이 진행되었는지 면밀히 관찰하는 것처럼. 주한미군을 포함한 미군이 5명이 각각 다른 한국의 호텔에서 토막 난 채로 발견되었다는...며칠전 본 뉴스가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아직 일주일도 안됬지만, 그가 이 집에 오고난후로는 수사를 진행중이라는 말만할 뿐, 피해자가 더 나오고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는 연쇄살인범일 가능성이 80프로정도? 하지만 어째서...? 리사의 털을 말려주던 손이 생각에 너무 집중해버려 멈췄다. 물어보면 화내려나..
뭐해? 털 덜 말랐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다시 털을 말려주기 시작한다.
녀석들을 잡을 때 쓰려고 암거래로 구입해놓았던 수갑을 찾아 조였다. 열쇠는 아까 뉴스를 보며 능청스럽게 소파에 쑤셔 박아 놓았다. 확실히 그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내게 매우 유용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누워
자신의 한쪽손목에 달린 수갑을 만져보던 유권이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이어져있는 수갑을 따라 그도 등을 돌리고 눕는다.
사람일은 모르는 거지. 나도 인생을 함께해왔다고 굳게 믿었던 전우들이 그럴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등 뒤에 누운 유권이 그들이 알아서 날 찾기 전에 신고를 하고 싶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빠른 대처를 못하는 수면시간동안 맘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일이지.
의자보단 이게 훨씬 낫네요...노곤한 목소리로 말하던 유권이 금세 고른 숨소리를 내뱉었다.
#3
삼일정도 더 지났을까. 빨래를 널고 있던 유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젊고, 혼자 제대로 할 수 있는일이 많지 않은걸로 보아 후천성 시각장애일 가능성이 크다. 개는 끔찍이 아끼고. 그 뒤로도 한번쯤 친하다는 형의 전화도 왔고, 정기적으로 방문한다는 복지사의 요청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알아서 거절하고 있는 그의 속내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한건지, 아니면 내 생각을 뛰어넘는 고도의 작전인지. 후자일 가능성은 지극히 낮은 것 같았지만 완전히 가능성이 제로인 것도 아니었다. 물을 들이킨 민혁이 오늘날짜가 적힌 달력에 X자를 그었다. 예상보다 수사의 진척이 너무 없다. 벌써 이곳으로 온지 일주일이 다되어가고 있었다. 이럴리가 없는데...모든곳에 수사의 올바른 방향을 잡아주는 최소한의 증거는 남겨놓았고, 목을 매달아 첫 타자를 죽인지는 언 30일이 다 되어가고있다. 이건 말이 안된다. 손톱을 까드득, 씹은 그가 다시 처음부터 일을 정리했다.
그녀의 장례를 치르고 바로 은퇴를 했고, 1년 동안 치밀하게 작전을 계획했다. 이유도 모르고 중지된 그녀의 수사, 총과 자료를 빼돌리고 그들의 동선과 스케줄을 모두 알아내는데에만 꽤 많은 돈과 시간이 들었다. 돈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7개월 후 빛을 볼 수 있었던 우리의 아이, 좀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하기위해 차곡차곡 모아뒀던 돈을 쓸 곳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죗값을 치루지 않은 놈들을 그녀의 첫 기일에 맞춰 한명씩, 20일에 거쳐서 죽일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칼을 갈았다. 이동루트, 장소, 걸리는 시간까지 수 십번을 재설계하며 예행연습도 했다. 그 1년 동안 마음속으로는 정말인지 천번만번은 그들의 시체까지 찢어발기고도 남았지만 목표는 그런게 아니니까. 좀 더 계획적이고, 체계적이며, 경고의 효율성이 가장 높은 연쇄살인. 마지막타자는 모든일을 묻어버리려 했던 녀석을 산채로 썰어버리는 것. 계획대로라면 마지막 살인을 끝내고 3일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일전, 아니면 그보다 더 빨리 잡혔어야했다. 계속해서 그들을 처리하는 과정을 낱낱이 군부대에 전송했으니까.
살던집 현관 앞에 달려있던 CCTV를 혼자 수백번 돌려보며 눈물을 흘리던때가 생각난다. 이제일이 다 끝났는데, 어째서 마지막에 계획이 틀어져 버리는거지? 미간을 지푸린 그가 달력을 찢어버렸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 제 머리에 쏘려 남겨놨던 총알이 썩어나갈 지경이었다.
뭐해요?
어느새 빨래를 다 널고 뒤에 서있는 그를 돌아다봤다.
글쎄, 내가 무슨 생각했는지 알게되면 어제먹은 저녁까지 토해낼걸.
입술을 비죽인 유권이 웃음을 흘린다.
웃어?
재미있네요.
재미있으라고 한말아냐.
풋, 웃던유권이 잠깐 뭔가를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왜 토하죠?
...몰라도 돼.
한결같은 대답에 유권이 입술을 비죽거린다.
얌전히 앉아있던 리사를 쓰다듬던 그가 민혁이 누워있던 것 처럼 소파에 몸을 뉘인 채 눈을 감는다. 리사가 뛰어올라 그와 나란히 눕는다. 감긴 유권의 눈을 빤히 내려다보던 민혁이 그가 했던 것처럼 리사를 쓰다듬었다.
굳이 친해져서 떠나기 힘든 여지를 남기면 좋지 않겠지
뒤로 돌아 침실로 들어가는 민혁의 발자국 소리를 들은 유권이 감겨있던 눈꺼풀을 올린다.
챙그랑-.
설거지를 하던 유권이 접시를 깨트리고 말았다. 사방으로 흩어졌을 파편을 더듬어 주우려하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 가만히 있어.
차곡차곡 모아지는 조각들의 소리가 들린다. 괜히 그에게 미안해져 원랜 잘했는데...손이 미끄러져서...시키지도 않은 변명을 하는 유권을 본 민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피나잖아.
따끔한 발등을 뒤로숨긴 그가 괜찮은데...안아픈데...중얼거리자 딱밤이 날아왔다. 바보같은 소리하지 말고 소파에 앉아. 하는 완벽한 명령조에 얼얼한 이마를 짚고 순순히 발길을 옮겼다.
자,잠깐만요!
소파에 앉은 그의 발을 타월이 올려진 무릎에 올리자 그가 팔을 허우적거렸다. 한쪽눈썹을 올린 민혁이 개의치 않고 소독약을 뿌린다. 쎄하게 쓰려오는 고통에 으으..하고 몸을 부르르 떤 유권이 혹 조각이 박히지 않았나 살펴보려고 발을 잡는 그의 행동에 깜짝 놀라 숨을 들이킨다.
힉! 안돼요!
왜?
발...발인데...발인데 그렇게 만지면...
만지면?
...더러울..수도...
콧방귀를 낀 채 상처를 살피는 민혁 때문에 뜨끈뜨끈해지는 얼굴을 가린 유권이 눈을 꼭 감았다. 가..간지럽다...지금분명 얼굴이 빨개졌을거야...
반창고를 붙여준 민혁이 구급상자를 정리했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 옆으로 빨간 귀가 보였다. 그냥 다 예민한건가? 아니면 부끄럼이 많은건가? 휙 일어나 버리는 민혁 때문에 발이 툭 떨어졌다. 아무렇지 않게 구급상자를 올리고 이중으로 된 베란다 창에 가까이 간 그가 커튼사이로 야경을 바라다본다. 유권은 말없이 소파에 누워 발을 꼼지락 거릴 뿐이었다.
![[블락비/범권] 선이없는 경계 02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4/3/5/435fa3d18759cf169f8b5632a3fb82a9.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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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혁, 소름끼칠정도로 치밀한 새끼. 교묘하게 끼워진 증거들을 낱낱이 뒤지자 생각보다 큰 퍼즐이 두각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산채로 자로잰듯이 일정하고 깔끔하게 잘린시체부터 시작해서 복부장기만 싹 긁어낸 시체, 황산을희석시킨 욕조안에서 완전히 손상된시체, 손발톱과 치아를 모두 뽑고 후두덮개까지 수십개의 콘돔을 밀어넣어 질식시킨 시체, 아킬레스건을 포함한 네댓개의 인대를 자르고 도망가지 못하게한뒤 스스로 목을매어 죽도록만든 시체까지. 사건현장에 출동한 경찰의 평균두세명이 토악질을 피하지못했다고 한다. 단순 복수심이라기보다, 심하게 또라이스럽잖아? 하지만 원래 싸이코패스는 이렇게 예상하기 쉬울리가 없지. 이동루트며 남겨놓은 최소한의 증거까지, 지독히도 치밀하지만 목적이 너무 정상적이야.
널브러진 자료와 증거들을 차곡차곡 쌓은 그가 잔에담겨져있던 캐캐묵은 위스키를 쏟아붓고는 성냥불을 켰다. 아마 수사를 하게되면 중단되었던 1년전 수사도 함께 진행이되, 모든사람이 사건을 전말을 낱낱이 알게되면 자신도 목숨을 끊을생각이겠지. 단순해라. 그런데 꼭 이런놈을보면 좀 골려주고 싶단말야. 툭하고 성냥불을 떨어트린 그가 활활타오르는 자료들을 뒤로하고 건들건들 지하를 벗어났다. 질리도록 살다가 벌여놓은일을 한번 후회해보시지.
무섭도록 타오르는 불길속엔 profiler. 우 지호라고 적힌 그의 명함도 함께 타닥타닥 타고있었다
이번엔 좀 늦었군요 ㅜㅜ 또르르 ! 분량이 많이지지다보니 역시 업뎃이 느려지는건 어쩔수가 없나봅니다 ㅠㅠ 암호닉주신 새우깡님, 해바라기님, 바게트님, 우동닝 을 비롯한 모든독자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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