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이번 편은 다니엘 시점입니다. 2년 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동기들은 취업난에 시달려 허덕이는 가운데 난 비교적 쉽게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동기들 중 친하지 않은 몇 명이 낙하산이라며 날 씹어댔지만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부모 잘 만난 것도 능력이잖아. 라는 철없는 생각과 함께. 대학과 마찬가지로 회사도 하나의 작은 사회였다. 학점이 실적으로 바뀌고, 교수님이 없는 대신 짜증나는 선배들이 더 많아졌다는 게 작은 차이라면 차이였다. 말단 사원인 나에게 선배들은 이것저것 잘도 시켜댔다. 정말 단순한 작업을 비롯해 개인적인 일까지도. 처음엔 아버지의 체면 때문에 그러려니 참다가도 점점 빈도가 늘어나니 나도 모르게 욱하는 성질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입사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난 상사와 작은 다툼을 벌이게 됐다. “저번이 분명 마지막이라고 하셨잖아요.” “야, 상사가 까라면 까야지 뭔 말이 많아?” “전 일 하려고 취직했지 상사 심부름 하려고 취직한 건 아닌데요.” “뭐?! 야, 이 새끼가 미쳤나!"
그 때 난 처음으로 남에게 맞았다. 학창시절에 선생님께도, 부모님께도 단 한 번 맞지 않았던 나를 그 날 부장님이 처음으로 때리셨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욱해서 주먹을 꽉 쥐었지만, 뒤에서 누군가의 작은 손이 내 주먹을 부드럽게 움켜쥐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안돼요, 다니엘씨. 참아야 돼요.” 그게 김예림과 나의 첫 만남이었다. - 그 일이 있고 난 후 김예림은 나에게 더 친한 척을 해 왔다. 다니엘씨 라고 부르던 호칭은 어느새 오빠로 바뀌었고, 점심 식사는 거의 항상 같이 하게 됐다. 나도 사람인지라 눈치는 있었기에 김예림이 나에게 더 친한 척을 하기 시작했을 때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나에게 더 다가왔다. 똑같이 오빠라 부르면서. “오빠, 오늘은 뭐 먹으러 갈래요?” “아, 나 오늘은 와이프랑 같이 점심 먹기로 했어. 미안.” “아… 알았어요. 그럼 이따 봐요!” 나에게 다가오는 김예림을 뒤로 하고 여주를 만나기로 한 식당으로 오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표정이 너무나 안 좋아보였다. 나는 괜히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맞은편에 앉아 슬며시 입을 열었다. “카페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왜- 무슨 일인데?” “…건물주가 당장 다음 달부터 월세 올려 달래. 나쁜 놈, 왜 갑자기 난리야? 안 그래도 요새 매출 좀 떨어졌는데 큰일이야.. 나 진짜 부모님께 손 안 벌리려고 했는데 까딱 잘못하다가는 손 벌려야 할 판이야… 나 어떡해, 자기야?” “어떡하긴, 내가 있잖아.” “또 아버님께 돈 받으려고? 됐어- 언제까지 부모님께 손 벌리려고 그래? 너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제대로 자리 잡기까지 시간 걸리는 거 내가 모를까봐? 일단 내가 어떻게든 해 봐야지, 뭐….” “…….”
그 때 처음으로 내 스스로가 철이 들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네 말을 듣는 순간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세게 때리고 간 듯 멍해졌으니까. 너에게 난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저 철없는 남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걸까. 그 때 난 결심했다. 진짜 열심히 일해서 너한테 내 능력을 인정받고, 당당히 도움을 줄 수 있는 멋진 남편이 되겠다고. 그래서 난 그 날 이후로 지독하게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굳이 안 해도 될 일도 맡아서 하고, 일주일의 절반 이상의 야근은 기본이었다. 늦은 밤에 퇴근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혹시나 곤히 잠든 네가 깰까봐 안절부절 하며 아무 소리 없이 잠자리에 드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고, 너와 나는 한 집에 살면서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부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 “오빠, 괜찮아요?” “…어, 괜찮아.” “에이, 아닌 것 같은데? 오늘 밤에 술이라도 한 잔 하러 갈래요? 이럴 땐 술 마시고 확 풀어야죠!” “…….” 그 때 내가 고개를 끄덕인 게 화근이었다. 그 날은 내가 작은 일 하나를 실수해서 삐끗했던 때였다. 그 땐 그게 왜 그렇게도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부장님께 까이고 자리로 돌아와 한숨을 내쉬며 내 스스로에 대한 화를 가라앉히고 있으니 김예림이 나에게 다가와 또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난 덜컥 그 손을 잡아버렸다. 바보같이. 결국 그날 우린 술을 진탕 마셔댔다. 아니, 정확히는 나 혼자. 김예림은 그저 옆에서 간간히 추임새만 넣을 뿐이었다. 내 평소 주량을 훨씬 넘어섰기에 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했고, 그 때를 틈타 김예림은 나와 더 가까워지려고 했다. 그걸 알면서도 난 제대로 철벽을 치지 못했다. 내 스트레스를 받아줄 사람은 김예림 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여주는 내 회사생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그녀도 나름대로 일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할 텐데 굳이 내가 거기에 짐을 더 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사정을 잘 아는 김예림에게 내 마음을 다 털어놓았고,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내 한탄을 잘 들어주며 위로해줬다. 그 날 이후로 나와 김예림은 더 가까워졌고, 내가 꽁꽁 닫고 있던 마음의 마지막 문도 조금씩 열렸다. 그러다 내 스트레스를 받아줄 여자는 김예림 뿐이라는 착각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살게 되었다. 퇴근하면 여주는 항상 먼저 잠들어 있었고, 난 내 사정을 속 시원히 털어놓을 곳이 마땅히 없었다. 유일한 분출구가 김예림이 되었고. 그래서 난 점점 집에 있는 시간보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여주와 있는 시간보다 김예림과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고, 여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 * * * * * 며칠 간 일이 한가해져 집에 비교적 일찍 들어가니 여주가 이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엔 그냥 그녀도 나처럼 일이 바쁜가보다 했다. 근데 어느 날은 나에게 연락 한 통 없이 외박을 하더라. 그 때 난 본능적으로 느꼈다. 여주에게도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걸. 처음엔 왠지 모르게 괘씸했다. 내가 한 짓은 생각도 못하고 말이다. 그래서 무작정 출근하려는 여주를 붙잡고 화를 냈다. 근데 그 때 그녀의 입에서 마지막으로 들려오는 말에 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래, 잘 아네. 그럼 이 참에 우리 갈라서자. 진작 얘기할 걸 그랬네, 이렇게 쉬울 줄 알았으면. 등신같이 왜 혼자 참았는지 몰라.” 난 그렇게 너무나도 허무하게 난 여주를 놓쳤다. 처음엔 괘씸해서, 그러다 괜한 오기가 생겨서, 마지막엔 붙잡을 면목이 없어서. 우리가 함께 살던 집에서 그녀가 떠난 후, 난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여주가 떠나고 나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김예림을 완전히 끊어냈고, 그녀는 날 계속 마주칠 용기가 없다는 핑계를 대며 회사를 그만뒀다. 퇴근 후 집에 가면 여주의 흔적 따위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처량한 내 신세를 달래주듯 쎄한 공기와 달빛만이 방을 비춰주고 날 반겨줄 뿐이었다. 그동안 너에게 너무나도 익숙해져 네 소중함을 잊었나보다. 난 듣는 이 없는 혼잣말을 속으로 삼키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소도 잃고 외양간도 잃고 내가 가진 모든 걸 다 잃은 것 같아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 기분이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난 조금이라도 여주를 잊으려 더더욱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 “여어, 오랜만이다?” “어, 잘 지냈어?” “나야 뭐 항상 똑같지-” 여주와 이혼한 지 2년이 흘렀다. 그녀에 대한 생각을 지우려 일부러 아무도 만나지 않고 미친 듯이 일에만 매달렸던 나는 일 년이 조금 지나고, 대리라는 직함을 달았다. 그리고 나서도 계속해서 내 스스로를 혹사시키다 문득 내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에게 조금의 여유를 주기로 했다. 그래서 거의 2년 만에 연락을 끊었던 친구들을 하나 둘씩 만났다. 그 중 가장 반가웠던 건 대학교 다닐 때 가장 친했던 재환이었다. 재환이는 학교 다닐 때부터 주변에 친구가 많았다. 요즘 말로 인싸라고 하던가. 아무튼 그 덕분에 오랜만에 여주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만나던 사람과 헤어지고 완전히 혼자가 된 지 일 년이 다 되어 간다고. 그 소식을 들은 뒤로는 다른 말이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난 여주를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난 여전히 그녀가 보고 싶었다. 아주 많이, 속도 없이.
몇날며칠을 고민했는지 모르겠다. 다시 여주에게 가기엔 내가 그녀를 볼 면목이 없었다. 여주에게 난 그저 쓰레기 같은 전남편일 뿐일 테니까. 내가 그녀에게 다시 다가간다고 한들 분명 날 밀어낼 게 분명했다. 그래도 내 심장은 여주만 떠올리면 미친 듯이 쿵쾅댔다. 결국 나는 다시 그녀에게 가겠다는 큰 결심을 내리게 되었다. 아무리 날 밀어낸다고 해도, 다 내가 감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 * * * * * 딸랑- “어서오세요-” 여주는 여전히 너무나도 예뻤다. 날 반하게 한 예쁜 미소, 차분하지만 힘 있는 음성, 대충 묶어 올린 긴 머리까지도 모두 다. 나인 걸 확인한 여주는 누가 봐도 당황한 듯 했다. 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커피를 주문했고, 커피를 내리던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여주야." "……." “잘 지냈어?” “…….” “난 잘 못 지냈는데.” 내 말에도 여주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커피를 내려 내 앞에 내려놓을 뿐이었다.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하는 정 없는 멘트와 함께. 커피를 받아들고 나서도 난 가만히 서서 여주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단 한 순간도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십 분 정도 서 있었을까, 괜히 내가 일을 방해하는 것 같아 오늘은 그만 하기로 하고 또다시 나 혼자 일방적으로 여주에게 내 할 말을 내뱉었다. 앞으로도 계속 찾아오겠다고. * * * * * * 여주의 마음을 돌리려 매일같이 카페를 찾아간 지도 벌써 두 달 가까이 지났다. 제주도 출장 일정이 잡혀 일주일 간 못 올 것 같다는 말을 하니 여전히 여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없을 때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난 출장길에 올랐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나는 짐도 풀지 않고 곧장 여주의 카페로 향했다. 10시가 조금 넘었지만 그래도 마감하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급히 차에서 내려 카페로 가니 너는 웬 아저씨들에게 둘러싸여 누가 봐도 난감해 보이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욱하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분히 아저씨들을 쫓아내고 빨개진 네 손목이 신경 쓰여 다시 보려 하니 넌 날 유난히도 차갑게 대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길이 없는 나는 그저 너의 뒤에 서서 네 걱정만 늘어놓고 있을 뿐이었다.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네가 뭔데 자꾸 이래라 저래라 간섭이야? 너 자꾸 나 찾아와서 이러는 거 진짜 이해 안 되고, 뭐 때문에 자꾸 찾아오는지 몰라도 난 네가 너무 싫어. 제발 내 눈 앞에서 좀 사라져줘.” “…….” 상처를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아니, 엄청 상처 받았다. 내가 갈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진 않았어도 매정하게 내치진 않았던 터라 아주 조금은 여주도 날 받아줄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갑자기 이렇게까지 날 내칠 수가 없다. 그래도 난 매몰차게 내게서 등 돌리는 여주를 잡아야만 했다. 원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니까. 지금 난 한없이 약한 을의 입장에 서 있는 상황이니까. 이번에도 여주를 놓치면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갈 것 같아서 난 계속 그녀에게 매달렸다. - 너의 약속장소로 가는 길은 너무나도 멀었다. 차가 왜 이렇게나 많이 막히는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난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운전만 했다. 뭐라도 말을 걸고 싶었지만 괜히 말 걸었다 더 어색해질 것만 같았다. 이리저리 머리를 열심히 굴리다 약속장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용기 내어 내 진심을 표현할 수 있었다.
“…저기, 있잖아.” “…….” “나 다시 보는 거 네가 싫어할 거라는 것도 잘 알고, 내가 이러는 거 염치없다는 것도 잘 알아. 그래도 그거 다 감수하고 너 매일 찾아오는 거, 내 입장에서도 어려웠던 선택이라는 것만 알아주라.” “…….” “네가 나한테 상처 받았던 거 다 갚을게. 마음 다시 돌려줄 때까지 너 찾아올 거야. 이게 내가 내린 결론이고, 내 나름대로의 사과 방법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어.” “…갈게. 데려다줘서 고마워.” 난 그 말을 끝으로 차에서 내린 여주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나서야 차를 출발시켰다. 시원하면서도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밤, 내 감정도 길거리에 나뒹구는 낙엽들처럼 힘없이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작가의 말 + 암호닉 |
안녕하세용 녤루입니다! 독자님들 일주일 잘 보내셨나요?! 더 빨리 오려고 했는데 글이 너무 안 써져서 계속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느라 늦었어요ㅜㅜ 사실 이번편도 살짝 부끄러운 감이 없지 않아 있는데 더 고치다가는 너무 늦어질 것 같아 그냥 가져와버렸습니당. 재미없어도 용서해주세요 다 제 능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ㅠㅠㅠㅠㅠ 많은 독자님들이 원하시는대로 녤이랑 여주가 얼른 찌통 끝내고 행복한 부부로 돌아갈 수 있게 열심히 다음 편 써 볼게요! 이번 편 보다 더 빨리 들고 올 수 있길..ㅎㅎㅎ *암호닉 명단* [녜리] [0226] [일오] [자두] [수 지] [빙수] [숮어] [영이] [강낭] [윙녤옹환] [줄리] [꾸쮸뿌쮸] [쩨아리] 오늘도 제 부족한 글 읽어주신 독자님들 모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