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백일주의 위험성
w.서화
수능 D-100. 뉴스나 신문에선 학생들이 막판 스퍼트를 내고 있다며 떠들어댔지만 정작 고3 교실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보충 수업을 째고 피씨방이나 가자는 친구도, 도대체 밤에 무슨 짓을 하고 다니 길래 미동 한 번 없이 엎드려 자는 친구도. 모두 똑같았다. 덧붙여 나는 수시에 비중을 더욱 크게 두고 있던 터였다. 수시러에게 수능 백 일은 글쎄, 특별한 의미를 부여 할 날짜가 아니었다. 그냥, 조금 더 습한 날 정도. 그 뿐이었다. ㅇㅇㅇ가 우리 집 문을 두들기기 전 까진.
"...그래서, 이걸 지금 마시자고?"
"응! 백일주!"
ㅇㅇㅇ는 동그란 안경 너머로 제 두 눈을 빛냈다. 초록색 소주병을 꼭 쥔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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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단은 대략 10분 전. 화요일은 ㅇㅇㅇ가 과외가 있는 날이라 야자를 마친 뒤 어두컴컴한 하굣길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여기 무섭다고 데리러 나오라고 난리를 피우던 모습이 잠시 떠올라 옅은 미소를 짓다가도 고3의 전유물인 피로에 나는 조금 더 속도를 내어 집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빨랐던 걸음 덕인지 20분이 걸릴 거리를 그 반인 10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고 얻은 것은 흥건한 땀이었다. 원체 찐득한 느낌을 싫어하는 저인지라 곧장 화장실로 향해 샤워 타올에 몸을 마구 문댔다. 시원한 물로 향긋한 거품이 씻겨내려 가자 그제야 습한 기운이 조금 가셨다. 뿌얘진 거울을 뒤로 한 채 대충 옷을 꺼내 입곤 물기에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어내던 중, 현관에서 삑삑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모님 여행 가셔서 올 사람도 없는데, 누구지? 문짝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경쾌한 알림 음을 내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앞엔, 소주병 2개를 야무지게 쥔 ㅇㅇㅇ가 있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ㅇㅇㅇ는 이미 신발을 내팽겨치고 들어와 소파를 차지하고 있더랬다. 소풍가는 어린아이 마냥 연신 생글거리는 얼굴로 빨리 안 오냐며 재촉하는데, 참. 저걸 내쫓을수도 없고. 결국 나는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며 흐드러진 분홍색 슬리퍼를 정리하곤 거실로 향했다. ㅇㅇㅇ의 손에 들려있던 소주병은 이미 뚜껑이 열려 제 향을 맘껏 뿜어내고 있었다. 어째 쟤 볼이 불그스름한 게 이미 조금 취한 것 같기도 하고.
"안주는?"
"안주? 없는데."
"그럼 이걸 깡으로 마시게?"
응! 쓸데없이 발랄한 목소리였다.
"먼저 마시지 말고 기다려. 엄마가 파전 해놓고 간 거 데워 올 테니까."
"네네-"
나는 오늘따라 유난히 하이텐션인 ㅇㅇㅇ를 뒤로 하곤 부엌으로 발을 옮겼다. 냉장고 대신 식탁 위에서 차갑게 식어있는 파전을 전자레인지에 돌리자 금세 방금 구운 듯한 모양새로 변했다. 무작정 소주 들고 찾아온 ㅇㅇㅇ 아니었으면 손도 안 댔을 전인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걸 보니 입 안에 살짝 침이 고이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침을 꿀떡 삼키다 말고 얼른 오라는 ㅇㅇ의 재촉에 따뜻해진 파전과 찬장에서 꺼낸 소주잔을 거실 탁자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쪼르륵. 물 마냥 투명한 소주가 자그마한 잔에 가득 담겼다. 내 잔에도, ㅇㅇㅇ의 잔에도. 잔이 꽉 차자 그냥 목구멍으로 빨리 털어버리고 이 골칫덩이를 집에 보내려던 내 속셈은 팔을 붙잡아오는 그녀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뭐냐는 듯 바라보는 내 시선에 ㅇㅇㅇ는 제 눈을 접어보이며 미소 지었다. 지 저렇게 웃는 거에 약한 건 더럽게 잘 안다.
"쨘 해야지."
"그냥 좀 마시면 안 돼?"
"안 돼. 아아, 빨리이-"
어쭈, 말꼬리까지 늘려. 평소 성격은 애교 보단 무뚝뚝에 가까운 ㅇㅇㅇ가 어지간히도 신났다는 걸 제대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었다. 딱히 말릴 생각은 없었다. 못 이기는 척 잔을 갖다 대자 쨍- 하는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 가득 채워져 있던 서로의 잔은 금방 빈 잔이 되었다.
"크으-"
"..맛있냐?"
"먹을 만한데?"
먹을 만하다. 그래, 이 때 말렸어야 됐다. 하지만 이후의 상황을 예측하는 능력 따위 없는 나는 그저 한숨을 내쉬며 파전을 ㅇㅇㅇ의 입 앞에 갖다 대줄 뿐이었다. 오물오물. 안경 쓰고 왔으면서 틴트는 왜 바른 건지 모르겠다만 빨간 입술에 기름까지 묻어 오물거리는데, 시선이 자꾸 그 쪽을 향했다. 이는 짝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사춘기 남학생에게 꽤나 자극적인 소재였다. 그러나 홀린 듯 번들거리는 입술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소주를 더 달라며 찡찡대기 시작한 그녀의 목소리에 시선은 금세 걷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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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두 잔. 빠른 속도로 비워내더니 어느새 두 번째 병도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꽤 많이 마신 것 같은데 필름이 끊긴다거나 하는 증세는 보이지 않았다. 그냥 머리만 조금, 아주 조금 어지러운 정도. 하지만 ㅇㅇㅇ는 달랐다. 말꼬리는 무슨 껌 마냥 죽죽 늘리고 무엇보다 헤실 대며 나를 향해 웃어 보이는 모습이, 누가 봐도 취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운다거나 동네방네 뛰어다닌다거나 하는 골치 아픈 술버릇은 아니었지만 해맑게 웃는 그 모습은 내게 전자와 비슷한 정도의 고통이었다.
"박지후운-"
"왜."
"지훈아아아."
"......"
몇 시간째 곱게 접혀있던 그녀의 눈가가 금세 꼬리를 축 하고 내렸다. 그 표정을 한 채로 머리통을 내 어깨에 기대어 오는데 진짜, 죽는 줄 알았다. 나도 모르게 들이 마쉰 숨을 언제 내뱉어야 하나 내적갈등을 일으키던 중,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대학 갈 수 있겠지? 그치?"
대학 때문이었나. 대한민국 모든 고3들의 고민거리에 나는 그저 마쉰 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6개 중에 하나는 붙겠지. 그거 때문에 이러냐?"
절레절레. 어깨 부근에서 그녀의 동그란 머리가 좌우로 끄덕였다. 움직일 때 마다 피부에 스치는 부드럽고 나와 같은 향이 풍기는 긴 머리칼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름의 참을성 테스트 중이었다.
"내 친구가 너가 좋대."
뜬금없었다. 어딘가 장난이 섞인 것 같기도 하고.
"..예쁘냐?"
나는 이와 비슷한 목소리로 물었다. 별 의미 없는 '응' 과 같은 말이었다.
"어, 예쁜, 아니 이게 아니고 좀 들어봐."
"뭘."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게?"
줄곧 어깨를 떠날 줄 모르던 동그란 머리가 예고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떠나 도착한 곳은 내 얼굴 바로 앞이었다. ㅇㅇㅇ는 고사리만 한 손으로 내 양 볼을 부여잡곤 제 두 눈을 빛냈다. 갑작스레 가까이서 마주한 얼굴에 나도 모르게 열이 확 올랐으나 곧 술기운 때문이라며 덮어버렸다. 그래도 이건 너무 가깝다. 눈은 더더욱 못 마주치겠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기 전에 이미 본능은 시선을 다른 곳을 향하도록 만들었다. 멍하니 바라본 허공은 어느새 검은 자수를 읊어내고 있었다.
"번호 줬겠지, 뭐."
"......"
"아님 내 단점이라도 쫙 읊었어?"
"그런 거 아니거든."
ㅇㅇㅇ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나갔다. 더불어 삐죽 튀어나온 입까지. 제가 삐졌을 때나 나오는 행동들이었다. 19년을 봐 왔는데 그거 하나를 모를까 싶었지만 쟨 모르는 것 같았다. 나름대로 숨긴다고 입술을 말아 넣곤 앙 물어대는데, 웃긴다기 보단 귀엽단 생각이 강했다. 그런 아이 같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피식, 하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뭔데, 그럼."
"몰라. 저거나 줘."
"안 돼, 그만 마ㅅ, 야, 내려 놔라. 너 많이 마셨어."
말리는 나보다 ㅇㅇㅇ의 손이 더 빨랐다. 잽싸게 잔을 뺏어 보았지만 이미 텅 빈 상태였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잔을 내려놓자 거실 베란다의 큰 창으로 새벽의 달빛이 스며들었다.
그 빛은 마치 우리가 주인공이라도 된 것 마냥 딱 둘만을 비추었고 어느새 그녀의 손은 또 다시 내 양 볼을 감쌌다. 전보단 훨씬 누그러진 손아귀였다. 사실 그 전도 그다지 세진 않았다. 부여잡은 게 아니라, 진짜 연인처럼 부드럽게. 알 수 없는 정적만이 우리를 감싸왔다. 위험한 거리에서 둘의 시선이 묘하게 얽혔다.
"...야."
도톰한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왜."
"우리 친구 맞지?"
친구. 글쎄. 내가 널 친구로 봤던 적이 몇 년 전이었더라.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얻는 것은 없었다. 내가 여기서 뭐라고 말을 해야 맞는 걸까. 이 상황에 대한 답은 그 어떤 답지를 뒤져봐도 나오지 않을 것이 뻔했다. 오롯이 우리 둘만의 일이었으니.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찌질 하다고, 용기가 없다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나는 무서웠다. 혹여나 술기운에 내뱉은 속마음이 널 못 보게 만드는 원인이 될까봐.
"넌?"
"..난 아닌데- 나 그래서 번호도 안 주고 뒷담도 안 깠어. 짜증나서."
어둠이 내려앉던 ㅇㅇㅇ의 얼굴에 또 다시 헤실 거리는 웃음꽃이 트였다. 장난을 치는 건지 술기운에 나온 진심인지 구별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그저, 멍하니 네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야 너. 갈수록 복잡해져만 갔다.
쪽, 그 순간이었다. 말캉한 입술이 부르튼 내 입술에 꾹 닿은 것은.
"헤헤 뽀뽀했다-"
...닿았다. 온기가 남아있는 입술을 매만져보아도 달라질 사실은 없었다. 단 둘이 있는 집에서, 백일주랍시고 소주 2병을 해치우고, 자의는 아니었지만 뽀뽀까지. 소꿉친구라는 관계 하에 우리가 한 행동들이었다. 비상식적인. 제가 먼저 부딪혀놓곤 시뻘개진 얼굴을 하고 있는 ㅇㅇㅇ를 확 당겼다. 당기면 당기는 대로 따라와 다시 가까워진 모양새가 퍽이나 귀여웠다. 나는 선홍빛을 띠고 있는 볼을 슬며시 감싸 쥐었다. 말랑말랑한 게 아까 전 닿았던 입술과 비슷한 감촉인 것 같기도. 패기롭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여기저기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에 나는 나지막이 이름 석 자를 불렀다.
"ㅇㅇㅇ."
요동치던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나마 가라앉았다.
"...응?"
"나 좋아해?"
저 입술에서 무슨 대답이 나올까. 몇 년 동안 궁금해 했던 답이지만 재촉은 없었다. 지금까지도 잘 기다려왔으니 이 정도 쯤이야, 뭐. 그렇게 5분 정도 지났나. 체감 상 한 시간은 지난 기분이었다. 참을성이 극에 달한 나는 결국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으나 고개를 두 어 번 주억거림이 대신했다. 나른하게 풀린 눈이 허공에서 얽히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내내 참고 참아왔던 본능이 터지며 맞닿은 입술은 더욱 세게 파고들었다. 부드럽게 시작한 입맞춤은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콧잔등에 머물던 걸리적거리는 동그란 안경은 이미 내 손에 의해 벗겨져 탁자 어딘가를 나뒹굴고 있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며 도톰한 입술을 앙하고 깨물기도, 소주로 번들거리던 걸 혀로 핥아내기도 하며 입맞춤을 이어나갔다. 갈 길을 잃은 ㅇㅇㅇ의 손은 어느새 내 목을 감싸 안으며 서툴게 입술을 파고들었다. 내 쪽의 리드로 이어지던 키스의 주도권이 바뀐 시점이었다.
그녀를 닮아 둥그스름한 혀가 치열을 고르게 훑고 옭아매고.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따라하는 모양새가 귀엽긴 했지만 본능을 억눌러 사리가 나올 기세이던 사춘기 소년에겐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서툴게 입술을 부비던 ㅇㅇㅇ를 들어 무릎 위에 앉혔다. 잠시 입술이 떨어지고 빈틈이 생기자 그녀는 숨을 몰아 내쉬며 내게 기댔다. 돌겠다, 진짜.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 지, 편히 기댄 채 숨을 고르는 그녀를 바라보자 오래도록 참아왔던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다.
"좋아해."
도착하기까지 참 오래도 걸린 한 마디였다. 직구로 던진 고백에 ㅇㅇㅇ는 번들거리는 입술을 한 채로 웃어보였다. 기름도, 소주도 아닌 누구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은. 말 하지 않아도 알겠지. 입술을 닦아 낼 틈도 없이 파고들었다. 둘을 비추던 희미한 달빛도 자리를 비켜주었으며 밤은 깊고 길었다. 친구라는 아슬아슬한 외줄에서 떨어진 새벽. 아주 긴 새벽.
수능 백일주의 위험성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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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보니 너무 야한 것 같네요 여러분 전 변태가 아닙니다 아마도..
성균관 양애취 그거 너무 안 써져서 그냥 다 완결내고 텍파로 보내드릴까 싶기도 하고..이런저런 생각이 많습니다 허허 비 오는데 조심 하세요♥ 나도 팬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