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연 A
w.서화
터덜터덜. 대학 입시 상담을 마치고 교무실을 빠져나오는 내 발걸음이었다. 오늘 따라 유독 질질 끌리는 삼선 슬리퍼도, 별 걱정도 없는지 복도에서 웃고 떠드는 친구들도, 복도 창문으로 스며들어오는 쨍한 햇빛도. 모두 내겐 우울함을 더하는 요소들이었다. 왜인지 자꾸만 시야를 가리는 뿌연 눈물들도 그 감정에 정점을 찍어댔다. 하지만 나에겐 학교 복도에서 엉엉 울 정도의 용기는 없었다. 그렇게 울어봤자 해결 되는 것도 없을 뿐 더러 애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 할 뿐이란 걸 잘 알기에. 괜시리 씁쓸해졌다. 나는 에어컨 바람을 쐐 차가운 손등으로 눈가를 박박 문질러댔다. 살짝 따끔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교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공부하는 애들 반, 자는 애들 반. 시끄러울 수가 없었다. 다들 이어폰을 끼고 있어 문이 열려도 어느 하나 돌아보지 않는 교실이었지만 지금 내겐 이편이 훨씬 나았다. 괜히 운 거 걸려서 의미 없는 위로 받는 것 보다야 낫지, 뭐. 나는 교실 뒤에 달린 거울로 몰골을 확인 하곤 제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왔냐? 담임이 뭐래?”
어쩌다보니 두 달 째 짝 노릇을 하고 있는 김재환 이 놈, 그래도 나름 고3 코스프레는 하는 중 이었나보다. 수능이 100일 어언 남은 지금까지도 깨끗한 수능특강을 펴 놓은 채 멍을 때리던 재환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그냥. 여기 안 된다, 저기 안 된다. 정신 차려라.”
“쌤은 어떻게 된 게 하는 말이 다 똑같지? 신기해.”
“별 게 다 신기하다. 다음 시간 뭐야?”
“나한테 물어보면 대답이 나올 것 같,”
쓰지도 않는 샤프만 돌리며 대답하는 재환에 아차 싶은 순간, 앞자리에서 노트북을 딸깍거리며 자소서를 써 내려가던 민현이 뒤를 돌았다. 쟨 참, 언제 봐도 단정하다. 이 더운 여름에 하복 셔츠의 단추를 끝까지 꼭꼭 채운 거 하며, 어깨 너머로 보이는 각 맞춰 정리되어있는 그의 책상서랍까지. 뒤를 돌아보다 나와 잠시 눈을 마주치자 그는 씩 웃어보이곤 시선을 지나쳤다. 민현의 시선의 도착지는 누구나 예상했겠지만 재환이었다.
“다음 문학. 재환아 수능 며칠 남았다고?”
“백, 뭐라 그랬지 아까?”
재환은 돌리던 샤프를 내려놓고 제 열 손가락을 접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누가 보면 수능 열흘 남은 줄 알겠다, 빙신아. 내뱉은 말은 욕이었지만 어딘가 조금 모자라 보이기도 하는 재환과 그를 타박하느라 바쁜 민현의 모습에 살풋 웃음이 새어나왔다. 꽤나 오랜만에 지어진 미소였다. 고작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도 방금 전 보단 나아진 기분이었다. 미소를 지워내지 않으며 투닥거리는 둘을 뒤로 한 채 책을 가지러 일어나자, 창문 사이로 살랑 바람이 불어왔다. 더운 바람도 아닌, 기분 좋은 봄바람이.
-ㅇㅇㅇ.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린 순간,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목소리가 순간 귓가에 맴돌았다. 내 이름 세 글자를 나지막이 부르는 목소리. 갑작스런 부름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리 아련하게 나를 부를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들릴 소리라면 맨 뒷줄에서 불렀어야 하는데 뒷줄의 주인은 눈이 마주치자 장난스런 미소를 지은 채 뭐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성우였다. 환청이라도 들은 건가. 나는 찜찜한 기운을 털어내지 못한 채 사물함 문을 열었다.
수업이 시작 된 지 20분 쯤 지났나, 체감 상으론 이미 한 시간도 더 지난 것 같다. 정말이지 문학 쌤의 저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불면증 환자가 와도 금방 완치 되어 나갈 정도의 수면제였다. 더군다나 지금은 오후 3시. 아주 잠에 들기에 최적화 된 타이밍이었다. 교실에 울리는 소리는 똑딱 거리는 시곗바늘 소리와 선생님의 목소리뿐이었다. 똑딱똑딱. 그러니까 여기는 은유법을 써서... 뚝. 순간 귀가 멍해지며 그 모든 소리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홍연 A
“아씨, 아씨! 정신이 드세요?”
흐릿한 달빛이 깜빡, 깜빡.
“아씨, 눈 좀 떠보세요. 예? 여기서 눈 감으시면 안 돼요!”
전 보다 조금 선명해진 목소리가 앵앵거렸다.
“아씨!”
번쩍. 아주 조금의 틈을 보이던 눈이 금세 제 크기를 찾았다. 눈을 뜬 나를 보자마자 옆에서 연신 ‘아씨’를 외쳐대던 재환은 잔뜩 처진 눈에 눈물을 방울방울 매달았다. 손을 뻗어 괜찮다고 말 해주고 싶었으나, 깊게 잠긴 목은 쉽게 소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자 재환은 그 뿐이라도 다행이라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여댔다.
“..환아.”
“예, 아씨!”
“우리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그게 저도 잘,”
머리를 긁적이며 망설이던 재환의 목소리는 무참히 끊겨버리고 말았다.
“从这儿开始妇女们分开移动.”
(여기서부터 여자들은 따로 이동한다.)
찬 기운을 폴폴 내뿜는 군인의 외침에 곳곳에서 여자들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게 중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도 있었고 이미 비녀를 꽂은 아녀자들도, 솜털이 보송한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각자 출신도 다르고 신분도 다른 그들에게 공통점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두려움. 그 감정만이 수많은 여자들을 에워쌌다. 엉거주춤 일어난 여자들은 명의 군인들에게 이끌려 다른 배에 올라탔고, 나 또한 다를 바는 없었다. 뒤에서 제 이름을 애타게 찾는 재환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으나 뒤를 돌아 볼 여유 따위 또한 없었다. 이어 들려오는 구타 소리는 내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하지만, 쓰러지고 기운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몸이 성할 리가 없었다. 그냥 걷는 것도 힘든 몸으로 빠른 걸음의 군인들을 따라잡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위태위태한 발걸음을 옮겨가던 중, 작은 돌부리에 신이 채이며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몸이 크게 휘청였다. 버틸 힘은 이미 도성을 나오면서 다 써 버리고 말았기에 나는 그저 찢어진 치맛자락을 붙잡고 또 한 번 쓰러질, 그럴 시점이었다. 옆을 지키던 군인이 아니었더라면.
“조심해.”
힘없이 쓰러지는 내 몸뚱아리를 무심히 받아낸 군인은 고맙단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같은 민족이었던 건가.
***
“야, 야. 일어나. 수업 끝났어.”
“......”
“ㅇㅇㅇ, 일어나 봐. 엉?”
-아씨, 눈 좀 떠보세요. 예?
꿈속에서 나를 애타게 부르던 남자와 짝꿍 김재환. 잠에 취해 작게 뜬 실눈 사이로 둘의 형체가 흐릿하게 겹쳐보였다.
“매점 가자고오-”
재환은 실눈만 겨우 뜬 채 꿈뻑꿈뻑 저를 보고 있는 내 팔을 마구잡이로 흔들기 시작했다. 몇 년 묵은 잠도 다 달아날 그의 찡찡댐에 나는 억지로 허리를 일으켰다. 재환은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입술을 쭉 내민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교실을 빠져나갔고 난 여전히 실눈을 뜬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실눈이 화근이었나. 한 두 걸음 내딛었을 쯤, 내 다리는 책상 다리에 보기 좋게 걸려버렸고 그대로 엎어져 딱딱한 교실 바닥에 얼굴을 박을 순간이었다. 꽤 튼튼한 팔이 넘어지던 내 몸을 잡아왔다. 어딘가 익숙한 향. 어디서 맡아봤더라.
“어어, 조심 조심. 눈 좀 뜨고 가시죠-”
-조심해.
잠기운도 싹 달아나 깨끗하던 시야가 잠시 흐릿해졌다. 꿈속에서 휘청이던 나를 받아낸 군인과 교실에서 나를 붙잡아 준 옹성우. 또 한 번 둘의 형체가 겹쳐보였다. ...뭐지, 이상하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맙단 인사를 남긴 후 빠르게 교실을 빠져나왔다. 야, 같이 가! 하며 이미 저 앞에 있는 재환의 뒤꽁무니를 쫓아가는 내 뒤로 봄바람이 한 번 더 살랑 불었다. 옅게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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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제겐 불치병이있어요. 뭐냐구요? 그것은 바로바로 새작병...하하핳 사실 새 작이라고 하지만 다음 편은 언제 올라 올지 저도 몰라욥...그냥 갑자기 소재가 떠올라서 마구잡이로 쓴 거라허허 아직 나오지 않은 인물이 많습니당! 혹시 글이 이해가 안 가신다면 무엇이든 물어봐주세요!! 조만간 성균관 양아치로 찾아뵙겠습니다 :) 워너원 데뷔 축하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