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angle
02
마시지 마. 네 그 한 마디에 찬물은 끼얹은 듯 시끄러웠던 식당 안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내 술잔을 빼앗아 든 너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야 인지한 거 같았다. 놀란 듯 크게 뜬 두 눈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나라고 놀라지 않은 건 아니었다. 네가 먼저 말을 건 게 헤어지고 나서 처음이었으니까. 그동안 같은 과니까 어쩔 수 없이 형식적인 대화를 몇 번 하기도 했었지만 그것도 전부 내가 먼저 말을 걸 때뿐이었고 너는 일절 내게 말을 건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식당 안의 모든 이목이 너와 나를 향했다. 너는 그 많은 시선들이 부담스러운 건지 고개를 푹 숙인다. 그러게 왜 그랬어 너 이렇게 주목 받는 거 싫어하잖아. 아랫입술을 꾹 깨문다. 뭐야 둘이? 다영 선배 옆에 앉은 상환 선배가 능글거리는 투로 물었다. 그에 아무것도 아니라며 너는 손사래를 친다. 묘한 눈으로 우리를 번갈아보는 눈빛들이 여럿 있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김빠진 사이다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이럴 때 나유타라도 있었으면 자리를 빠져나가기 편했을 텐데 이 새끼는 왜 안 오는 거야? 상단에 뜬 나유타와의 톡방에 들어갔다. 거의 도착, 마지막엔 내가 읽씹한 나유타의 톡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도영의 한 마디에 조용해졌던 분위기는 다시금 시끄러워졌다. 그 소란스러움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눈을 슬쩍 들어 올려 너를 살폈다. 아까부터 계속 술만 마시는 것이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저러다 취할라…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너는 힘없이 고개를 툭 떨군다. 옆에 앉은 남주혁도 취한 것인지 헤롱헤롱거렸다. 시간이 꽤 많이 지난 건지 동기나 후배, 선배들이 하나둘 씩 취한 듯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이 보였다. 뭐야 나만 정상인 거야? 김도영이 내 술잔을 뺏는 바람에 난 본의 아니게 멀쩡했고 설마 정상인 사람이 나 밖에 없나 하는 불안감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내 눈에 들어온 건 취한 듯 벌게진 얼굴로 무어라 소리치고 있는 상환 선배 옆에 앉은 정재현이었다.
"재현이! 재현이도 한 잔 해야지."
"아, 아니요. 선배 저는 괜찮…"
"파티에서 술이 빠지면 쓰나."
선배 많이 취하셨어요. 술을 따르려는 상환 선배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찼다. 상환 선배 옆에 앉으면 그 날은 무조건 취하게 돼있다. 취하고 싶지 않아도 저렇게 강압적으로 나오는 상환 선배의 행동엔 다들 속수무책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때 나는 보고 말았다. 정재현의 다른 얼굴을.
정재현의 작은 손놀림으로 상환 선배가 들고 있던 술병이 아래로 추락했고 쨍그랑하며 술병이 깨지고 말았다. 깨질 때 유리의 파편이 튄 것인지 정재현의 왼쪽 뺨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상환 선배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들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정재현에게 연신 사과를 하고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정재현에게 묻더라. 괜찮냐며 아프지 않냐며. 그 중 몇몇의 사람들은 상환 선배에게 버릇 좀 고치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난 멀찍이서 보고 만 것이다. 정재현의 다른 얼굴을. 한쪽 입꼬리를 비식 틀어올려 웃는 모습을 말이다.
"…."
"… 아."
하필 그때 눈이 마주칠 게 또 뭐람. 내 쪽을 쳐다보는 정재현의 두 눈과 정확히 허공에서 맞물렸다. 차갑게 식은 낯은 나를 딱딱하게 굳어버리게 만들었다.
"재현아 괜찮아?"
물론 얼마 안 가 맞은 편에 앉은 민선이의 말에 시선은 끊겼지만 말이다.
"응 괜찮아. 넌 안 다쳤어?"
웃을 때 패이는 보조개가 눈에 띄었다. 쟤 뭐야? 어떻게 얼굴이 저렇게 싹 바뀔 수가 있지? 싱긋 웃는 정재현의 얼굴에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정재현이 다시 나를 쳐다보기 전에 얼른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 싶어서 가방을 챙기고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어디 가냐는 물음에 집에 일이 생겨서… 라는 보편적인 거짓말을 뱉고는 식당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가을 밤의 공기가 얼굴에 와닿는다. 가방 속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11시 30분, 시간이 언제 이렇게 빨리 지나간 거지. 홀드키를 누르곤 꺼냈던 핸드폰을 다시 가방 안으로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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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민형아 안 자고 있었어?"
"네."
익숙하지 않은 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가니 부엌에서 물을 마시고 있던 민형이가 보였다. 지금 이 시간이면 잘 시간 아닌가? 그러기엔 조금 이른가. 저녁은, 먹었어? 내 질문에 녀석은 입을 연다. 먹었어요. 짧게 떨어지는 음성에 할 말이 없어졌다. 녀석은 물컵을 싱크대에 두고는 나를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가버린다. 친해지기 힘들 거 같은 느낌이 든다. 민형이가 올라간 2층을 올려다보다가 나도 따라 계단을 올랐다. 이틀 밖에 안 지났는데 역시 방이 편하긴 편한 가보다.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대충 화장을 지우고 씻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밀려오는 피로감에 눈꺼풀이 스르르 감긴다. 내일 학교에 가면 일단 나유타의 모가지부터 처리할 생각을 하며 그렇게 잠이 들었다.
망할.
"안녕. 시민아."
이런 개 같은.
과파티 이후로 제일 마주치면 불편한 1순위인 정재현이 지금 내 앞에 있다.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내 옆자리에 앉는 정재현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아니 얘는 왜? 여기 왜? 대체 왜? 하는 궁금증이 들었지만 친한 사이도 아니고 차마 물어볼 수가 없더라. 사람 없다고 신청한 교양 수업이었는데 몇 없는 사람 중에 정재현이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냐고. 저번엔 없었던 것 같은데.
"다행이다. 혼자 듣기 싫었는데."
난 혼자 듣고 싶었는데 시바…… 고개를 휙 돌리고 놈에게 들리지 않을 욕지거리를 해댔다.
그렇게 끝나기만을 바라보고 있던 수업이 드디어 끝이 나고 교수님의 마지막 말을 듣기도 전에 나는 서둘러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어제 봤던 그 눈빛이 쉽사리 잊히지가 않았다. 그것 뿐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어딘가 찝찝한 녀석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피해 다니면 그렇게 마주칠 일도 별로 없을 거고 뭐 별로 걱정할 건 없겠지? 두꺼운 책을 품에 안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생각은 그렇게 했는데. 왜 정재현이 저기 앉아 있는 거냐고.
"배고프다. 오늘 어디로 갈래?"
오른팔로는 내 어깨를 감싸고 왼팔로는 정재현의 어깨를 감싸며 나유타는 말문을 튼다. 아까까지만 해도 꼬르륵거리며 요동치던 배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분명 정재현이랑 같이 밥을 먹는다면 체할 게 분명했다.
내가 이렇게 정재현을 피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어제의 일이라면 다른 이유는 내가 20살 때의 일어난 일이었다. 그땐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에 지나지 않던 나는 정재현의 두 얼굴을 알아채지 못 했다. 조별 과제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였는데. 하필 내가 그때 조원들이 거지 같았다는 거다. 연락 잠수는 기본에 무임승차가 특기인 그런 조원들이었다. B를 받는다 해도 장학금이 위험했기 때문에 그때의 난 혼자 과제를 다 하기로 마음을 먹었었고 비어있던 강의실에서 혼자 과제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얘가 왜 그렇게 바보 같아?"
"뭐?"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
"네가 그렇게 노력해도 결국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어."
"…."
"왜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어."
그래 아직까지 기억한다. 그때의 무미건조한 낯을 하며 내게 말을 거는 정재현의 모습을.
그때 이후로 정재현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왜 자꾸 마주치는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