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도령에게 시집가기
글 잎련
"더이상 미룰 수 없구나."
"예?"
"나의 재혼 너의 혼례"
내 나이 열 일곱. 마을에서도 혼기 꽉 찬 노처녀라고 소문이 나있는 마당에, 새삼스레 날 아침부터 마루에 앉혀놓고 하신다는 아버지의 말씀에는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나의 혼례는 그렇다 치고, 아버지의 재혼..?
"아버지는 결혼을 하신 적이 없지 않습니까?"
"..나는 너를 마음으로 낳았느니라."
"차라리 아버지부터 혼례를 치르시는게.."
예끼!
작은 앞마당까지 울리는 아버지의 호통에 몸을 움찔했다. 무섭다기보단, 목소리가 갑자기 커져서 놀란게 더 크다.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하고 아버지를 바라보니, 얼굴이 살짝 붉어지신 모습이 꼭 숨겨둔 여인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내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지어졌다.
"혹 마음에 두신 여인이라도..?"
"크흠! 너의 신랑감은 내가 다 봐두었다!"
"..신랑이요?"
놀리는 듯 한 내 말에 당황하신 아버지께서 부채를 팍 펴서 부치기 시작하셨다. 혼자 큭큭대기도 잠시, 신랑이라는 단어에 눈이 번쩍 떠졌다. 더이상 미룰 수 없다지만, 벌써 신랑이라니, 너무 빠른 것 아닌가?
"그래. 사주팔자도 너와 잘 맞는다고 하더구나."
"..."
"좋은 집 아들이니 너도 예를 갖추거라."
"그래서 제가 시집을 언제 간다구요?"
"내일이니라."
"..예??"
세상에. 딸한테 혼례 날짜를 하루 전에 알려주는 아버지가 어디있나 했더니 바로 여기 있었네. 등잔 밑이 어둡다 어두워. 충격에 빠진 내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지, 아버지께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채만 펄럭이신다.
"이런..오라질."
"뭐?"
작게 중얼거리는데도 귀는 밝으셔서 용케도 목소리를 들으신 모양이다. 아버지의 친구분들이 놀러오시면 성격 좋은 딸처럼 보이려고 짓는 가식적 웃음을 지으며 아무것도 아니에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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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병.."
결국 다음 날이 밝았다. 내 머리에선 일어나지 말라고 주문을 걸고 있지만, 방 밖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강제로 기상을 했다. 오늘이 시집가는 날이라니. 정신도 차리지 못한 채로 이불을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언제부터 내 방에 놓여있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여태 본 옷들 중에 가장 화려했다. 아버지가 또 어디서 도움을 줄 여자분을 불러 화장도 곱게 했다. 준비를 마치고 아버지께 다가가니,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살짝 흠칫하고 놀라신 듯 하다.
"너도 꾸며놓으니 꽤나 어여쁘구나."
"소녀 평소에도 한 인물 하옵니다만.."
"됐다. 그런 말은 김서방에게나 하거라."
김서방? 내 신랑이 될 사람은 김씨 성을 가졌나보다. 아니 이와중에 아버지는 김서방 소리가 너무 자연스러우신거 아닌가? 누가보면 벌써 시집간 줄 알겠다. 붉은색의 고운 꽃신을 신으니, 신랑 집에서 보냈다는 꽃가마가 우리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타거라."
"아버지께서는..?"
"나는 말을 타고 가마."
엥. 평소에 잘 타시지도 않던 말을? 아무래도 딸래미 시집간다고 힘주는 게 분명하다. 우리 동네는 말을 가진게 남들에게 체면을 세울 수 있는 수단이어서 그렇다. 꽤 능숙하게 말에 올라타시는 아버지를 보다가 나도 꽃가마에 발을 들였다.
밖이 보이지 않는 꽃가마 덕에 나는 온 신경을 귀로 쏟았다. 점점 사람들의 이야기소리가 들려오고 소란스러워 지는 게, 혼례를 치룰 장소에 거의 다 온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가마가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고 곧 문이 열렸다.
"신부는 신랑 앞으로 와서 서시오."
그래도 시집가는 날이니까 최대한 조신하게 행동하려 했다. 저고리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종종걸음으로 천천히 자리에 섰다. 힐끔 보니 신랑이 될 남자도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신랑 신부 맞절!"
천천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다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부지.. 저 진짜 시집가나봅니다..
떨림도 잠시, 곧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라는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높이 들고있던 팔을 내리고 고개를 들어 나의 신랑이 될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풉."
신랑의 얼굴을 처음 보자마자 풉, 하는 웃음이 삐져나왔다. 다행히 가까이 있는 나의 서방님 될 사람만 들은 것 같아 급하게 표정관리를 했다. 이미 신랑님은 나의 웃음소리를 듣고 나를 째려봤지만.
혼례가 진행되는 동안 가끔씩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애썼다. 드디어 끝이 났다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서방님의 뒤를 졸졸 따라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꽤 으리으리한 집이었다.
"왜 웃었습니까?"
안채로 향하는 문을 통과하자마자 뒤를 돈 서방님이 나를 보며 말한 첫마디다. 그것도 기분 나쁘다는 티를 팍팍 내며. 그래, 사정은 나만 알고 있으니 충분히 기분나쁠만도 하다. 그런데 또 슬금슬금 웃음이 터지려고 한다.
"왜 웃었냐고 물었습니다."
"..그게.."
"..."
"서방님이 너무 아기도령 같으셔서.."
거짓말로 둘러대면 입이 근질근질할게 뻔해서, 그냥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얼굴을 보면 크게 웃어버릴 것 같아 땅을 보고서. 그랬더니 대답이 없는 서방님의 표정을 볼 수가 없다. 반응이 궁금해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근데 진짜 나이가 몇이나 되세요? 저보다 어리시죠?"
"..."
"저랑 비슷하다고는 들은 것 같은데. 한, 열 다ㅅ..으악!"
새삼 서방님과의 거리가 대화하기엔 좀 먼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가려 했는데, 잔디밭에 간간히 깔려있는 돌에 오늘 처음 신은 꽃신이 턱, 하고 걸려버렸다. 두 발자국을 채 떼기도 전에 으악 하는 소리를 내며 휘청이던 나를 가만히 서있던 서방님이 한손으로 잡아 끌어당겼다. 발을 헛디디며 치마까지 밟은 나는, 나를 끌어당기는 힘에 저절로 몸이 쏠렸다. 순식간에 너무 가까워져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서방님을 올려다봤는데, 금방이라도 입이 맞닿을 것 같았다.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차분한 눈빛에 마음이 간질거렸다.
"..."
"..열 아홉이다."
그리고 서방님은, 아기도령이 아니었다.
*
신나서 서방님의 나이를 묻던 나는 어디가고, 말이 없는 서방님의 옆에 앉은 나는 한없이 얌전하기만 하다. 그저 귀엽게 생겼다고만 생각했는데, 오라버니였고 게다가 약간은 설레기도 했단 말이다. 이렇게 금방 반하기도 쉽지 않은데, 역시 나는 내 자신도 종잡을 수가 없다.
"좀 귀엽더구나."
"네? 누가요?"
"손목 한번 잡았다고 얼굴이 빨개져선."
아.. 내 얘기구나..
갑자기 민망함이 몰려와 고개를 푹 숙였다. 남자 손이라곤 아버지 손을 잡아본 게 다인데, 이런게 결국엔 다 티가 나나보다. 얼굴이 화끈거리는게 느껴져 분홍빛의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사부작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부부가 되었으니,"
"예?"
"그게 끝이 아닐텐데."
그러면서 나에게 얼굴을 불쑥 내민다. 행동과 동시에 들려오는 말 때문에 아까보다 더 당황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내 반응이 재밌는건지 정작 서방님은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나를 바라본다.
"이왕 혼례를 치뤘으니 잘 지내보자."
"..."
"부인."
막상 제대로 된 호칭을 부르니 부끄러운건지 올라가는 입꼬리를 잡느라 입을 꾹꾹댄다. 그런 모습이 귀여운 얼굴과 잘 어울려 저절로 나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네. 서방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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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극같은 글이 아니라 퓨전사극으로 봐주세요ㅠㅠ)
작가는 볼살 빵빵한 만두째니가 좋았을 뿐입니다...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