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파수 105.2 MHz : 세 번째 이야기
w.서화
민현이 떠나고 난 후의 작업실은 적막만이 흘렀다. 시끄러운 쪽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적막은 좋은 의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작업실은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불과 10분 전, 전 애인에게서 미련 가득한 목소리를 들어온 여자의 생각은 어느 쪽이겠나. 어느 쪽이든 내게 도움 될 것 없는 생각들이었다. 띠링- 생각을 끊어내기에 아주 좋은 문자 알림음이었다. 힘없이 홀드를 해제하자 예상 외로 발신인은 2명이었다.
하나는 학자금 대출의 이자를 갚으라는 은행의 문자, 그리고 하나는 동창이었다. 고등학교 동창.
[ㅇㅇㅇ 오늘 10시 알지?! 애들이 너 엄청 보고 싶어해ㅠㅠ - 309 반장]
텍스트만 봤을 뿐인데 동창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나는 귓가에서 웅웅 맴도는 민현의 목소리를 동창의 목소리로 바꿔 넣으며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딱히 내키지 않는 자리였지만, 지금 내겐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더 이상 생각이 늘어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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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남짓 된 여고 동창회의 목적은 제 자랑이었다. 어느 대학을 갔고, 어느 회사에 취직을 했고, 어느 명품 가방을 선물 받았으며, 어떤 능력 좋은 남편을 만나는지. 이 동창회엔 더 이상 열아홉의 순수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자랑이 마무리 될 쯤 이면 화살은 자신들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것 같은 동창들에게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ㅇㅇ는 결혼 소식 없어? 오래 사귄 남자친구 있지 않았어?”
방금까지 대기업의 팀장과 결혼을 한다며 청첩장을 돌린, 콧대가 잔뜩 높아진 미희였다. 학생 때도 나와는 맞지 않는 부류라 생각했는데 그 때의 나는 아주 올바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달갑지 않은 자랑들을 들으며 겨우 지워낸 이야기를 단 한 마디로 끄집어내는 미희에 나는 내 앞에 놓인 맥주를 목구멍으로 털어 넣으며 싱긋 웃어보였다.
“헤어졌어.”
“뭐? 언제?”
“그냥, 꽤 됐어.”
“둘이 같이 작업한다고 그러지 않았어? 헤어졌는데도 계속 같이 하는 거야?”
미희의 눈이 커지며 속사포로 질문들이 날아왔다. 알게 모르게 입맛을 다시는 게, 아무래도 오늘의 표적은 나인 듯싶다. 쟨 남의 인생이 뭐가 그리도 궁금할까. 그것도 친하지도 않은 사람의 남자관계가. 원체 주변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나로선 도저히 이해 가지 않는 물음이었다. 굳이 목소리를 내며 대답해주고 싶지 않아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동창들의 시선이 전부 내게로 꽂혔다. 안쓰러워. 쟨 저 나이 먹고 헤어지면 어쩌자는 거야. 테이블 위로 오가는 말은 없었지만 흥미로운 시선들이 충분히 저들의 속마음을 훤히 말 해주고 있었다.
“그럼 결혼은 안 하게? 가사 쓰는 거 얼마나 번,”
저번 동창회에서도 부반장이었나, 누구한테 이러다 대판 싸운 걸로 아는데. 사람의 습성이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 번 증명해주는 셈이었다. 나는 결혼 문제를 넘어서 이젠 내 돈벌이 걱정까지 해주려는 오지랖 넓은 친구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미희야.”
“어?”
넌 뭔데 그렇게 남한테 관심이 많아. 라며 쏘아 붙이고 싶은 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무르디 물러터진 성격은 그럴 수 없었다. 그저 웃는 낯으로 또 한 번 상처 난 마음을 덮어갈 뿐이었다.
“결혼 축하해. 식장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생방송 있어서. 최대한 가 볼게.”
“어? 어어..와주면 고맙지.”
뭣도 모르고 벽을 치던 고등학생 때처럼 욕이라도 퍼부을 줄 알았는지 미희의 얼굴은 당황스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잔뜩 벙찐 동창이라는 사람들에게 대충 인사를 건네곤 급히 술집을 빠져나왔다.
술집 문에 매달린 맑은 종소리도, 유흥가의 시끌벅적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넓고 화려한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왜 우는지는 나 또한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냥 주체할 수 없이 눈에 가득 차 더 이상 버티지 못해 흘러내린 눈물이었다. 소리 내어 우는 법을 잊은 스물아홉의 나는 거칠한 손등으로 이를 닦아내며 걸을 뿐, 그 어떤 다른 행동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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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걷고 걸어 도착한 집 앞. 오는 길도 오늘따라 유독 험했다. 지나가는 오토바이에 쓸린 흙탕물이 하얀 남방에 튀질 않나, 연락도 자주 없던 엄마가 갑자기 전화를 해 선을 보라며 닦달하지 않나. 참, 일진이 사나워도 이 정도로 사납긴 힘든 날이었다. 눈물은 어느새 차갑게 식어 볼에 긴 자국을 냈고 운수 더러운 날의 클라이맥스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
배터리가 나간 건지, 아예 고장이 난 건지 * 버튼을 아무리 눌러보아도 미동조차 없는 도어락이 그 클라이맥스였다. 휴대폰 홀드를 켜 본 시각은 새벽 1시. 이 시간에 콜센터에 전화를 해봤자 돌아오는 건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삐 소리 후-’ 이런류의 기계음일 것이 뻔했다. 일단 오늘 집에 들어가긴 글렀고, 예전 같았다면 민현의 집에서 신세를 졌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재환의 집에 가자니 집 앞에 죽치고 있을 사생이 무서웠고, 마지막 남은 희망인 소이는 오늘 아침부로 일본 출장 중이었다. 좁디좁은 인간관계가 바닥까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우울해 할 힘도 없는 나는 결국 다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엘리베이터 속 거울에 비친 나는 더할 나위 없이 불행한 여자였다.
찜질방, 복작거리는 건 딱 질색이다. 모텔? 내가 굳이 비싼 돈을 내고 커플의 신음 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터덜터덜 걸으며 하룻밤을 묵을 곳을 생각해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결국 내 발이 닿은 곳은 집에서 조금 떨어진 놀이터였다. 아이들도 다 가고, 가을 밤바람에 끽끽 소리를 내며 홀로 움직이는 그네가 지금의 나와 별 다를 바 없어 보여 괜한 동정심이 느껴져 멈춘 발걸음이었다. 어색하게 그네에 엉덩이를 끼워 넣으니 그네는 더 이상 끽끽 소리를 내지 않았다. 무게가 실린 탓일까. 놀이터에서 유일한 소음이던 그네 소리마저 사라지자 한 밤의 놀이터는 완전한 정적 상태로 돌아왔다.
나 어릴 땐 모래가 대부분이라 흙장난이라도 쳤지, 요샌 다들 건강이니 뭐니 하며 우레탄으로 바닥을 바꿔 놓아 발장난 칠 모래도 없었다. 푹신한 바닥을 운동화 코로 몇 번 툭툭 치다 이내 내 시선은 높은 하늘로 향했다. 반짝 반짝, 눈치도 없이 빛나는 별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다 들어간 줄로만 알았던 눈물이 또 다시 제 모습을 드러냈다. 고작 별 하나에. 내가 이리도 감정적인 사람이었던가. 하며 하루를 곱씹어 보았다.
황민현의 미련 가득한 넌 아무렇지 않냐는 질문, 원치도 않는 동창회에서 동정만 잔뜩 받고 나온 나, 그 동정의 눈빛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던 나, 흙탕물로 엉망이 되어 버린 하얀 남방, 대출 이자를 갚으라는 은행의 문자, 선을 보라는 엄마의 재촉. 하나하나 나열하다보니 정말 극적인 하루였다.
뭣도 모르던 초등학생 땐 교복을 입으면, 교복의 마지막인 고3땐 대학만 가면 인생이 꽃 필 줄 알았다. 하지만 사회는 너무나도 각박했다. 사람 관계도 돈벌이도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었고 차가웠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따뜻하던 게 황민현이었고 그와의 관계였는데, 이젠 그것 또한 얼음장 마냥 차갑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진 나는 크게 휘청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힘겨운 하루를 버텨낸 내 눈가는 또 축축해져있었다. 안 그래도 힘든데 황민현 너는 왜 하필 오늘 그런 이야기를 해. 이번에도 역시, 소리 내어 울진 못했다.
“여기서 뭐해요. 날도 추운데.”
“......”
술이 들어간 건 내 쪽인데 느릿한 쪽은 성우였다. 느릿하고도 다정하게 물어온 그는 내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아무 말 없이 빈 그네를 차지했다. 작게 발을 구르며 그가 앉은 그네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레탄 바닥을 향하고 있는 내 시선은 달빛에 진 그림자만을 담아냈다.
"무슨 일 있어요?"
"......"
"라고 묻고 싶은데 대답해 줄 기운도 없어 보이네요."
나를 오래 본 사람도 잘 잡아내지 못하는 속마음을 이 남자는 어찌 그렇게도 잘 간파하는지.10년을 가까이 알고 지낸 민현도 재환도 눈치 채지 못하던 내 깊은 곳에 숨긴 상처마저 성우는 쉽게 알아채고 말았다. 만난 지 고작 한 달도 안 된 이 남자가. 하긴, 이 정도 눈치가 있으니 그 살벌한 방송국에서 살아남았겠지. 그에 대한 나만의 생각이 이어질 쯤, 그의 머리에 씌워져있었을 야구 모자가 내 머리에 푹 눌러앉았다. 순식간에 눈앞으로 드리워진 챙에 시선이 차단되었고 그의 나른한 목소리는 또 한 번 내 귀를 파고들었다.
"울고 싶을 땐 울어요. 어른이라고 울면 안 된다는 법도 없잖아요."
거짓 하나 없이 담백한 그의 한 마디는 눈꼬리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눈물의 기폭제나 다름없었다. 고작, 그 말 하나에 소리 없이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무릎을 적셔갔다. 우레탄 바닥만 보이던 흐릿한 시야에 그와 썩 잘 어울리는 하얀 운동화가 들어찼다. 그리고 툭하니 모자 위로 얹어지는 손. 아기를 달래듯 토닥이는 손길이 두 어 번 닿더니 이내,
"안아줄까요."
끝이 올라가지 않은 물음이 내려앉았다. 그 물음에 나는 긍정의 뜻을 내비칠 틈도 없이 그의 품을 찾아들었다. 길을 잃었던 어린 아이가 제 부모를 찾은 것 마냥 껴안은 형태였다. 그는 갑작스레 안긴 나에도 불구하고 투정 없이 어정쩡하게 안겨있던 나를 고쳐 안았다. 토닥토닥. 투박하면서도 섬세한 손길이 서툰 위로를 건네 왔다. 괜찮다는 말 한 마디는 찾아 볼 수 없었으나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는 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한 위로였다. 일전에 내가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었나. 아니, 내겐 그저 사랑이 필요했고 따스한 위로가 필요했다. 항상 부족했던 것을 예고도 없이 한 번에 받은 나는, 단단한 성우의 품을 더욱 파고들었다. 머리가 자라고 난 후,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운 밤이었다.
-
한참을 그의 품에서 엉엉 울어댔을까. 어느덧 눈물은 멈추었고 밀려들어온 것은 쪽팔림이었다. 이 나이 먹고 아이처럼 운 것도 모자라 친하지도 않은 직장 동료라 할 수 있는 남자의 품이라니. 심지어 내가 먼저 안았다. 갑자기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그의 넓은 가슴팍에서 두 눈을 끔뻑이기만 몇 번을 했다. 옅은 섬유유연제 향이 코끝을 맴돌 쯤, 그의 적당히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쪽팔리죠."
확신하는 듯한 말투. 묘하게 웃음도 섞여있는 물음이었다.
"...알면 이것 좀 풀어주세요."
내 예상대로라면 이제 그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품에서 놔주어야 맞았다. 그러나 내 예상은 아주 보기 좋게 빗나갔다. 허리를 감은 그의 손이 더욱 세게 감기며 그의 고개가 내 어깨에 툭 내려앉았다.
"나도 힘들었는데, 위로 좀 해줘요."
"저 그런 거 잘 못 해요."
정말 못해서 뱉은 말이었다. 누굴 위로해 본 기억이 언제가 마지막이더라.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는 지나치게 솔직해진 내가 우스웠는지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그냥 이것만 안 풀면 돼요."
길쭉한 손가락이 그의 허리에 감긴 내 팔을 톡톡 쳤다. 살짝 닿은 손끝에 찌릿 전기가 흐르고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람 빠진 웃음이 스며들었다. 더 이상 세게 안을 슨도 없다 생각했는데 그는 작은 틈조차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인지 나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나 또한 그 품을 깊게 파고들긴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포옹이 그저 위로의 의미인지, 다른 마음을 숨긴 것인지는 둘을 비춘 하얀 달만이 눈치 챘다.
주파수 105.2 MHz : 세 번째 이야기
"씻고 와요. 편한 옷 문 앞에다 둘게요,"
"...감사합니다."
"뭘요. 피곤하겠다. 얼른 씻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그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이곤 화장실 문을 닫았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의 화장실 치곤 제법 깨끗한 모양새였다. 익숙지 않은 샤워밸브를 이리저리 돌리니 금세 미지근한 물줄기가 흘러나왔다. 손끝을 적시는 느낌이 그리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아늑한 쪽이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한숨보단 자연스레 번지는 미소가 더욱 강했다.
거품이 흘러내려 따가워진 눈으로 용케 샤워용품들을 찾아내 깨끗이 씻었다. 팅팅 부었던 눈도 조금은 가라앉은 것 같고, 내내 눈을 갑갑히 감싸왔던 렌즈 대신 안경을 쓰자 작게 남아있는 붓기마저 가려진 듯 했다. 나는 눈두덩이 대신 띵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수건으로 축축한 머리를 틀어 올리고 향수 냄새가 배인 내 옷과 달리 산뜻한 섬유유연제 향기가 배인 그의 옷에 팔 다리를 끼워 넣었다. 피디님, 되게 말라보여서 별로 안 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헐렁했다. 헐렁하다 못해 어벙해 보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어쩌자고 친하지도 않은 외간 남자 집에 들어와 씻고 그의 옷까지 입고 있는 걸까. 고향에 계신 엄마가 아신다면 놀라 자빠질 일이었다. 물론 도어락이 고장 난 직장 동료에게 선뜻 집과 옷을 내어주는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냥, 좀. 아니다.
"도와준 사람인데 뭐 어때."
야근도 잦아서 집에 잘 없다고도 했고. 나 스스로 합리화를 하며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아직까지 머리에 남아있는 물기를 꾹꾹 짜내며 문고리를 돌렸다. 달칵, 소리에 그는 부엌에서 얼굴만 쏙 내민 채 나를 맞았다.
"다 씻었어요?"
"네. 옷이 좀 크네요-"
"그러게요. 저 방 들어가면 침대 있으니까 먼저 자요. 속 쓰리면 이거 마시구요."
그가 눈짓으로 가리킨 것은 노란 꿀물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입에도 대지 않았을 꿀물인데 이상하게도 자꾸 시선을 빼앗겼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정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가 화장실로 들어가 물소리가 흐를 때까지 멍하니 컵을 만지작거렸다. 꿀물의 적당히 따뜻한 온도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오니, 점차 눈꺼풀에 무게가 더해졌다. 딱 기분 좋을 정도인 밤의 노곤함. 성우와 닮은 노곤함이었다. 긴장이 절로 풀리는, 그런.
그렇다고 해서 벌컥벌컥 마실 마음은 들지 않아 온기만 전해 받고 있던 중, 욕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후덥지근한 수증기와 함께 물기를 머금은 그가 제 머리카락을 대충 털며 나왔다. 그의 시선은 빨래 건조대도, 제 방도 아닌 내 손에 쥐여진 채 하나도 줄지 않은 꿀물이었다. 내가 그 시선을 알아채기도 전에 그는 눈썹 한 쪽을 씰룩이며 질문을 던졌다.
"속 안 쓰려요? 왜 안 마셨을까."
"어, 아, 다 씻으셨어요?"
말을 더듬었다.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네, 그거 다 식었겠다."
"괜찮아요. 뜨거운 거 잘 못 마셔서요."
웃을 거라 예상했던 반응과 달리 진득하게 따라붙는 걱정 어린 시선에 열꽃이 피어오르는 듯 했다. 나는 그 꽃을 감추려 이미 식은 지 오래인 꿀물을 허겁지겁 넘겼다. 거짓말이었다. 뜨거운 걸 못 마시긴 개뿔. 한여름에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찾는 나인데 왜 고작 저 남자의 걱정을 덜어주려 내 취향까지 바꾸어버리는 건지.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 그 앞에선 툭툭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본능은 감출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었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미끄덩한 액체에 깨끗하던 내 미간엔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이를 알아챘을 땐 이미 그의 웃음보가 터진 후였다. 컵을 감싸 쥐고 있던 내 손이 그의 손에 의해 하나하나 떨어져나갔다. 손끝에 닿은 그의 따스한 온기에 겨우 가라앉혔던 열꽃은 도로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으로 옮겨간 컵이 아일랜드 식탁에 놓이자 반 쯤 남아있던 꿀물이 옅게 찰랑였다.
"싫어하는 거 억지로 마시지마요. 그러다 체 해."
존댓말과 반말이 교묘하게 섞인 다정한 말투. 옅게 찰랑인 것은 비단 꿀물만의 몫이 아니었다. 잔잔한 호수나 다름없던 곳에 작은 돌멩이가 던져진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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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륵 ㅇㅇㅇ 성우네서 3일이나 지낸대요~~~~꺄핳 다큰 남녀가 한 집에 어머어머 그나저나 ㅇㅇ의 힘든 하루가 잘 그려졌는지 모르겠네요 가끔은 저렇게 다 울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나저나 분량도 짧고 내용도 우울우울하고..이해 좀 해주시와요...주말 내내 실기시험 보러 다녔는데 아주 거창하게 말아먹었거든요 하하하하핳 다음편은 분량 많이 뽑아서 들고 오겠습니당 그럼 굿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