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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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와서 죄송해요...
비축분도 만들고 묵혀뒀던 수위도 찌고 메이플도 하고(....)하다보니 늦었네요ㅠㅠㅠㅠㅠㅠㅠ
대신 오늘부터 학연이 나와요!!!!
(아싸 나도 신난다)
04.
든거라곤 먼지뿐인 가방이 무겁다고 느껴질 만큼, 택운은 존나게 뛰었다. 우라질.... 흐릿하게나마 정상적으로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무렵 그제서야 택운은 뜀박질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자 저도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유치원 때부터 성폭행 예방교육의 단골멘트는 싫어요 안돼요 하지마세여!!!! 였다. 머리가 조금 굵어지고 나서는 그런 말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지. 대처는 잘했으나 실전은 처음인지라 택운은 너무 놀라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 풀어진 교복셔츠와 마구 헝클어진 머리, 가파르게 몰아쉬는 숨. 이건 누가봐도 성폭행미수 피해자의 몰골이었으므로 택운은 주저앉은 채로 교복을 갖춰입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쯤이더라.
"....정택운?"
시발 좆됐다.
이곳은 교무실 앞 복도였다. 얼마나 놀랐으면 계단을 그렇게 많이 뛰어내려와놓고 여기가 교무실인 줄도 몰랐을까. 그런데 저 목소리는 누구지, 택운이 뒤를 돌아보자 막 교무실에서 나온듯한 남학생 하나가 택운에게 뛰어오고 있었다. 나는 너를 모르는데, 너 대체 누구니. 이 상황에서 그 대사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뭐야, 너 왜 그러고 있어? 괜찮아?"
"누구...."
"...지금 그건 별로 안 중요하니까, 일단 일어나자."
남학생이 택운의 양 팔 사이에 손을 넣어 택운을 일으켰다. 나 다친 거 아닌데...라고 볼멘소리로 말하려던 택운은 곧 짧은 순간 입을 다물고 있었던 자신을 칭찬했다. 왜냐하면 발목이 밖으로 꺾일만큼 미친듯이 뛰어왔던 터라 지도 모르는 사이 다리를 삐었기 때문이다. 휘청거리는 택운을 남학생이 놀라운 순발력으로 잡아 부축했다. 근데 나 얘 진짜 처음보는데.
"존나게도 삐었네....보건실 가자, 업혀."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자신보다야 약간 작았지만 남학생은 키가 꽤 컸다. 이제보니 서글서글한 눈도 제법 또랑하니 잘생겼고, 보기좋게 그을린 피부는 섹쉬한 구릿빛이었다. 택운이 아무리 호모...는 아니고 바이라지만 다시는 남자 안 만날 거라고 한상혁한테 말해뒀는데. 첫눈에 이렇게 호감을 느낀 상대는 여자남자 통틀어 얘가 처음이었다. 하긴,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건 반칙이다.
남학생이 택운을 들처업고 보건실 문을 열었을 때, 선생은 없었다. 하긴 아무도 없는데 여길 지키고 있을 이유는 없지. 남학생은 구석에 있는 침대에 택운을 앉히고 다리를 뻗게 했다.
"파스 뿌릴게."
"냄새 싫은데...."
"어쩔 수 없어, 이게 제일 직빵이라."
벌겋게 부어오른 발목에 파스를 꼼꼼히 뿌리고, 압박붕대로 단단히 테이핑하는 솜씨가 영 한두번 해본 실력은 아닌듯해 물어보니 그냥 지가 자주 다쳐서 셀프로 하다보니 늘었단다. 나도 자주 다치는데 왜 난 저런 거 모르지. 택운은 그냥 눈만 도록도록 굴려댔다.
"근데....너 진짜 나 아냐?"
"와 존나 너무한다, 정택운."
"왓?"
"우리 이제 같은반이잖아. 난 임시반장이고."
"...헐...."
그랬다. 옆자리의 이재환이 꼴보기싫어 하루종일 고개 처박고 잤더니 재환과 상혁 외에 다른 애들 얼굴도 한번 훑어보지 않은 탓이었다. 당연히 임시반장이 누군지도 몰랐다. 택운이 순간 미안하고 쪽팔려서 고개를 푹 숙였더니 낮게 웃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3학년인데 나 한번도 본 적 없어? 난 너 오다가다 몇번 봤는데."
"...사람 얼굴...기억 잘 못해서....."
진짜다. 한상혁은 정택운보고 너 안면인식장애 있는 거 아니냐고 진지하게 병원 좀 가보라는 말까지 했었다.
"당연히 내 이름도 모르지?"
"...어."
"차학연이야, 내 이름."
차학연. 학연이 말을 마치고 택운을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존나 잘생겼다....이 학교가 언제부터 이렇게 꽃밭이었지. 택운이 그저 멍하니 정신을 놓고 학연의 얼굴을 감상했다. 학연이 다 감아진 붕대에 테이프를 두 개 붙여놓고 불편하지 않냐며 택운에게 물었다. 확실히 아까보다 조금 편해진 느낌이 들어 택운이 괜찮아, 고마워. 짧게 대답했다.
"근데 있잖아...."
"어?"
"아까 왜...그러고 있었어?"
혹시.....학연이 말끝을 흐리자 당황한 택운의 머리가 멍해졌다. 자신을 들어올려 눕히던 이재환, 웃는 낯으로 옷을 벗기던 이재환, 무지막지한 힘과 함께 드러난 팔뚝.
"....정택운....?"
순간 존나 쪽팔리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한방울 흘러내린 눈물은 겉잡을 수 없이 번져만 갔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울어제끼는 택운을 본 학연이 당황하며 택운을 끌어안았다. 미, 미안해 내가 괜히 물어본거야? 응? 울지마....괜찮아 괜찮아. 순간 안긴 품이 너무 아늑하고 안심이 되서, 택운은 그 후로도 조금 더 울었다. 이유도 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택운이 짜증날 법도 한데 학연은 택운의 곁을 묵묵히 끝까지 지켜주었다.
+
「택운아, 여기여기!!」
아마 한상혁이 짝 진행을 맡아 애정촌에 눌러앉는 게 맞을 거라고, 택운은 그때도 지금도 쭉 생각한다.
검은색 스냅백을 눌러쓰고 회색 나이키 후드집업까지 머리에 뒤집어쓴 택운이 고개를 푹 숙이고 양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호프집에 들어섰다. 상혁은 웬 범죄자 한마리가 나왔냐며 비난했지만 개의치 않고 다리를 쩍 벌린 자세로 의자에 앉자마자 익숙하게 맥주잔을 집어든 택운의 눈에 그제서야 낯선 이가 들어왔다. 생각해보니 얼굴만 보면 중딩인 상혁이 술집을 혼자 뚫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국적인 얼굴에 튀어나올 듯 큰 코. 음, 어디서 봤는데.
「......얜 누구.」
역시 안면인식장애.
「어제 봤잖아, 편의점에서.」
「편의점....아, 걔. 안녕. 근데 얜 왜?」
지나치게 시크한 자세로 맥주 500cc를 숨도 안 쉬고 벌컥벌컥 들이켜는데, 재환은 그 모습을 놓칠세라 택운의 얼굴을 뚫을 기세로 무섭게 쳐다보았다. 옆에 있던 상혁이 무안할 정도로 보는데 정작 당사자인 택운은 신경도 안 쓰고 앞에 놓인 새우튀김 하나를 집어 입에 넣는다. 잘되게 해준다고 불러내긴 했는데 이대로 진행하기엔 이재환이 너무 불쌍하다.
웬만하면 당황하는 법이 없는 상혁도 불알친구의 무신경함에 치를 떨었다. 나가죽어라 븅신아, 정택운 너는 평생 연애하긴 글러먹었어. 그냥 하던대로 솔로부대 대대장이나 계속 해.
「잘생겼네, 이름 뭐냐?」
의외로 택운이 먼저 이름을 물어보는 것에 놀란 상혁이 어버버하는 사이 재환이 빠르게 치고나왔다. 빅스고 2학년 이재환이라고 해. 야 이새끼야 그건 초등학교 2학년 버전이잖아.
「학원에 친구 없냐? 왜 하필 한상혁이랑 다녀?」
「미친....경우없는 새끼.」
「친구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어떡해 상혁아, 괜찮니 택운아? 신경쓰지 마.」
재환의 망언에 상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미친놈, 이재환한테 너는 코도 크고 머리도 큰데 좆은 왜그리 좆만하냐고 막말을 들은 게 바로 엊그제였던가......
상혁과 재환이 서로를 신나게 노려보든 말든 택운은 맥주를 음료수 마시듯 시원하게 원샷 때렸다. 아, 이맛이야. 재환이 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상혁에게 갖다바친 상납금이 얼만지 택운이 알 턱이 없었다. 피같은 전화번호부를 털어 제 어장에 팔딱팔딱 살아숨쉬고 있던 금붕어들을 랜첨해 넘긴 것도 한 여덟 마리는 될거다.
「야, 한잔 따라봐! 씨발, 여자 없으니까 이재환 너라도 술시중 들어.」
「호호호 정사장님 요즘 왜이리 뜸하셨어요, 보고싶어서 뒤지는 줄 알았잖아.」
급하게 마신다 싶더니 벌써 취해버린 택운의 횡포도 적당히 개드립으로 받아주며 술을 따르는 재환은 상혁이 보기에 이미 헬 게이트로 들어선 것 같았다. 인연이 있다면 굳이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알아서 지지고볶고 박고싸고 다 하겠지 뭐.....상혁은 슬슬 올라오는 술기운에 머리를 한번 짚고 일어섰다. 술에 꼴아버린 택운의 멍한 시선이 상혁의 동선을 따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갔다.
「우이효기....어디가아?」
술만 먹으면 혀가 두동강나는 우리 정택운 어린이.
「집 간다, 왜.」
「지입....나도 갈래, 나도나도.」
「넌 우리집 가야지, 택운아.」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재환은 매우 자연스럽게 택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랬다. 상혁은 아무리 개같은 친구지만 지금 이재환이 데려가게 하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억지로 택운을 떼어냈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재환의 지갑으로 계산을 한 상혁은 완전히 맛탱이가 간 택운을 부축하며 재환에게 이렇게 속삭였더랬다.
「.....애 의식은 있을 때 해, 변태새끼야.」
쉽게 말하자면 정택운은 한상혁한테 졸라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할까. 어차피 동정을 따인 건 동일인물이지만 최소한의 로맨스와 순정은 지켰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한상혁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은 이재환이 첫만남에 아다 딸 만큼 쓰레기는 아니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