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새를 못참고 자냐. 나중에 잠 좀 푹 재워야겠네. " 귓가에 들릴듯 말듯 홍빈이의 혼잣말이 들리면서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니 어느새 주차장이었어. " 수고했어.. 아 피곤해 " " 새벽까지 잠을 안자니 당연히 피곤하지. " " 그런가. 헤. " " 어디가서 그런 식으로 웃지마라. " " 별로 안 설레. 너 그 말 니 전여친한테 했던 말이잖아. 니가 그 말 해줬더니 걔가 엄청 좋아했다며. " " 어,어? 내가 언제? " " 모르겠다. 엄청 최근이었는데.. 그 여우랑 사귀기 직전이었나 아무튼.. " " 잠이 덜 깼네. 더 잘래? " " 너 벌벌거리는거 다 티나. 니가 이래서 차이는거야. " " 저기요. 착각하시나본데. 아직 사귀자고 안했거든요? 여친병 얼른 고치시죠? " " 난 너 남자친구라고 한 적 없는데? 누가 그래 내가 니 여친이라고? " " 진짜? 너 그 말 후회 안 해? " " 한 번 뱉은 말에 후회를 왜 하냐. 충분히 생각하고 뱉었는데. " " 두고봐. 내려 일단. " " 아 네네. " 살살 이홍빈 심기를 긁으니 분해 죽겠다는 듯이 널 노려보다 이내 백원을 꺼내 카트를 뽑았어. " 운전은 니가. " " 응? " " 내가 여기까지 운전했으니까 카트는 니가 운전하라고. 알아들었냐? " " 예예.. " 아니 카트를 맡길꺼면 제대로 너한테 밀라고 하던가, 이리로 가네 저리로 가네 옆에서 계속 깐족대다가 결국 너한테 정강이를 까이고서야 시무룩해져서는 네 뒤를 툴툴거리며 쫓아오는 홍빈이야. " 이쪽. 나 시리얼 사야 돼. " " 왠 시리얼? 어떤거. " " 이거. 그래놀라 이거. " " 워워. 깝치지말고 높이 있는건 나한테 시켜. 괜히 떨궜다가 터져서 보상할라. " " 아픈 기억 또 꺼낼래? 하지마라 " 고등학교때 한 번 둘이 마트 갔다가 니가 높이 있는 통조림을 못꺼내고 떨어트려서 고스란히 홍빈이 돈으로 보상을 했었거든. 그때를 생각하니 괜히 예전에 이홍빈 모습도 생각이 나고, 그래서 너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어. " 난 이거. 이거랑 이것도 사고.. " " 아 왜이렇게 많이 사! " " 내 카드로 살껀데 뭐. " " 에? 그럼 내거는. " " 같이 하면 되잖아. " " 신세 지는거 딱 질색인데. " " 군만두 시식하러 가야지- " 곤란한 말은 싹 끊고서 카트를 끌고 군만두 시식코너로 가더니 딱 봐도 비싸보이는 만두를 맛있다고 먹고 있는 홍빈이가 보여. 쟤 저거 백퍼센트 사자고 할텐데. " 빵니아서 머거바 " 녹말 이쑤시개에 딱 봐도 뜨거워보이는 군만두를 꽂고는 후후 불어서 네 입 안에 넣어주는 홍빈이야. 넌 뜨거워서 씹지도 못하고 뒤돌아 먹고 있는데, 이홍빈 이거이거 하는 말 좀 보세. " 신혼인가봐? 좋을때네 남편이 직접 먹여도 주고! " " 그쵸? 근데 아직도 제 소중함을 모른다니까요. " " 이거이거 이뻐서 만두 하나 더 붙여주는거야. 잘 살아요- 응? " " 감사합니다! 아주머니도 많이 파세요- " 다른 코너에 가서도 팔짱까지 끼고는 계속 부부행세를 하는 이홍빈 때문에 넌 말문이 막혀버렸어. 계속 너희를 보고 웃는 아주머니들 때문에 아니라고 반박도 못하고, 여자친구도 모자라 부인이라니. " 이홍빈. 디지고 싶지. 말은 똑바로 해라. 너 나 여자친구로도 생각 안한다며. " " 저렇게 해야 하나 더 받지. " " 고작 서비스 하나 받자고 넌 스무살인 나를 유부녀로 만들어? " " 니가 늙어보였나보지. 현실에 맞춰서 살아라 좀. " " 마트에서 정강이 까여봐야 정신 차리지? " " 니방에 전등 하나 나갔던데. 이거 맞겠지.. " "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 " 아까 밥할때 보니까 도마도 하나 사야 하고.. " " 야. " " 앞치마도 하나 살까? 커플로 맞춰서? " " 아주 우리 집에 와서 살겠다? " " 어디가 화날 시점이었지. 커플이 그렇게 화날 말인가. " " 진지하게 고백도 안하고 무슨 커플이야 " " 꼭 고백해야 커플인가. " " 적어도 나랑 사겼던 남자들은. 다 고백해줬는데. " " 아 그때 그 미친 오타쿠새끼랑 그그바리스타 준비하던 미각고자? " " 말 예쁘게 한다며. " " 그 오타쿠는 너 피규어보고 접근했었잖아 니 그거 안 날 나 붙잡고 졸라 울고 " " 이홍빈. " " 그 바리스타 그새끼는 지 미각 잘 못느낀다고 니한테 커피 마시게 했었지 아마? 그래서 니 불면증 오고 " " 그만해. " 더 있다간 소리라도 지를 것 같아서 카트도 내버려둔 채로 다른 곳으로 와버렸어. 감정을 추스릴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 아직 그렇게 아픈 기억을 되짚기엔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먹지도 않을 어묵꼬치를 사서 푸드코트에 앉은 너야. 생각해보면 니가 힘들때 옆에 있던건 남자친구도 그 누구도 아닌 이홍빈이었는데. 그동안 홍빈이의 존재를 너무 당연하게만 생각한게 아닌가 자꾸만 드는 미안함에 핸드폰을 켜서 자연스럽게 홍빈이의 번호를 눌러. 치다보니, 번호도 외웠네. - 너 어디야. 내가 미안해 집 간건 아니지? " 1층 푸드코트야. 어딜 가 내가. " - 아, 너 보인다. 끊어 많이 걱정한 듯 머리를 쓸어올리며 너에게 뛰어오는 홍빈이가 보이는데, 이홍빈이 한 미안하다는 말 때문에 홍빈이에게 더 고마운 너야. 지가 뭘 미안해. " 왠 좋아하지도 않는 오뎅? " " 어묵. " " 아, 아 맞다. 어묵. " " 그냥. 시켜버렸네. 너 먹을래? " " 아직 안 식었네? 그럼 먹지 뭐. " 아무 일 없었다는듯이 웃으며 어묵을 먹는 홍빈이를 찬찬히 보니, 예전에는 그냥 아 잘생겼어 하고 넘겼던 말들이 헛된 말이 아니구나를 느끼는 너야. 물론 이홍빈이 자기 얼굴에 자부심을 갖는 것도 왜인지 알겠고. [ 엄마 사랑하는 딸. 할 얘기 있는데 언제 들어오삼?~ㅋ ] " 이모? 들어오래? " " 응, 할 말 있다는데? " " 우리 상견례날ㅉ " " 죽어 니 진짜 " " 태워다줄게. 얼른 가자. " " 너도 온다고? 우리 집을? " " 내가 남이냐 " " 그럼 남이지. 가족이냐? " " 치사하게 그럴래? 확 키ㅅ " " 에에에 안들린다 에에에에에 " " 널 누가 말리겠어. 가자. " 그렇게 부부라는 오명만 잔뜩 뒤집어 쓰고 지옥같던 마트를 나왔어. 그런데. 진짜 지옥은 앞으로 펼쳐질 것이라는 걸. 그때까진 알지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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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올리다 날아가버려서...후 핸드폰으로 글쓰면 안좋다는게 왜인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다들 즐거운 설 명절 보내셨나요? 2014년 한 해도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