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물건을 가져왔네?"
라지엘의 날카로운 눈빛이 엔의 몸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가듯 움직였다. 홍빈은 라지엘의 말을 듣고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다시 밀려있는 자신의 업무를 볼 뿐이었다. 라지엘의 행동에 흥미가 있는 쪽은 오히려 쇼파에 앉아 상황을 살피고있는 엔이였다. 자신을 꿰뚫어 보는 눈빛의 엔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저 자가 대천사 라지엘이라는 것을. 라지엘은 천계와 지상계의 모든 비밀을 알고있는 천사, 다른 천사들에게는 '비밀의 영역과 지고한 신비의 천사'라 불렸다. 그것은 곧. 라지엘의 앞에서는 어떠한 비밀, 거짓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뜻했다. 엔이 일부러 가식을 담아 라지엘에게 야살스레 웃어보였고. 엔의 의도를 아는 라지엘은 엔을 비웃을뿐이였다.
"엔은 반인 마족 캄비온이야. 물론 알고 있었겠지만."
라지엘과 엔이 끊임없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어느새 자신의 업무를 다 마쳤는지 책상 위에 서류를 차곡차곡 정리한 홍빈이 라지엘을 쳐다보며 말했다. 홍빈의 견고한 표정을 본 라지엘의 인상이 구겨졌다. 엔은 여전히 라지엘을 보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엔을 '인간'으로써 우리가 보호한다. 그게 내 생각이야, 라비."
"하지만 저 자는!,"
홍빈씨. 라비씨와 잠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요. 라비의 말을 끊으며 자신에게 웃어오는 엔과 짜증난다는 듯이 인상을 꾸기며 엔을 째려보고 있는 라비를 번갈아 본 홍빈이 정리한 서류를 챙겨 문고리를 잡았다. 둘이 잘 얘기해 봐. 난 아직 밀린 일이 많아서. 홍빈이 자리를 뜨고 엔과 라비만이 남은 방에는 지독할만큼의 정적이 찾아왔다.
서류를 챙겨들고 방을 나온 홍빈은 일이 많다던 말과는 달리 하릴없이 신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기만 했다. 한참을 돌아다니고 나서야 겨우 신전 뒷구름의 자리를 잡은 홍빈이었다. 라비는 아마 캄비온인 엔을 믿지 못 해서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것일 것이다. 엔은 평범하게 살고싶어하는, 엄연히 천사들이 보호해야할 인간의 피를 물려받은 '반인'일 뿐인데 말이다. 엔이 잘 설득하겠지? 생각을 마친 홍빈이 일을 많이 해 뻑뻑해진 제 눈가를 자신의 손등으로 덮었다. 어느새 홍빈 자신도 모르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이미 '엔'의 존재 자체를 신뢰하려 하고 있었다.
*
중심을 잃고 쓰려졌다 다시 몸을 일으켜 뒷짐을 진 켄의 얼굴은 이미 생채기와 멍들로 가득했다. 옆 쇼파에 앉아 안쓰러운 듯 표정을 굳히고 켄을 바라보는 혁이 있었다. 아이가 없는 성에는 등골이 오싹할만큼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자신의 자리에 앉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난 켄을 무심하게 보던 마왕이 한 번 더 검지를 움직였다. 이번엔 배를 구타 당한 켄이 숨을 급하게 들이쉬며 제 배를 잡고 무릎을 꿇었다. 아, 저거 진짜 아픈데. 전에 한 번 맞아본 기억이 있는 혁에게도 고통이 전해지는 듯 했다. 더 이상 켄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 하고 바닥의 시선을 고정시켜버린 혁이 의자 등받이의 몸을 기대는 마왕의 기척을 느끼고서야 쓰러져있는 켄에게 다가가 팔을 제 어깨에 둘러 켄을 일으켜 부축했다.
"지금부터 단 하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 아이를 찾아와. 흩어진 마족을 동원해서라도. 나를 동원해서라도."
"..알겠, 습니다."
힘겹게 말을 뱉은 켄이 혁의 부축을 받아 마왕의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마왕의 표정이 미묘했다. 애정, 증오, 갈구를 넘어선 그 어떤 것.
켄의 방으로 켄을 데려다준 혁이 한숨을 쉬며 켄을 침대에 늬였다. 침대 옆자리의 자신도 앉은 혁이 팔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켄을 쳐다보았다. 켄의 걱정이 들긴 했지만, 그게 다 부질 없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는 혁은 딱히 켄을 위로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않았다. 저 끈질긴 자식은 어떻게든 사라진 엔을 찾아내어 악착같이 자신의 훼손된 명예를 도로 돌려놓을 것이니까. 그것이 켄이 사는 이유이자, 자기 자신만의 신념이니까. 그것이 오랜 시간 동안 같이 지낸 혁이 깨달은 켄의 본 모습이니까.
"그래도. 꼬맹이를 건든 건 용서가 안돼."
켄의 몸 위에 올라타 자신의 손자국이 벌겋게 남을 때까지 켄의 목을 조른 혁이 쿨럭대는 켄을 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나아, 필요하면 부르고. 계속해서 쿨럭대는 켄을 뒤로한채 혁이 켄의 방을 나섰다. 한참이 지나서야 기침을 멈춘 켄의 눈꼬리에는 눈물이 조금 매달려있었다.
엔이 마왕과, 혁. 그리고 켄까지 주위 모두를 변화 시켰다는 걸 눈치챈 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
"가능하다는거 알고있잖아요. 대천사, 라지엘씨."
이번엔 진심을 담아 자신을 보며 웃는 엔을 본 라비의 얼굴이 차오르는 분노를 어찌하지 못 하고, 벌겋게 붉어졌다. 당장이라도 엔의 사지를 찢어버리고 싶은 제 마음을 꾹꾹 눌러담는 라비의 주먹을 말아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거절하셔도 상관 없어요. 지금 죽으나, 그 때 가서 죽으나. 결말의 내용이 조금 달라질뿐. 결과는 같으니까요."
엔의 미소는 사악한 미소는 흡사 타락 천사들의 그것이었다. 급기야 라비의 눈에는 눈물이 차오르기까지 했다. 흐르지는 않지만 당장이라도 떨어질듯 그렇게 가득 고여있었다. 자신의 말이 다 끝난 듯 방의 문고리를 잡는 엔을 다급하게 라비가 붙잡았다.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결말까지 내가 데려가주지."
결국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 한 라비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을 꼭 감았다. 대천사, 라지엘. 막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라비의 눈에 고여있던 눈물들이 결국은 라비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전히 엔은. 웃고 있었다.
전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바꿀겁니다. 그게 뭐든. 모두.
다른커플링이 살짝 등장할지도 몰라요! 누군지는 안알랴줌!헿헿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