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이 되뇌이다
나의 품에 안기어 울던
어릴 적 네 자그마한 손등
달빛 아래 바래지던
이슬 젖은 입맞춤
어렴풋이 되뇌이다
연날리는 은행 아래
봄눈 오롯이 맞으며
그저 가만히 미소짓던
어깨 너머, 너의 환영
-소리꾼, '봄, 어깨'
봄비가 내린 길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쉴 새 없이 질척였다. 잠시 제자리에 멈추어 선 김씨가 발끝에 달라붙는 젖은 흙더미를 맨손으로 쓸어내었다.
갓 동이 튼 하늘은, 여즉 노을빛이 채 가시지 않아 노르스름히 물들어 있었다. 새벽의 하늘은 이토록 묘하다. 마치 밤하늘 같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옷깃 너머로 흘러드는 찬 바람을 막기 위해, 단단히 가슴 쪽의 천을 여미었다.
김씨가 한숨을 몰아 쉬었다. 한 시진 정도를 걸어 왔으나, 길은 도무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황성에서 한성까지의 거리가 그리 얕지 않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성의 의금부로 찾아가, 한상혁이라는 자를 찾거라.
조용한 음색으로 저에게 명령하는 태양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으나,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었다.
태양궁으로 불리어 간, 정택운이라는 자와 연관된 일이로구나. 그저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어쩐지 뿌리칠 수 없는 불길함이 온몸을 잠식해 나갔다.
궁 내부의 일을 제법 빠삭히 꿰뚫고 있던 자신이었기에, 정택운이란 자의 출신은 진작에 알고 있던 참이었다.
청하 이홍빈의 손 아래에 있는 의문의 사내. 일단, 이홍빈과 연관되어 있는 자라는 사실만으로도 탐탁치 않았다.
혹여 태양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까. 우려가 확신으로 변하기까지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누군가를 향한 애정으로 가득 차버린 태양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하마터면 진한 한숨을 내쉬어 버릴 뻔 했으니.
태양에게 아뢰옵고 싶었다.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를 향한 애정으로 당신의 가슴을 채우지 마십시오.
그러나, 못난 주둥이는 감히 태양을 향해 이런 저런 언질을 할 수 없었다.
그런 눈은 처음이었다. 오랜 시간, 태양 차학연의 곁에 머무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눈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잠시나마 일지라도, 그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은 무의식적인 마음이 제 입을 닫게 한 것일지도.
말을 타고 가면 좋으련만, 은밀한 암행이라 요란스레 움직일 수 없는 노릇이니 그러지 못한다.
짐을 고쳐 매고 부지런히 발을 떼었다. 어서 빨리 중간 지역의 마을에 도착하지 않는다면, 날이 어두워져 위험할 것이다.
도적이나 산짐승이 즐비하는 곳이라, 제 아무리 무술에 능한 본인이라 할지라도 생사는 장담하지 못할 테다.
숨을 고르고, 잰 걸음으로 길을 가는 김씨의 미간이 순간 일그러졌다. 등 뒤에서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알을 굴렸다.
웬 놈이 훤한 대낮부터 제 주위를 치근덕대는 것일까.
슬그머니 소맷자락에 감추어 놓은 칼자루를 쥐었다. 녀석의 몸놀림을 느껴보건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감지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들고 계속해서 걸었다. 그러자, 역시나 의문의 인기척이 오롯이 제 등 뒤를 곧바로 따라 붙었다.
정면을 바라보니, 어느새 내리막길에 다다랐다. 이 내리막길만 넘어서면, 혜화 마을에 닿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자가 노리는 것이 제 자신임에 확실하다면, 분명 마을까지 순순히 도착하게 하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만이.
김씨의 강직한 등이 빠른 속도로 돌았다. 실처럼 가늘게 뜬 눈은 예리했다.
칼을 들고 싸움 태세를 갖추었으나, 어쩐 일인지 제 앞은 휑하기만 했다. 그저 다람쥐 한 마리만이 깨작이고 있을 뿐.
마치 허허벌판을 연상시키는 허무한 광경에, 김씨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긴장을 한 탓인가, 다람쥐 한 마리를 도적으로 의심하다니.
힘없는 실소를 자아내고서, 짐을 주워 들기 위해 몸을 숙이었다.
……… 잠깐.
"… 윽!"
늦은 깨달음 뒤에, 김씨의 억눌린 신음이 터졌다. 옆구리를 파고 드는 날카로운 고통에, 서서히 몸이 무너져 갔다.
무채색의 장옷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갔다. 바닥에 흩어지는 혈흔이 길게 늘어졌다.
입가에 고인 피를 어찌하지 못하고서, 벌겋게 충혈된 눈을 가까스로 돌렸다.
까만 옷을 입은 사내가, 무너져 내리는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낯이 익은 듯한 그 얼굴에 김씨의 창백한 입술이 파르르 떨리었다.
"…… 너는…!"
"……."
"……그러한가. 이홍빈이…, 나를, 살해하라 하더냐."
"……."
"참으로 질기다. 청하, 그 자도……."
남자는, 이홍빈의 최측근에 머물고 있는 시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시야가 가물가물해졌다.
저를 죽이라고 한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정택운의 이복 형제를 찾으라던 태양의 말씀에 암행을 하고 있던 저를, 도대체 왜.
기어코, 태양을 막으려는 것이냐. 청하 이홍빈.
"…… 크나 큰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라고."
"……."
"네 주인께 그리 전하여라………."
중심을 잃고 쓰러진다. 차마 눈꺼풀을 닫지도 못한 채, 김씨는 그렇게 축축한 바닥 위에 몸을 뉘였다.
미동 없이 김씨를 바라보던 시종의 고개가, 천천히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려졌다.
어두워지고 있었다. 점점, 더.
-
흐릿했다. 갓 눈을 뜬 택운에게, 빛이란 익숙치 않은 것이었다.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킨 택운에게, 다정한 목소리가 닿았다. 여전히, 변함없는 따스함이었다.
저를 바라보지 않고서 말하는 학연의 등이, 참 아름답게 뻗었다고 생각했다.
"일어났느냐."
"……."
"종일 눈을 감고 있더구나. 혹여 몸이라도 아픈 것이냐?"
"…… 아닙니다."
"그렇군."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띤 학연이, 문득 아, 하는 탄성을 지르고서 택운에게로 고개를 돌리었다.
수척한 양볼이 마음에 들지 않아 혀를 쯧, 차보이고서, 말을 잇는다.
"너는, 여인이 아니지 않더냐."
"……."
"어째서, 치마를 입었느냐."
"……."
이홍빈이 그리했으니.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내뱉지 못하고서, 그저 조용히 학연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서책을 넘기었다.
학연의 마지막 한 마디만이, 향초의 내음에 묻혀 흩어졌다.
너는 여인이 아니라 사내이니.
사내로서, 너를 다시 보고 싶구나. 택운아.
나는……….
나는.
진정, 사내가 맞는 것입니까……?
택운의 마지막 한 마디는, 향초가 아닌 제 입술 속에 묻혀 조용히 바스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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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머리 박겠습니다. 쾅 쾅 쾅 (피를 흘린다) 왕의 남자.. 왕의 남자.. 죄송해요... 뼈를 묻고 반성하겠습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헝헝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내용도 모조리 다 구상해 놨는데, 왜 이리 글이 써지지를 않던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사죄의 말씀 올리겠습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기다리신 독자님들 죄송합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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