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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
이성열을 그렇게 정의할 수 있었다. 그저 그 한 마디만으로 김명수가 이성열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을 정리 가능했다. 어쩌면 김명수는 이성열을 사랑해야만 할 운명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마음이 한순간에 이렇게까지 움직일 리 없었다. 명수는 운명론자가 아니었지만, 성열의 한 마디를 들은 직후부터 그대로 그에게 빠져 버렸다. 어쩌면 그의 얼굴을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예감했을 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존재를 알지도 못하면서 사랑에 대한 장편을 집필했으니까. 생전 처음 들었던 칭찬과, 그의 우는 얼굴이 한없이 아름다웠다.
M이, 아름다워서요.
나를 아름답다고 말해 주었다.
그것도, 첫번째로.
이미 그것을 들은 순간부터 김명수는 이성열에게 반해 있었다.
명수의 심장은 더 이상 차갑게 식어있지 않았다.
너 요새 좀 변한 것 같다.
호원의 말에 명수는 그대로 답했다. 이성열에게, 반한 것 같아. 호원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네가 이성열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명수는 웃고 있었다. 처음 짓는 미소였다. 더러워도 괜찮아. 좋으면 그만이니까. 호원이 명수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야? 다시 던져진 물음에 명수는 분명하게 그래, 난 사랑에 빠졌어. 하고 대답할 수 있었다.
" 우는 얼굴이 예뻐. "
"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건데? "
" 글쎄,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
아니 그냥 걔가 웃었으면 좋겠어. 호원은 예측했다. 그는 이성열이라는 마약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두번 다시는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명수 또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서서히 지옥의 한가운데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감정이 생겨난 대신 지상과 영원히 안녕하는 길을 택한 그의 미래는 이제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명수는 같은 길을 선택했을 것이 뻔했다.
열다섯의 봄,
명수는 성열과 같은 반이 되었다. 일찌감치 온 학교에 종일 엎드려 있었던 이유는 옆자리라 적혀져 있는 벽보 때문이었다. 성열을 확인하기 위해 계속 기다렸다. 쭉 엎드려 다음 작품을 쓰고 있는 명수는 계속 단락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명수는 누군가의 기척이 제 옆자리를 가득 메운 사실을 알았지만 한동안 말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선생의 경고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서서히 타이밍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명수는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얼굴은 여전히 음울했고 아름다웠다.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고개를 돌리는 모양새가 여실히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곧, 명수는 준비해 두었던 말을 꺼내었다.
"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 … 뭐? "
" 프랑스의 극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마약 재판에서 했던 말인데, 결정적으로 그녀는50대의 중년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개소리를 한 셈이지."
사강은 훌륭한 극작가였으나 제대로 된 정신머리는 없었던 모양이다. 50대의 갱년기였는지 본래부터 그랬는지 모르지만 말년의 중년 여인은 자신이 코카인 복용을 했다는 사실로 재판을 받게 되었음에도 당당하게 그 소리를 했다. 그래도 딱 그 발언까지는 봐줄 만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자랑, 대표하는 극작가였던 그녀가 다 죽어가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탈세 혐의로 붙잡혀갔던 것은 치명타였다. 결국 그것은 훌륭한 자가변호가 아니라 노망난 50대 여인네의 헛소리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명수가 그에게 말을 꺼낸 요지는 이것이 아니었다.
고로,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 그런데 너도 지금 존나 그렇게 보여, 물론 넌 그녀와는 다르게 해를 끼치고 있지만. "
김명수야, 넌?
표정없는 얼굴 위로 미미한 미소가 띄워졌다.
바야흐로, 시작이었다.
틈이 날 때마다 네 무릎 위에서 잠을 청했다.
약을 하지 않는데도 잠이 잘 오는 게 요상했지만, 막지 않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너는 내 이야기들이 흥미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일부러 엘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한다면 괜시리 모조리 다 허사로 돌아갈 것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멍청하게 "기대"라는 것을 걸었던 것 같았다.
아니, 그랬다.
바보같이, 멍청하게.
네가 걸레 서방이라면서?
감히 성열을 우롱하는 그들에게 주먹을 날리고 혼자 대여섯이 훌쩍 넘는 패거리들을 상대했지만 이겼다. 그러나 잠깐 방심했던 것이 화근이어서, 어깻죽지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그대로 박혔다. 뒤늦게 달려온 호원이 구급차를 부르겠다고 했지만, 명수는 거절했다. 대신 주머니 안에 있던 바이코딘 한 줌을 그대로 삼켰다. 성열과의 약속이 있었다. 가야 했다. 명수는 어깻죽지에 상관하지 않은 채 호원에게 말했다. 가방에 대마초 좀 있지.
" 들고 이성열한테 가자, 나 약속 있어. "
분명히 어깻죽지 깊숙히 칼이 박혔음에도 성열이라는 단어 자체가 좋은지 누구보다 즐겁게 웃는 명수를 본 호원은, 이미 반쯤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마리화나, 피울래?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를 내밀었다. 그대로 받아 서툴게 불을 붙이는 모습이 예뻤다. 어느새 호원은 보이지 않는다. 명수는 머리가 좀 어지러웠지만,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성열을 보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얼굴에 대고 물었다. 맛이 어때?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답이 돌아왔다. 기분이 이상해, 알아. 다 꺼져가는 심지를 본 명수는 제 몫의 대마에 불을 붙였다. 한 모금을 빨자, 바이코딘의 영향으로 기분이 조금 더 몽롱해졌다. 세상이 점점 깜깜해졌지만, 명수는 물고 있는 그대로 성열의 대마의 불을 붙여주었다. 점점 깜깜해지는 와중, 명수는 문득 대마를 입에서 놓았다. 성열도 그랬다.
잠시지만, 입술을 부딪혔다.
이제 명수는 거의 의식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열의 답이 듣고 싶어 물음을 던졌다. 어때?
" 모,르겠어 "
" 그래 "
그리고 세상이 깜깜해졌다.
그 뒤로 명수는 성열과 한동안 만남을 가질 수 없었다.
난간에 선 아름다운 얼굴이 수척하다. 되살리고 싶었다.
명수는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옥상에 올랐다. 난간에 다리를 올린 성열은 한없이 위태해 보였다.
" 그의 첫 모습은 아름다웠다. "
" 그러나 나는 그의 겉모습만 보고 아름답다 여긴 것이 아니라, 단지 그라서, 그였기 때문에아름답다 생각했을 뿐이다. "
[찬가론]의 첫 단락이었다.
명수는 그대로 성열이 서 있는 난간으로 올라섰다. 새하얀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진심으로 물었다. 죽으려고? 응, 하고 대답하는 모양새가 위태롭다. 그 다음 말도 진심이었다. 그럼 같이 죽을까? 그 말에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조금 기분이 언짢아졌지만, 명수는 곧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 애썼다. 싫음 말고. 대꾸하며 담배를 입에 무는 얼굴이 묘하게 씁쓸했다. 명수가 물었다.
" 왜 죽으려고 하는 건데? "
"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으니까. "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숨겼다. 이 상황에서 하면 안될 말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명수는 이상하게도 음울한 아까의 기분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그를 살리기에 앞서 먼저 확인하고 싶어지는 게 생겼다. 잠깐 명수는 고심했고, 따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말을 꺼낸 명수의 표정이 밝지 못했다.
" 내가 싫어? "
" ……모르겠어. "
쿵,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아,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명백한 부정이라 생각했다. 생각보다 훨씬 뼈저린 현실을 체감하며 명수는 괴로워졌다. 마구 타들어가는 가슴 안의 애정이 보인다. 이성열을 향한 애정이, 그러나 결코 시들지 않을 터였다. 비록 다 떨어져 마른 나뭇가지가 되어도 초라한 겉과 달리 끝까지 불타오를 애정을 알고 있기에 명수는 더 아팠다. 성열이 제게 나타내는 모호한 거절의 표시가, 한없이 아프고 차가웠다. 모호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래서 놓을 수가 없었다. 명수는 입을 열었다. 열리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열어 말을 했다.
" 난 엘을 싫어해, "
" 그는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든. "
결국 자신의 이그러진 사랑을 미화시키는 꼴 밖에 더 되겠어?
" 쓸모있어, 너. "
" 뭐…? "
" 쓸모있다고. "
어쩌면 이성열이라는 존재는 악의 구렁텅이보다 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손을 뻗는다는 행위는 자살행위와 다를 바가 없을 수도 있었다. 아무 희망도, 미래도 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그래도 나는.
" 사귀자, 나랑. "
" 날 위해 살아. "
너의 생존을 바라,
그 뜻을 인지한다면 한없이 거창한 고백이었지만 실체를 모르는 상대에게는 한없이 야속할 터였다. 결국 명수는 지옥의 무저갱에 한 발을 내딛었다. 한번 빠지면 영원히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영원한 구렁텅이,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 명수는 그의 숨통을 끊지 못하게 하는 대신 자신의 심장에 커다란 족쇄를 채워 버렸다. 이성열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아무도 풀 수 없는 족쇄를.
사랑해, 이성열.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는 작은 고백.
살아있는 이성열을 우선시하고, 그렇게 명수의 결말 없는 애정은 그를 구제한 대가로 스스로에 인해 깊게 묻혀졌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 단지 살아있기만을 바랄 뿐.
그리고, 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만족한다.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네가 살아있으면 그만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앞으로도 네가 죽지만 않는다면, 살아만 있다면 괜찮다. 웃음을 보고 싶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알지만 상관없다. 단지,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떠나지만 않기를. 그러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만약 그렇기만 한다면 나는 너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테니.
기절한 성열을 들쳐업고 옥상에서 내려오자 호원이 다가왔다. 좀 괜찮냐는 물음과 함께하는 걱정의 표정, 명수는 웃지 않았다. 원래대로 돌아온 듯 했다. 호원은 직감했다. 아마도, 그는 미쳤구나. 영원히 감정을 봉인해버리는 길을 택한 명수는 호원의 표정에도 태연했다.
" 됐어, 다 끝났어. "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결심한 열다섯의 끝이, 한없이 쓰고 떫었다.
명수는 다시 집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Y를 바라보는 데에 그쳤던 M의 결말은 점점 갈수록 비참해진다. 비상하는 Y를 바라보며 숨이 서서히 끊긴다던가, 끝까지 사랑한다 부르짖지 못하고 짧은 생을 힘없이 마감한다. 시들고, 타들어가는 M은 바로 명수 자신이었다. 열일곱은 이다지도 괴롭다. 바로 옆에 애인을 두고도 아름답다 말하지 못하는 비애는 한없이 끔찍하고 잔인한 현실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에.
「 사랑해, Y. 」
그리고, 그를 살게 해야 하기 때문에.
타들어가는 명수의 심장이 아팠다.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날 수록 더욱 그러했다. 찬란한 모양새는 점점 수척해져가서 더욱 그랬다. 사귄 뒤부터 명수와 성열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성열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서 명수가 택한 방식 중 하나였지만, 그래서 더 망가져갔다. 그렇게 꼭 이 년째 되던 해까지, 명수는 점점 망가져갔다. 날마다 스스로의 심장을 쥐어뜯는 것보다 더욱 큰 고통을 느껴야 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가둬버렸으니까. 그러나 족쇄가 반쯤 풀려버리게 된 사건이 얼마 전 발생하고서야 말았다.
이성열의 숨결,
우현과의 의미 없는 통화 도중 들려온 그것은 명수의 봉인을 결국 찢어놓았다. 결심했다. 너를 살게 할 테니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달라고, 받아들이기는 것은 애초에 바라지도 않으니 이해라도 해 달라고. 이것은 명수의 마지막이었고 곧 그것은 최후의 순정이었다. 찢겨진 심장이 여전히 아팠고 열일곱의 현실은 여전히 잔인했지만 그만큼 이성열은 아름다웠다. 모호했지만 완벽히 거절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잔인하지만,
그래서, 내가 너를 놓을 수가 없어.
네가 M을 보고 아름답다 논하지 않았더라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애꿎은 성열을 탓하는 스스로가 추했다. 명수는 성열에게 미안해졌다. 아까의 말을 기억한다. 우리 어차피 아무 것도 안하는 사이잖아. 그 말이 너에게는 한없이 쉽기만 하지. 그러나 네 죄는 아니다. 전부 선택한 자에게 돌아오는 죗값이다. 다 찢겨진 심장은 이제 아무 고통도 호소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네게 거짓말을 하고서 뒤돌아서면 피가 철철 흐르는 심장을 부여잡는다. 모두가, 사랑한 내 죄겠지.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줄 알면서도, 너를 택한 나의 죄겠지.
그러니 잘 자. 나의 Y,
명수는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랬다. 열일곱의 현실은 여전히 쓰고 떫었다.
그러나, 여전히 놓을 수 없다. 명수는 멍청한 스스로를 향해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오랫만에 진심을 담아 말해본다.
" 사랑해. "
여전히 사랑해, 이성열.
비록 네가 나를 여전히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그래도 사랑해.
명수의 손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처참히 찢기고 갈라진 마음은 이제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성열을 생각하면, 뛰고 있다. 이 곳이.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마 성열이 살기를 바라서일 것이다. 사랑해, 사랑해. 미치도록 원하는 단어를 말하면서도 한없이 괴롭기만 하다.
그럼에도 멈추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너에 대한 사랑이겠지.
바야흐로 고통의 밤이다.
명수는 오늘도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