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준] 수상한 마네킹 번외 W.Cantata BGM - Freetempo - Mistake 10년 전. 흐아아암. 입을 벌리며 하품을 쩌억 해댔다. 아 심심해. 지구에서 한참 떨어진 하늘나라, 구름 위 으리번쩍하게 지어진 하얀색 성 (주)에로스의 사장이자 신인 오세훈은 오늘도 책상 위에 발을 올려 까딱거리며 지루함에 하품을 쩍쩍해댔다. "어떻게 이렇게 지루할 수가!" 나는 오늘도 심심함에 종대를 괴롭혔다. 종대는 여기 하늘나라의 햇병아리 천사이자 (주)에로스의 내 전용비서였다. 사실 말이 좋아 비서지, 사실은 노예나 졸개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괜히 호출을 해 잠을 잘 터이니 불을 꺼 달라 하기도했고, 정리가 잘 되어있는 문서를 없애버린 후 제출하지 않았다고 혼을 내자 억울해하는 종대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몰래 킬킬거리기도했다. 그렇다. 사실 나는 심심하지만 할 일이 없던 건 아니다. 명색이 에로스, 사랑의 신인데 할일이 없을 리가 없었다. 나는 인간들의 운명을 이어주는 장부를 적어야 했다. 인간들의 이름이 생년월일시간으로 쭉 적혀있으면 그와 맞는 운명의 상대와 빨간 선을 그어 인연의 줄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건 상당히 귀찮고 까다로운 일인지라 다른 신들 몰래 가끔씩, 사실은 좀 더 많이 종대에게 맡기곤 했다. "이렇게 시간을 버릴 순 없지. 종대야!" "예, 사장님." " 오늘 인간세상에 갔다와야겠다." 머릿속에 온통 클럽에서 만날 쭉쭉 빵빵 언니들의 흐뭇한 생각에 세훈은 한껏 멋을 부리고 있었다. 예쁜 금발 누나들 기다려요. 여기엔 왜 클럽 같은 게 없는지 몰라. 아 머리카락 색 다른 걸로 바꿀까.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노란색, 회색, 분홍색, 검은색 등등 여러 가지 색깔로 바뀌었다. 캬. 그래도 얼굴이 받혀주니까 뭐 다 소화해내네. 거울을 보며 자화자찬 하는 세훈을 보며 종대의 창백한 얼굴은 점점 더 하얗게 질려갔다. "아니...저 사장님." "아이씨. 야 김종대. 촌스럽게 사장님이 뭐야? 세훈님-하면서 사근사근하게 좀 불러봐." "....세훈님-." "오냐. 무슨 할 말 이길래." "아니 그러면 오늘 태어난 아이들의 장부들은 어느 세월에 하시려고요? 예?! 오늘만 태어난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지금 사장님 책상에 쌓여있는 장부들의 양이 어마어마합니다!" 역시. 웬만한 천사들이 알아주는 엑소대 출신인 종대는 속사포랩하듯 말을 뱉고 명문대생답지 않게 다급한 얼굴로 세훈의 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엉엉. 자꾸 이러시면 저 제우스님한테 진짜 혼나요!! 저 걸리면 진짜 끝장이라구요!! 동그란 눈에 진한 눈썹을 가진 제우스는 규칙을 어기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고로 걸리면 사망. 세훈은 가랑이에 매미처럼 매달려있는 종대를 매정하게 뿌리치고 마지막 포인트 아이템, 선글라스까지 장착하였다. 역시 선글간지 오세훈. "종대야 부탁한다." "아 안된다고요!! 아..." 한 번 더 붙잡기 위해 종대가 손을 뻗었을 땐 이미 세훈은 사라진 후였다. 세훈이 사라진 자리에는 먼지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다. ...갔나? 종대가 주위를 힐끔대며 그가 이곳에 없는지 확인을 했다. " 아악!! 오 시발. 저 스윗펌킨같은새끼. " 그가 완벽하게 이곳을 떠났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종대는 아는 욕을 총동원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물론 오늘 태어난 아기들의 장부 첫 번째 페이지를 펼치면서. * 빵빵- 세훈이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을 땐 사람들이 없는 지저분한 좁은 골목 안이었다. 익숙하게 코너를 꺾으며 돌자 곧 시끄러운 차 소리와 반짝이며 일렁이는 화려한 불빛들, 왁자지껄한 사람들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유휴. 밤공기 좋고." 인간 세상은 시끄러우니까 살아있는 느낌이 든단 말이지. 위는 너무 따분해. 세훈은 한 손을 코트 주머니에 찔러놓고 여유롭게 신호등이 초록불이 켜지길 기다렸다. " 어머 오빠- " 딱 봐도 클럽 쪽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는 세훈이 마음에 드는 듯 건너편에서 여자 두 명이 손을 흔들었다. 세훈은 여자들을 향해 씩 웃어주며 바로 스캔을 떴다. 딱 봐도 32-24-34. 한 명은 뽕브라 티가 나지만 뭐 나쁘지않네. 이래서 신이 좋다니까? 사이즈도 바로바로 보이고.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두 명이 속옷이 보일듯 짧은 미니스커트와 원피스를 입고 진한 화장을 한 채로 세훈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빨리 와 오빠! 오랜만의 유흥을 즐기는 세훈은 입가에 슬며시 번지는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쭉쭉 빵빵 금발에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는 완벽한 세훈의 취향이었다. 아 오늘 땡잡았네. "직업은 뭐로하지? 대학생이라고 하면 너무 어리게 취급하니ㄲ..악!!!" 아악 내 발!!!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던 세훈은 갑자기 느껴진 발가락의 통증에 펄쩍 뛰었다. 아 으스러진 거 아니야? 어떤 미친 자식이 감히 신의 발가락을! 화가 나 얼굴까지 시뻘게진 세훈은 주위를 둘러보며 감히 발가락을 밟은 사람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뭐야 투명인간이야? " 저기 아저씨.... " 밑에서, 그것도 좀 많이 밑에서 나는 소리에 세훈은 깜짝 놀랐다. 그는 허리를 구부려 말하는 이를 확인했다. 밑에 있던 소리의 정체는 자전거를 탄 10살짜리 꼬맹이였다. 아마도 지금 상황상 꼬맹이가 타던 자전거 바퀴에 발가락이 눌린 것 같았다. 미안한 듯 고개를 푹 숙인 동그란 머리통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 꼬맹이가 그럴 수도 있지 뭐. 욱해서 펄쩍 뛰어다닌 세훈은 그제야 좀 민망한지 꼬맹이에게 말을 걸었다. "야 꼬맹. 그럴 수도 있지 뭐. 용서해줄게." "지짜에여?" 앞니가 빠진 것처럼 바람 새는 발음에 웃음이 나왔다. 몇 백년 전엔 나도 그랬는데. 푹 숙이고 있는 머리통이 갑자기 귀엽게 느껴져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그래. 근데 아저씨가 아니라 형이다. 형이라고 해. 알겠..." "네. 형 깐사합미다!" 꼬맹이가 갑자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 두 눈을 마주쳤다. 커다란 두 눈이 반짝였다. 헐. 천사다. 크고 맑은 두 눈과 뽀얀 피부는 마치 하늘 위에 있는 갓 태어난 아기천사 같았다. 형 깐사합미다! 형 깐사합미다! 귀여운 목소리가 머릿속에 웅웅거리며 메아리처럼 울렸다. 지금 저 여자들이 중요한 게 아니야. 제 앞에 진짜 베이비천사가 있다구요. 오 어머니. 전... 로리콤이 아니에요.. 세훈은 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떼지 못했다. 진짜 아니에요. 얘만 빼구요. "꼬맹아. 이름이 뭐야? 나이는?" "10샬 김준면인니다." 그래 그렇구나. 김준면 10살.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대답하는 준면이 마냥 사랑스러운 듯 세훈은 엄마 미소를 활짝 지었다. 그리곤 마치 머릿속에 각인시켜놓듯 여러 번 중얼거렸다. 김준면 열살. 김준면 열살. 그래 준면아 엄마 말씀 잘 듣고, 밥도 많이 먹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된다. 그래야 형처럼 멋있는 사람이 될 수가 있어요. 알겠지? 네에-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 이내 결심한 듯 세훈은 준면의 머리를 한 번 더 쓱쓱 쓰다듬었다. 순간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났다. 따악- "우와-!" 시끄러운 거리 속 신호등 앞 세훈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진 후, 놀란 표정을 한 여자 둘과 신기한 듯 두 팔을 벌리며 방싯방싯 웃는 준면만 있을 뿐이었다. * " 아니, 사장님 엄청 빨리 오셨네요?! " 의자에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던 종대가 벌떡 일어나 세훈에게 달려왔다. " 야 너 딴짓하고 있었지. " " 아니에요! " 열심히 장부를 기록하다가 1분 전 부터 잠깐 쉬고 있던 종대는 억울함에 입이 툭 튀어나왔다. 요 주둥아리. 세훈은 툭 튀어나온 종대의 입술을 마치 젓가락질해서 잡듯 집게 손가락으로 꽉잡았다. 그리곤 아무도 들어선 안된다는 듯 주위를 살피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다른 일들은 다 내일로 미루도록 해. 지금 완전 급한 일이 있으니까. 일급기밀이니 절대 다른사람한테 말하지마." 꿀꺽. 일급기밀이라는 사실에 긴장한 듯 종대는 침을 꿀꺽 삼켰다. " 지금 당장 10살 장부 뒤져서 오늘까지 김준면이라는 애 있는 페이지 찾아와. " "예??!!!! 그 많은 걸 언제 뒤져서 오늘까ㅈ..웁!!!" "닥쳐. 조용히 하고 빨리 알아와." 오늘까지 찾으라는 황당함에 목소리가 커지자 세훈이 억지로 입을 막았다. 이제 가봐. 아..아니 그게 아니고 제 말을 들어보세요. 이게 말이 되는...쾅!!! 그리곤 막무가내로 종대의 통통한 엉덩이를 발로 뻥 차며 방 밖으로 쫓아냈다. "아 빡쳐!!" 종대의 절규가 복도에 울렸다. "....여기...찾았어요..." 종대는 방에서 쫓겨난 지 정확히 다섯 시간 후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아이고 삭신이야. 엉덩이에 땀띠 나는줄 알았네. 인간 세상의 그 많은 10살 중 김준면을 찾는다는 건 서울에서 왕 서방 찾기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막노동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쏟아지는 잠과 과도한 피로에 종대의 눈알에 핏대가 잔뜩 서 있었다. 힘없는 노크소리가 들리자마자 세훈은 열심히 하던 자동차 게임기를 던져버리고 뛰쳐나왔다. 이제야?! "빨리 줘봐." 왜 이렇게 느려. 10시간은 기다린 줄 알았다고. 종대가 건네기도 전에 세훈이 다급하게 손에 들려있던 장부를 빼앗았다. 그리곤 황급하게 의자에 앉아 다리를 동동 굴렀다. ... 참자.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며 종대는 속으로 애국가를 불러댔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 312페이지 10번째 줄이에요. " 아 어떡해. 베이비 천사의 장부라니 떨린다. 두근두근 설리설리 두준두준. 어디선가 들은 인간들의 인터넷용어를 중얼거리며 떨리는 두 손으로 312페이지를 폈다. " 하나 둘..... 아홉..... 열. " 행여나 틀릴까 봐 손으로 세보며 준면의 이름을 확인했다. 여깄네. 우리 베이비는 이름도 어쩜 이렇게 예쁠까. 「김준면」이라고 단정하게 적혀있는 이름 옆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과 생년월일, 부모 관계 등등이 적혀있었다. 옆에 있는 화살표를 클릭하자 세부정보가 적혀있었다. 예상 얼굴? 이건 뭐야. 아무 생각 없이 누르자 나온 사진에 세훈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세상에. 요정이다. 요정이야. 아기때 처럼 뽀얀 피부와 동글동글한 얼굴, 짙은 쌍꺼풀과 똘망똘망한 눈. 살짝 앙다문 입술은 그가 나이 때보다 두 세살 좀 더 어려 보이게 했다. 준면이는 내꺼야. 세훈은 다시 한번 굳은 다짐을 하며 다른 화살표를 클릭했다. 총 연애횟수라. 뭐?! ㅅ...스무번?? 미친. 인기도 드럽게 많네. 역시 얼굴값 하네 우리 준면이. 사실 세훈은 속으로 굉장히 빡쳤지만 애써 괜찮은 척을 해댔다. 노 프라블럼. 미래는 바꿔가는 거니까여. " 걸리면 진짜 주옥되는건데 ..후...정신차려 오세훈! " 쫘악- 옆에서 졸고 있던 종대가 깜짝 놀라 깰 정도로 두 뺨을 세게 쳐대며 세훈은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좋아 오세훈. 이건 별거 아닌 거야. 그냥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꾸는 뭐 그 정도밖에 안되는거야. 그냥 연애경력을 없애버리면 된다고. 아주 간단한일이지. 그래. 이어져있는 선들만 다른 곳으로 바꿔버리면 되는거야. 좋아. 세훈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빨간펜과 수정 테이프를 쥐었다. "난....난 몰라." 수정 테이프를 쥔 두 손은 장부를 위를 방황하다 결국 굳게 결심한 듯 「총 연애횟수 : 20번」 이라고 적혀있는 곳에 「2」를 열심히 지웠다. 0번. 좋아.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군. 옆 세부정보를 클릭해 스무 번의 연애 기간 동안 만난 사람들의 리스트도 보았다. 권유리, 최수영, 한가인...세상에 박찬열 황쯔타오?? 남자도 있어? 그것도 외쿡인도 있다고?! 이렇게 예쁜 준면이를 나 말고 다른 놈이 채 간다고? 갑자기 분노로 가득찬 세훈은 분노의 수정 테이프를 시전하며 준면과 연결된 모든 빨간선을 빠르게 지웠다. "크큭....어리석은 인간들.. " 세훈이 또 어디선가 들어본 인터넷 용어를 중얼거리자 소름이 돋아 잠이 홀딱 깬 종대는 썩은 표정을 지었다. 뭘 봐. 예..? 하핫. 종대가 썩은 표정을 감추려 엄지 손가락을 세우며 어색한 윙크를 날렸다. 사장님 최고. 그에 세훈도 썩은 표정으로 보답하며 다시 나머지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스무 명의 인간들의 기록을 다 찾아 총 연애횟수에서 하나씩 뺀 후 수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귀찮은 일이였지만 누군가와 하하호호 웃으며 연애를 할 준면의 모습을 떠올리며 세훈은 이를 악물고 스무명의 기록을 모두 수정하기 시작했다. 끝났다. 몇십 년간 사용하지 않았던 집중력을 한번에 쓴 탓에 시간이 좀 오래 걸렸지만 결국 장부를 모두 수정하였다. 우드득. 온몸에서 나는 뼈소리에 근육들이 아픔을 호소했지만 세훈은 아무렴 괜찮았다. 어쨌든 이제 준면이는 연애를 안하, 아니 못하니까. " 10년만 기다려 준면아. 스무 살 채우면 이 오빠가 만나러간다. " 준면은 아마도 평생동안 모를 것이다. 장부 속 준면의 페이지에 다시 한번 「연애경험 : 1번」이라 수정된것과 이름과 연결된 붉은색 선의 끝에는 서툰 글씨로 오세훈. 이라 적혀있다는 사실을. + 15012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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