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이웃
w. 문달
** "이..이 무슨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 법한 구린 장면이에요오..이게." "우리 모두를 지키는 방법이에요!" "우리에서 저는 빠질래요." 내가 질색하며 그가 꼼꼼히도 붙여놓은 테이프를 뜯어냈다. 그러자 어어-큰 소릴 내며 내 손을 붙잡는다. 동거를 하자는거야 수련을 하자는 거야, 내가 궁시렁 거리자 할 말이 없어진 동거 제시자는 물끄러미 내가 멋대로 침대를 반토막 낸 선을 없애버리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부끄러움을 핑계로 숨지 마요?" 슬그머니 침대 헤드에 기댄 베개 하나를 빼서 사이에 세워둔 걸 낌새로 알아챘다. 나쁜 손! 하며 손등을 철썩 때리니까 아파하며 그 어둠 속에 묻혀서 원망스럽게 째려보기도 한다. 아마. "이래가지고 결혼하면 나랑 각방 쓰겠네." "그렇지 않아요." "좋은 말 할 때 안겨요." "..박력 어쩌면 좋지." 기다란 팔이 허리를 감싸왔다. 품 안으로 파고든 그의 머리칼을 만지다가 같이 잠이 들었다. 요새 우리 부서장님은 집만 들어오면 세상 애기가 된다. 전보다 애교가 많아졌다. 이 자아를 그동안 숨겨뒀단 말이야? 하고 경악하며 물어보면 급 점잖은 체를 했다. 그의 달라진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건 아니었다. 이런 의외의 면을 거리낌 없이 보여줄 정도로 나를 깊숙한 관계에 넣어놓았다는 뜻이니까. "오늘 좀 늦게 들어올 것 같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요." 새벽부터 부지런히 출근 준비를 마친 그가 옅은 향수 냄새를 풍기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몽사몽한 가운데 몸을 반쯤 일으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가볍게 츕 소리를 내며 목에 뽀뽀를 해주고 떨어지는 서영호를 붙잡아 도로 앉혔다. "얼마나 늦게?" "열 시?" "열 시까지 나를 혼자 두시겠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여섯시부터 정각마다 연락할게요." 그러면서 입을 부딪히려고 하는 걸 얼굴을 뒤로 빼서 피했다. "아침이잖아. 난 이 안 닦았잖아아" 그 말에 서영호가 바람 빠진 웃음을 짓더니 도망 못 가게 뒷목을 잡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따 봐 우린아. 사랑해, 보고싶어." "나도! 나도 보고싶어!" "사랑은?" "..몰라." "알겠어. 그럼 내가 더 사랑해!" 누가보면 주책맞으시네요, 부서장님. 이라고 한 마디 쏠 정도로 요란스럽게 발을 굴리며 머리 위로 큰 하트를 그리다 사라졌다. 사진 찍을걸. 흐믓하게 보고만 있다가 뒤늦게 핸드폰 카메라를 들었지만 서영호는 이미 방을 나간 뒤였다. 아쉬움에 입 안에서 혀를 굴리다 카톡 대화창으로 들어갔다. '연락은 반드시 영통으로 하기!' ** 이젠 옆자리가 비면 허전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에게는 지금보다 더 작은 사이즈의 침대를 사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어처구니 없을 수도 있는 이유를 듣고 난 후의 서영호는 의외로 긍정적인 답을 해줬다. 더 가까이 붙어서 자겠네요. 부끄럼 많던 동거 초반의 모습은 어디가고 툭하면 허리로 손부터 넘어오는 능구렁이만 남았다. "영호씨, 나랑 살아보니까 어때요?" "너무 좋아요." "구체적으로." "집 오면 우린이가 있어요. 그게 진짜 너무 좋아요."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빈둥 거리고 있는데?" "완전 좋은데?" 앞치마를 두르고 칼질을 하는 중에도 대답은 건성으로 하지 않았다. 소파 머리에 턱을 대고 그의 널찍한 등을 흐믓하게 쳐다보았다. "맨날 냉장고에 음식만 축내고, 요리도 안 하고, 꼬질하게 씻지도 않고 있고, 집안만 어지럽히는데?" "어떤 대답을 원하는거예요?" 따끈한 김을 내며 완성된 음식들이 군침 도는 냄새를 풍기며 식탁 위에 올려졌다. 한 몸처럼 붙어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당연하다는 듯이 서영호 옆구리로 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나 해서." 그가 허리를 숙이고 다가왔다. 올려다보다 느닷없이 가까워진 얼굴에 자동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머리라도 감을 걸. 회사에서 돌아와 바로 저녁 준비를 했던 그와 다르게 완벽한 백수 차림인 내 모습이 비교됐다. 서영호의 입술이 다가왔다. 움찔거리다 눈을 아예 감았다. 느낌은 입술이 아닌 코에서 느껴졌다. 코 끝끼리 맞물리자 웃음이 터졌다. "우린씨." 코가 눌릴 정도로 바짝 다가오며 나를 불렀다. 코 퍼졌을걸. 얼마나 우스꽝스러울 지 상상하니 헛웃음이 계속 나왔다. 여전히 바라보는 눈빛은 못 견디겠다. "사랑한다니까요." 뒤로 주춤거리자 균형을 잡으려고 손이 어깨 위로 올라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기다랗게 뻗은 그의 손이 깍지를 껴왔다. 매끈하게 사이사이로 잘도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 "조만간 반지 때문에 한 번 깍지 끼면 풀리지도 않을 거예요." "나랑 결혼하기로 마음 먹은 거예요?" "응? 나 처음부터 답을 정해놓고 시작했는데? 우린이는 아니에요?그렇다면 섭섭. 조금 많이 섭섭." "말 하는 요 입이 아주 아주, 는다 늘어." "음식 다 식어서 맛도 없겠다 얘들아." "너네 너무 재밌는 짓 하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들에 놀라 짧게 비명을 질렀다. 언제 어떻게 들어와 있으신건지 조향사님과 엄마가 우릴 흥미진진한 표정을 하고서 보고 계셨다. 머쓱하게 목을 긁으며 언제 들어오셨냐 물으니 벨을 누르다 지쳐 비번을 따고 들어왔다고 하셨다. "네 생일이더라? 나는 영호 집에서 널 볼 줄은 몰랐지." "어, 어디부터 들었어요?" "그건 노코멘트 합시다. 쟤네 얼마나 쪽팔리겠어? 아들 귀 빨개진거 봐." 분명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식탁에 놓여졌던 음식들이 싸늘하게 식어선 우릴 기다리다 지쳐있었다.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죄다 끌어다 모아 떨 것만 같았던 엄마는 의외로 덤덤했다. 오히려 내가 더 안절부절 못해서 서영호와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 "밑반찬 한 것 좀 가져다주고 둘이 저녁 안 먹었으면 나가서 먹자 할랬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네. 방해해서 미안하다." "그러니까요. 언니, 우리 밖에 나가서 최고로 맛있는거 먹어요." "그래요. 냉장고에 넣고 바로 갈게. 그건 되지, 아들?"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데자뷰였다. 냉장고에 정성껏 해 온 반찬들을 넣으시고 가벼운 손으로 인사하며 나가신 두 분 뒤로 정적이 깔렸다. 전에 조향사님을 만나뵀을 때는 서먹한 분위기에 못 이겨 나도 얼른 집으로 돌아갔었는데. "영호/우린씨." 말이 겹쳤다. 서로에게 손짓하며 배려하다가 내가 먼저 말했다. "..나. 지금 그거 해야 겠어요." "뭐를요?" "키스요." 일은 충동적으로 후회가 기척을 느끼고 몰려오기 전에 저지르는거다. 의자 위로 올라가 허리를 숙여 그의 입술로 돌진했다. 키스라고는 말했지만 실상 나는 지레 겁이 나서 입술을 꾹 닫고 맞대기만 했다. 그가 웃으며 입을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눈을 더 세게 감았다. 가끔 키스를 할 때면- 정말 드물게 했다. 내가 부끄러워 미쳐하기 때문.- 아랫입술을 공략하던 그였는데 오늘은 윗입술을 물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떡 벌어졌다. 서영호는 언제나 부드럽다. 느끼해지거나 물릴 법도 한데 반대로 더 갈증나게 했다. 나는 또 새로운 맛에 들렸다. 꽤 길게 이어지는데 배 곯는 소리가 났다. "우리 우린이 소리나는 거 보니 더 늦기 전에 밥 먹어야겠다." 그 말을 하며 미련없이 떨어져서 식은 음식들을 다시 데우는데 아쉬워서 의자에 앉아 다리를 떨었다. 더 하고 싶다. 더. 뭘 더 하고 싶은데 하면 안될 것 같애. 여기까지 생각하다 사람 앞에 두고 이 무슨 음흉한 짓인가 싶어 자괴감이 들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너와 나의 결혼. 결심에 선 두 주먹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비혼주의자에 기본적으로 남자에 대한 불신이 깔려있던 내가 결혼을 한다. 그것도 무려 오랜 시절부터 최악의 인물로 꼽았던 사람과. 만나기만 해. 그동안 자존감 깎여내렸던 세월만큼 되갚아줄거야 하고 씩씩거리던 내가 그 사람의 집 안에, 그 사람의 체취를 가장 깊게 느낄 수 있는 침대 위에 엎드려 누워있다. 이 무슨 코미디 영화 같은 전개지. 뭐가 됐든간에 똘똘 또아리를 틀고 있던 탁한 집념은 예상 밖의 전개에 물렁물렁해진 껍데기를 벗어 던졌다. "보고싶다, 서영호.." 하루종일 입에 달고 지내는 말은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에 집 안을 꽉 채울 만큼 부풀었다. 이것저것 준비한다고 집순이 생활을 접고 바쁘게 뛰어다녔다. 집이 제일 좋고 쏘다닌다고 발바닥이 아파도 생산적인 한국사람 피가 흘러서인가 열심히 사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오늘은 같이 웨딩 드레스를 맞추려고 회사 근처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다. 열심히 피부 관리를 해놔서 화장도 잘 먹고, 식단 관리도 하는 중이라 상태는 무난하니 괜찮았다. 오늘은 대한민국에서 내가 제일 예쁘다. 발걸음이 마음가짐 따라 당당해졌다. 풍경을 거울처럼 비추는 건물 벽에 붙어있는 똑같은 나와 마주쳤다. 반곱슬인 머리는 고데기로 정성껏 죽여주지 않으면 스프링처럼 퉁겨 오른다. 부스스한 빗자루를 대롱대롱 달고 있다니. 그것도 모잘라 긴 길이를 감당 못해 중간부분에선 굽이치기까지 했다. 서영호를 만나기 전까지 시간은 널널했다. 생각보다 가는 길이 뻥뻥 뚫려있기도 했고. 머리를 할까 어쩔까 고민하며 걷는데 내 눈에 헤어샵 한 곳이 띄었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머리를 하게 됐다. 단순히 컨디션이 좋아서였다. 끝났습니다- 라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렸다. 거울 속엔 답답했던 긴 머리를 댕강 잘라 목이 훤히 드러나진 내가 있었다. 나 좀 오버했다. 옆에서 단정하고 잘 어울리신다고 알랑거리는 말에 나는 억지로 웃으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시간은 금세 급박해졌다. 손거울로 지나가는 차들의 창으로 건물의 통유리로 핸드폰 액정으로 계속 머리를 확인했다. 아차 싶더라. 그러나 머리를 다시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머리 붙이기만 해도 얼만데. 입술을 깨물며 자책만 했다. 어느새 서존 백화점이 코앞이었다. 큰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다 왔다. 바람에 헝클어진 앞머리 때문에 턱을 목 쪽으로 바싹 당긴 채 손을 빗처럼 사용했다. 빨간불로 바뀐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 간만에 온 서존이었다. 부서 사람들은 얼마나 잘 지내고 사시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마주치면 어쩌나, 알아보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신호를 받고 쌩쌩 달리는 수많은 차들 사이로 아침에 보았던 눈에 익은 슈트 차림의 남자가 반대편에 서 있었다. 입가에 미소가 띄어졌다. 그도 나를 발견했는지 꽃을 든 손을 머리 위로 들고 흔들었다. 걸려오는 전화를 잽싸게 받자 그가 인사도 생략하고 말했다. "머리. 짧아도 예쁘다." "참나,멀리서나 예쁘다고 하지. 가까이서 봐도 과연 그런 말이 나올까요?" "우린이는 가까이서 보면 더 예뻐요. 멀리서 봐도 이렇게 미치겠는데." 엄멤메. 낯뜨거운 말을 주저없이 하는 서영호에 입이 실그러졌다. 립서비스는 항상 최고네요. 차들의 동작이 굼떠지고 불이 바꼈다. 내가 그대로 거기 있으라며 손을 앞으로 펼치며 걸어갔다. 멈추지 않고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계속 걸어나갔다. 그가 자기 좀 봐달라고 말해도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걸음을 멈춘 서영호에 나도 따라 삐걱거리며 멈추었다. 그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뺏어서 얼굴을 가리자 그가 흐드러진 꽃들 위로 손을 올리더니 지그시 눌러 눈 밑까지 빼꼼 나오게 했다. "일부러 제일 예쁜 애들만 묶어 달라고 했는데 우린이 앞에선 소용이 없네." "영호씨 항공 기장 안 하고 왜 면세점에서 일 해요? 사람 비행기 태워주는거 누구보다 제일 잘 하는데." "저 아무나 안 태우는데요. 그래서요. 갈까요?" 그가 얽힌 팔을 푸는 대신 손을 잡아왔다. 내 손가락 하나를 집요하게 문질러대더니만 이어서 단단한 고리 하나가 약지 손가락에 딱 맞게 끼어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나 만나고나서부터 주먹 쥐고 있던게 수상하더만 안에 반지를 품고 간지러워서 어떻게 참았나 싶다. 서영호를 빤히 쳐다보자 그가 능청스럽게 굴었다. 손가락들이 제자리 찾듯 사이사이로 들어왔다. 일부러 나와 마주잡은 손의 약지에 반지를 낀 그가 깍지 껴진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이제 안 풀려요." 같은 위치에 놓여 있어 조립하듯이 붙어있는 반지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더보기 |
어머 완결이에용! 재업 글도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주부터는 종이호랑이 가위토끼로 만나요~~ 종이호랑이 역시 최악의 이웃처럼 내용이 약간씩 고쳐져 있거나 추가될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