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칼같은 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새벽을 깨우던 종달새들의 지저귐이 멎고, 낙엽이 구겨지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천지를 울려대었다.
이른 아침 눈을 뜬 택운이, 힐끔 제 옆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익숙한 청하궁이 아닌, 태양궁이었다.
어질한 이마 부근을 부여잡고 눈을 한참 껌벅였다. 태양은 이른 아침 조회로 상참 (약식 조회로 매일 짧게 열림 - 의정부의 재상 및 대신 등이 참석) 에 니서서인지,
궁 안은 내관 몇몇과 궁인들을 제외하고는 비어 있는 상태였다. 목을 단단히 졸라맨 듯 텁텁한 공기 속에 파묻힌 제 모습에 택운은 미간을 좁히고서 몸을 일으켰다.
달 그림이 그려진 창호지 안으로 엷은 새벽빛이 흘러 들어왔다. 감각 없는 입술이 달싹이었지만, 다시 힘없이 닫힐 뿐이다.
팔랑-, 꽃잎 한 떨기가 발치에 떨어지자, 흰 손등 하다가 흙바닥에 놓여진 꽃잎을 쓰다듬었다. 홀로 떨어져 나왔으나, 여전히 아름답구나. 너는.
지그시 그것을 바라보던 택운은 숙이고 있던 허리를 들어 올리고서 늘어뜨린 소매를 세게 거머쥐고는 고개를 주억였다.
어젯밤,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던 다정한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았다. 어딘가를 둔탁하게 때려 맞은 것처럼, 머리가 울리는 기분이었다.
너는, 사내이지 않느냐.
사내였던가, 내가. 새삼스레 벅차 오르는 기분이었다.
사내로서, 너를 다시 보고 싶구나.
그 다정한 목소리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이 마음 안에서. 손을 들어 제 뒷통수를 그러쥔다.
짧디 짧게 끝맺어지는 머리칼이 금방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여인들과는 달리, 쪽 튼 머리를 하지 않는다. 여인들과는 달리, 꽃이 수놓아진 옷을 입지 않는다.
고개를 내렸다. 시선이 닿은 곳은, 단조로운 녹색으로 물든 바짓단. 그것은 결코 펄럭거리지 않고 발목 끝에 똑 떨어지는 것이었다.
눈앞의, 청색의 홀꽃을 향해 눈을 치켜 뜬 택운은 메말라 붙은 입술을 짓씹었다.
상혁만, 한상혁만 돌아오게 된다면.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을 듯 혼란스러운 것들에서든.
절벽 끝에서 나를 끌어 올렸으나, 끌어 올린 손끝을 놓을랑, 말랑, 조롱하는 이홍빈에게서든.
……….
그리고……….
떠오르는 단 하나의 인물에 택운의 다물린 입술이 열리었다. 머리맡으로 여전히 뜨거이 내리쬐는 붉은 태양볕이 괴로웠다.
다정하디 다정했던 목덜미의 향내는, 여전히 자신의 턱을 맴돌며 따사로운 빛을 주었다.
아주, 따사롭기 그지 없었다.
여기서, 무얼 하느냐.
따사로운 태양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
홍룡포를 입은 학연의 입가가 미약하게나마 올라가 있었다. 거의내 웃음을 보이지 않던 학연이었으나, 어쩐지 택운의 앞에서 만큼은 그 틀을 깨곤 하였다.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택운의 모습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학연의 시선이, 이내 천천히 하강하다 놀라움에 물들었다.
"……너."
"……."
"……더 이상, 펄럭이지 않는구나."
말을, 흘러 들은 것이 아니었구나. 제 바램대로 치맛자락을 벗어 던진 택운이, 애정스럽기 그지 없었다.
사내로서도 너는 아름다우니, 그저 택운이 네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렸다. 그렇게 생각했다.
바람이 불었다. 이번에는 칼바람이 아닌, 이불보 마냥 폭신한 결이었다.
여전히 멍하니 학연의 코끝을 응시하던 택운이, 입술을 열어 그에게 고했다. ……감히, 아뢰어도 되겠습니까.
그러면, 먼저 입술을 엶에 학연은 덧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답할 뿐이었다. 무엇이냐.
"검을, 배우고 싶습니다."
"…검이라?"
"연정을 품은 이를, 지켜주고 싶다고."
"……."
"유년 시절부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사내로서."
사내로서.
사내로서, 말입니다.
강단이 선 택운의 목소리가 공간을 온전히 흐뜨렸다. 잠시 놀라움을 담았던 학연의 눈동자가 머지 않아 곱게 휘어졌다.
희디 흰 얼굴로 검을 휘두를 너의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어른거리었다. 그리고, 결국 그 모습 마저도 꽃 한 떨기 마냥 아름답겠지.
아름다운 '사내', 정택운은.
-
이마에 송골히 맺힌 땀을 훑어 내었다. 입술 밖을 치고 나오는 호흡들에 잠시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시종의 길다란 눈이 제 앞을 가로막고 선 횃불을 쫓았다. 불씨가 커다랗게, 작게, 타올랐다, 멎었다를 반복하였다.
입을 두건으로 옭아 맨 시종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이방인임에 틀림 없었기에, 입구를 지키고 있던 포병의 입매가 사납게 변하였다.
"어떠한 용무로 찾아 온 것이오?"
"……안에 들어서야 할 일이 있소만."
포병이 기가 차, 허. 하는 힘 빠진 코웃음을 쳐보였다.
"아무나 들어설 수 있는 곳인 줄 아오? 이곳은 포도청 옥사요. 들어갈 수 없소."
미동 없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종이 시선을 옮기지도 않은 채 소맷자락을 뒤져 문서를 꺼내었다.
뭐 하는 놈인가, 이건. 의문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를 훑어보던 포도청 포병에게 말 없이 그것을 건네 주었다.
읽어 보시오. 단조롭기 그지 없는 음성에, 포병은 아니 꼽다는 듯 입꼬리를 한 번 실룩이고서 거칠게 문서를 펴 내었다.
한 자 한 자, 글자를 읽어 내는 동안, 몇 번이고 목울대를 흔드는 포병의 시선이 잘게 떨리었다.
시종을 향해 투박한 목소리를 뱉었던 모습은 어디 가고, 새어 나오는 음성은 덜덜 떨리어 애처로웠다.
"화, 황성에서, 이곳까지는 어떠한 용무로…."
"한상혁이라는 자를 만나야 하오."
"……."
"황성, 청하의 명이오."
-
여태 찾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게 마련이지. 진하게 다리어 낸 홍차로 입술을 축이는 홍빈의 자세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꽃 한 송이를 손에 그러쥐니, 그 향긋한 내음에, 주변의 악취를 맡지 못하는 것이겠지. 우습구나.
생각보다, 제 윗 전을 향한 불만의 목소리는 적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은밀한 눈빛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를 건네는 대신들의 입술 끝에 비릿한 역모가 쏟아졌다.
어서, 반란을 도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청하. 지금 이 시기 만큼 적절한 때도 없습니다.
청하께서 들이신 그 광대놈 하나가, 태양을 뿌리 채 흔들어…….
감히, 청하의 선견지명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
홍빈의 미미한 미소가 싸악, 굳었다. 선견지명이라, 선견지명이라…….
확실히, 너로 인해 태양을 휘어잡을 미련한 생각을 가지고서 도모한 일이었지.
그러나, 그 미련한 생각보다 더한 미련함이 마음 속에 차버렸지 말이다. 아마.
무언가를 빼앗기기 싫은 어린 아이 처럼, 까끌해진 입 안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 네가, 나를 돕기 위해, 태양의 곁을 지키고 있다, 이 말이냐?
아니면, 태양의 곁에 있으니 따사롭기 그지 없다, 이 말이더냐?
"푸흐."
잇새를 박차고 나온 비릿한 웃음, 그 손가락 새로, 그의 얼굴이 비친 홍찻물이 찰랑이며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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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다는 인사를 꼭 전하고 싶었어요. 언제나 감사합니다. 언제나. 왕의 남자를 기다려 주시는 많은 분들. 정말로. 왕의 남자를 정주행 해주시는 분들, 그 수고로움에 그저 감사합니다. 그리고, 빅스 독방에서 제 글에 대해 언급해 주시는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어요. 모자라기 짝이 없는 글인데도, 항상 예쁘게 보아 주셔서 감사드려요.
독자님들을 따라 1편부터 차곡차곡 읽어 보았어요. 정말 모자란 글들. 아직 초반이라, 이야기를 이끌어 가기 급급한 글솜씨에 탄식을 했어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마, 메일링 속의 왕의 남자가 조금 달라져 있을 거예요. 표현도 좀 더 많아지고, 인물들에 대해서 좀 더 명확하게. 물론 내용은 달라짐이 없을 테지만!
언제나 열심히 글 쓰는 소리꾼 될게요. 고마워요!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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