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한 부분. 너는 나에게 그랬다. 애써 너를 상기시키려 하지 않았고, 애써 너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저 무감하게, 고요한 정적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사라져가는 듯 했다. 그것은 마치 까슬히 입안에 돋아난 혓바늘과도 같아서, 더욱이 제 몸을 혹사시키며 고통을 삼켜냈다. 봄의 끝자락,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느리디 느렸던 따스한 햇발은 이내 머지않아 자취를 감추었다. 비록 옅었지만은, 지상에는 눈발이 덮히고 거리에는 여지없이 겨울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그 중심에서 재환은 검정 목도리를 두르고 서 있다. Love you best, Love you best……. 이제는 새하얀 안개가 되어버린 노래 선율을 읊조렸다. 사랑받기를 좋아했고, 사랑하기를 좋아했던 아이. 재환의 입가를 맴돌던 선율이 멈추었다. 혓바늘 푸릇한 풀, 아직은 영글지 못한 향기를 품은 노란 꽃물이 피어나는 봄이었다. 재환은 새하얀 헤드폰을 끼고서, 학교 정원 앞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더없이 밝은 햇살, 그 아래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봄을 즐기는 나그네와 같이. 몇 없는 노래가 담긴 네모진 기계를 손바닥에 한 아름 쥐어 들고서, 눈을 감았다. 귓가에 흐르는 잔잔한 선율이 따스했다. 언젠가 흘리듯 들었던 말이 기억났다. 노래란, 기억을 되짚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책갈피라고. 그저 가볍게 웃으며 스쳤던. 그 말이 기억이 나, 재환은 감았던 눈을 떴다. “Love you best…….”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익숙한 가사를 품다. “그거, 노래야?” 낯선 가사 하나가 날아들면. “응.” 꽤나 아무렇지 않게 스며주었다. 시선을 돌려 환히 웃고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께로 그림자가 져 제대로 보이지가 않으면, 재환은 슬쩍 몸을 일으켜 그와 마주보기를 잘 했다. 얼굴을 확인하고서, 그 다음은, 꼭 저처럼 구김살 없는 판판한 교복 위에 적힌 이름 석 자를 보았다. 차학연. 봄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여름이던, 가을이던, 겨울이던, 이 아이는 모두 시리도록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웃음을 보는 순간, 언제나, 항상. “너.” “…….” “항상 그 노래를 불러.” 그러면서, 제 옆에 소리내어 앉는 것이다. 나도, 들어보고 싶어. 올망한 눈을 굴리며 밝게 이야기하는 학연을 두고서, 재환은 예의 입꼬리를 올리며 헤드폰을 벗어주었다. 새하얀 색의 그것이, 새까만 색의 머리칼을 헤집고 들어갔다. 아이처럼 밝게 웃으며 감탄한다. 노래 좋다. 나 이런 노래 좋아하는데. 잔잔하고, 잠올 것 같기도 하고. 꼭 나른한 게, 응. 꼭 봄 같아. 종알대는 입술을 주시했다. 저절로 허공을 맴돌던 오른손이, 이내 아이에게 닿을까봐 얼른 힘 주어 내렸다. 봄의 향이 더욱 짙어지던 날, 서로를 만났다. 언제나 밝고, 사랑스러운 아이. 학연은 그런 아이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두들 학연을 그렇게 불렀다. 그것이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었다. 제법 무뚝뚝한 남학생이라도 학연의 웃는 낯을 마주하면 그랬다. 저 애, 참 밝다고. 습관처럼, 그렇게들 말하곤 했다. 재환이 바라보는 학연도 그와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누군가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기 보단, 누군가에게 의지해야할 사람에 더 어울리는 사람. 항상 그 주변에 아이들이 많았다. 예쁘거나 잘 생긴 사람도 있었으나 학연보다 더 환히 웃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눈길이 가는 아이. 재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차학연, 쟤.” “…….” “참, 예쁘게도 웃어.” 걱정이라고는 없다는 듯이. 그게 부럽더라. 차가운 음료를 마시며 함께 창밖을 바라보던 제 친구의 입술을 타고 흐르는 말에, 재환은 고개를 주억이며 잠시 옮겼던 시선을 다시금 창밖에 고정시켰다. 덧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공을 주고받는 학연의 모습이, 재환의 눈동자에 한 아름 담겼다. 야, 이재환! 헤드폰을 넘어 특유의 목소리가 닿으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서 넘어지기라도 한 건지, 팔목 부근에 꽤나 큰 붕대가 감겨져 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다 고개를 들어 학연을 마주보았다. 다름 없이 밝은 웃음인데, 어쩐지, 묘하게 다른 것만 같아서. 그래서 재환은 그에 함께 웃어줄 수 없었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새어나간 말을 주워담지도 못했다. “왜, 웃어?” “…….” “뭐가 그렇게 행복해?” 순 억지일 지 모르는 질문이라고 깨달은 것은, 이미 그 말들이 허공을 꿰뚫고 지나 학연의 귀에 스며든 이후였다.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것밖에는, 정말, 아무것도. 그러다 학연의 메마른 입술이 열렸다. 이번만큼은 결코 밝지 않은 미소를 짓고서, 아리게도 말했다. “다시 웃지 못할 지도 몰라서.” 정말, 아리게도. “하루하루, 억지로라도 웃어.” 그 아이는, 슬픈 웃음을 환히도 지어보였다. “정말 그럴 지도 모르잖아.” 아무런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꽃잎이 뒤집어지듯, 푸릇함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하는 봄의 끝자락이었다. 여전히 높은 하늘이었지만, 그곳에서 태양만은 전과 달리 밝지 못했다. 고개를 들고서 지나는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제 어깨를 두르는 투박한 팔에 그 짓을 그만두었다. 살랑이는 햇발이 걸린 네 목소리가 아니었기에, 재환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냐. 단조로운 친구의 음성에, 그저 아무것도,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차마 너의 기억을 되짚고 있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차학연, 기억 나냐?” 그것은 뜻밖의, 의외의 이름이었다. “왜, 있잖냐. 몇달 전에 소리 소문없이 사라진 애.” 고개를 끄덕이면, 낮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떠다니는 구름 사이를 헤집는 공깃방울 마냥, 무감히 이야기를 전했다. 나도 어디서 들은 거지만, 차학연, 그러니까……. 자살, 시도를 많이 했다고. 집안 분위기가 많이 안 좋은가봐. 왜, 차학연 손목에 감겨 있었던 그 붕대. 손목을, 많이 그어서 그런 거라고 하더라고. 리스트 컷 증후군이었나. 자기 몸에 고통을 줘서, 살아있는 삶을 느끼는 병이라고……. 그렇게 웃고 다니던 애가, 설마 그런 거일 줄은 몰랐지. “간다.” 헤드폰을 고쳐 올리고, 천천히. 또는 빠르게 걸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외침은, 노랫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 겨울이 오면, 너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던 노래였다. 우리의 봄을 기억하는지. 제법 낯 간지러운 말을 섞어가며 들려줄 참이었다. 누가 그러더라, 노래란, 기억을 되짚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책갈피라고. 그러나 너는 겨울이 되기 까지, 기억 저편에서 바스라져 눈앞에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그럼에 너의 귓가에 들려줄 수 없는 노릇이, 참으로 아릿했다. 아니. 네가 아릿했다. 입술을 열면 젖어든 입김이 퍼졌다. 그 사이에 네 웃는 얼굴도 젖어들었다. 아직 겨울이니, 봄은 멀었다. 봄이 돌아오는 날이면, 4년 전 그날의, 18세의 차학연이 눈앞에 나타날지 모른다고 믿고있다. 변함 없이 해사로운 미소를 지으며. 보고싶었어, 라는 간단한 안부 인사를 건네며. 어쩌면, 너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너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목덜미에 놓여진 헤드폰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귓가에, 습관처럼 익숙해진 노래가 울려 퍼졌다. Love you best, Love you best………. - 어떠한 말씀을 해주시던, 그것이 길던, 짧던. 복잡하건, 간단하건. 모두 저에게는 감사할 뿐이예요. 부담 가지지 않기. ㅎㄴ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