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깔끔히 넘긴 남자가 카페 테이블 정중앙에 앉아 무언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제 손바닥 위 은박지에 둘러 싸여 얌전히 놓인 육각형의 무언가였는데. 사실 남자가 카페 안으로 발을 디딜 때부터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여종업원조차도 ‘저게 도대체 뭐야?’ 라는 의문의 물음표를 찍어댈 정도로 잘 생긴 남자가 그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아주 열심히, 무던히도 바라보고 있다는 거다. 입가에 방글방글. 나름 브래드피트 부럽지 않은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던 그 남자의 이름은 이재환. 아마 머지않아 학연의 직속 상사가 될 예정인 남자라고나 할까. 몇 분 가량 더 지났을 때, 남자가 손가락을 꾸물대며 움직였다.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그 동태를 주시하던 여종업원이 그제서야 무릎을 탁, 치며 아하, 라는 꽤나 순수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래, 저 은박으로 둘러 싸인 정체불명의 육각형. 그것이 뭉툭하고 남자다운 검지 손가락과 엄지 손가락으로 슬슬 만져지더니, 이내 껍질이란 것이 벗겨지고 알맹이는 남자의 새빨간 입안으로 들어갈지니. 그것은 카라멜일 지어다. 입안 가득 느껴지는 카라멜 특유의 단내에 재환의 입가가 더욱 행복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단정한 발소리를 내며 여종업원의 쪽으로 다가가는데. “카라멜 프라푸치노.” “네?” 여종업원. 얼마나 긴장한 건지 말귀도 못 알아듣고 재차 되묻는 모습이 가련했다. 그에 재환은 혀를 한 번 쯧, 차보이더니 멋들어진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잘 생기면 이래서 곤란해. 도를 넘은 잘 생김 때문에 또 한 명의 피해자가 늘었잖아. 자기 만족에 심취한 제 앞 남자의 속사정을 당연히 모르는 여종업원은 하물며 고개를 젓는 그 모습마저도 멋져보인다. “카라멜 프라푸치노.” 다시 한 번 또박또박. 친히 말씀해주시는 재환을 정신없이 바라보며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던 종업원이 그제서야 허겁지겁 제조실에 들어간다. 그러면, 재환은 또다시 흥미잃은 표정으로 주문대 테이블 위로 검지 손가락 하나를 터억 올린 채, 일정한 박자로 두들기기 시작한다. 딱, 딱, 딱.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정확하고도 정확한 비트가 조용히 가게 안을 울리고, 뒤이어 딸랑, 하는 종소리가 울린 덕에 무의식적으로 재환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동시에 그 비트 소리도 멎었다. 새하얀 얼굴을 가진 남자가 스치듯 재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흥없는 그 눈동자와 마주친 찰나의 순간 다시금 재환의 입가에 웃음기가 서렸다. 흥미로운 일이 생겼을 때에 습관적으로 나오는 버릇같은 것. 그의 주위에서는 일명 ‘볼라벤 미소’ 라고 칭할 만큼 인기 있는 표정이었다고들 하던데. 여하튼 재환은 빙글거리며 저의 쪽으로 다가오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저번 방문차 들렀던 회사에서 본. 그리고 여태 머릿속에 남아있는, 눈앞의 남자와 꼭 붙어서 귀여운 미소를 짓고 있던 가무잡잡하고 귀여운 얼굴 하나를 상기시키며 말이다. 곧이어 주문하신 카라멜 프라푸치노 나왔습니다, 라는 경쾌한 종업원의 음성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터지는 남자치고는 여린 목소리같은 것. “모카라떼 한 잔.” 그러면 먹이를 기다렸던 맹수와 같은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남자에게 넌지시 입술을 여는 재환. “이한치한.” “…….” “추운 날씨에는, 차가운 음료가 제격인데.” 어쩌라고? 라는 듯한 남자의 눈초리를 능글맞게 받아치던 재환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하강하더니 이내 어딘가에 정착했다. 그것은 조명을 받아 깔끔히 빛나고 있는 남자의 목에 걸린 사원증. 그 아래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이름 석 자, 정택운. 재환의 시선을 느낀 남자. 택운의 눈매가 일순간 사나워졌다. 초면에 상대방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관찰하는 사람이라는 건 정말이지 택운이 그닥 좋아하지 않는 부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건, 있습니까?” “딱히 용건이라기 보단.” 능글거리는 사람도, 딱 질색인 택운이었다. “혹시 카라멜 좋아합니까?” “…….” “난 정말 좋아하거든요.” 가무잡잡하고, 달콤하고, 계속 먹고싶은 중독성이 있어서. 말이 끝맺어지는 순간 택운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보통 사람이, 음식을 두고서 ‘가무잡잡하다’ 라는 표현을 썼던가. 아니, 그저 미친놈이라 보통 사람의 논리가 들어먹지 않는 것일지도. 홀로 생각을 정리한 택운의 눈썹이 다시 반듯하게 내려갔다. 사실, 택운은 현재 기분이 매우 저조한 상태였다. 학연과 그렇게 헤어진 후 시궁창 어딘가에 처박힌 것처럼 기분이 찝찝했다. 더 이상 전망 없는 이런 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는 판단 아래 학연에게 이별을 고했건만 어쩐지 남는 것은 후회 뿐인 것 같은, 그런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옆에서 저를 건드려대는 이국적인 생김새의 남자에 더욱 짜증이 났다. “주문하신 모카라떼 나왔-” 여종업원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음에도 냉한 표정을 한 채 커피잔을 들고 뒤를 돌아버리는 택운의 모습을 보던 재환이 또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매너가 없는 남자야. 매너가. 그런 재환을 완벽히 무시하고서 방금 전 재환이 자리했던 정중앙의 테이블 의자에 앉은 택운이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검정색의 코트 주머니를 뒤적여 휴대전화를 꺼내었다. 이제와서 차학연에게 미련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건가. 택운의 입에서 힘없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꺼두었던 휴대전화 전원을 켰으나 문자 따위 와 있을 리가 없다. 꽤나 애교 많고 귀염성 있는 학연이라지만화가 났을 때나 가끔 삐쳤을 때 발휘되는 그 엄청난 자존심이란 견딜 수 없을 만큼 강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이별을 고한 이 상태에서 그 엄청난 자존심과 분노는 아마 상상을 초월해 있을 지도. 다시 한 번 택운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자그마한 한숨을 쉬었다. “이거 먹어요.” “……뭡니까?” “보면 모릅니까? 카라멜.” 날카로운 눈빛을 받아내던 재환이 예의 습관처럼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설마 오해같은 거 할까봐 미리 말해두는데 추파 던지고 그런 거 아니에요. 나 당신한테 관심 없습니다. 그럼에도 택운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저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올려진 작은 카을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뿐. 손에 차갑게 그러쥔 프라푸치노를 한 번 빨아들인 재환의 눈매가 해사히 접어지더니 미련없이 그 자리를 돌아섰다. 택운이 무의식적으로 그를 쫓자 스치듯 지나며 입술을 떼었다. “새로운 카라멜이 생길 것 같아서.” “…….” “그냥 인사치레 겸 받아놔요.” 그렇게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선 뒤돌아 걸음을 떼던 재환. 그리고 그의 뒷모습을 따라 움직이던 날 선 택운의 시선. 어쩌면 이것이 달콤하고 질척한 인연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 그렇게 밀어내도 밀리지 않더니 순간 힘을 주어 밀어내자 너무나도 쉽게 떨어지는 남자. 아니. 재환을 향해 학연은 당황과 황당을 적절히 섞은 듯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그러면 재환은,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결백한 사람인 것처럼 두 손을 들어보이며 씩 웃을 뿐이었다. 학연은 생각했다. 이 남자, 능글거림으로 어디 세계대회같은 곳에 나가면 대상은 따논 당상이라고. “어제 그 커피가, 티, 팀장님.” “뭐 그렇게 됐네요.” 마치 오늘 점심은 갈비다, 하고 무덤덤히 이야기 하는 어느 집 아버지처럼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을 해대는 재환의 태도에 도리어 학연이 기빠진 호흡을 내뱉었다. 사기꾼 아닐까.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서 눈앞의 이재환이라는 남자를 살피지만 빼박캔트. ‘빼도 박도 못한다’ 의 준말을 아주 훌륭히 사용할 수 있는 시점이 바로 지금인가보다. 정택운의 것만큼이나 화려하게 빛나는 저 네모진 사원증. 학연은 눈을 딱 감고 이대로 기절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파도가 물 밀듯 솟구치는 쪽팔림, 그리고 눈에 불을 켜고 찾고만 싶은 쥐구멍. 그 날 실연 당하고서 꺼이꺼이 하소연하는 제 볼썽 사나운 모습을 저 두 눈에 모두 담았겠지.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망했다. 두 가지 다행스러웠던 건, 본인이 게이라는 사실. 그리고 본인이 남자에게 차였다는 사실을 이 남자가 모른다는 것. 딱 그 두 가지. 학연은 경련이 이는 입가를 애써 추스리며 재환을 향해 어색히 웃어보였다. 그 때 혼잣말 적당히 하길 잘 했다. 정택운 네 새끼가 감히 나를 차. 그딴 소리 안 내뱉길 잘 했다. 자기 위로를 하는 학연의 뇌는 하나를 알면 열을 아는 그런 명석한 두뇌는 아니었나보다. ‘나. 너 말고도 만날 남자 많다.’ 라는 망언을 내뱉은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차학연씨.” “예?” “그 때 줬던 카라멜 프라푸치노 맛있었죠?” 싱거웠어요, 라고는 차마 말 하지 못한다. “네, 네.” “그럼 오늘도 한 잔 사줄게요.”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이한치한.” 싱긋, 웃으며 저를 바라보는 재환에 그저 깨갱, 하고 수긍할 수밖에 없는 학연은 이 팀장 아래 차 대리 역 되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