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중궁궐 07
w. Cecilia
1
태형은 그 말에 허겁지겁 머리를 고쳐 썼다. 혹여나 눈치챈 것은 아닐까 매우 조마조마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는 누구길래 자신을 위해 이렇게 가려주고 있는것인지 궁금하기도, 한편으로 걱정되기도 했다. 한동안 정적이 계속되었다. 태형을 감싸고 있던 남자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매우 곱상한 얼굴선에 부드러운 눈매를 갖고 있는 남자였다. 그 남자는 진이었다.
진은 태형을 보고 부드럽게 웃음을 지으며 상냥하게 말을 꺼냈다.
"오늘이 너에게는 참 긴 하루로 기억되겠구나."
태형은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웃어보였다. 곧이어 기방에서 일하는 꼬마 아이들이 들어와 널부려진 상을 치웠다. 태형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는 그 아이들과 함께 방을 나갔다.
"운화님, 괜찮으십니까?"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생 나비가 운화에게 다가가 묻는다.
"괜찮습니다. 제가 첫 날부터 큰 무례를 저지르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저도 다른 기방에서 처음 일할 때에 그러하였는걸요.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십시요. 흑운 도련님들은 이런 일로 질책하실 분이 아닙니다."
"나비님은 혹시 저들이 어떤 일로 모였는지 아십니까?"
"저도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아까 운화님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어 주시는 도련님은 잘 알지요."
"누구..십니까?"
"조선 임금의 둘째 부인의 첫째 아들, 진 왕자님입니다."
왕실의 사람이었다니.. 태형은 대역죄라도 저지른 것 마냥 안절부절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분명 아까 자신에게 지어준 미소로 미루어 보건데, 이 일로 나무랄 위인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분 덕에 다행히도 정국님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은 것 같아 감사하기도 했다. 이대로가다간 기방에서 쫓겨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루빨리 이 곳 생활에 적응해야한다. 태형은 마음이 어지러운듯 기방 문을 살짝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까 스치듯 본 정국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좀 더 오래 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이 너무 아쉬웠다. 마음같아서는 다시 그 방에 들어가 정국님 옆에서 함께 있고 싶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떠한지, 왜 이 곳에 계신 것인지... 할 말이 태산같았다.
그냥 빨리 날이 밝아서 정국님을 보고 싶었다. 처음 정국님을 만났던 그 때의 모습으로...
2
"왜 이렇게 헬쓱한 것이냐?"
"요새 걱정이 많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어디 좀 보자."
정국은 태형의 얼굴에 손을 갖다대고 이 곳 저 곳 살피었다. 피골이 상접한 것이 걱정이 된 듯 하였다.
"혹 밥을 잘 못먹고 다니는 것은 아니고?"
"아닙니다. 잘 먹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국님은 요새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 말이냐? 그냥 평소와 같다.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며 장사 하고 뭐.."
"저에게 따로 하실 말씀은 없으시구요?"
"따로 할 말이라니? 혹 나에게 궁금한 것이라도 생긴 것이냐?"
"아..아닙니다!"
정국님이 숨기고 싶어하는 일이겠거니. 태형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꾸역 꾸역 밀어 넣었다. 지금은 그저 정국님을 한없이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태형이 너는 어찌 살고 있느냐? 무과 시험은 무산되었고.."
"저도 열심히 살 방도를 궁리하고 있습니다."
"혹, 과거를 볼 생각은 없는 것이냐?"
"무과시험을 보지 못하는 제가 그것이라고 가능하겠습니까?"
"그렇겠지..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있느냐?"
"정국님은 그저 오늘처럼만 계셔주시면 됩니다."
"헌데 섭섭하구나."
"뭐가 말입니까?"
"그렇게 궐 안에 들어가고 싶어하니 말이다. 궐 안에 들어가면 날 더 자주 보지 못할 것 아니냐?"
정국의 말에 태형은 피실피실 쪼개었다.
"정국님, 지금 제가 보고싶다고 하시는겁니까?"
태형의 장난에 정국은 또 당황한듯 말을 더듬었다.
"아..아니..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그냥 네가 너무 궐 안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을 보고 살짝 걱정이 되어 하는 말이다."
"정국님은 궐 안에 들어가본 적이 있으십니까?"
"궐이라...."
궐. 정국이 태어난 곳.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 그러나 정국에게 마냥 편하지만은 않은 곳. 그런 장소가 누구에게는 간절한 곳이 되었다.
"태형이 너는 궁 안의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궁 안의 사람들이요?"
태형은 정국의 물음에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궁 안의 사람들이라... 생각나는 장면들이라면 궁 안을 거니는 많은 신하들, 그리고 임금... 마지막으로 또 한 사람. 어제 기방에서 만난 검은 옷의 왕자, 진. 그러나 정국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의심을 살 것이 뻔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국님이 그 진이라는 왕자와는 어떤 관계인지 궁금했다. 그 말인즉슨, 정국님 또한 궁 안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이니...
"글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화려하겠죠, 궁 안은.."
3
약속이 있다며 정국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형은 정국과 오랜 시간을 함께 있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정국이 더 보고싶은지도 모른다.
"운화야! 너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는 것이냐! 어제밤에도 그렇게 난리를 쳐 놓고 지금 외출이 가당키나 한것이라고 생각하니?"
태형이 기방에 들어서자마자 기방 주인이 뛰어나와 태형을 혼냈다. 태형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옷 꼬라지를 봐라. 이 모양새로 대체 어디를 다녀온 것이더냐?"
근처 마굿간에서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는 바람에 옷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태형은 대충 손으로 저고리를 감쌌다.
"송구하옵니다."
그리고는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기방 주인은 기가 막히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대체 저 기생년은 어디서 굴러먹다가 이 곳으로 들어오게 된 것인지.. 마음 같아서는 쫓아내고 싶었지만 호진아비의 부탁이니 참고 넘어가는 수 밖에...
태형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도끼눈을 하고 있던 주인이 너무 무서웠다. 여인네가 어찌나 기가 센지.. 답답한듯 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바닥에 누웠다. 아직도 지난밤 정국님의 모습이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다. 흑운... 흑운... 정국님은 누구에게나 친절한 듯 했다. 괜사리 질투가 났다. 만약 자신이 아닌 다른 계집이 나자빠져도 정국님은 비슷한 말을 했을 것이 뻔하였다.
"잡아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허 참... "
그러다가 지금 자신이 질투하고 있는 상대가 계집 꼴을 한 자신임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내가 미친거지. 미친거야."
4
"운화야, 나비랑 장에 좀 다녀오너라."
주인의 말에 태형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었다. 아니 시장을 가는데 이렇게 차려 입고 가야 한단 말인가. 기생 나비는 어느새 나갈 채비를 다 하고 문 앞에서 태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화님, 어서 가시죠."
나비의 우아한 자태에 태형은 순간 넋을 놓았다. 역시 여인의 자태는 따라갈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복잡한 시장을 나비는 한발짝 한발짝 곱게 내딛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태형이 양 손으로 치마를 걷은채 씩씩하게 걸어갔다. 당연히 이 둘에게 시선이 쏠릴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나비는 그런 태형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사야할 채소들과 곡물들을 찬찬히 살피었다. 그러다가 장신구를 파는 가판대에 멈추어섰다.
"운화님, 이거 보세요. 너무 이쁘지 않습니까?"
금 비녀였다. 여인들은 이런 것을 좋아하나보지? 태형은 한 번 슬쩍 보더니 그러하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비는 주인이 내민 손 거울에 이리 저리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았다. 하지만 살 생각은 아니었는지 조용히 비녀를 내려놓고는 가던 길을 갔다. 태형은 나비가 내려놓은 비녀를 유심히 보았다. 이런 것이 바로 여인들이 좋아하는 장신구라는거지... 좀 더 여인의 마음을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그 비녀를 집어들고는 주인에게 물었다.
"이건 얼마요?"
무심코 튀어나온 말투에 태형은 화들짝 놀랐다. 얼마요라니... 여인네의 사내다운 말투에 주인도 놀란 듯 했다.
"아니..이건 얼마이옵니까?"
"허허.. 독특한 분이십니다. 금 다섯 냥이올시다."
"금 다섯냥.. 네? 다섯냥이요?"
태형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 비녀를 다시금 유심히 보았다. 이 조그만 것이 금 다섯냥이나 된단 말이구나.. 역시 여인의 세계는 어렵구나.
"마음에 드나 보구나."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였다. 태형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곳에는 진이 서 있었다. 태형은 또 말을 잃은듯 멍하니 쳐다만 볼 뿐이었다.
"아, 내가 혹 놀라게 한 것인가? "
"아닙니다..어제는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니다. 덕분에 매우 기억에 남는 하루가 된 듯 하구나."
능청스러운 진의 말에 태형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지 몰랐다. 지금 이 사람은 내가 남자인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인가.. 혹 자신에게 반한 것은 아닐까..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다 그 자체가 너무 우스운듯 태형은 고개를 돌려 웃었다. 어느새 진은 태형이 고개를 돌린 쪽으로 와있었다.
"뭐가 그리도 웃긴것이냐?"
(다음화 예고)
어둠이었지만 그 모습은 분명 정국님이었다. 달은 그 둘의 모습을 가리기 위함이었는지, 하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칠흑 같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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