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수호] 지여애모(只汝愛慕)
01
"으아악!!!"
검붉은 피가 문에 이리저리 튀었다.이 곳이 제가 며칠전까지만해도 즐겁게 웃었던 나의 궁이 맞는지 준면은 의문스러워졌다. 제가 태어나고 커왔던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곳이 검붉게 물들어갔다. 준면이 몸을 바들바들 떨며 방의 구석으로 숨어들어갔다. 꿈일거야, 이게 현실일리없어. 다시 자고 일어나면 아무일도 없다는듯이 유모가 나를 깨우고 아바마마가 인자한 미소로 나를 맞을거야. 이건 꿈이어야만해. 누군가 자신의 방문을 힘차게 열어제끼는 큰 소리와 함께 준면은 그만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준면이 눈을 떴을때는 흙먼지가 자욱한 막사 안이었다. 손이 뒤로 결박된채로 주위를 둘러보니 수국의 재상부터 준면의 외가쪽친척인 간의대부또한 무릎이 꿇린 채 발과 손이 결박되어있었다. 아마도 궁의 고관들과 왕족을 모아놓은듯했다. 그러나 준면이 아무리 도리질치며 고개를 둘러봐도 제 아비인 현왕제와 중전인 영안은 보이지않았다. ..설마. 두려움에 다시 손발이 덜덜 떨려오는 듯 했다.
"아,아바마마는요? 어마마마는 어디계신겁니까?"
준면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간의대부에게 물었다. 간의대부는 그런 준면을 어두운 낯빛으로 쳐다볼뿐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하지만 그 무언에서 준면은 직감했다. 이제 다신 제 아비와 어미를 볼수없단것을. 아아, 이 무슨.. 준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그 눈물은 부모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키지못한 죄책감과 이젠 다시 볼수없다는 그리움, 그리고 앞으로 저도 그렇게 될지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입에 재갈을 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열댓명의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그저 그렇게, 처연하게 제 운명을 받아들이려 노력하는중이었다.
"죽기직전에도 배운사람들은 다르단건가, 소란떨지않는군."
머리를 짧게 자른 사내가 막사안으로 들어왔다. 태평국-준면의나라인 수국을 공격한 나라-부대의 대장쯤으로 보일만큼 풍채가 위풍당당한 사내였다. 가만히 앉아있던 수국의 영의정이 입을 떼었다.
"여섯해동안 꼬박 공물을 바쳐왔소. 이번해 우리 수국이 대흉(大凶)이었단 것은 어느 누구보다 태평국이 잘 알터인데 바칠 공물의 양을 조금 줄여주는 것, 그 조그만 자비도 베풀지 못하고 신하국이라 칭했던 나라를 하루새에 무너뜨리는것이오? 스스로 대제국이라 칭하는 태평국은 그리도 속좁은 나라였단 말이오?!"
영의정의 말투가 점점 격해졌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못하고 얼굴이 붉게 물들어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영의정의 말을 가만히 듣고있던 사내가 영의정의 말을 곱씹는듯 가만히 있다 박장대소하였다. 사내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큰 막사안을 그득 채웠다. 한참을 재밌는듯 웃다 웃음을 뚝 멈추더니 허리춤에 차고 있던 은빛날이 날카롭게 선 장도(長刀)를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높이 치켜들고 다시 힘껏 내려쳤다. 막사안은 또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아까와 다른점이 있다면 영의정의 목이 흙바닥을 굴러다닌다는 점. 막사안에 무릎꿇려진 수국사람들의 얼굴빛이 잿빛으로 변하였다.
"수국의 왕족들과 현질(顯秩,높은 벼슬을 뜻함)들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논의하였소. 그 결과 향후 반란의 여지가 있음을 고려하여 모두 참수에 처하라는 황태자마마의 명을 따라 한 사람도 빠지지않고 참수에 처할것이오. 그동안의 정을 봐서 능지처참이나 화형이 아닌 참수에 처하는것이니 황태자마마의 정에 감사를 표하시오."
어이가 없어진 준면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제 나라의 영토확장을 위해 어이없는 이유로 한나라를 패망시켜놓은 자에게 깔끔히 죽여줄테니 감사를 표하라니. 이 무슨.. 어이가 없어서 나오던 눈물조차 쏙 들어가는듯했다. 병사들이 다가오더니 흙바닥에 꿇어앉아있던 사람들을 한명씩 끌고 나갔다. 네다섯명씩 끌고 나가더니 이윽고 끌려나갔던 자들의 비참한 마지막 비명소리가 하늘을 날카롭게 찢었다. 시간이 한 식경쯤 흘렀을까, 수염이 듬성듬성히 난 병사가 준면에게 다가와 팔을 거칠게 잡아채며 끌었다. 준면은 그저 병사가 끌고가는대로 끌려갔다. 체념이었다. 병사가 끌고간곳은 처형장으로 보이는 곳이었다. 옆의 큰 구덩이에는 며칠전까지 얼굴을 맞대며 지내온 사람들이 목이 잘린채로 내동댕이쳐져있어 보기만해도 속에서 구역질이 나올것만같았다. 태평국사람들의 성질이 본디 괴팍하고 잔인하단것은 말로 누누이 들었지만 이정도일줄이야, 준면의 눈에는 제 나라를 망친 태평국의 사람들이 사람은 커녕 도깨비만도 못해보였다. 망나니의 손에 들린 커다란 칼에서 구덩이에 묻힌 사람들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왕 죽일거 깨끗한 칼로 죽여줄것이지. 죽을때가 다되면 눈에 뵈는게 없다더니. 죽기직전에 하는 생각이 살려달라는게 아니라 자신의 목을 벨 칼에 대한 투정이라니, 준면이 자신이 진정 두려움때문에 정신을 놓았다고 생각했다.
"올라가시오."
자신의 어깨죽지를 강하게 붙들고 있던 병사가 자신을 망나니가 있는 처형대쪽으로 떠밀었다. 준면은 반타의적으로 의자에 풀썩 앉았고 병사는 준면이 달아나지 못하게 준면의 양 손을 뒤로해 밧줄로 묶었다. 망나니가 입에 머금고 있던 물을 칼에 뿌리고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이 춤이 자신이 죽기전에 보는 마지막 춤이리라. 망나니의 짧은 춤이 끝나고 그가 하늘 무서운줄모르고 칼을 높이 쳐들었다. 몇명의 목숨을 걷어갔을지 모를 칼은 피가 덕지덕지 묻었음에도 불구하고 영롱함을 잃지않고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준면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휘익,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다.
"잠시 멈추거라."
모두가 숨을 죽이고 칼소리밖에 들리지않는 그때 근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면이 질끈 감았던 눈을 서서히 떴다. 칼을 내리거라. 다시 한번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누구지..? 준면이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려 고개를 살짝 돌렸다. 밧줄을 풀고 이리 데려와보거라.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아닌 태평국의 황태자, 크리스였다. 이번 작전을 진두지휘했다고 했다던 그 남자? 준면이 어리둥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와 안면이 있던 사람도 아닌데 어찌된 일이지. 어리둥절하다는듯 멀뚱히 서있던 병사가 황태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크리스가 특유의 강압적인 얼굴로 병사를 내리깔듯 쳐다보았다. 병사가 정신을 차린듯 기합이 바짝 들어간 몸짓으로 준면을 끌어 크리스가 앉아있는 꽤 높은 단상밑에 무릎을 꿇렸다.
"어허, 어디서 황태자마마앞에서 눈을 치켜뜨는것이냐. 당장…."
"되었다. 그만하거라. 넌 이름이 무엇이냐."
"…지금은 이렇지만 한때 일국의 왕자였습니다. 예의를 갖춰주십시오."
"풉, 그렇군. 왕자마마셨습니까? 제가 몰라보고 결례를 할뻔했습니다. 그렇지않나, 부사관?"
명백히 자신을 비꼬는 말투였으나 준면은 당당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 하고싶은 말을 하니 오히려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크리스가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단상을 내려와 준면앞에 섰다. 일으켜세우거라. 크리스의 명령에 옆에 서있던 병사 한명이 꿇어앉아있던 준면을 일으켜세웠다. 크리스가 일어난 준면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만족한다는듯 웃었다. 제 귀에 꽂혀진 빨간 홍옥(紅玉=루비) 귀걸이 한쪽을 빼더니 준면의 왼쪽 귀에 꽂아넣었다. 투툭, 하고 살이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준면의 인상이 한껏 찌푸려졌다.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왜 아까 물음에 답하지 않느냐.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다."
"무슨짓이냐 물었습니다."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다."
"…준면이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준면은 생각했다. 준면이라, 썩 괜찮은 이름이구나. 그말을 들은 준면은 니가 뭔데 내 이름을 평가하느냐 묻고 싶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고 못마땅한듯 부루퉁한 얼굴로 크리스를 쳐다보았다. 크리스는 그 시선을 무시한채로 제가 꽂아넣었던 홍옥귀걸이를 만지더니 이내 준면의 눈을 바로 쳐다보았다. 준면과 크리스의 시선이 섞였다.
"너는 이제 내것이다."
..지금 뭐라하셨습니까. 내것이라 했다. 같이 태평국으로 갈것이다. 네 외양(外樣)이 마음에 들었다. 어이없는 크리스의 말과 더더욱 어이없는 그 말의 이유에 준면은 이게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가지않았다. 크리스가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
크리수호행쇼S2 |
크리수호는 역시 자급자족이 제맛이라며..(눈물) 연재텀이 쫌 길수도 있어요 글을 느리게쓰는편이라 흡 고전물은 처음이라 부족한면이 있어도 고나리질보다는 상냥하게 가르쳐주셔요:-D 암호닉신청감사히받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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