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에게 03
3장. 계획의 이중성
이럴 때만 유난히 빠르게 흐르는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성우를 소개팅 날에 데려다 놓았다. 어젯밤 어떻게 하면 소개팅을 가장 완벽하게 망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성우는 밤새 포털사이트에 ‘여자들이 싫어하는 남자 패션’을 쳐본 후 가지고 있는 옷 중 제일 이상해 보이는 옷을 고르는가 하면, 거울을 보면서 일부러 일그러진 표정을 연습해보느라 늦은 새벽에 잠이 들었다. 긴 고민 끝에 내려진 결론은, 소개팅 이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남자가 되자는 것이었다. 최대한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인상을 남기자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성우는 이왕이면 약속 시간까지 어겨버릴까 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그건 너무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약속 시간 10분 전에 미리 도착할 수 있을 시간에 집에서 나섰다. 학창시절에는 공부하느라 연애를 하지 못했고,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바로 군대에 다녀오느라 연애를 하지 못해 승혜가 첫 여자친구였던 성우는 난생처음 나가보는 소개팅에 기분이 괜히 이상해졌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칠 뻔한 성우가 간신히 부저를 눌러 버스를 세우고 심호흡을 한 뒤 버스에서 내려 카페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찾은 카페는 2년 전과 비교했을 때 거의 변한 곳이 없었다. 변한 건 성우뿐이었다.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성우는 자신을 향해 수줍게 손을 흔드는 여자를 발견했다. 나름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미리 와 성우를 기다리고 있는 여자의 모습에 성우는 어제 했던 못난 생각들이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에 계획을 변경할 성우가 아니었다. 계획한 대로 가능한 가장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자리에 앉은 성우에게 여자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재환 오빠가 칭찬 많이 하더라고요. 성함이... 성우씨였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밝고 해맑은 여자의 모습에 다정하게 대답할 뻔한 성우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덤덤한 말투로 여자의 이름을 물었다.
“맞아요. 그쪽은 이름이?”
“아, 전 정은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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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요?”
“은주요. 제가 은자 발음을 잘 못하나 봐요. 다들 우주로 잘못 알아들으시더라고요.”
“아, 은주.”
성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이름이 우주였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은주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성우가 일부러 살짝 삐딱하게 자세를 틀었다.
“성우씨, 성우씨는 성이 어떻게 돼요?”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한 성우가 최대한 정확한 발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옹씨예요.”
“공씨요?”
“옹씨요. 옹성우요.”
“이름 되게 특이하고 좋네요.”
“매번 두 번씩 말해야 하고 귀찮기만 하죠 뭐.”
어떻게 하면 은주를 언짢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뱉은 이 말에 놀란 건 은주뿐만이 아니었다. 한 번도 자신의 이름에 대해 나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성우는 자신이 도를 지나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머뭇거리던 은주가 입을 떼었다.
“재환 오빠한테 성우씨가 좀 까칠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긴 했는데, 생각보다 좀 많이 까칠하시네요.”
은주의 뼈 있는 한마디에 성우가 잠시 움찔한다. 하지만 자존심 센 걸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성우는 그 말에 괜히 더 심통을 부리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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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잘 알고 오셨네요. 제가 무지 예민하고 까칠한 사람이거든요. 오늘 원래 나올 생각 없었어요. 저 때문에 그쪽까지, 아니 은주씨까지 기분 나빠져서 좋을 거 없잖아요.”
은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죠. 저까지 기분 나빠질 필요 없죠. 성우씨 딱 보니까 억지로 끌려 나온 것 같은데, 우리 그냥 형식적인 이야기나 하다 갈까요? 나이는 듣고 왔고, 뭐 좋아하는 영화 있어요? 액션?”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딘가 미안한 마음이 든 성우가 마침내 마음속 문의 손잡이를 향해 팔을 뻗었다. 잘못도 없는 은주에게 화풀이를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하기엔 좀 늦은 것 같고, 남은 시간이라도 은주에게 친절히 대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성우가 대화를 이어갔다.
“왜 액션 좋아할 거라 생각했어요?”
“아니에요? 웬만한 남자들은 다 액션 좋아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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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는 안 좋아할 것 같아요?”
“로맨스 영화 좋아하는 남자 드물던데.”
“남자 많이 만나봤나 봐요?”
“네? 저 이제 스물넷이거든요. 연애 경험 딱 한 번 있어요, 한 번. 이거 원래 비밀인데, 어차피 오늘 보고 말 사이니까 말해주는 거예요.”
여태 자신이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데도 웃음을 잃지 않고 말을 이어가는 은주를 보며 성우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소개팅을 주선해 준 재환이에게 내심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알았어요. 그럼 로맨스 좋아하는 남자 드물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어요?”
“아, 제가 로맨스 영화를 진짜 좋아하는데 아는 언니가 그런 영화 같이 봐 줄 사람 찾기 어려울 거라는 거예요. 다들 히어로물이나 액션 영화만 좋아한다고.”
“그 언니 분 순 엉터리네요. 내가 로맨스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 진짜요?”
은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성우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로맨스 영화 좋아하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아니, 아까 그렇게 세상 삐딱하시던 분이 로맨스 좋아한다니까. 웃기잖아요.”
하긴. 본인이 원치 않은 소개팅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에게 예의 없이 행동한 자기 자신이 너무 유치하게 느껴진 성우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깐 미안했어요. 저 나름대로는 이유가 있었는데, 아니다. 다 변명이죠 뭐. 정말 미안해요.”
“됐네요. 영화 이야기나 계속하죠? 재밌는데요 왜.”
털털한 은주의 모습에 성우는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성우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더 신기한 거 말해줄까요?”
“뭔데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뭔 줄 알아요?”
“와, 이거 진짜 기대된다. 나 지금 놀랄 준비 하고 있는 거 보이죠? 빨리 말해줘요. 궁금하니까.”
“노트북이요.”
“설마 제가 아는 그 노트북이요? 레이첼 맥아담스랑 라이언 고슬링 나오는? 그거 완전 멜로의 정석 아닌가? 진짜 신기하다. 되게 매치 안 되는 거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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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럼 은주씨는 대체 내가 뭘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첫인상만 놓고 보면 느와르 좋아할 것 같았는데. 막 어두운 곳 좋아하고 낭만이라고는 코딱지만큼도 모르고, 계절 중에 봄을 제일 싫어하고.”
자신의 첫인상이 그 정도로 별로였나 싶은 생각이 든 성우가 민망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왜 웃어요?”
“은주씨가 말한 게 전부 제 취향이랑 정반대여서요.”
“네? 정반대요? 그럼 성우씨는 대체 뭘 좋아하는 거예요?”
“저 예쁜 카페 찾아다니는 게 취미예요.”
“헐.”
“로맨스 좋아하는 건 아까 말했고. 낭만에 관심이 없긴, 요즘 누릴 수 있는 낭만이 너무 없는 것 같아서 슬픈 사람 중 하나거든요 제가. 아, 그리고 저 봄 좋아해요. 벚꽃 흩날리는 게 얼마나 예쁜데.”
“진짜 너무 다르다 너무.”
“뭐랑 달라요?”
“처음이랑이요. 좋은 뜻이니까 기분 나빠하진 말아요.”
“생각해보니 누구한테 이런 이야기 하는 건 또 처음인 것 같네요. 여태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물어봐 준 사람도 없었고.”
은주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혹시... 아싸예요? 막 사람들이랑 말 잘 안 하고 그래요?”
친구 많기로 소문난 성우에게 아웃사이더가 아니냐고 묻는 은주의 질문에 성우가 피식 웃었다.
“그래 보여요?”
“아니요. 인싸일 것 같았는데 이런 말 하는 게 처음이라니까 또 내가 틀렸나 싶어서 그러죠.”
“아싸는 아닌데, 이런 이야기를 누구랑 해보겠어요. 다들 학점 얘기, 취업 얘기 하느라 바쁘잖아요. 그래서 내가 요즘 낭만이 너무 없는 것 같아서 슬프다고 한 거예요. 서로 취미나 관심사 공유하는 것도 소소한 낭만인데.”
“듣고 보니 그러네요. 뜬금없긴 한데, 성우씨 여러모로 반전 있는 분인 것 같아요.”
“은주씨는 반전 없이 좋은 사람인 것 같네요.”
집에서 나오기 전부터 최대한 빨리 집에 다시 들어오는 게 목표였던 성우는 은주를 좀 더 오래 보고 싶어졌다. 커피만 마시고 나오려던 성우의 계획은 어느새 은주와 저녁까지 함께 먹고 헤어지자는 계획으로 바뀌어 있었고, 의외로 말이 잘 통하는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식당 밖으로 걸어 나온 성우가 아쉬운 마음을 꾹 누른 채 은주에게 말을 붙였다.
“여기 음식 괜찮네요.”
“그러게요. 처음 와봤는데 앞으로 자주 올 것 같아요.”
자신의 말에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성우에게 은주가 조심스레 묻는다.
“우리 다음에 또 봐요?”
마음 같아선 꼭 다시 보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한 행동 때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있던 성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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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씨 처음 뵀을 때 제가 너무 못되게 굴어가지고... 은주씨 좋을 대로 하세요.”
성우의 대답을 들은 은주가 애꿎은 신발코만 땅에 콩콩 찧더니 자신보다 한참 큰 성우를 올려다보며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 그럼 우린 여기서 안녕인 걸로.”
성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냥 아까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잡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지만 별 고민 없이 만남을 정리해버린 은주의 대답에 성우는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아쉬움 가득 섞인 인사를 마치고는 뒤돌아서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내내 성우는 머릿속에 맴도는 은주의 이름을 지울 수 없었다. 자꾸만 은주의 이름과 우주라는 단어가 뒤엉켜 성우를 괴롭게 했다. 마치 은주가 곧 성우의 우주가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성우는 결국 버스에 오르자마자 핸드폰을 켜 은주의 번호를 찾았다. 연락처 목록을 뒤적이던 성우는 은주에게 연락을 하는 대신에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함께 시간을 보낸 반나절 동안 서로의 번호조차 교환하지 않은 것이다.
한편 집에 도착해 샤워를 마치고 나온 은주는 휴대폰에 떠 있는 문자 알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모르는 번호로부터 온 문자를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던 은주의 얼굴 가득 봄 같은 미소가 번져 나갔다.
[저 옹성우예요, 오늘 만났던.
연락처도 교환 못한 것 같아서 재환이한테 은주씨 번호 물어봤어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사실 억지로 나왔던 거 맞거든요. 소개팅 나온 분이 다시는 날 만나고 싶지 않게 만들자는 계획은 대성공한 것 같은데, 소개팅에서 어떤 분을 만나도 흔들리지 말자는 계획은 완벽히 실패한 것 같네요. 은주씨가 자꾸 생각나서 안 되겠어요. 우리 한 번 더 봐요.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무례하게 행동한 게 너무 미안해서 다음번에 만나자는 말을 못했는데 끝까지 이 말을 못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 문자라도 남깁니다.
천천히 생각해보시고 답장 주세요. 오늘 즐거웠어요.]
“그러니까 후회할 짓을 왜 해.”
조용히 혼잣말을 읊조린 은주가 고민 없이 자판을 눌렀다.
[전 또 성우씨가 끝까지 저를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줄 알았죠.
거절을 왜 해요. 저도 그 말 해놓고 집에 오는 길 내내 성우씨 생각나서 미치는 줄 알았는데.
늦게라도 문자 줘서 고마워요. 시간은 언제가 괜찮아요? 최대한 빨리 봤으면 좋겠는데.]
++ 드디어 진짜 여주인공 '은주'가 등장했어요!
이름 치환 기능을 사용할까 했지만 이번 화에서도 보여지듯이
'은주'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의 소재로 사용될 예정이라
'나의 행복에게'에서는 치환 기능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시는 분들이 계시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몰라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독자님들을 한 분 한 분 알아볼 수 있도록 댓글에 암호닉을 적어주세요:)
완결 이후 있을 메일링을 위한 암호닉 신청 관련 공지는
'나의 행복에게'의 연재 중반쯤 자세히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나의 행복에게'에 언급된 성우의 취향들은
전부 구글링을 바탕으로 한... 성우의 실제 취향임을 알려드립니다!
오늘도 읽어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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