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어떡해. 진짜 하나도 모르겠어. 벌써 1시간 째 종인이 컴퓨터 앞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을 하려니까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찬열에게 물어보자니 자존심이 상했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자니 이번 일은 확실히 제가 잘못한 일이 맞았다. 검색창에 '화해하는 방법' 을 검색해 봐도 나오는 것들이라곤 다 낯간지러운 방법들 뿐이었다. 종인에게 '[훈녀생정] 예쁜 편지지에 사과 편지 쓰기★' 등의 방법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피씨방에서 찬열이 지식인간을 하는 장면이 종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맞아,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한 때, 지식인간에 목숨 걸었던 종인이었기에 지식인간은 잘만 활용한다면 좋은 대답들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지식인간에 접속한 종인은 전과는 많이 달라진 지식인간에 어색해 처음엔 조금 헤맸다. 하지만 왕년 지식인간 고수 등급까지 올랐던 종인은 그 때의 기억을 더듬어 겨우 질문하기를 누를 수 있었다. 타닥타닥….
조용한 방 안에 종인의 타자소리만이 울렸다. 벌써 5일째였다. 평소에도 그리 많이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이젠 제가 불편해 죽을 것만 같았다. 나름 자존심이 센 종인이었기에 먼저 사과를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먼저 말을 걸지도 못했다. 경수도 종인과 화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 둘의 관계는 진전이 없었다. 밥을 먹을 때도 침묵이 흘렀고, 서로의 방엔 들어오는 일조차 없었다. 종인은 질문을 모두 작성한 뒤, 컴퓨터 전원을 껐다.
* * *
씨발, 왜 글이 안 써지냐!
PM 11:45. 조금 늦은 시간까지 경수는 제 방 책상 앞에 노트북을 켜 놓고 고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경수는 신경질이나 키보드를 제 주먹으로 내리쳤다. 씹, 아프잖아! 너무 세게 내리친 바람에 주먹이 욱씬댔다. 괜히 쎈 척했어….
경수는 하루종일 겨우 옷가지들을 캐리어로 다 옮기고 종이 상자에 개인 물품들을 옮겨놨다. 하지만 문제는 가구들이었다. 일단 이사할 집을 구하면 그 때 옮겨야 겠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그렇게 되면 종인은 어디서 지내야 하는 거지, 하고 걱정이 됐다. 아냐! 이제 남인데 내가 걔 걱정을 왜 해! 여태껏 종인에게 당한 일들을 생각하자 경수는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듯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12인의 초능력자들'을 쓰기 시작한 데에는 종인의 공이 컸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종인의 모습을 보고 순간 이동을,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에서 불을 연상하게 되어 외계에서 온 초능력자들에게 여러 가지 능력들을 지니게 했다. 여러모로 종인의 모습들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순간 이동 스킬을 구사하는 '카이'라는 캐릭터의 외향 묘사도 종인을 떠올리며 했으니 말은 다 한 것이었다. (덕분에 글을 쓰는 중간 중간 '카이'를 죽이고 싶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저녁을 먹고 간식으로 과자들까지 먹어버린 탓에 경수는 슬슬 잠이 쏟아지려는 것을 느꼈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늘어지게 하품까지 나왔다. 결국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채 경수는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히힝, 난 이제 자유다아…. 꿈 속에서의 경수는 종인의 몸집보다 3배는 더 커져 종인을 발로 차기도 하고 들었다 놨다하며 끊임없이 괴롭혔다. 나 무섭지?…킥. 내가 원래 이런 놈입니다아! 졸고 있는 와중에도 경수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결국 종인이 엉엉 대며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무섭지? 하하! 참으로 기분 좋은 꿈이어서 깨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자요?"
쾅쾅쾅! 그 때 경수의 방문이 격렬한 노크로 인해 부서질 듯이 흔들렸다. 쾅쾅쾅! 잠시 단 잠에 빠져 있던 경수는 시끄러운 문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입술 옆으로 흐른 침을 옷 소매로 대충 닦고 엉거주춤 일어나 방 문을 열었다.
"……."
종인이었다. 문을 열자 확 끼치는 담배향과 술 냄새에 경수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경수의 표정을 놓치지 않은 종인은 혼자 경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하는구나, 하며 절망했다. 맨정신으로는 절대 사과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술까지 마시고 나름 용기내서 사과하려고 온 건데 갑자기 사과를 하고 싶었던 마음이 싹 사라지려 했다.
하지만 종인은 경수의 뒤로 보이는 방의 모습에 그 마음을 금세 접었다. 가출이라도 하려는 건지 옷장의 옷가지들이 전부 꺼내져 캐리어에 담겨져 있었고, 종이 상자엔 경수의 개인 물품들이 담아져 있었다.
"미안…요."
"……뭐?"
이제 저를 때리려 제 방까지 찾아온 줄 알았던 경수는 뜻밖의 종인의 사과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화낸 거랑, 사고친 거랑 버릇없게 굴고 욕한거…. 다요."
"……."
"그니까 가출하지 마요…."
경수가 가출을 하려는 걸로 단단히 오해한 종인이 경수의 손을 덥썩 잡았다. 역시나 술의 효과가 있기는 했는지 잔뜩 대담해진 종인이 말을 술술 이어 나갔다.
"아저씨 집 나가면 누가 나 밥 해줘요…."
밥 뿐이겠니, 빨래랑 청소는 또 누가 해주는데….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한 경수였지만 지금 경수는 잔뜩 감동을 받았다. 이런식으로 종인의 진심을 받아본 적도 처음이었거니와 심지어는 존댓말을 받아 보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내가 사과 같은 거…. 처음 해봐서 잘 몰라요. 그냥 미안해요…."
종인이 마지막으로 그 말을 전하곤 조금 비틀 비틀 대더니 맞은편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 보던 경수가 방금까지 종인과 마주 잡았던 손을 꽉 쥐었다.
"내가 미쳤나. 왜 기분이 좋냐…."
..............................
내가 미쳤냐고? 맞아, 내가 미친 거야. 겨우 싸 놓았던 짐들도 밤새 원상복귀 해 버린 경수가 아침이 밝아오자 제 머리를 내리 치며 절규했다. 어젯밤의 기억이 되살아 났다. 혼자 엄청난 감동의 쓰나미를 받아 준면과 부모님께 문자로 모든 일이 무산되었다고 보내버린 뒤 쌓아 놓은 짐들도 모두 헤쳐버렸더랬다. 그토록 원하던 일을! 어떻게 찾아 온 기회인데! 경수는 지금 그 기회를 제 발로 뻥! 차 버린 것이었다.
진짜 마음이 약해서 탈이야, 씨발! 경수는 어젯 밤 종인이 제게 보내왔던 진심 어린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구나, 개새끼…. 경수는 지금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듯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침은 밝아왔고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경수는 다시 학교로 돌아야 하는 종인을 위해 아침밥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 나의 운명이란 노예인가 보다. 눈물에 젖은 쌀을 씻기 시작했다.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이 꿈인 것만 같이 종인은 원래대로로 돌아왔다.
"김치가 시잖아. 다른 거 없어?"
"어, 없는데…. 근데 종인아, 어제…."
"밥 맛 없네. 안 먹어!"
밥상머리에 앉아 밥을 끼적이던 종인이 어제의 일을 꺼내자마자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저, 천하의 씨발노무새키를 보았나…. 경수는 주걱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쥐었다. 잠시라도 너한테 감동하고 널 걱정했던 내가 병신이지!
* * *
찬열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쭈쭈, 쭈쭈…. 벌써 거의 한 달가량 쭈쭈만을 애타게 부르는 찬열에 종인은 찬열의 뒷통수를 세게 내리쳤다. 꽤 세게 내리쳤는데도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찬열은 종인이 제 옆에 온 것조차 알지도 못하는듯 했다.
"제발 작작 좀 해라, 박찬열. 너 차인 거야, 병신아."
"아니야…. 우리 쭈쭈도 날 사랑한단 말이야…."
그 쭈쭈라는 년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찬열이 하는 말은 '우리 쭈쭈…? 존나 예뻐….' 가 끝이었다. 항상 웃고 다니고 모든 만물을 사랑하는 단군이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밝았던 찬열이 그 쭈쭈라는 년 때문에 이렇게 폐인으로 변해버렸다. 덕분에 종인은 찬열과 함께 놀러다닐 수조차 없게 되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찬열이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대기만 했다. 결국 종인은 찬열을 위해 옆 여고에서 여신으로 추앙받는 제일 예쁘다는 애도 소개시켜줘봤지만 찬열은 그 여자아이에게까지도 쭈쭈타령을 해 대다가 싸대기를 쳐 맞고 돌아왔다고 했다. 무슨 짓을 해도 찬열은 전처럼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까지 찬열을 애타게 만든 사람은 그 쭈쭈라는 년이 처음이었다. 결국 종인은 고민 끝에 병신스러운 일을 저질러버렸다.
"야. 그 쭈쭈라는 애, 내가 책임지고 너랑 이어줄게."
결국 쭈쭈와 이어주겠다는 근거 없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찬열이 종인을 따라 나섰다. 일단 우리 집에서 기분이나 좀 풀자. 종인이 찬열을 억지로 질질 끌고 제 집까지 데리고 왔다. 정말 나 도와줄꺼지? 그치? 찬열이 계속해서 되물어오자 종인은 귀찮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경수는 장을 보러 나갔는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종인이 찬열을 끌고 제 방으로 들어왔다. 컴퓨터 전원을 켜고 커튼을 치자 찬열이 뭐하냐는 듯한 표정을 보여왔다. 종인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우울할 땐 야동이 짱이지."
"나 그럴 기분 아니…."
"가슴 좆나 커. 내가 보장함."
결국 찬열은 의자를 끌어다가 컴퓨터 앞으로 더 다가갔다. [ 보물 ] 폴더에 들어가니 국가별로 다양한 종류의 영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씨발, 좆나 대단한 새끼…. 찬열이 감탄하며 종인에게 엄지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런 찬열의 반응에 뿌듯해진 종인은 그 중 하나를 골라 틀었다.
8분 정도가 경과했다. 아, 씨발. 찬열이 욕설을 뱉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종인도 옆에 앉아 엄청난 집중력으로 금발 누나의 몸매를 감상하고 있었다. 사운드 죽여 주시고…. 이제 절정에 다다르려 했을 때였다. 눈에서 레이저가 쏟아져 나올 듯 화면을 째려보고 있던 둘이 갑자기 열리는 방문에 깜짝 놀라 동시에 나동그라졌다.
"미, 미안. 다, 다시 봐. 즈, 즐감."
경수였다. 장을 봐온 경수가 종인의 방 문을 급하게 열었다가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라 다시 닫아버렸다.
"방 문 잠그는 거 깜빡했다, 씨발…."
종인이 자책하며 제 머리를 때리고 있는데 옆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종인이 눈을 돌려 찬열을 보자 찬열의 표정이 이상했다.
"야, 너. 왜 그래…. 많이 놀랐냐."
찬열의 표정이 이모티콘으로 치자면 '⊙0⊙' 가 되어 있었다. 종인이 그런 찬열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찬열은 그 표정 그대로 미동조차 없었다.
"ㄴ…너어…. 가, 같이 산다…는, 그 아…아저씨가…."
"아, 그러고 보니 처음 보냐? 어. 쟤야."
"쭈, 쭈….쭈쭈…였어?"
찬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갑자기 방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박찬열! 종인이 그런 찬열을 보고 당황해 그 뒤로 급하게 따라 나섰다. 찬열은 부엌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경수의 어깨를 붙잡아 훽 돌려 세웠다.
"쭈쭈야, 왜 내 연락 다 씹었어…?"
"아나, 씨발! 박찬열!"
당황한 듯한 표정의 경수가 왜, 왜 이러세요…! 하며 찬열에게서 뒷걸음쳤지만 찬열이 그런 경수의 어깨를 꽉 쥐고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종인이 그런 둘을 쳐다보다가 다가가 박찬열을 경수에게서 떼어냈다. 야, 씨발. 너 뭐해? 그러나 종인이 하는 말을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찬열의 눈을 오로지 경수만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보고 싶었어, 쭈쭈야…!"
"저, 저기요! 저는 쭈쭈가 아니…."
"작작해. 씨발, 우리 형이라고…!"
"아냐, 우리 쭈쭈야. 쭈쭈야…. 오빠 안 보고 싶었쪄…?"
찬열이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경수에게로 갑자기 얼굴을 들이댔다. 흐익! 놀란 경수가 지난번처럼 당할 위기에 놓였다. 안 돼! 이번만은! 씨발!
"악!"
찬열이 바닥에 쓰러졌다. 아, 씨발! 존나 아파! 자신의 볼을 어루만지는 찬열은 조금 이성을 찾은 듯했다. 찬열과 종인을 번갈아 쳐다보는 경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때, 때. 때렸…?
"씨발, 누가 니네 쭈쭈야. 안 꺼져?"
종인이 찬열의 얼굴로 주먹을 날렸다. 경수는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너무 놀라 벌어지는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O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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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로션이에요!!!!오늘 왕 길게썼어요!!!!!!!!! 불쌍한 찬열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헝
아참 저 그리고 댓글 하나하나 다 읽어본답니다 ♡.. 언제나 저를 응원해주시는 분들 모두모두 사랑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하트하트 뿅S2
앞으로 이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세훈이는 언제 등장할지.. 기대해주세요! 커밍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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