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익숙한 듯 변기를 끌어안고 한바탕 소동을 벌인 경수가 물로 입을 헹군 뒤 지친 몸을 이끌고 화장실을 나왔다.
곧장 침대로 가서 눕고싶을만큼 몸이 축축 쳐졌지만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겨 묵묵히 설거지를 하고 식탁정리까지 끝마친 경수가
그제서야 방으로 가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금방이라도 잠에 빠져들 것같이 눈이 따끔하고 피곤한데 이상하게도 잠은 오지 않는다.
요즘 경수는 그랬다. 잘 먹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속에 든 것을 게워냈고, 몸이 꺼져버릴 듯 피곤하고 눈꺼풀이 무거워도 눈을 감으면
잠이 오지 않아 뜬 눈으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그래도 남들이 보기엔 그리 티가 나지 않고 추한 몰골은 아닌 모양이었는지 다들
별 말이 없어서 새삼 다행이라고 생각한 경수였다. 그만큼 몸은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지만.
식사도 못하고 잠도 못자고 마음은 날이 갈수록 황폐해지기만 하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이불을 끌어당겨 품에 안은 경수가 곧 잠에 빠져들 듯 눈을 깜빡이는 간격이 점점 길어지더니 이내 눈꺼풀이 완전히 감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수의 손에 자리잡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을 울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경수는 결국 번뜩 잠에서 깨어났다.
"여보세요..."
- ... 어디 아픕니까?
"아..."
속을 게워낸 후라서 그런지 목이 칼칼한데다 그리 좋지않은 몸상태로 인해 목소리마저 갈라져나옴에 경수가 흠흠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어쩐일이예요 김종인씨..."
- 어제 잘 들어갔는지 궁금해서 전화했습니다
"흐흐... 그건 오히려 내가 물어야 할 말인걸요. 잘 들어갔어요 김종인씨?"
- 나는 잘 들어갔는데 목소리 들으니까 도경수씨는 아닌 모양이네요. 진짜 어디 아픕니까?
"목소리 들으면 알아요? 와... 김종인씨 진짜 나 많이 좋아하나보네..."
- 누가 들어도 아픈 목소리잖습니까
"아닌데... 누구는 모르던데..."
- ... 집입니까?
"왜요. 집이면 오게요?"
- ......
"와... 김종인씨 이젠 막 들이대기 시작하네? 좋아하는거 알았으니 이젠 박력있게 밀어붙이겠다 이런건가? 흐흥..."
- 끊습니다
종인의 말을 끝으로 매정하게도 뚝- 하고 전화가 끊겨버렸다.
한동안 멍하니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던 경수가 피식 웃곤 침대 옆 협탁에 핸드폰을 올려놓았다.
사실 종인의 전화가 반가운 마음에 조금 장난을 치려던 것 뿐이었는데 기분이 상한 모양인지 말 한마디 하고 뚝- 끊어버리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경수였다. 사람 감정가지고 장난하는게 얼마나 나쁜건지는 알고 있지만 어쩐지 경수가 생각하기에
종인은 곧고 바르기만 해서 이런걸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만 같다.
"에휴, 잠이나 자자"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기 위해 눈을 감은 경수가 아까처럼 잠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침이라 그런지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에 잠을 방해받은 경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나자마자 차양커튼부터
장만해야겠다고 다짐한 후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이제야 좀 차단되는 햇빛에 편하게 몇 번 몸을 뒤척인 경수가 금방이라도 잠에 빠져들 듯 고르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런 경수의 노력을 알았는지 곧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완벽한 무의식으로 빠져들려고 할 때 쯤,
Ding- Dong-
들려오는 현관벨소리에 또다시 경수의 수면이 방해를 받았다.
안돼. 지금 깨버리면 이젠 잠들지도 못한다구... 베개를 이용해 두 귀를 꼭 틀어막은 경수가 애써 벨소리를 무시하며 다시 잠에
빠져들기 위해 애를 썼다. 한 번 뿐이 울리지 않는 벨소리에 인기척이 없으니 그냥 갔겠지 싶어 베개를 끌어내리는데 다시 한 번
Ding- Dong-
"아이씨..."
결국 짜증스레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선 경수가 발을 쿵쿵 굴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누군지 걸리기만 해봐, 가만 안 둬..."
따위를 중얼거린 경수가 상대방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망설임 없이 거칠게 문을 열었다.
"어...?"
"생각보단 쌩쌩하네요"
문을 열자 보인 것은 한 손에 뭔가를 든 채 무표정하게 서있는 종인이었다.
* * *
놀란 경수가 입만 벌린 채 아무 말이 없자 결국 종인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별 일 있는 거 아니면 좀 들여보내주시겠습니까?"
"아, 예..."
뭘까 이 어색한 공기는.
벙찐 경수가 얌전히 옆으로 비켜서자 전혀 망설이는 기색 없이 종인이 경수의 집 안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서둘러 정신을 차린 경수가 현관문을 걸어잠그고 먼저 집 안으로 들어서니 종인 역시 신발을 벗고 거실바닥으로 올라섰다.
"뭐 마실거 줄까요? 뭐 마실래요? 쥬스? 커피?"
"알아서 줘요"
소파에 앉는 종인을 본 경수가 주방으로 향해 냉장고 문을 열고 오렌지 쥬스를 꺼내 투명한 유리잔에 따른 후 쟁반을 받쳐 종인에게 가져간다.
"고마워요"
"전화한 것도 의외였는데 진짜 집까지 왔네요? 난 그냥 농담으로 한 얘긴데"
"아프다는 사람 그냥 내버려 둘 만큼 무심한 남자는 아닙니다"
"응. 그건 알아요. 김종인씨 되게 다정한 남자같아 흐흐..."
슬쩍 곁눈질로 경수를 흘끗 쳐다보던 종인이 경수의 말에 쥬스를 홀짝인다.
"음... 그래도 내 생각엔 좀만 더 다정해도 좋을 것 같아요. 지금은 뭐랄까... 말투가 너무 딱딱해"
"원래 말투가 이런걸 뭐 어떡하란 말입니까. 그리고 난 지금도 충분히 내 나름대로 다정하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김종인씨 주변사람들이 불쌍해지네요"
진지하게 농담을 내뱉는 경수에 종인이 풋- 하고 웃는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옆에 내려놓았던 쇼핑백을 들어 경수에게 건네자 경수가 의아한 듯 받아든다.
"뭐예요 이게?"
"아프대서 오는 길에 죽 사왔어요"
"와... 전복죽이네? 이거 비쌀텐데"
"어제 도경수씨가 계산한 술값에 비하면 비싼 것도 아닐껄요"
"에이, 그건 내가 사고 싶어서 그런거고... 그래도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던 경수가 자리에서 일어서 죽을 주방으로 가져다놓으려하는데 종인이 쥬스컵을 가지고 따라와선
식탁 의자를 빼곤 앉는다.
"왜 따라왔어요?"
"지금 먹어요. 식으면 맛없데요"
"별로 생각 없는데... 속도 안좋고"
"그러니까 속 가라앉게 먹고 약 먹어요"
종인의 말에 입을 삐죽인 경수가 죽을 꺼내들곤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우기 시작했다.
물과 숟가락까지 식탁에 셋팅한 뒤 따뜻해진 죽을 꺼내와 종인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경수가 숟가락으로 죽을 슬슬 휘젓는데
종인의 시선이 경수의 손가락으로 와 박힌다.
"손가락은 또 왜그럽니까?"
"보면 몰라요? 다쳤잖아요"
"누가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그냥 칼질하다가 좀 베였어요"
대수롭지않은 듯 말하는 경수지만 오른쪽 검지를 다쳐서 그런지 숟가락질이 영 불편해보인다.
게다가 약도 바르지 않고 대충 둘러붙인 밴드는 설거지를 할 때 물이 들어가서인지 이미 접착력을 상실한 듯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은 멈추지 않는다.
아무래도 사온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맛도 모르고 억지로 쑤셔넣는 듯 했다.
"안아파요?"
"아... 오늘 그 말 벌써 두번째네"
"뭐라구요?"
"아니예요 아무것도. 아 배부르다"
대충 얼버무린 경수가 싹싹 비운 그릇을 들어 종인에게 검사받듯 보여주며 뿌듯하게 웃어보였다.
그 모습이 꼭 초등학생이 다 비운 급식판을 들고 선생님께 보여드리며 칭찬받길 기다리는 모습같아서 종인은 조금 웃었다.
"아 참, 깜빡했네. 김종인씨는 아침 먹었어요?"
"참 일찍도 물어보네요. 대충 먹었습니다"
"이씨... 한 마디도 조용히 넘어가는 법이 없어"
궁시렁거리며 식탁을 치우기 위해 일어난 경수를 보며 종인은 또 한 번 웃었다.
종인이 그러거나 말거나 설거지거리는 별로 없지만 어쨌든 종인이 마신 컵과 수저, 일회용 죽그릇을 닦기 위해 물을 틀려는데
어느새 옆에 선건지 종인이 경수의 손을 저지한다.
"가서 앉아있어요. 손 다쳐서 물 닿으면 덧나요. 얼마 안되니까 내가 할게요"
"종인씨 말대로 얼마 안되니까 그냥 내가 할게요. 그리고 손님한테 어떻게 설거지를 시켜요"
"됐으니까 방해하지말고 가요"
키도 큰 남자 두 명이 주방에서 부대끼는 꼴이 별로 좋지 않을거라고 생각한 경수가 결국 터덜터덜 걸어 소파에 푹- 주저앉았다.
눕고싶은데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을 종인이 신경쓰여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느슨하게 기대앉은 경수에게로 금새 설거지를 마친
종인이 뭔가를 중얼거리며 다가온다.
"구급상자 어딨습니까?"
"에? 그건 왜요? 어디 다쳤어요?"
"잔말말고 빨리 줘봐요"
"에.. 네..."
TV 서랍장 안에서 아까 넣어둔 구급상자를 다시 꺼낸 경수가 얌전히 종인에게 구급상자를 건네자 종인이 경수의 팔을 잡아당겨
옆에 끌어다 앉힌다.
"뭐예요?"
"그거 그냥 가만히 두면 진짜 상처 덧나고 물 들어가서 잘 안아물어요"
"괜찮대도 그래요"
이번에도 역시 경수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종인이 경수의 손을 자신의 허벅지께로 가져가 간신히 접착력을 유지하고 있는 밴드를
떼어냈다. 쪼글쪼글해진 경수의 검지손가락이 하얗다. 그 하이얀 손가락에 비스듬히 길고 깊게 패인 상처가 보인다.
밴드를 떼어내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조금씩 베어나오는 핏망울에 종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거즈로 상처를 꾸욱 눌렀다.
"아...!!"
"거봐요, 상처가 이런데 왜 거짓말해요"
"심한 것도 아닌데 이런걸로 엄살이라도 떨어요?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병원가봐야되는거 아니예요 이거? 무슨 회라도 뜰 작정이였어요? 아주 난도질을 해놨네 쯧"
"혹시 지금 그거, 조크...? 푸흐흡..."
"난 진지합니다"
진지하지만 자신을 걱정해주는 종인이 나쁘지 않아 아까까지만해도 축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 좋아지고 있는 것을 느끼는 경수였다.
입 한 번 떼지않고 거즈로 지혈했던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 대신 붕대와 테이프를 붙여 단단히 고정시킨 종인이 만족스럽다는 듯
경수의 손가락을 꼬옥 한 번 말아쥐었다가 놔주었다.
"되도록이면 물 닿지 않게 조심하고 씻을 때 장갑이라도 끼고 씻어요"
"그런것 쯤 나도 알아요. 고마워요..."
손을 자신의 가슴께로 가져가 한 번 감싸쥔 경수가 말이 없는 종인만 흘끗거리며 쳐다본다.
TV도 켜지 않은 거실은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려올 뿐 정적에 휩싸여 조용하기만 하다.
"아, 맞다. 차 가져와야되는데..."
"어제 놓고 온 차 말입니까?"
귀찮더라도 그냥 대리를 부를껄 후회한 경수가 다시 차를 가지러 맨 몸으로 나갔다가 들어올 것을 생각하니 착잡한 듯 한숨을 내쉰다.
"태워다줄까요?"
"아, 정말요? ... 아니다. 여기까지 와준 것 만으로도 고마운데 귀찮게 안그래도 돼요"
"어차피 나 아니면 택시를 타던 뭘 하던 맨몸으로 다시 가야하잖아요. 도경수씨 얼굴에 '나 귀찮아 죽겠음' 하고 써있는데 뭘"
"아앗, 벌써 파악되었단 말인가"
장난스럽게 종인을 흘기며 웃은 경수가 입을 연다.
"근데 오늘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웬일이예요?"
"지금 시간이 썩 이른 시간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김종인씨 우리집 쳐들어온 시간이 아홉시 조금 넘은 시간이었거든요? 지금은 열한시 되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이른거죠"
"도경수씨가 그렇다고 얘기하면 그런가보죠"
"이씨... 근데 진짜 웬일이냐니까요?"
"말했잖습니까. 안부차 전화걸었는데 아픈 것 같아서 겸사겸사 병문안 왔다구요"
"언제 그랬어요!!!"
"죽 사온거보면 뻔한거 아닙니까?"
"그럼 약은요!!"
"여기"
아까 쇼핑백과 같이 들고왔던 봉지 안에서 여러가지 약들을 꺼낸 종인이 경수의 앞으로 내민다.
"뭔 약을 이렇게 많이 사왔어요? 약국 차려도 되겠다..."
"아프다는데 어디가 아픈지 몰라서 종류별로 다 사왔어요. 놔뒀다가 두고두고 먹어요"
"치, 약이 무슨 과자야? 두고두고 먹게"
그래도 조금은 감동한 듯 감기약, 두통약, 소염제, 해열제, 진해거담제, 소화제, 진통제 등등 이것저것 가득 담겨있는 봉지를
뒤적이던 경수가 구급상자와 약봉지를 TV서랍장 안에 넣어두고 돌아온다.
"약 안먹습니까?"
"음... 지금 나한테 필요한 약은 없는 것 같아서요"
"대체 어디가 아픈데요?"
"마음이... 마음이 아파요"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경수를 주시하는 종인을 마주보던 경수가 처연하게 웃어보였다.
그거아세요? 왠지 점점 재미없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라는거...???
그래도 재밌다고 읽어주시는 분들 너무 감사드려요ㅠㅠㅠㅠㅠ
암호닉 신청해주신 두분!!!ㅠㅠ제 사랑 다 받아가요 어서ㅠㅠㅠㅠ
마지막님!! 뽀리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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