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스라친 눈동자를 자각한다. 비가 내리는 새벽이었다. 침대 밑에 웅크린 젖은 몸은 진정제를 삼키다 왈칵 눈물을 쏟는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숨 쉬는 것이 괴로운 좀먹은 정신은 매사 후회를 안고 발버둥 쳤고, 종국에는 약을 먹어야만 잠이 들었다. 거세지는 비가 창을 뚫고 목까지 밀려 들어올 것 같은 환상은 지훈을 버린 그날부터 시작됐다.
- ‘……거짓말.’
앙상한 가지만이 남는 계절에도 떨쳐낼 수 없는 목소리가 뺨을 적신다. 어스름한 새벽달도 과거의 퍼런 눈물을 흘리며 발광했다. 거울 속 비어버린 육신은 더는 슬퍼할 이유도 좌절할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여태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까닭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마음과 질척한 후회 때문이었다.
- ‘지훈이를 버렸어요. 떠나보낸 게 아니라 제가 버린 거였어요.’
……
- ‘꿈속에서 지훈이가 매일 울어요. 하지만 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정신과 상담을 재개한 건 일 년 만의 일이었다. 이번 만큼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제 발로 찾아온 나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본 의사는 태연히 안부를 물었다. 본래 괜찮음의 여부로 오로지 두 개의 선택지만 가지고 있던 나는 아름드리 앞에서 빌었던 소원을 이루고 싶다는 대답으로 과거를 지웠다. 으레 바닥에만 고정된 시선이 진료 기록을 더듬는 의사를 향한다. 나를 고쳐주세요. 이 한마디를 위해서.
처음부터 되감아야 하는 거북하고 불편한 기억에 몸서리를 치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그것을 쥐고 지금까지 놓지 못했던 건, 아빠와 은수에 대한 미련과 애증과 두려움이 엉킨 질긴 감정을 버리지 못한 자신이었다. 이것을 인정하기까지 4년이 걸렸다. 살아있는 내가 죽은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빠져나오기까지. 그 먼 길을 돌고 돌아 지훈을 잃어버린 뒤에야 깨닫는 허무함에 글썽인다.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계속 흘러가는 시간이 전부였다.
- ‘언제 떠나신다고 하셨죠?’
……
- ‘약은 장기로 처방해 드릴게요.’
다음 달부터 해외 출장이 잡힌 엄마는 휴학 소식에 말도 없이 두 장의 티켓을 끊었다. 평소 가벼운 설득으로 의견을 압살하길 좋아했던 그녀는 잃어버린 시간만큼 나와 함께 하고 싶다는 담담함을 핑계로 용서를 구했다. 어디 저수지에 빠져 죽어버릴 줄 알았나 보다. 그간 아빠의 일도 그녀의 무관심도 참아내던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펑펑 울었으니 말이다.
오래된 장소를 떠난다는 건 버거운 일이었으나 정리할 곳이 간절했던 나는 최소한 김여주를 모르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내 약점을 알고 눈물을 알고 나약함을 아는 사람들이 없는, 이를테면 지훈과 승관이 존재하지 않는 머나먼 지상으로.
색이 없는 캠퍼스는 괴괴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감추고 눈 내리는 창밖을 주시한다. 똑같은 사람과 장면이 반복되는 것으로도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으니 짐짓 바깥으로 눈을 돌려 결정체의 의미 없는 크기를 쟀다. 작은 것과 작은 것. 더 작은 것과 덜 작은 것. 시야로 판별할 수 없는 것들에 기준을 내리며 진득하게 따라붙은 상대방의 시선을 피한다.
올가을부터 시작한 면담이었으니 이번만 해도 족히 대여섯 번은 되었다. 호텔 건물 모양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아 휴학하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써볼까 하다, 신청서는 허무맹랑한 이유로 접수할 수 없다는 조교의 단호함에 가장 적절해 보이는 ‘진로 변경’을 택했고, 그 잘못된 선택에 현재까지 없는 시간을 낭비하며 시달리고 있었다. 어떤 이유를 선택하든지 낭비될 시간이었으나 진로 변경은 구질구질의 밑바닥이었다.
휴학 신청서를 받아 든 교수의 일방적인 회유가 타박이 되고 그 타박이 공격이 되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는 나의 일관된 태도였다. 선택한 전공을 진실로 하고 싶어 온 사람들이 몇 명이 되겠냐는 질문 따위는 오래전에 버렸으니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창밖으로 거세지는 눈발이 두려워 더 깊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오후로 넘어가는 열두 시를 기점으로 교수의 폭언이 체념으로 돌아섰다. 문밖을 나설 때까지 결정에 대해 얄팍한 후회 따위 일절 하지 말라는 교수의 목소리가 발목을 감는다. 식사 약속이 급한 상대를 위해 복잡한 인사말 대신 가벼운 묵례로 긴 이별을 건넨다. 교수는 뚱한 얼굴로 문을 닫았다.
종강을 앞둔 학교는 소강상태였다. 교수실 앞에서 삐딱한 자세로 서 있던 승관이 금세 다가와 콧잔등을 비빈다. 얼어 뒤지는 줄 알았네. 펭귄만 있으면 최소 남극이다. 양팔을 다리에 붙이고 뒤뚱거리는 녀석이 호탕하게 웃는다. 겨울에는 필히 검은색 머리로 학우들에게 어필하고 싶다던 녀석은 되려 명도를 높였다. 매일 덜떨어진 누구를 걱정하느라 흰머리가 생겨 평생 어두운색은 포기해야 한다는 건 보나 마나 날 두고서 하는 말이었다.
- “넌 진짜 멍청해.”
- “알아.”
-“그래도 다시 와라.”
- “너 올쁠 맞으면.”
- “안 온다는 말을 꼭 돌려서 해야겠냐.”
나란히 본관 계단에 앉아 침묵을 지킨다. 농담이 적어도 서너개 쯤 오갔어야 할 시간은 아무 말이 없다. 서로의 시선도 각자였다. 직접 묻진 않았지만 승관은 지훈과 헤어진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여차하면 빈 강의실에 혼자 엎드려 울거나 오가지 않는 비상구 계단에 앉아 아주 오랫동안 창밖을 보는 날이 많아졌으니 눈치가 젬병이 아니고서야 알 수 있는 행동이었다. 승관은 이후로 지훈이를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그의 이야기를 하는 적도 있었으나 거의 흐지부지되는 일이 많았다.
오래된 관계의 독은 나보다 나를 잘 아는 거였다. 녀석은 헤어진 이유를 묻기보다 지금처럼 내 옆에 앉아 위로했다. 그래서 울지 못했고 더더욱 감출 수밖에 없었다.
- “이제 너 없으면 무슨 낙으로 학교 오냐.”
- “학교를 낙으로 다니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걸.”
- “불가사리 들어가서 김여주 후크송이나 만들려고 했는데 주인공 없으면 그게 무슨 재미냐.”
계선배의 질긴 노력 끝에 극적 타결을 맺은 승관은 지난달부터 석민과 함께 보컬 자리를 쥐었다. 대학 가요제는 부석이 따놓은 당상이다 칭찬하는 선배보다 김여주 욕 한방이 실력 향상의 지름길이라는 농담을 던지던 승관은 누그러진 분위기에 차츰 입술을 들썩였다. 쉽게 잊지 못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 “정말 안 물어봐?”
- “…….”
- “이지훈.”
그의 소식을 굳이 파헤치지 않아도 들리는 건 많았다. 강의실과 작업실에 박혀 단절된 사람처럼 살다, 이젠 먹지도 못하는 술에 잔뜩 꼴아 계선배와 민규의 부축을 받아야 하고, 자취방 문 앞에 주저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듯 밤을 새며 떠나지 못하는 것까지도.
한번은 윤 쌤이 안부를 핑계로 학교까지 찾아온 적도 있었다. 본가에 억지로 데려오면 며칠 동안 죽은 듯이 잠을 자거나 새벽에 테라스로 나가 몸을 웅크리고 눈물에 젖는 일이 허다하다는 그를 제발 살려 달라는 이유로.
일방적인 이별을 고하던 나를 죽이고 싶다가, 부재중으로 남겨진 이름이 미치도록 사무치다가, 그를 버려야만 했던 이유를 떠올리다가, 나를 바라보는 선명한 눈빛을 상기하다가……. 이토록 처절하게 흔들리던 내가 승관의 물음을 애써 외면한다.
우리가 또 다른 우리가 되어 어디선가 만난다면
그땐 우연이 아닌 운명으로 널 사랑할게
- ‘……거짓말.’
소스라친 눈동자를 자각한다. 비가 내리는 새벽이었다. 침대 밑에 웅크린 젖은 몸은 진정제를 삼키다 왈칵 눈물을 쏟는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숨 쉬는 것이 괴로운 좀먹은 정신은 매사 후회를 안고 발버둥 쳤고, 종국에는 약을 먹어야만 잠이 들었다. 거세지는 비가 창을 뚫고 목까지 밀려 들어올 것 같은 환상은 지훈을 버린 그날부터 시작됐다.
- ‘……거짓말.’
앙상한 가지만이 남는 계절에도 떨쳐낼 수 없는 목소리가 뺨을 적신다. 어스름한 새벽달도 과거의 퍼런 눈물을 흘리며 발광했다. 거울 속 비어버린 육신은 더는 슬퍼할 이유도 좌절할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여태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까닭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마음과 질척한 후회 때문이었다.
- ‘지훈이를 버렸어요. 떠나보낸 게 아니라 제가 버린 거였어요.’
……
- ‘꿈속에서 지훈이가 매일 울어요. 하지만 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정신과 상담을 재개한 건 일 년 만의 일이었다. 이번 만큼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제 발로 찾아온 나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본 의사는 태연히 안부를 물었다. 본래 괜찮음의 여부로 오로지 두 개의 선택지만 가지고 있던 나는 아름드리 앞에서 빌었던 소원을 이루고 싶다는 대답으로 과거를 지웠다. 으레 바닥에만 고정된 시선이 진료 기록을 더듬는 의사를 향한다. 나를 고쳐주세요. 이 한마디를 위해서.
처음부터 되감아야 하는 거북하고 불편한 기억에 몸서리를 치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그것을 쥐고 지금까지 놓지 못했던 건, 아빠와 은수에 대한 미련과 애증과 두려움이 엉킨 질긴 감정을 버리지 못한 자신이었다. 이것을 인정하기까지 4년이 걸렸다. 살아있는 내가 죽은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빠져나오기까지. 그 먼 길을 돌고 돌아 지훈을 잃어버린 뒤에야 깨닫는 허무함에 글썽인다.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계속 흘러가는 시간이 전부였다.
- ‘언제 떠나신다고 하셨죠?’
……
- ‘약은 장기로 처방해 드릴게요.’
다음 달부터 해외 출장이 잡힌 엄마는 휴학 소식에 말도 없이 두 장의 티켓을 끊었다. 평소 가벼운 설득으로 의견을 압살하길 좋아했던 그녀는 잃어버린 시간만큼 나와 함께 하고 싶다는 담담함을 핑계로 용서를 구했다. 어디 저수지에 빠져 죽어버릴 줄 알았나 보다. 그간 아빠의 일도 그녀의 무관심도 참아내던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펑펑 울었으니 말이다.
오래된 장소를 떠난다는 건 버거운 일이었으나 정리할 곳이 간절했던 나는 최소한 김여주를 모르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내 약점을 알고 눈물을 알고 나약함을 아는 사람들이 없는, 이를테면 지훈과 승관이 존재하지 않는 머나먼 지상으로.
색이 없는 캠퍼스는 괴괴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감추고 눈 내리는 창밖을 주시한다. 똑같은 사람과 장면이 반복되는 것으로도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으니 짐짓 바깥으로 눈을 돌려 결정체의 의미 없는 크기를 쟀다. 작은 것과 작은 것. 더 작은 것과 덜 작은 것. 시야로 판별할 수 없는 것들에 기준을 내리며 진득하게 따라붙은 상대방의 시선을 피한다.
올가을부터 시작한 면담이었으니 이번만 해도 족히 대여섯 번은 되었다. 호텔 건물 모양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아 휴학하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써볼까 하다, 신청서는 허무맹랑한 이유로 접수할 수 없다는 조교의 단호함에 가장 적절해 보이는 ‘진로 변경’을 택했고, 그 잘못된 선택에 현재까지 없는 시간을 낭비하며 시달리고 있었다. 어떤 이유를 선택하든지 낭비될 시간이었으나 진로 변경은 구질구질의 밑바닥이었다.
휴학 신청서를 받아 든 교수의 일방적인 회유가 타박이 되고 그 타박이 공격이 되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는 나의 일관된 태도였다. 선택한 전공을 진실로 하고 싶어 온 사람들이 몇 명이 되겠냐는 질문 따위는 오래전에 버렸으니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창밖으로 거세지는 눈발이 두려워 더 깊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오후로 넘어가는 열두 시를 기점으로 교수의 폭언이 체념으로 돌아섰다. 문밖을 나설 때까지 결정에 대해 얄팍한 후회 따위 일절 하지 말라는 교수의 목소리가 발목을 감는다. 식사 약속이 급한 상대를 위해 복잡한 인사말 대신 가벼운 묵례로 긴 이별을 건넨다. 교수는 뚱한 얼굴로 문을 닫았다.
종강을 앞둔 학교는 소강상태였다. 교수실 앞에서 삐딱한 자세로 서 있던 승관이 금세 다가와 콧잔등을 비빈다. 얼어 뒤지는 줄 알았네. 펭귄만 있으면 최소 남극이다. 양팔을 다리에 붙이고 뒤뚱거리는 녀석이 호탕하게 웃는다. 겨울에는 필히 검은색 머리로 학우들에게 어필하고 싶다던 녀석은 되려 명도를 높였다. 매일 덜떨어진 누구를 걱정하느라 흰머리가 생겨 평생 어두운색은 포기해야 한다는 건 보나 마나 날 두고서 하는 말이었다.
- “넌 진짜 멍청해.”
- “알아.”
-“그래도 다시 와라.”
- “너 올쁠 맞으면.”
- “안 온다는 말을 꼭 돌려서 해야겠냐.”
나란히 본관 계단에 앉아 침묵을 지킨다. 농담이 적어도 서너개 쯤 오갔어야 할 시간은 아무 말이 없다. 서로의 시선도 각자였다. 직접 묻진 않았지만 승관은 지훈과 헤어진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여차하면 빈 강의실에 혼자 엎드려 울거나 오가지 않는 비상구 계단에 앉아 아주 오랫동안 창밖을 보는 날이 많아졌으니 눈치가 젬병이 아니고서야 알 수 있는 행동이었다. 승관은 이후로 지훈이를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그의 이야기를 하는 적도 있었으나 거의 흐지부지되는 일이 많았다.
오래된 관계의 독은 나보다 나를 잘 아는 거였다. 녀석은 헤어진 이유를 묻기보다 지금처럼 내 옆에 앉아 위로했다. 그래서 울지 못했고 더더욱 감출 수밖에 없었다.
- “이제 너 없으면 무슨 낙으로 학교 오냐.”
- “학교를 낙으로 다니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걸.”
- “불가사리 들어가서 김여주 후크송이나 만들려고 했는데 주인공 없으면 그게 무슨 재미냐.”
계선배의 질긴 노력 끝에 극적 타결을 맺은 승관은 지난달부터 석민과 함께 보컬 자리를 쥐었다. 대학 가요제는 부석이 따놓은 당상이다 칭찬하는 선배보다 김여주 욕 한방이 실력 향상의 지름길이라는 농담을 던지던 승관은 누그러진 분위기에 차츰 입술을 들썩였다. 쉽게 잊지 못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 “정말 안 물어봐?”
- “…….”
- “이지훈.”
그의 소식을 굳이 파헤치지 않아도 들리는 건 많았다. 강의실과 작업실에 박혀 단절된 사람처럼 살다, 이젠 먹지도 못하는 술에 잔뜩 꼴아 계선배와 민규의 부축을 받아야 하고, 자취방 문 앞에 주저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듯 밤을 새며 떠나지 못하는 것까지도.
한번은 윤 쌤이 안부를 핑계로 학교까지 찾아온 적도 있었다. 본가에 억지로 데려오면 며칠 동안 죽은 듯이 잠을 자거나 새벽에 테라스로 나가 몸을 웅크리고 눈물에 젖는 일이 허다하다는 그를 제발 살려 달라는 이유로.
일방적인 이별을 고하던 나를 죽이고 싶다가, 부재중으로 남겨진 이름이 미치도록 사무치다가, 그를 버려야만 했던 이유를 떠올리다가, 나를 바라보는 선명한 눈빛을 상기하다가……. 이토록 처절하게 흔들리던 내가 승관의 물음을 애써 외면한다.
우리가 또 다른 우리가 되어 어디선가 만난다면
그땐 우연이 아닌 운명으로 널 사랑할게
- ‘……거짓말.’
소스라친 눈동자를 자각한다. 비가 내리는 새벽이었다. 침대 밑에 웅크린 젖은 몸은 진정제를 삼키다 왈칵 눈물을 쏟는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숨 쉬는 것이 괴로운 좀먹은 정신은 매사 후회를 안고 발버둥 쳤고, 종국에는 약을 먹어야만 잠이 들었다. 거세지는 비가 창을 뚫고 목까지 밀려 들어올 것 같은 환상은 지훈을 버린 그날부터 시작됐다.
- ‘……거짓말.’
앙상한 가지만이 남는 계절에도 떨쳐낼 수 없는 목소리가 뺨을 적신다. 어스름한 새벽달도 과거의 퍼런 눈물을 흘리며 발광했다. 거울 속 비어버린 육신은 더는 슬퍼할 이유도 좌절할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여태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까닭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마음과 질척한 후회 때문이었다.
- ‘지훈이를 버렸어요. 떠나보낸 게 아니라 제가 버린 거였어요.’
……
- ‘꿈속에서 지훈이가 매일 울어요. 하지만 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정신과 상담을 재개한 건 일 년 만의 일이었다. 이번 만큼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제 발로 찾아온 나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본 의사는 태연히 안부를 물었다. 본래 괜찮음의 여부로 오로지 두 개의 선택지만 가지고 있던 나는 아름드리 앞에서 빌었던 소원을 이루고 싶다는 대답으로 과거를 지웠다. 으레 바닥에만 고정된 시선이 진료 기록을 더듬는 의사를 향한다. 나를 고쳐주세요. 이 한마디를 위해서.
처음부터 되감아야 하는 거북하고 불편한 기억에 몸서리를 치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그것을 쥐고 지금까지 놓지 못했던 건, 아빠와 은수에 대한 미련과 애증과 두려움이 엉킨 질긴 감정을 버리지 못한 자신이었다. 이것을 인정하기까지 4년이 걸렸다. 살아있는 내가 죽은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빠져나오기까지. 그 먼 길을 돌고 돌아 지훈을 잃어버린 뒤에야 깨닫는 허무함에 글썽인다.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계속 흘러가는 시간이 전부였다.
- ‘언제 떠나신다고 하셨죠?’
……
- ‘약은 장기로 처방해 드릴게요.’
다음 달부터 해외 출장이 잡힌 엄마는 휴학 소식에 말도 없이 두 장의 티켓을 끊었다. 평소 가벼운 설득으로 의견을 압살하길 좋아했던 그녀는 잃어버린 시간만큼 나와 함께 하고 싶다는 담담함을 핑계로 용서를 구했다. 어디 저수지에 빠져 죽어버릴 줄 알았나 보다. 그간 아빠의 일도 그녀의 무관심도 참아내던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펑펑 울었으니 말이다.
오래된 장소를 떠난다는 건 버거운 일이었으나 정리할 곳이 간절했던 나는 최소한 김여주를 모르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내 약점을 알고 눈물을 알고 나약함을 아는 사람들이 없는, 이를테면 지훈과 승관이 존재하지 않는 머나먼 지상으로.
색이 없는 캠퍼스는 괴괴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감추고 눈 내리는 창밖을 주시한다. 똑같은 사람과 장면이 반복되는 것으로도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으니 짐짓 바깥으로 눈을 돌려 결정체의 의미 없는 크기를 쟀다. 작은 것과 작은 것. 더 작은 것과 덜 작은 것. 시야로 판별할 수 없는 것들에 기준을 내리며 진득하게 따라붙은 상대방의 시선을 피한다.
올가을부터 시작한 면담이었으니 이번만 해도 족히 대여섯 번은 되었다. 호텔 건물 모양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아 휴학하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써볼까 하다, 신청서는 허무맹랑한 이유로 접수할 수 없다는 조교의 단호함에 가장 적절해 보이는 ‘진로 변경’을 택했고, 그 잘못된 선택에 현재까지 없는 시간을 낭비하며 시달리고 있었다. 어떤 이유를 선택하든지 낭비될 시간이었으나 진로 변경은 구질구질의 밑바닥이었다.
휴학 신청서를 받아 든 교수의 일방적인 회유가 타박이 되고 그 타박이 공격이 되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는 나의 일관된 태도였다. 선택한 전공을 진실로 하고 싶어 온 사람들이 몇 명이 되겠냐는 질문 따위는 오래전에 버렸으니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창밖으로 거세지는 눈발이 두려워 더 깊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오후로 넘어가는 열두 시를 기점으로 교수의 폭언이 체념으로 돌아섰다. 문밖을 나설 때까지 결정에 대해 얄팍한 후회 따위 일절 하지 말라는 교수의 목소리가 발목을 감는다. 식사 약속이 급한 상대를 위해 복잡한 인사말 대신 가벼운 묵례로 긴 이별을 건넨다. 교수는 뚱한 얼굴로 문을 닫았다.
종강을 앞둔 학교는 소강상태였다. 교수실 앞에서 삐딱한 자세로 서 있던 승관이 금세 다가와 콧잔등을 비빈다. 얼어 뒤지는 줄 알았네. 펭귄만 있으면 최소 남극이다. 양팔을 다리에 붙이고 뒤뚱거리는 녀석이 호탕하게 웃는다. 겨울에는 필히 검은색 머리로 학우들에게 어필하고 싶다던 녀석은 되려 명도를 높였다. 매일 덜떨어진 누구를 걱정하느라 흰머리가 생겨 평생 어두운색은 포기해야 한다는 건 보나 마나 날 두고서 하는 말이었다.
- “넌 진짜 멍청해.”
- “알아.”
-“그래도 다시 와라.”
- “너 올쁠 맞으면.”
- “안 온다는 말을 꼭 돌려서 해야겠냐.”
나란히 본관 계단에 앉아 침묵을 지킨다. 농담이 적어도 서너개 쯤 오갔어야 할 시간은 아무 말이 없다. 서로의 시선도 각자였다. 직접 묻진 않았지만 승관은 지훈과 헤어진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여차하면 빈 강의실에 혼자 엎드려 울거나 오가지 않는 비상구 계단에 앉아 아주 오랫동안 창밖을 보는 날이 많아졌으니 눈치가 젬병이 아니고서야 알 수 있는 행동이었다. 승관은 이후로 지훈이를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그의 이야기를 하는 적도 있었으나 거의 흐지부지되는 일이 많았다.
오래된 관계의 독은 나보다 나를 잘 아는 거였다. 녀석은 헤어진 이유를 묻기보다 지금처럼 내 옆에 앉아 위로했다. 그래서 울지 못했고 더더욱 감출 수밖에 없었다.
- “이제 너 없으면 무슨 낙으로 학교 오냐.”
- “학교를 낙으로 다니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걸.”
- “불가사리 들어가서 김여주 후크송이나 만들려고 했는데 주인공 없으면 그게 무슨 재미냐.”
계선배의 질긴 노력 끝에 극적 타결을 맺은 승관은 지난달부터 석민과 함께 보컬 자리를 쥐었다. 대학 가요제는 부석이 따놓은 당상이다 칭찬하는 선배보다 김여주 욕 한방이 실력 향상의 지름길이라는 농담을 던지던 승관은 누그러진 분위기에 차츰 입술을 들썩였다. 쉽게 잊지 못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 “정말 안 물어봐?”
- “…….”
- “이지훈.”
그의 소식을 굳이 파헤치지 않아도 들리는 건 많았다. 강의실과 작업실에 박혀 단절된 사람처럼 살다, 이젠 먹지도 못하는 술에 잔뜩 꼴아 계선배와 민규의 부축을 받아야 하고, 자취방 문 앞에 주저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듯 밤을 새며 떠나지 못하는 것까지도.
한번은 윤 쌤이 안부를 핑계로 학교까지 찾아온 적도 있었다. 본가에 억지로 데려오면 며칠 동안 죽은 듯이 잠을 자거나 새벽에 테라스로 나가 몸을 웅크리고 눈물에 젖는 일이 허다하다는 그를 제발 살려 달라는 이유로.
일방적인 이별을 고하던 나를 죽이고 싶다가, 부재중으로 남겨진 이름이 미치도록 사무치다가, 그를 버려야만 했던 이유를 떠올리다가, 나를 바라보는 선명한 눈빛을 상기하다가……. 이토록 처절하게 흔들리던 내가 승관의 물음을 애써 외면한다.
비디오 태그를 지원하지 않는 브라우저입니다
겨울의 초입새, 지훈의 소식이 끊겼다.
그는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OHMYRAINBOW
; Caramel Drizzle
Chapter 27. 〈어떤 미래>
; 당신이 내게 남긴 것들
#64.
정확한 정보는 없었다. 본관 옥상에서 그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고 새벽엔 아름드리나무를 물끄러미 올려보는 뒷모습을 기억한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 같이 괴담이 되어 거짓의 살을 입혔다. 날짜가 변할수록 찾는 그림자만 늘어날 뿐, 정작 찾고 싶은 그림자는 흔적조차 없었다.
더불어 행방을 모르는 것보다 더욱 비참했던 건, 기억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번호를 누르지 못하는 남이 나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무력함은 이른 아침 캠퍼스에 앉아 기숙사 짐을 싣는 바퀴 따위를 관찰한다. 시간을 죽이고 의미를 죽이는 것들을 골라 자신을 죽인다. 명백한 살인죄였다.
- “김여주.”
……
- “……야.”
승관의 목소리에 비로소 자각한 휑한 눈동자가 주변을 훑는다. 종강의 기쁨도 잠시, 자질구레한 짐으로 골머리를 썩이던 석민은 마지막 상자를 트렁크에 싣고 손을 털었다. 승관의 외투까지 뒷좌석에 밀어 넣고 기지개를 켜더니 시동 걸린 자동차의 매캐한 연기를 그대로 먹고 목을 부여 잡았다.
여주, 잘 지낼 거지? 까끌거리는 목으로 더한 걱정을 쏟는다. 곧 눈물 많은 아이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흐느끼며 승관의 제지를 받아야 했다. 헤어짐에 나약한 인간은 약육강식 사회에서 잡아 먹히기 십상이라는 독한 말을 뱉는다. 울음을 부추기는 꼴이 된 승관은 서러움을 뿜는 석민을 품에 안고 토닥였다.
- “같이 타고 가지 그러냐. 짐은 어제 다 부쳤다면서.”
- “오후에 학과실 한 번 더 들려야 돼. 휴학 때문에.”
- “끝나면 집으로 가는 거지?”
- “……응.”
겹겹이 쌓인 거짓은 순간마다 부피를 달리했다. 끝내 친구에게도 떠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재차 확인하는 승관의 얼굴을 부러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거짓 된 확신에 넘어간 녀석은 조수석 창문을 내려 팔 위에 턱을 얹는다. 연락해. 먼저 갈게. 장난기 많은 얼굴. 내 친구. 손을 흔드는 지금.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멀어지는 그들이 점이 될 때까지 손을 흔들다, 녀석이 남긴 발자국과 반대 방향으로 길을 올랐다. 보이지 않는 지훈의 숨을 따라가지 못한 무력한 나는 이윽고 열매를 털어낸 아름드리나무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몇몇 이들이 봤다던 그가 정말 이곳에 있었다면, 하늘이 욕심 많은 날 괘씸히 여겨도 좋으니 다시 한번 그를 볼 수 있게 해준다면. 이기적인 욕심을 가지에 매달고 거세지는 눈발을 맞는다.
- [범주 형 이지훈 잡았대 둘이 지금 같이 있어]
……
- [너한테 얘기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보낸다]
승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계선배의 이름이 휴대폰을 울린다. 이기적인 욕심을 매달던 나는 사라지고 그저 망설이는 겁쟁이만 남는다. 차가운 계절 속에 벌게진 손끝은 부재 하는 번호를 방관했다. 그리고 마침내 갈등의 한계치에 도달했을 때, 죽음을 뒤로하고 그를 향해 뛰어가던 그 눈밭을 다시 달렸다. 한 번이라도 그를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 욕심부렸던 날 위한 하늘의 마지막 배려였다.
#65.
쾌쾌한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어지러운 벽에 기대 담배를 빨아들이던 선배는 앞에 선 그림자를 응시하다 안경을 치켜 올렸다. 이지훈 개새끼야 일어나. 네가 보고 싶어 뒤지겠다는 사람 왔는데 잠이나 쳐 자고. 실핏줄이 터진 눈을 벅벅대며 테이블에 엎어져 간신히 숨을 뱉는 그를 깨운다. 선배는 거칠게 흔들어도 눈을 뜨지 못하는 그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테이블에 벌인 술병과 꿈쩍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면 얼마나 마셨는지 대충 짐작은 갔다. 선배는 피곤한 듯 꽤나 긴 하품을 했다.
- “지훈아.”
- “…….”
- “너 인마 지금 일어나야 돼.”
연락을 끊어버린 그가 걱정된 건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종강 전날 외상값을 치르러 들린 가게에서 혼자 잔뜩 꼴아 술을 기울인 그를 발견한 선배는 손을 뿌리치며 가게를 나서려던 그를 잡아 지금까지 가둬 둔 상태였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으면 업어서라도 집까지 데려다줄 목적으로 그를 지키던 선배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 “민규 아직 학교에 있으니까 끝나면 불러서 얘 좀 눕혀라.”
- “…….”
- “너도 잠은 좀 자고 다니고.”
밖으로 사라지는 선배의 등 뒤로 자욱한 안개가 찼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나뒹구는 술병과 어울리지 않는 그는 참담했다. 눈언저리에 얼룩진 눈물과 마른 입술로 내 이름을 부른다. 그도 나와 같이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비참히도 서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젖어 들고 이내 희미한 물체를 쫓는 눈동자가 울먹이는 날 향할 때, 천천히 테이블에 엎드려 그를 마주한다. 꿈과 현실, 그 경계 어디쯤 서 있는 채로.
- “……안녕.”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꿈을 헤맨다. 나처럼 아득한 그곳을 방황했다. 뒤틀어진 시간을 잡지 못하는 그도 역시 시한부였다. 하늘이 준 마지막 배려의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곧 떠나야 하는 걸 알면서도 이기적인 마음은 살며시 그의 뺨을 감싸 남은 온기를 나눈다.
- “거짓말인 거 알면서 왜 보냈어?”
- “네가 슬퍼하니까.”
- “……”
- “내 옆에 있으면 네가 울잖아.”
나는 결국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떠나보낸 것이 아닌, 그가 나를 떠나보내며 생각했을 곱절의 시간까지. 서로 상처를 주는 것에 서툴던 우리의 마지막 페이지는, 크레딧이 올라가고 불이 켜지기 직전에 서 있는 우리는…….
- “마지막 소원, 들어 줄게.”
- “…….”
- “말해봐.”
점차 느려지는 눈으로 대답을 기다리던 그가 손을 뻗는다. 그 순간이, 그 순간의 우리가, 그 순간 틈 사이 비추던 처참한 빛이 서로를 향한 화살이 되어 심장부에 박힌다. 어떤 미래도 약속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 그를 위한 마침표를 찍는다.
- “날 기다리지 않는 거.”
……
- “그래야 우리가 살아.”
그가 반지를 빼내는 손을 거칠게 움켜쥐고 애처롭게 운다.
술기운에 속절없이 감기는 눈을 억지로 붙잡으며 틔워낸 목소리는 그 후로도 매일 밤 젖은 꿈을 따라다니며 날 울게 했다.
사랑해
……
내일 또 만나
달음박질로 가게에 도착한 민규가 지훈을 부축한다.
이윽고 문밖을 나서는 발자국이 멀어진다.
그 발자국을 따라 조용히 걷던 나는
더는 내 것이 아님을 깨닫고 등을 돌렸다.
지독한 겨울이었다.
Chapter 27. 〈어떤 미래>
; 당신이 내게 남긴 것들
#64.
정확한 정보는 없었다. 본관 옥상에서 그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고 새벽엔 아름드리나무를 물끄러미 올려보는 뒷모습을 기억한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 같이 괴담이 되어 거짓의 살을 입혔다. 날짜가 변할수록 찾는 그림자만 늘어날 뿐, 정작 찾고 싶은 그림자는 흔적조차 없었다.
더불어 행방을 모르는 것보다 더욱 비참했던 건, 기억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번호를 누르지 못하는 남이 나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무력함은 이른 아침 캠퍼스에 앉아 기숙사 짐을 싣는 바퀴 따위를 관찰한다. 시간을 죽이고 의미를 죽이는 것들을 골라 자신을 죽인다. 명백한 살인죄였다.
- “김여주.”
……
- “……야.”
승관의 목소리에 비로소 자각한 휑한 눈동자가 주변을 훑는다. 종강의 기쁨도 잠시, 자질구레한 짐으로 골머리를 썩이던 석민은 마지막 상자를 트렁크에 싣고 손을 털었다. 승관의 외투까지 뒷좌석에 밀어 넣고 기지개를 켜더니 시동 걸린 자동차의 매캐한 연기를 그대로 먹고 목을 부여 잡았다.
여주, 잘 지낼 거지? 까끌거리는 목으로 더한 걱정을 쏟는다. 곧 눈물 많은 아이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흐느끼며 승관의 제지를 받아야 했다. 헤어짐에 나약한 인간은 약육강식 사회에서 잡아 먹히기 십상이라는 독한 말을 뱉는다. 울음을 부추기는 꼴이 된 승관은 서러움을 뿜는 석민을 품에 안고 토닥였다.
- “같이 타고 가지 그러냐. 짐은 어제 다 부쳤다면서.”
- “오후에 학과실 한 번 더 들려야 돼. 휴학 때문에.”
- “끝나면 집으로 가는 거지?”
- “……응.”
겹겹이 쌓인 거짓은 순간마다 부피를 달리했다. 끝내 친구에게도 떠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재차 확인하는 승관의 얼굴을 부러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거짓 된 확신에 넘어간 녀석은 조수석 창문을 내려 팔 위에 턱을 얹는다. 연락해. 먼저 갈게. 장난기 많은 얼굴. 내 친구. 손을 흔드는 지금.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멀어지는 그들이 점이 될 때까지 손을 흔들다, 녀석이 남긴 발자국과 반대 방향으로 길을 올랐다. 보이지 않는 지훈의 숨을 따라가지 못한 무력한 나는 이윽고 열매를 털어낸 아름드리나무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몇몇 이들이 봤다던 그가 정말 이곳에 있었다면, 하늘이 욕심 많은 날 괘씸히 여겨도 좋으니 다시 한번 그를 볼 수 있게 해준다면. 이기적인 욕심을 가지에 매달고 거세지는 눈발을 맞는다.
- [범주 형 이지훈 잡았대 둘이 지금 같이 있어]
……
- [너한테 얘기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보낸다]
승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계선배의 이름이 휴대폰을 울린다. 이기적인 욕심을 매달던 나는 사라지고 그저 망설이는 겁쟁이만 남는다. 차가운 계절 속에 벌게진 손끝은 부재 하는 번호를 방관했다. 그리고 마침내 갈등의 한계치에 도달했을 때, 죽음을 뒤로하고 그를 향해 뛰어가던 그 눈밭을 다시 달렸다. 한 번이라도 그를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 욕심부렸던 날 위한 하늘의 마지막 배려였다.
#65.
쾌쾌한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어지러운 벽에 기대 담배를 빨아들이던 선배는 앞에 선 그림자를 응시하다 안경을 치켜 올렸다. 이지훈 개새끼야 일어나. 네가 보고 싶어 뒤지겠다는 사람 왔는데 잠이나 쳐 자고. 실핏줄이 터진 눈을 벅벅대며 테이블에 엎어져 간신히 숨을 뱉는 그를 깨운다. 선배는 거칠게 흔들어도 눈을 뜨지 못하는 그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테이블에 벌인 술병과 꿈쩍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면 얼마나 마셨는지 대충 짐작은 갔다. 선배는 피곤한 듯 꽤나 긴 하품을 했다.
- “지훈아.”
- “…….”
- “너 인마 지금 일어나야 돼.”
연락을 끊어버린 그가 걱정된 건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종강 전날 외상값을 치르러 들린 가게에서 혼자 잔뜩 꼴아 술을 기울인 그를 발견한 선배는 손을 뿌리치며 가게를 나서려던 그를 잡아 지금까지 가둬 둔 상태였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으면 업어서라도 집까지 데려다줄 목적으로 그를 지키던 선배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 “민규 아직 학교에 있으니까 끝나면 불러서 얘 좀 눕혀라.”
- “…….”
- “너도 잠은 좀 자고 다니고.”
밖으로 사라지는 선배의 등 뒤로 자욱한 안개가 찼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나뒹구는 술병과 어울리지 않는 그는 참담했다. 눈언저리에 얼룩진 눈물과 마른 입술로 내 이름을 부른다. 그도 나와 같이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비참히도 서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젖어 들고 이내 희미한 물체를 쫓는 눈동자가 울먹이는 날 향할 때, 천천히 테이블에 엎드려 그를 마주한다. 꿈과 현실, 그 경계 어디쯤 서 있는 채로.
- “……안녕.”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꿈을 헤맨다. 나처럼 아득한 그곳을 방황했다. 뒤틀어진 시간을 잡지 못하는 그도 역시 시한부였다. 하늘이 준 마지막 배려의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곧 떠나야 하는 걸 알면서도 이기적인 마음은 살며시 그의 뺨을 감싸 남은 온기를 나눈다.
- “거짓말인 거 알면서 왜 보냈어?”
- “네가 슬퍼하니까.”
- “……”
- “내 옆에 있으면 네가 울잖아.”
나는 결국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떠나보낸 것이 아닌, 그가 나를 떠나보내며 생각했을 곱절의 시간까지. 서로 상처를 주는 것에 서툴던 우리의 마지막 페이지는, 크레딧이 올라가고 불이 켜지기 직전에 서 있는 우리는…….
- “마지막 소원, 들어 줄게.”
- “…….”
- “말해봐.”
점차 느려지는 눈으로 대답을 기다리던 그가 손을 뻗는다. 그 순간이, 그 순간의 우리가, 그 순간 틈 사이 비추던 처참한 빛이 서로를 향한 화살이 되어 심장부에 박힌다. 어떤 미래도 약속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 그를 위한 마침표를 찍는다.
- “날 기다리지 않는 거.”
……
- “그래야 우리가 살아.”
그가 반지를 빼내는 손을 거칠게 움켜쥐고 애처롭게 운다.
술기운에 속절없이 감기는 눈을 억지로 붙잡으며 틔워낸 목소리는 그 후로도 매일 밤 젖은 꿈을 따라다니며 날 울게 했다.
사랑해
……
내일 또 만나
달음박질로 가게에 도착한 민규가 지훈을 부축한다.
이윽고 문밖을 나서는 발자국이 멀어진다.
그 발자국을 따라 조용히 걷던 나는
더는 내 것이 아님을 깨닫고 등을 돌렸다.
지독한 겨울이었다.
Chapter 27. 〈어떤 미래>
; 당신이 내게 남긴 것들
#64.
정확한 정보는 없었다. 본관 옥상에서 그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고 새벽엔 아름드리나무를 물끄러미 올려보는 뒷모습을 기억한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 같이 괴담이 되어 거짓의 살을 입혔다. 날짜가 변할수록 찾는 그림자만 늘어날 뿐, 정작 찾고 싶은 그림자는 흔적조차 없었다.
더불어 행방을 모르는 것보다 더욱 비참했던 건, 기억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번호를 누르지 못하는 남이 나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무력함은 이른 아침 캠퍼스에 앉아 기숙사 짐을 싣는 바퀴 따위를 관찰한다. 시간을 죽이고 의미를 죽이는 것들을 골라 자신을 죽인다. 명백한 살인죄였다.
- “김여주.”
……
- “……야.”
승관의 목소리에 비로소 자각한 휑한 눈동자가 주변을 훑는다. 종강의 기쁨도 잠시, 자질구레한 짐으로 골머리를 썩이던 석민은 마지막 상자를 트렁크에 싣고 손을 털었다. 승관의 외투까지 뒷좌석에 밀어 넣고 기지개를 켜더니 시동 걸린 자동차의 매캐한 연기를 그대로 먹고 목을 부여 잡았다.
여주, 잘 지낼 거지? 까끌거리는 목으로 더한 걱정을 쏟는다. 곧 눈물 많은 아이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흐느끼며 승관의 제지를 받아야 했다. 헤어짐에 나약한 인간은 약육강식 사회에서 잡아 먹히기 십상이라는 독한 말을 뱉는다. 울음을 부추기는 꼴이 된 승관은 서러움을 뿜는 석민을 품에 안고 토닥였다.
- “같이 타고 가지 그러냐. 짐은 어제 다 부쳤다면서.”
- “오후에 학과실 한 번 더 들려야 돼. 휴학 때문에.”
- “끝나면 집으로 가는 거지?”
- “……응.”
겹겹이 쌓인 거짓은 순간마다 부피를 달리했다. 끝내 친구에게도 떠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재차 확인하는 승관의 얼굴을 부러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거짓 된 확신에 넘어간 녀석은 조수석 창문을 내려 팔 위에 턱을 얹는다. 연락해. 먼저 갈게. 장난기 많은 얼굴. 내 친구. 손을 흔드는 지금.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멀어지는 그들이 점이 될 때까지 손을 흔들다, 녀석이 남긴 발자국과 반대 방향으로 길을 올랐다. 보이지 않는 지훈의 숨을 따라가지 못한 무력한 나는 이윽고 열매를 털어낸 아름드리나무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몇몇 이들이 봤다던 그가 정말 이곳에 있었다면, 하늘이 욕심 많은 날 괘씸히 여겨도 좋으니 다시 한번 그를 볼 수 있게 해준다면. 이기적인 욕심을 가지에 매달고 거세지는 눈발을 맞는다.
- [범주 형 이지훈 잡았대 둘이 지금 같이 있어]
……
- [너한테 얘기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보낸다]
승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계선배의 이름이 휴대폰을 울린다. 이기적인 욕심을 매달던 나는 사라지고 그저 망설이는 겁쟁이만 남는다. 차가운 계절 속에 벌게진 손끝은 부재 하는 번호를 방관했다. 그리고 마침내 갈등의 한계치에 도달했을 때, 죽음을 뒤로하고 그를 향해 뛰어가던 그 눈밭을 다시 달렸다. 한 번이라도 그를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 욕심부렸던 날 위한 하늘의 마지막 배려였다.
#65.
쾌쾌한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어지러운 벽에 기대 담배를 빨아들이던 선배는 앞에 선 그림자를 응시하다 안경을 치켜 올렸다. 이지훈 개새끼야 일어나. 네가 보고 싶어 뒤지겠다는 사람 왔는데 잠이나 쳐 자고. 실핏줄이 터진 눈을 벅벅대며 테이블에 엎어져 간신히 숨을 뱉는 그를 깨운다. 선배는 거칠게 흔들어도 눈을 뜨지 못하는 그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테이블에 벌인 술병과 꿈쩍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면 얼마나 마셨는지 대충 짐작은 갔다. 선배는 피곤한 듯 꽤나 긴 하품을 했다.
- “지훈아.”
- “…….”
- “너 인마 지금 일어나야 돼.”
연락을 끊어버린 그가 걱정된 건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종강 전날 외상값을 치르러 들린 가게에서 혼자 잔뜩 꼴아 술을 기울인 그를 발견한 선배는 손을 뿌리치며 가게를 나서려던 그를 잡아 지금까지 가둬 둔 상태였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으면 업어서라도 집까지 데려다줄 목적으로 그를 지키던 선배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 “민규 아직 학교에 있으니까 끝나면 불러서 얘 좀 눕혀라.”
- “…….”
- “너도 잠은 좀 자고 다니고.”
밖으로 사라지는 선배의 등 뒤로 자욱한 안개가 찼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나뒹구는 술병과 어울리지 않는 그는 참담했다. 눈언저리에 얼룩진 눈물과 마른 입술로 내 이름을 부른다. 그도 나와 같이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비참히도 서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젖어 들고 이내 희미한 물체를 쫓는 눈동자가 울먹이는 날 향할 때, 천천히 테이블에 엎드려 그를 마주한다. 꿈과 현실, 그 경계 어디쯤 서 있는 채로.
- “……안녕.”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꿈을 헤맨다. 나처럼 아득한 그곳을 방황했다. 뒤틀어진 시간을 잡지 못하는 그도 역시 시한부였다. 하늘이 준 마지막 배려의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곧 떠나야 하는 걸 알면서도 이기적인 마음은 살며시 그의 뺨을 감싸 남은 온기를 나눈다.
- “거짓말인 거 알면서 왜 보냈어?”
- “네가 슬퍼하니까.”
- “……”
- “내 옆에 있으면 네가 울잖아.”
나는 결국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떠나보낸 것이 아닌, 그가 나를 떠나보내며 생각했을 곱절의 시간까지. 서로 상처를 주는 것에 서툴던 우리의 마지막 페이지는, 크레딧이 올라가고 불이 켜지기 직전에 서 있는 우리는…….
- “마지막 소원, 들어 줄게.”
- “…….”
- “말해봐.”
점차 느려지는 눈으로 대답을 기다리던 그가 손을 뻗는다. 그 순간이, 그 순간의 우리가, 그 순간 틈 사이 비추던 처참한 빛이 서로를 향한 화살이 되어 심장부에 박힌다. 어떤 미래도 약속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 그를 위한 마침표를 찍는다.
- “날 기다리지 않는 거.”
……
- “그래야 우리가 살아.”
그가 반지를 빼내는 손을 거칠게 움켜쥐고 애처롭게 운다.
술기운에 속절없이 감기는 눈을 억지로 붙잡으며 틔워낸 목소리는 그 후로도 매일 밤 젖은 꿈을 따라다니며 날 울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