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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경수야! 이거 S아파트 3304호 배달하고 와."

"아, 거긴 가기 싫다니"

"바빠 인마, 빨랑 갔다 와."



그 집은 진짜 가기 싫은데. 경수가 제아무리 인상을 구겨봐도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내일이 오디션인데 나름대로 피부관리는커녕 스트레스만 잔뜩 받고 오게 생겼다. 경수는 영수증에 붙은 주소를 다시금 확인해봤지만 그 주소가 맞았다. 이 자식들 요새 치킨을 부쩍 더 시켜먹는 것 같다. 한숨을 푹 내쉰 경수가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처음에는 자신이 지금 엄청나게 욕을 하며 배달을 가고 있는 집에 사는 인간들이 뭐하는 인간들인지 몰랐었다. 사실 몰랐어야, 관심 없었어야 정상이긴 하다. 그 집에 배달을 가던 첫 날, 호출을 누른 후 1분여가 지나서야 문을 열어 준 그 녀석은 러닝셔츠에 반바지 차림인데도 허여멀건한 얼굴에 키도 크고 잘생김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녀석이었다.



'어, 왜 내가 시킨 건 치킨인데 존나 섹시한 애가 왔지.'



사실 경수는 '존나 섹시'와는 거리가 멀다. 라고 스스로가 거울을 찬찬히 뜯어본 후 결론을 내렸다. 그것도 치킨 배달을 하러 가서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단 말인가. 잘 생겼다, 귀엽다 라는 말은 들어 봤어도 섹시하다, 라는 말은 영…그딴 말을 뱉은 게 남자라면 더더욱.

아무튼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허여멀건 놈―그 자식 말에 의하면 자기 이름이 오세훈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그랬다.―이 한 그 개소리를 들었는지 집구석 안에서 사내놈 하나가 더 기어나오더니―심지어 이 새로운 새끼는 세훈이라는 놈이랑 흑백 바둑알 콤비인지 까만 편이었다.― 지 취향이라고 헛소리를 지껄이지 않는가. 결국 일주일에 한두번은 꼭 치킨을 시켜먹더니 갈 때마다 개소리를 해 댄다. 녀석들 욕을 머릿속으로 한바가지 하는 동안 경수는 그 집 앞에 도착해서는 호출을 눌렀다.



"누구세요?"

"치킨배달 왔는데요."

"우린 치킨 말고 경수 보고 싶어서 부른 건데."

"간다."



다 보이면서 저런다. 경수는 참을 인자를 세 번은 더 새겼다. 그래도 그냥 간다니까 또 순순히 문을 열어준다. 경수는 그 집 안에 한 발짝도 들이지 않고 열린 문틈 사이로 치킨박스만 내밀었다. 방금 샤워했는지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나온 세훈이 치킨을 받지도 않고 섭섭한 표정을 한다.



"아, 야박하다. 서비스로 얼굴 좀 제대로 보여주지."

"서비스로 무 많이 넣었으니까 빨리 돈 내. 2만 천 원."

"튕기는 것도 귀여우니까 봐 준다. 김종인 똥 싸러 간 사이에 오고, 역시 우린 천생연분인듯."



네 놈 하나 감당하기도 버거운데 김종인은 웬말이야. 결국 현관에 발을 들인 경수에게 살짝 웃어보인 오세훈이 치킨박스를 받아들곤 주머니에서 이만 원을 꺼낸다.



"아, 천원짜리 아까 있었는데 어딨지. 지갑 가지러 가기 귀찮은데…백현이 형! 나 지갑 좀 갖다줘!"



오세훈이 소리치자 방 안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누군가 한 명이 더 나타난다.



"니들 운동하면서 식단조절도 안 하고 치킨 같은 거 시켜먹으면 말짱 꽝이야, 알아?"

"아, 알지. 왜 이렇게 잔소리가 늘었어? …어, 경수 놀란 거 봐. 이야, 변백현 실제로 본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눈 땡그래진 것도 귀엽네."



몇 초간 백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경수가 이내 집을 뛰쳐나갔다.



"어? 야, 천 원 받아가야지!"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황급히 눌렀다. 빨리 이 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변백현 네가, 왜 여기 있어….



2년만이었다, 그를 실제로 본 것은. 대본을 들고 거울 앞에 선 경수의 표정이 아직도 착잡했다. 아, 이러면 안 된다. 경수는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노력했으나 그럴수록 백현의 얼굴은 머릿속에 더욱 선명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결국 밤새 잠을 설쳤다. 그래서인지 피부가 오늘따라 유난히 더 푸석푸석하게만 느껴졌다. 오디션장에 오는 버스 안에서도 눈으로는 대본을 읽어내려가고 있지만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번에 오디션을 볼 드라마는 학원물이기 때문에 화장실에서 준비해 온 교복으로 갈아입고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나 머리를 정돈하고 있는데, 경수 옆에 서 있던 남자 둘이 하는 대화가 들린다.



"야, 오늘 새로 입수한 정본데 이 드라마 변백현도 한다던데."

"걔가 왜? 아이돌 출신 배우 이미지 탈피하고 한창 국민 연하남이니 뭐니 하면서 이미지메이킹 잘 하고 있었잖아."

"그래도 그런 이미지가 걔 같은 주연이랑 우리 같은 조연감들이랑 같겠냐."

"하긴, 야 나가자. 곧 시작하겠다."



변백현이 이 드라마를 한다고? 경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당장이라도 오디션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떨어진 게 수백 번인데 이걸 붙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변백현이라는 이름 앞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바로 그때, 익숙한 얼굴이 거울 속에 비춰졌다.



"도경수. 어제부터 자주 보네?"



자기가 주인공을 맡게 될 오디션 구경이라도 왔는지 변백현이 경수 옆에 와 서서는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올려 손을 씻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가 그러는 동안 경수는 눈이 빠져라 백현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어제 치킨 배달 하는 거 보고 이 쪽에는 아예 미련 버렸나 했는데, 아닌가 봐."

"…."

"그래, 언제까지 기약없는 꿈만 꿀 거야. 슬슬 현실로 돌아와야지."

"…."

"뭐, 이런 조연 쯤이야 따 줄 수 있는데. 원해?"

"변백현."



화를 꾹 눌러참던 경수가 낮은 목소리로 백현의 이름을 부르자 백현이 옅게 웃는다.



"언제까지 네 속을 긁어야 목소리를 듣나 했다."

"난 더러운 도움은 안 받아."

"알지, 그 고귀한 자존심."

"알면 좀 꺼져."



실소를 머금은 채 비꼬던 백현이 어깨를 으쓱 하곤 화장실을 나가려는 듯 몸을 튼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경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넌 내가 더럽게 스타 된 주제에 너 실력 없다고 그냥 막 깔보는 것 같지."

"…."

"자기 감정 컨트롤도 못해서 어제 거의 울 뻔한 놈이 어떻게 배우를 하겠다고."

"…."

"그냥, 전 애인으로서 조언 한 번 해 봤다."

"하."

"애인이라고 해도 되나 몰라. 그 소꿉장난만도 못한 게 너한텐 진지했으니까 네가 어제 그랬겠지. 그러니 애인이었다고는 해둘게."



말을 마친 백현이 나가고, 깊게 한숨을 쉰 경수가 멍하니 거울을 바라봤다.

그러게, 지금 생각하면 소꿉장난 같았던 우리 연애가 뭐라고 내가 널 우연히 한 번 봤다고 이러는 걸까.

그 때만 해도 함께 꿈을 키워나가던 우리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기나 했을까.




-

반응 보고 연재할게요.

다음편부터는 과거-현재 왔다갔다 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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