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는 정말 어떻게 해야하는건지 하나도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닦고 진정하려해봐도 쉽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꾹 쥐고는 정면을 바라봤다. 어느새 시내에서 나와 한적한 시외도로가 보였다. 그냥 이대로 뛰어내려 죽어버릴까. 모진 생각마저 떠올랐다.
" 경수씨는 대학 졸업반인가요? "
" .... 네, 올해 졸업해요.. "
" 사법고시는? "
" 봐야죠.. 그게 꿈이었는데. "
그렇게 무서운 이야기를 내뱉고도 아무렇지않게 화제를 돌리는 찬열이 이제는 신기하기까지 했다. 나도 변호산데. 아무렇지않게 말을 꺼내는 찬열의 말에 깜짝 놀란 경수가 찬열을 바라봤다. 변호사라구요? 경수가 눈을 크게 뜨고 찬열을 천천히 훑어봤다. 그렇게 안보이죠? 나도 사실 거울보면 쫌 놀래. 능청맞게 농담까지 건내는 찬열이 원망스러웠다. 백현이네 회사 고문변호사죠. 아 비서도 겸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이런 인재를 너무 싼값에 부린다는둥 사실은 모델같아 보이지않냐는둥 장난스러운 말만 늘어놓는 찬열이 소란스러웠다. 경수는 이젠 어지럽던 머리가 아프기까지 했다.
경수의 꿈은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변호사가 되어서 조그만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는 것이었다. 착한 심성에 맞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살고싶었다. 자신도 재정적으로 어렵지는 않았지만 항상 가정환경이 우울했으니까. 그렇게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그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재 자신은 디렉트라는 어마어마한 그룹과 엮어버렸다. 눈을 꼭 감고 창문에 기댄 경수는 이제 얼굴도 기억나지않는 그 아버지가 원망스럽기 시작했다.
왜 날 이런곳에 발을 들이게 했어? 그냥 항상 평범하게 사는게 꿈이었는데, 왜 날 이런 진흙밭에 뒹굴게 했어? 알지못하고 있는 크리스의 과거, 사실, 현재가 두려웠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도 선택을 하고 있는 자신이 무서웠다. 정말 찬열의 말대로 옆에 있어야되는건지 아니면 그대로 뒤돌아 나가는건지 선택을 하고있었다. 평소의 경수였다면 당연히 뒤를 돌아 나왔을것이다. 하지만 자꾸 머리속에 크리스의 다정한 눈빛이 떠올랐다. 멍청하게도 경수는 처음이었지만 같이 맞은 아침으로 돌아가고 싶기까지 했다. 그랬다면 자신은 나가자고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고 찬열과 백현을 만나지도 않았고 이런 무서운 진실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잔인한 사람.. 크리스는 잔인했다. 이렇게 자신을 흔들어 놓고서는 나가지도 못하게 그와의 다정한 일상이 자신을 잡고있었다.
" 뭐... 뭘 어떻게 해야하는거예요? "
" 응? "
" 난.. 뭘 어떻게 해야되는거냐구요. "
아 그렇게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나보네, 제법 자신이 해야할 일을 생각도 하고. 피식 웃은 찬열이 어느새 도착한 한식당 앞에 차를 세웠다. 그건 크리스한테 물어봐요. 제일 잘 알려줄테니깐. 전혀 간단하지않은 해답을 내놓고 내린 찬열은 다정하게도 조수석 문까지 열어주었다. 찬열의 다정함이 가식같았다. 징그럽고 또 무서워.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 찬열이 혐오스러웠다. 차라리 평생 모르고 살껄. 왜 어째서..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던 경수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그렇게 내리고서 오분정도를 기다리니 크리스의 차가 찬열의 차 옆으로 들어와 깔끔하게 주차를 했다. 크리스가 운전석에서 내리고 백현이 조수석에서 내리자마자 백현은 찬열의 앞으로 다가가 있는대로 쏘아대기 시작했다.
" 야이 거지같은 새끼야! 누가 쟤 데리고 그렇게 가래? 무슨 얘기 했어! "
" 글쎄, 니 얘기는 조금밖에 안했어. 두루두루.. "
백현은 약이 더 오르는 것을 느꼈다. 실실 웃으면서 달래는게 더 얄미운지 모르는 찬열은 백현의 조그만한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했고 참다참다 못참겠던 백현은 찬열의 정강이를 세게 까버렸다. 악!!! 자신의 정강이를 잡고 이리저리 깡충깡충대던 찬열을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백현은 경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경수는 크리스를 바라보며 눈물만 뚝뚝 떨구고 있었다. 경수에게도 뭐라 쏘아대려던 백현은 그대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미친.. 왜 울고 지랄이야.. 당황한 백현은 머뭇거리며 뒤로 두발짝 물러났고 우는 경수를 보며 찬열에게 작게 물었다. 야 너 뭐라 그랬는데 쟤 울어? 백현이 옆구리를 톡톡 치며 올려다보자 찬열은 어깨를 으쓱하며 백현을 데리고 식당안으로 들어가버렸다.
" 경수야.. "
" ... 당신 왜 그랬어?! "
" .... "
" 왜 나한테 이딴 더러운것들을 알게했어? 왜!! "
" 미안해... "
" 왜!!!! "
나한테 다정했어? 눈물을 흘리는 경수는 언제나 안쓰럽고 또 감싸주고 싶었다. 너를 보며 느끼는 감정을 무엇이라 칭해야 더 귀하고 아름다울까. 크리스는 경수에게 다가갔다. 이젠 소리까지 내며 우는 경수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미안해.. 내가.. 내가... 널.. 그 뒷말을 잇지못했다. 꺼낼 수 없었다. 정말 이 말까지 꺼내면 놓아주려 마음먹었던 것 마저 실행되지 못할꺼같아서 그래서 할 수 없었다. 경수를 위해서, 이 말이 모든것을 용서하는 변명이었다.
들어가서 우선 밥부터 먹자, 이렇게 울다 너 쓰러져.. 경수의 어깨를 부축해 식당안으로 들어가려하자 경수가 힘없이 딸려온다. 이대로 경수를 데리고 집으로 가고싶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함께였던 그 침대위로 올라가 키스를 해주고싶었다. 이젠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돌아가고싶었다. 경수가 아무것도 몰랐던때로. 순간 크리스는 자신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경수도 똑같이 생각할지 궁금했다. 분명 경수는 아니겠지만...
***
" 잘.. 달래준거야? "
우는 사람에게 약해져버리는건 백현도 어쩔 수가 없다. 거의 쓰러질듯 크리스에게 기대 방에 들어와 앉는 경수를 보며 이제 동점심까지 생길꺼 같았다. 괜찮아, 신경꺼. 매정하게 쳐내는 크리스의 말에 욕이 나올뻔했지만 참았다. 찬열이 무슨 말을 했는지 대강은 알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를 알려주는 사람이니 적잖게 충격을 받았겠지. 처음 루한이 죽었다고 대놓고 말하는 찬열을 자신도 쳐버렸으니깐. 하지만 지금은 대강 익숙해졌다. 그렇게 말하는게 어쩌면 제일 상처를 덜 받는거니까.
루한을 생각했다. 약해보였지만 강했던 그를 좌절하게 만든건 크리스였다. 경수마저도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내 백현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으려 애쓰고 있었다. 약하게 된건 경수가 아니라 크리스였다. 다시 눈물을 흘리는 경수에게 어쩔줄 몰라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그 뒤, 주문을 위해 들어온 종업원에게 코스 네개를 준비하라하고 내보내려하니 크리스가 종업원을 불러세웠고 코스요리중 하나는 죽으로 준비해달라는 모습에 이윽코 웃음이 터져버렸다. 헐 찬열아 저것봐, 크리스 병신됐어.. 백현은 웃으면서 끙끙 앓기까지 하다가 눈물까지 흘리고야 말았다.
" 변백현 닥쳐, 진짜 쏴버리기전에. "
" 헐, 야 니가 쏴버린다고 하니깐 또 운다! 푸하.. 아 어떻게 배 아파.. "
경수는 아무렇지않게 쏴버린다고 하는 크리스를 말에 또 울었다. 저 사람은 이제 내가 다 알아버려서 상관없다는걸까. 왜 나를 배려해주지않는거지.. 울음이 멈추지를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 상황에 자신을 달래주는 크리스가 고마웠다. 어떻게 해야 좋은 선택인걸까 쉴새 없이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어쩌면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서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기에 그래서 쉽게 결정하지도 못했다.
다정하게 물을 먹여주는 행동과 등을 두드려주는 손길에 경수는 끅끅댔다. 다정해서 더 눈물은 멈추지않았다.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이러는지 알 수없었다. 나한테 왜 이러냐고 멱살을 잡고 물어보고싶었다. 하지만 정말 그가 내가 듣고싶은 그 말을 했을때 자신 또한 어떻게 될껏만 같아서 물어볼수도 없었다.
" 경수야, 그만 울어.. 머리 안아파? "
" 흐윽.. 아파.. 흑, 흐응.. "
어쭈 이젠 반말까지하네, 재밌다며 관람하는 자세가 된 백현의 시선을 느끼고 경수는 부끄러운 마음에 눈물을 멈췄다. 저 사람은 자신을 작아지게 만들었다. 자신과는 다른 성격으로 말을 하고 행동했다. 경수가 훌쩍거리며 눈물을 멈추자 크리스가 이내 마음을 놓고 한숨을 쉬었다.
아 드디어 멈췄네. 찬열도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곧이어 음식이 들어오고 주문된 음식이 상에 차려졌다. 경수의 앞으로는 말끔한 죽이 놓여졌고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경수가 다들 숟가락을 드는 소리에 자신도 숟가락을 들고 죽을 한번 저었다. 이 상황에서 다들 음식이 들어가는 것이 용하게 느껴졌지만 이내 자신과는 뼛속부터 다른 사람들이었지라는 생각에 다시 먹먹해져옴을 느꼈다.
" 그래서 어떻게 할꺼야? 중국으로 옮겨? 말아? "
" 지금 경수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의도가 뭐야? 그 얘기는 나중에 하지. "
" 시간이 없으니깐 그러지! 평소에는 잘도 내뱉던 인간이 왠 지랄이야 정말. "
중국? 무슨 소리지? 옮긴다는 말에 고개를 들어 빨개진 눈으로 경수는 크리스를 바라봤다. 아무렇지않게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무슨일이냐고 물으려 하는 동시에 객실문이 쾅 소리와 함께 열렸다. 깜짝 놀라 어깨를 파르르 떤 경수는 문을 바라봤고 그 곳에는 한 남자가 입꼬리를 올린 채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수가 고개를 돌려 크리스를 바라보자 소리에도 아랑곳하지않고 크리스는 밥만 먹고 있었다.
아나 씨발.. 문을 한번 힐끔 바라보곤 짧게 욕을 짓걸인 백현은 다시 식사를 했고 찬열은 젓가락을 놓고 피곤한듯 미간을 구기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 다들 여기서 밥 먹는다길래, 합석하려고. 그래도 되지? "
싱긋 웃는 카이가 방을 찬찬히 한번 훑다가 경수에게 시선을 멈추고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곤 한쪽 입꼬리를 올려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 니가 걔구나.. 작게 중얼거린 카이가 식탁쪽으로 발을 옮기려 했다.
" 멈춰. "
" 형, 왜그래. "
" 예의차릴때 멈춰 "
크리스의 말에 카이는 인상을 찢부렸다. 더럽게 거만하기만 한 개새끼. 넌 뭐가 잘났는데 그렇게 나한테 명령질이야.. 화가 났다. 어렸을때도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를 아랫것 취급하는 저 새끼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살고싶으면 굽히라는 눈을 항상 파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이 더 징글맞고 저주스러웠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크리스를 태워버릴듯이 쳐다보는 카이를 백현은 가만히 응시했다. 저 광기 넘치는 눈은 항상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분수에 넘치는걸 원했지. 그래서 그 여자도 죽었고. 오이를 들어 천천히 씹던 백현은 어릴적 처음 본 카이를 떠올렸다. 그때는 저렇게 미치지는 않았던거같은데.. 뭐에 그렇게 정신을 놓은거지? 한참을 생각하던 백현은 이내 입맛이 떨어진듯 젓가락을 내려놓고 앞에 놓여진 녹차로 입을 축였다. 그러고는 밝은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 아 어디서 돈냄새 나지않아? 지폐냄새, 그것도 현금다발로. 누가 만지고 왔나봐 그지 카이? "
백현의 목소리에 카이가 놀라움을 숨기지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백현을 바라봤다. 아가야 넌 거기서부터 크리스한테 진거야. 그 표정 그걸 숨겨야지.. 안쓰럽다는듯이 동정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을 하지만 그 안에는 찌를듯한 비웃음이 들어있다. 피식 웃은 백현이 반찬을 이리저리 들춰내자 찬열이 백현의 손등을 탁하고 친다. 아 왜!! 맞은 손등이 제법 아픈지 노려보던 백현의 볼을 찬열이 아프지않게 살짝 꼬집었다. 반찬 뒤적거리지말라고 했잖아. 단호하게 말하는 찬열때문에 백현은 더이상 뭐라 승질내지못하고 투덜거리기만 했다.
자신을 앞에 두고도 아무렇지않게 식사를 하는 저들때문에 카이는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런 카이를 바라보던 경수는 아기늑대를 떠올렸다. 분노를 숨기고 침착할줄하는 크리스가 다 큰 늑대였다면 자신의 분노를 억제하지못하고 만천하에 다 드러내는 카이는 아직 어려보였다. 카이는 자신의 입술을 한번 씹은 뒤 다시 고개를 돌려 경수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에서 경수는 욕망을 읽을 수 있었다. 아.. 그렇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웠다. 그 열기에 자신이 더워져 짜증까지 나는거같았다.
" 그렇게... "
경수의 입이 열리고 말이 나오자 모두 고개를 돌려 경수를 쳐다봤다. 심지어 크리스까지도. 겁을 낼꺼라 생각했던 경수가 예상치도 못하게 담담하게 말을 꺼내자 카이는 흥미로웠다. 작게 콧소리를 낸 카이가 경수를 응시했다.
" 쳐다봐도 가질 수 없어. "
" .... 뭐? "
경수의 말에 백현과 찬열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쑥맥인줄 알았는데 뭐야 다 알잖아! 백현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즐거웠다. 경수의 말에 심지어는 호감까지 생기려 하고있었다. 레이가 물건이라더니 진짜 물건이네.. 작게 중얼거린 찬열의 입가에는 웃음이 만발했다. 사람은 쫌 볼줄 아나보네.. 고개를 저으며 못말리겠다는듯 녹차를 들이켰다.
예상치도 못한 공격을 받은 카이는 어이없음을 느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눈에 띄게 행동했나. 고개를 갸웃한 카이는 경수를 바라봤다. 담담한 얼굴에 제법 강함이 보인다. 어디서 저런 물건을 찾은건지. 먼저 찾지못한것이 안타까웠다. 내 옆에 있으면 좋을꺼같은데.. 툴툴거리던 카이가 웃었다.
" 쟤가 뭘 사줬길래 그렇게 단호해? "
" ..... "
" 건물? 차? 아니면 현금다발이라도 줬나.. "
" .... 미친... "
" 아니면 니가 몸이라도 대줬는데 좋았어? 쟤가 잘해? 나랑도 한번 해봐, 혹시 알아? 내가 더 잘할지. "
카이의 모욕적인 말에 경수가 주먹을 쥐었다.
쨍그랑!
카이의 얼굴 바로 옆으로 찻잔이 날아와 벽을 맞고 깨졌다. 손목을 돌리면서 카이를 바라보던 크리스가 피식 웃었다. 어리다고 봐줬더니 끝도 없이 기어올랐다. 그나마 눈치는 좀 있는 애인줄 알았건만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려 깨진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크리스를 바라보던 카이의 볼에 긁혔는지 작은 상처에서 조금씩 피가 새어나왔다. 손가락으로 상처를 만져보고 자신의 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씨발.. 중얼거린 카이가 안주머니에서 재빨리 총을 꺼내 크리스를 겨눴다.
마주친 눈이 참 똑같았다. 형제사이에서 형체 모를 검은 것이 마구 솟아오르는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