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이 미끄러졌네. "
" 씨발, 너 지금 나랑 장난쳐? "
" 앉아, 밥 먹자고 온거 아니야? "
웃고있는 크리스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카이는 총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줬다. 이대로 쏴버리면 자신이 계획한 모든 것이 좀 더 쉽고 빠르게 해결되겠지 싶었다. 총 내려. 카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가 손을 뻗어 벽에 달려있던 인터폰으로 카이의 음식을 주문했다. 그러다 문득 뭔가 생각난 크리스는 인터폰을 내려놓기전 추가로 덧 붙혔다. 아 당근은 빼주시죠, 알레르기가 있어서. 카이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는 빼놔야 할 것을 정확히 말하는 크리스가 카이는 더 얄미웠다. 여유롭게 뭐든 알고있는것처럼 사람을 꾀뚫어보는 저 눈빛, 그게 제일 맘에 들지 않았다.
정작 이 사단에 아무렇지않게 백현과 찬열이 식사를 하면서 식기가 서로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객실안에 가득했다. 카이와 크리스를 쳐다보던 경수도 한숨을 내쉬곤 숟가락을 들어 죽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 이들 사이에 있으면 자신마저도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는거 같았다. 이렇게 총이 아무렇지않게 눈 앞에 있고 욕이 난무하고 자신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마구잡이로 펼쳐지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어느새 자신도 이런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거 같았다.
제 입술을 혀로 핥은 카이가 사람들 소리가 들려올쯤 총을 수트 안쪽포켓에 집어넣고 아무렇지않게 자리에 앉았다. 자신의 옆에 카이가 앉자 순간 놀란 경수가 어깨를 움찔했고 그런 경수를 본 카이는 미소를 지었다. 종업원들이 재빨리 상을 차리고 나갔고 한참을 조용히 있던 찬열이 고개를 들어 모두를 찬찬히 훑어봤다.
" 니네 둘 아버지께서 보면 좋아하시겠네, 이렇게 백현이랑 셋이 마주앉아 밥도 먹고. "
" 미친, 생각도 하기 싫어. "
여기서 그 인간 이야기가 왜 나와? 버럭 성질을 낸 백현은 찬열의 말에 젓가락을 내려놨다. 왜 더 먹지. 찬열이 큭큭대며 백현의 머리를 쓰다듬자 백현은 찬열의 손을 탁 치며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진짜 그 인간 생각하니깐 입맛이 떨어져. 턱을 괴곤 주머니를 뒤지던 백현을 바라보던 찬열이 안쪽 포켓에서 껌을 꺼내 백현의 앞에 들이밀었다. 고마워. 퉁명스럽게 전혀 고맙지 않은 목소리로 말한 백현은 껌을 받아 짝짝 소리를 내며 씹기 시작했다.
언제 그랬냐는듯이 조용히 식사를 하는 크리스와 카이를 보는 백현은 그 둘이 가증스러워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미친새끼들 언제 대가리에 바람구멍 날지 모르는 상황에 밥이 넘어가나.. 저런거 보면 똑같아, 그지? 자신을 보며 동의를 구하는 백현을 바라보던 찬열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백현이는 입에 걸레를 물었나.. 진짜 한국어 공부를 다시 시켜야하는지 찬열은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분명 창문은 다 닫혀있는데 찬바람이 부는거같은 방안의 온도에 경수는 크리스와 카이 사이에서 어쩔줄 몰랐다. 죽을 더 먹기에는 배부르고 그렇다고 더 먹었다간 분명히 체할꺼같았다. 식후 입가심으로 나온 식혜만 홀짝이다가 경수가 찻잔을 내려놓고 의자를 뒤로 빼는 소리에 크리스와 카이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아 씨발 호러네. 그 모습에 백현이 눈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 아.. 저 잠깐 화장실 좀.. "
" 같이 가. "
그 말에 이때다 싶었는지 백현이 싱긋 웃으며 경수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는 잡아 끌었다. 어.. 저기! 경수가 잡힌 어깨와 크리스를 번갈아 보더니 어쩔 수 없이 질질 끌려 나갔다. 경수가 나가자마자 카이는 탁소리가 나게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로 입을 행궜다. 여기 음식 영 간이 싱겁네. 크리스는 피곤함에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 한국비자 만료던데? 비자연장신청 안한거 봐선 중국으로 돌아갈려고? "
" 그건 니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
" 아니지, 나랑도 깊게 상관이 있지. "
크리스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카이가 싱긋 웃었다. 나도 가야되잖아. 난 국적이 한국이라서 비자를 받아야되거든. 당연한 말을 해 무엇하냐는듯이 어깨를 으쓱거린 카이가 아직 따뜻한 녹차를 들어 입술을 축였다. 그 둘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찬열이 어깨가 뻐근한지 한번 돌리곤 백현과 경수가 나간 문을 한번 힐끗 쳐다봤다.
" 카이, 너 누구 만나? "
" 만나지, 난 항상 여자가 넘쳐나잖아. "
찬열의 말에 장난스레 웃으며 대답하는 카이를 크리스를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어려서 그런지 진지함이 없네. 카이의 가벼운 농담에 찬열은 같이 웃어주면서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백현이가 니 뒷조사를 시작할꺼야, 그럼 다 나와. 니가 어젯밤 어떤 술집에서 어떤 가벼운 년을 만나 어떤 체위로 섹스를 했다는거까지도. 웃고만 있어 몰랐던 찬열의 날카로움이 비웃음과 함께 드러났다. 솔직한 발언에 웃고있던 카이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끼리끼리 만난다는게 사실인가보네, 다 꼭 너 같잖아? 눈을 돌려 크리스를 힐끗 쳐다봤다. 개념이 없어. 그런 카이의 말에 크리스가 피식 웃었다.
그 세명의 말투는 꼭 항상 만나던 가족의 안부를 묻는 것처럼 정도 없고, 특별한 감정도 없이 그렇게 초침이 지나가는 것처럼 흘러갔다.
***
" 너, 뭐야? "
도저히 그 분위기에서 경수는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 칸 안에 들어가 숨을 고르고 나와 손을 닦고있는데 뒤에서 백현이 불쑥 날카롭게 물어왔다. 이미 간줄 알았던 백현이 뒤에 서있자 깜짝 놀란 경수는 순간 다리를 휘청거렸다. 어쭈, 가지가지하네.. 그런 경수를 보며 인상을 찢부린채로 다가온 백현이 경수의 옆에 서서 벽에 기대었다. 찬찬히 뜯어보면 닮은 점은 하나도 없는데 왜.. 경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던 백현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경수의 앞으로 한발짝 다가섰다.
착한척, 아무것도 모르는척 하려고 발버둥치는게 눈앞에 훤히 보여서 안쓰러울정도네. 안힘들어? 다가온 백현이 경수의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었다. 그런 백현을 가만히 보고있던 경수가 고개를 틀어 백현의 손을 피했다. 허, 이것봐라? 경수의 행동에 잠시 당황해 인상을 쓰던 백현은 손을 거두고 빤히 쳐다봤다. 이럴줄 알았지. 멍청한 새끼가 아직까지 저 미친놈 옆에서 붙어있을리가 없지. 슬슬 새어나오는 웃음에 백현이 어깨를 살짝 떨었다.
백현의 어이없어하는 모습에 경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않았다. 경수는 어렸을때부터 혼자였다. 그러기에 적당히 세상사는 법도 알았고 조금은 영악할줄도 알았다. 그렇지만 그 모습이 과하여 머리를 재빠르게 돌려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는 그런 행동따위는 해본적도 없었다. 하지만 아까 차에서 찬열의 말을 듣고 그와의 아침을 떠올렸을때 경수는 소름돋게도 그가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더욱 더 매달려 자신을 떠나보내지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습게도.
" 그렇게 어이없어 할 필요.. 없어요, 멍청하게도 아무 수작없으니까 "
고개를 푹 숙인 경수는 피식 웃었다. 아까 그렇게 차에서 내리고 크리스를 기다릴동안 수많은 감정이 자신을 덮쳤다. 어떻게 해야하는건지 정말 이대로 도망을 가도 되는건지, 아니면 그의 옆에 있어도 되는건지. 하지만 자신은 그의 옆에 남을 명분이라는것이 없었다. ... 그래 이대로 그냥 떠나자, 아무 일 없었다는듯이 생활이라도 해보자. 시도라도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굳게 먹었던 다짐했던것이 그를 보자마자 풍선처럼 어이없게 빵 터져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눈물샘과 함께. 왜 나한테 그렇게 해줬던거지, 왜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는지 경수는 도저히 이해할수가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그 말을 크리스가 자신에게 해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비록 그는 말을 하지않았지만.
이렇게 혼자 남겨질까 전전긍긍하는 자신이 너무 우스웠다. 눈물이 나올꺼같았지만 당연한거처럼 눈물은 이미 말라 나오지않았다. 한참을 고개를 숙이다가 화장실에 퍼지는 담배냄새에 경수가 고개를 들었다. 백현의 입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담배는 묘하게 그와 분위기를 어울리고 있었다. 천장만 바라보며 담배연기만 뿜어대던 백현은 짧아져버린 담배를 바닥에 버리곤 비벼껐다. 너 내가 쟤를 왜 싫어하는지 알아? 경수와 눈을 맞추고 천천히 말을 꺼내는 백현의 눈빛에 경수는 어쩐지 불쌍함을 느꼈다.
" 내가 진짜 저 새끼의 개가 된거같아서, 그래 애완견. 그거같아서 "
그리고 그걸 내가 느껴, 기분은 존나 더러운데 저 새끼가 뭐라고 말하면 그걸 들어쳐먹고 행동하는 내가 존나 한심스러워. 난 그게 싫어. 눈을 길게 감았다 뜬 백현은 눈앞에 흐릿하게 보이는 추억에 다시 눈을 감았다.
어렸을때 처음 본 크리스는 컸다. 자신은 닿을수도 없게 커보이던 그를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백현을 향해 백현의 아버지는 항상 말했다. 저 남자가 보여? 손에 모든걸 쥔 남자는 저런거야. 그러니깐 넌 저 남자를 지키는 칼이 되거라. 하얗고 작기만 했던 백현이 알아들을 수 있던 말을 지키라는 그 말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 지키자 그러자. 굳게 다짐한 백현은 크리스를 위해 컸다. 사랑은 아니었다. 가슴은 두근거렸지만 사랑이 아닌 기대감이었다. 나도 그처럼 될 수 있을꺼야. 그와 함께 있으면 그럴 수 있어. 묵묵히 그의 옆에서 커온 결과는 크리스가 아닌 루한이었다.
루한을 처음 본건 한참 중국에서 한국으로 넘어오기 위해 필요한 브로커들을 고르고 있던 중이었다. 공산당 고위간부가 소개시켜준 브로커가 루한이었고 그는 아름다웠다. 브로커라는 위험한 직업에 맞지않게 그는 밝았고 그래서 자신도 밝아지는거같았다. 그게 문제였다. 한낱 조직원에 불과한 그에게 과도한 정을 준것은 저였고, 그것을 알아챈것은 찬열이었다.
***
" 브로커를 사랑해? "
" 무슨 개소리야, 사랑이라니.. 너 나랑 장난해? "
" 근데 왜그래, 왜 공과 사를 구분을 못해. 너 어린애야? "
찬열이 화를 내는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에미넌트라 불리울만큼 홍콩 중심가에 우뚝 솟은 디렉트의 본사건물의 구조는 일층부터 이십팔층까지는 사원들이 다닐 수 있는 평범한 사무실이었고 이십구층은 백현의 사무실, 그리고 마지막 삼십층은 크리스의 사무실이었다. 루한이 아무리 올라가려고해도 올라올수있는 층은 백현이 있는 이십구층이 끝이었지만 루한은 자꾸 삼십층을 궁금해했다. 그런 그가 너무 귀여워서 잠깐만 보고오자 숨어서 조심히 올라가 내려오려하는길에 크리스를 만났다. 잠시의 아주 잠깐의 마주침이었지만 루한은 크리스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는 바보같이, 알아챘어야했는다는걸 꿈에도 몰랐다.
크리스를 사랑하게 되어버리다니.
조심스럽게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루한을 보며 백현은 당황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한번 봤는데? 좋아? 걔가? 왜? 끝도 없이 질문하는 백현을 향해 환하게 웃어보인 루한은 그냥 고개를 저었다. 차마 행복해보이는 루한에게 그를 사랑하지말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 자신의 잘못이었는데 왜 난 루한을 탓하고 크리스를 저주했던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때도 자신은 똑같이 저주하고 남탓을 했을것이다. 백현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루한은 제법 저돌적이었다. 무섭지도 않았는지 계속 크리스를 찾아갔고 적극적으로 그를 대했다. 아무말도 없이 루한의 행동을 가만히 냅두기만 했던 크리스의 행동이 문제였다고 지금도 백현은 계속 생각했다. 그래 니가 그때 확실히 끝만 잘 맺었어도..
눈에 눈물이 차올라오는거같았다. 루한을 생각하면 그랬다. 넌 열심히 사랑했을뿐인데 억울했겠지 그리고 복수하고싶었겠지. 루한에게 총을 겨누던것을 막아선것은 백현이었고 이미 화가 날때로 나버린 크리스가 총구를 당긴 순간 서있던 백현을 막은것은 루한이었다. 미친새끼.. 조용히 중얼거린 백현이 긴 시간동안 자신을 잡아둔 기억속에서 나왔다. 그리고 경수를 바라봤다. 너 또한 그렇게 될꺼야. 그를 사랑하는 그 순간 미친놈 손에 목졸려 죽을꺼라고.
" 너한테 기회를 주는거야 난. "
" .... 무슨 기회요? "
" 지금 너한테 제일 필요한 그거. "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얼마인지 알 수 없는 현금을 뭉텅이로 꺼내 경수의 손에 쥐어줬다. 백현을 쳐다보는 경수의 눈이 일렁거렸다. 어느정도 생각은 있는거같으니까 내 행동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 자신의 손에 쥐어진 돈과 백현의 얼굴을 한참이나 번갈아 쳐다보던 경수는 뒤를 돌아 화장실 밖으로 뛰었다. 텅 빈 지갑을 멍청하게 들고 서있던 백현은 바들바들 떨리는 걸음을 옮겨 화장실 밖으로 나와 정원을 비추는 넓은 창 앞으로 갔다. 한적한 고속도로에서 택시를 잡고있는 경수의 뒷모습이 보였다.
주먹을 꽉 쥐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거칠게 닦으며 한참이나 헛손질을 하던 경수는 이윽코 잡혀 버린 택시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백현과 눈을 마주했다. 가. 입모양으로 무슨말을 하는지 경수는 알 수 있었다. 이게 아마도 마지막이겠지, 무엇의 마지막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이 행동에 대한 후회를 저 백현이라는 남자와 자신은 분명히 할것이라는거. 이거 하난 경수도 알 수 있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띄어 택시에 탔다. 출발하는 택시에도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않던 경수는 비로소 그곳이 점처럼 보일때쯤 고개를 돌려 작게 탄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