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멍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혼인? 누구랑? 그저 멍하니 고개를 내리고 찬열의 가슴팍만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생각도 못한 말이었다. 제 앞에 찾아오신 것만으로도 너무나 좋아 꼭 꿈인듯한데 혼인이라니.. 비가 되어달라니.. 울어서 뻑뻑해진 눈이 지금에서야 피곤해지는 것만 같아서 눈을 꾹 감았다.
그런 백현을 뚫어질듯 보고있던 찬열은 혹시라도 백현이 거절할까 두려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리고 새삼 황제의 직위라는 것이 연모하는 이 앞에서는 다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저 백현이 제 앞에서 한떨기 작은 꽃 마냥 웃기만 했으면 좋겠다. 제게 안겨 많은 것을 함께보고 함께 잠자리에 들어선 제가 먼저 일어나 그를 바라보다 시작하는 아침이 갖고싶었다. 눈을 꼭 감은 백현을 바라보던 찬열은 다시 백현을 제 품 깊숙히 안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백현은 손을 올려 찬열의 허리춤에 감싸안아 가슴팍에 기대었다. 거절하면 옥에 가둬놓을 것이다, 분명히 말했어..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찬열의 말에 백현은 더욱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너무 하십니다.. 옥이라니요.. 심통이 난 말투로 웅얼대는 백현에 그저 사랑스러워 입가에 미소가 만발했다.
" 옥에 가둬놓는 것이 무서우면 혼인을 하면 되지않느냐 "
" 혼인이라니요.. 전... "
사내가 아닙니까... 제 품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백현을 내려보자 마음 속 깊은곳부터 소유욕이 일어났다. 네가 없는 삶은 어찌 살았던걸까 싶어서.. 작은 얼굴에 가닥가닥 내려와있는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찬열은 제가 살아오며 보내온 밤중에 이리 따스한 밤이 있을까 생각했다. 태어나서부터 그저 제 목숨부지하는 것을 모든 것이라 여기지않았다. 황제가 되고 싶었다. 천하에 제일 가는 황제가 되어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다. 그 뜻을 이루고 황제가 되었을때, 행복하였지만 허망했다. 내 인생에 다른 뜻을 이룰 일이 또 생길까 했지만 그러할 일은 없을꺼라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히 마음을 써보면 제가 바라던 그 뜻이 백현이 아닐까 싶었다. 그냥 이제라도 만나 참으로 다행이었다.
찬열은 그저 마음속 가득 차오르는 이 행복에 품 안에 있는 백현은 얼싸안고 궁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밤을 무심하게도 너무 길었고 제 품안에 있는 백현은 너무나 달았다. 폐하.. 저를 작게 불러오는 백현의 허리에 손을 감싸 힘을 주어 백현을 들어올려 제 위에 앉혔다. 예상보다 더 가볍게 들리는 백현이 이대로 날아갈까 싶어 허리를 감은 손에 더욱 더 힘을 주어 안았다. 백현은 제 허리에 감싸진 단단한 팔을 꼭 쥐었다가 하얀 의복에 감싸진 얇은 손을 들어 찬열의 얼굴을 감싸왔다. 가만히 두 눈을 감고 제 손길을 느껴오는 분이 정녕 황제폐하가 맞으신지, 그렇다면 제가 연모하는 분이 정녕 황제이신건지 백현은 이 느낌이 낮설었다. 꿈도 꾼적없었다. 감히 제가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주시는 분이 황제폐하라는거.
" 폐하를 이리 위에서 뵈오니 꼭 제가 하늘 같습니다.. "
제 입을 손으로 가리며 살풋 웃는 백현의 모습에 찬열은 무엇가에 홀린것마냥 멍했다. 네가 하늘이지, 그럼.. 고개를 끄덕이며 하얀 백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제서야 긴장이 다 풀리고 마음 속 응어리도 풀려버려 백현은 그저 꿈만 같았다. 밝은 밤, 그저 찬열의 얼굴을 찬찬히 하나하나 바라보던 백현은 너무나도 행복해서 눈물을 숨길 수가 없었다. 볼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에 깜짝 놀라 닦으려했지만 찬열의 저지에 그저 고개를 숙이기 급급하다.
" 뭐가 또 그리 서러워 우느냐.. "
" 이제야 정녕 사는거 같아서.. 그래서.. "
백현의 말에 그저 안쓰러워 제 품에 앉아있는 백현을 한참이나 토닥이다가 울음이 그쳐갈때쯤 침상에 눕혀 여름인데도 꾀나 두터운 이불을 덮어준다. 눈만 깜빡거리며 제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이불속에서 불쑥 하얀손이 나와 찬열의 옷자락을 소심하게나마 잡는다. 돌아가실.. 것입니까? 백현은 피곤함에 눈이 감길만도 한데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아쉬운듯 입술을 꼭 깨문다. 네가 잠이 들때까지 여기 있으마, 그럼 되지.. 이마를 덮고있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려주니 햐얗고 동그란 이마가 어여뻐 웃음이 나온다. 찬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백현이 꼬물꼬물 몸을 웅크려 찬열의 옆에 더 붙어 눕는다.
한참을 달래주고 얼러주니 새근새근 소리까지 내며 백현이 잠들자 찬열은 숨을 고르고는 백현의 손에 잡힌 자신의 옷자락을 빼 침소밖으로 나온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것인지 뒷채 앞에는 종인과 내관 그리고 중건과 항부인까지 지키고 서있었다. 그 모습을 찬찬히 살피던 찬열은 앞장서서 사랑채로 걷자 그 뒤로 모두가 따라나서기 시작했다.
* * *
" 백현이는 사내이옵니다, 더군다나 폐하께서는 일개의 백성이 아니라 천하를 다스리시는 황제이신데 어찌 사내를 비로.. "
" 내게 자네의 자식을 주기 그리 아까운가? "
찬열의 냉랭한 목소리에 중건이 고개를 들어 찬열을 바라봤다. 아까운게 아니라 그저 싫은게로군, 찬열의 말이 끝나자 중건은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황제는 비를 3명까지 들일 수 있다. 그 중 이미 두 자리는 곽가문과 정가문의 여식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두 가문은 한나라에서 제법 세를 잡고있는 문신가문이었다. 변가문이 그 두 가문을 합쳐도 모자랄만큼 부와 명예를 지니긴 하였지만 여인의 투기는 가문의 높고 낮음과 상관이 없었다. 어쨌든 백현이 비로 궁에 들어간다면 사내인만큼 무시와 멸시를 당하게 될 것이었고 중건은 그 모습을 두 눈에 흙이 들어가도 보기 싫었다. 하지만 백현과 황제를 갈라놓는다면 제 자식은 어찌해야되는것인가, 황제가 계속 백현을 만나러 이곳에 오기란 사실상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한 신하의 집을 들락날락 거리는것은 논란의 일으키기 충분했고 혹시라도 황후가 백현의 존재를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야말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자식을 위해 갈등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나도 처량하다 찬열은 생각했다. 눈을 감고 곰곰히 생각하던 찬열은 눈을 떠 항부인을 바라봤다. 백현은 사내인게 무심할만큼 제 어미를 똑닮았다. 어쩌면.. 고개를 끄덕인 찬열은 미소지었다. 변장군은 고개를 들라, 낮은 부름에 중건은 고개를 들어 찬열을 바라봤다. 거만하다해도 무색한 표정이었지만 그만큼 천하의 미장군이라 이르는 찬열의 얼굴에는 당당함이 서려있었다.
" 변장군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겐가. "
" 예? "
" 자네에겐 여식은 둘이고 아들은 하나뿐이지. "
무슨 말은 하시ㄴ... 찬열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며 대답하던 중건의 말은 멈췄고 곧이어 얼굴의 표정이 굳어졌다. 찬열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항부인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떠 찬열을 바라봤고 종인과 내관은 이내 웃어버렸다. 참으로 황제폐하다운 말이 아니신가. 고개를 끄덕인 종인이 중건의 반응을 기다렸다. 여식만 둘이라니 그럼 백현이를 여인이라 위장시키기라도 하시겠다 그 말씀이십니까? 얼이 빠져버린 중건은 넋이라도 나간 목소리로 찬열에게 중얼거리듯이 대답했고 찬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 구조를 보자하니 백현을 거의 가둬놓았더군, 그래서 몰래 월담을 하기도 쉬웠어. 상석에 앉은 찬열은 등받이에 기대 앉으며 손가락으로 의자를 톡톡 두드렸다. 사람들중에는 자네가 여식 하나에 아들 하나, 즉 자식이 둘인줄로만 아는 사람도 많고.. 몸을 일으켜 찬열은 중건의 뒤로가 어깨를 꾹 잡았다.
무언의 압박이었다. 이리하나 저리하나 백현은 어쨌든 궁에 들어가야만 했다. 찬열이 그를 원하니 이것은 바뀔수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어느새 가파진 숨을 진정시키며 중건은 말쑥하게 표정을 되돌렸고 곧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변가문의 여식이라니.. 혼인식은 참으로 화려하겠구나. 찬열은 미소를 지었고 항부인은 좌절했다. 제 아들이 황제와 혼인이라니, 그것도 여식이 되어서의 혼인이라니.. 그저 앞이 캄캄해 항부인은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찬열은 몸을 돌려 사랑채 밖으로 빠져나왔다. 일어서 배웅하려는 중건과 항부인을 저지한뒤 그저 종인과 내관만을 데리고 유유자적 미소를 지은채 대문을 빠져나와 말에 몸을 실었다.
백현이의 혼례복에는 금실로 장식하거라. 찬열의 말에 내관은 놀라 그 자리에서 떨어질뻔 했다. 황실의 혼례복에는 황제의 여인이라는 상징으로 봉황을 크게 수놓았다. 하지만 금실로 수놓은 혼례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은 황후뿐이었고, 황제가 왕자였을 시절에 혼인을 치른 현재의 황후는 금실로 수놓아진 혼례복을 입은 적이 없다. 그러니 백현이 처음으로 그 혼례복을 입는 것이었다. 황후께서 아시면 엄청난 투기를 부리실 것입니다. 종인이 찬열의 옆에서 조용히 속삭이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은 찬열은 다시 한번 내관의 발을 헛딛게 했다.
" 궁도 새로 지어야겠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
* * *
쨍그랑-
빛 좋은 찻잔이 벽을 맞고 산산조각이나 바닥으로 떨궈졌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궁녀는 몸을 벌벌 떨었고 자주빛 궁의를 입은 황후의 얼굴에는 분노와 투기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새로운 비라니, 그것도 변씨가문의 여식을.. 변씨가문이 무신을 대표하는 가문이었다면 황후의 집안인 여가문은 문신을 대표하는 가문이었다. 처음 황후가 되어 비를 맞아야 했을때, 황제가 변씨가문의 여식은 거들떠도 보지않아 그저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뒤늦게 비라니.. 그것도 제가 입어보지도 못한 금실을 수놓은 혼례복을 입고 화려한 국혼을 치르겠다 한다. 거기다가 새 궁이라니.. 제가 황후가 되어서도 받아보지못한 새로 지은 궁을 비에게.. 하얀 대리석으로 제일 가는 장인들을 불러 짓고 있다 하니 자존심이 끝도 없이 추락한다.
벌벌 떨려오는 손을 진정하려 주먹을 꽉 쥐어보지만 그래도 진정되지않았다. 이래서는 누가 황후이고 누가 비인지 겉으로는 구분이 안되게 생겼다. 분노로 인해 숨을 헐떡이던 황후는 붉게 칠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비를 둘이나 들였어도 그저 여인네에게는 관심이 없는 사내인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황제가 뒤늦게 여인의 치마폭에 쌓여 제 자리가 위험해질 지경이었다.
" 거기선 무엇을 하고 있다 하느냐? "
" 새, 새 궁에 들일 물품들을 고르고 있고... "
" 그것이 아니라 그 요망한 계집말이다!! 폐하를 정신나가게 만든 그 계집!!! "
황후의 소리지름에 어깨를 떨며 화들짝 놀란 궁녀가 침을 삼켰다. 그저 집안에서만 머물며 보호받고 있다 합니다.. 친히 황제폐하께서 군사들을 보내주시어.. 궁녀가 벌벌 떨며 말 끝을 흐렸다. 허- 보호도 그런 보호가 없구나.. 비소를 흘린 황후의 눈빛에 날이 선 칼날이 보였다. 제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역경을 이겨냈는가, 제 지아비가 황제가 되겠다 반역을 일으키고 전쟁을 일으켰을때도 이만큼의 위기의식은 느껴본적도 없었다.
내가.. 황제의 씨만 잉태했어도.. 이젠 온 몸이 억울함으로 벌벌 떨려왔다. 이대로 제가 올려놓은 자리에 같이 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올라오겠다면 손을 짓 밟아서라도 떨어뜨려야했고 손톱을 다 뽑아버려서 버티지도 못하게 해야했다.
곰곰히 생각하던 황후는 몸을 일으켜 문을 박차고 나갔다. 황후의 눈치만 살피던 궁녀들은 황후가 갑자기 궁밖으로 나오자 깜짝 놀라 몸을 숙였고 그런 궁녀들을 비웃던 황후는 몸을 돌려 황제의 침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직접 들어야만 했다.감히 비 주제에 주제에 맞지않는 대우는 용서할 수가 없었다. 보폭을 크게해 척척 걸어가는 황후의 뒤를 따르는 궁녀들은 오늘은 또 어떤 큰 소리가 날까 싶어서 수근대기 바빴다. 황후가 황제의 침소 앞에 다다르자 깜짝 놀란 내관들은 머뭇거리다가 황후의 앞으로 다가갔다. 황제폐하께 내가 왔다 고해라. 황후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느낀 내관은 큰소리로 황후께서 오셨다 소리치니 문이 열리고 당연하게 안으로 들어간 황후는 곧이어 황제의 앞에 도착했다.
" 너무 하십니다 폐하! "
" 무엇이 너무하다 그러는거요, 황후? "
자고로 한 나라의 모후란 자비로워야 하거늘 황후는 언제나 늘 투기로 똘똘 뭉쳐 제 자존심만 지키기 바빴다. 그런 여인에게 황제의 씨라니, 하늘에서 내려주지않는 것이 당연한 처사였다. 독기 가득 오른 눈으로 바라보는 황후를 차디찬 표정으로 바라보던 찬열은 피식 웃었다. 보기 우스웠다. 제 가문의 힘을 빌려 이리 날뛰고 저리 날뛰어도 그저 황후이니 봐주자 했었는데 이리 제 자리를 위협할 존재가 나오니 스스로 찾아오기까지하니 새삼 변가문의 위세가 놀라웠다. 금실 혼례복이라니요! 그것은 황후의 전유물 아닙니까!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가느다란 목에 핏줄이 선다. 쯧, 목이라도 졸라버리면 조용히 할까 싶은 생각에 고개를 저은 찬열은 입꼬리를 올려 내려보았다.
" 내가 그 여인을 너무 아끼어서 그리하는데 왜 그러시오 황후, 그리고 그녀는 너무 어리오. 열일곱 어린 나이에 내게 시집오는 것이 안쓰럽지도 않소? "
" 저도! 저도 폐하께 열아홉, 어리디 어린 나이에 시집와 폐하를 모셨습니다! 근데 제겐 그런 동정심도 생기지 않으신 것입니까? "
" 그래서 이리 참고있는 것 아닙니까. "
미소를 짓고 있던 표정을 굳히고 찬열은 냉담한 표정으로 황후를 내려봤다. 그대를 위해 내가 더 얼마나 참아야 하는거지? 한쪽 눈썹을 구기듯 찡그린 찬열은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찬열의 그런 행동과 말에 황후는 얼어붙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을 참아? 아직 아무것도 하지못했는데.. 여인의 마음을 그리도 모르십니까? 억울하다는듯 말하는 황후의 행동이 가증스러웠다. 내게 그대가 하는 말을 모조리 듣기 싫은 허언일뿐이니 돌아가시게, 오늘 황후는 너무.. 치덕대.. 잔인한 말이었다. 울음을 꾹 참으며 황후는 돌아서서 당당하게 걸어나왔다. 누가 뭐래도 나는 황후였다. 이 현나라의 하나뿐인 황후이자 백성들의 어머니였다. 제 자존심을 이리 만들고 황제를 뺐어간 그 계집에게 똑똑히 배로 복수하리라 다짐한 황후는 입술을 파득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