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아, 이 어미의 말을 잘 들으렴. 궁궐에서는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된다. 아무리 네게 친절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누가 네게 칼을 들이밀 지 모르는 곳이 궁이다. 특히 고위 관료들, 그리고 그들의 자제들 앞에서는 최대한 몸을 사려라. 지금 나라의 군주인 김한빈은 택군으로 왕의 자리에 앉은, 그저 허수아비이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야. 너의 선택은 말리지 않겠지만 혹여나 네가 왕의 옆자리를 꿰차 신분상승을 하겠다는 허망을 품고 있을까 혹여나 해서 하는 말이다. 왕을 따르지 말아라. 왕의 뒤에서 불결한 눈빛을 뿜어내는 그들을 따라라. 사람은 청렴해야 한다는 것이 도리이지만 피바람이 흩날리는 궁궐에서 살아남을 방도는 그 하나뿐이다. 이 어미의 말을 잘 기억하거라 사랑하는 딸아.
*
"전하, 전하는 지금의 나라를 어찌 생각하십니까?"
"지금의 나라는 '망(亡)이다. 고위 관직이라는 신하들은 저들의 뒷주머니나 채우기에 급급하고, 짐의 입을 막으며 백성들의 소리는 하나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민가에는 내가 택군이라는 말도 있더구나. 하지만 어쩌겠냐, 큰 소리를 내지 못한 짐의 잘못이지."
쪽빛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대답하던 임금은 깊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잎이 모두 떨어져 벌거숭이가 되어버린 버드나무 사이로 소슬바람이 스쳤다.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임금의 청색 곤룡포 끝자락이 흩날렸고 꽉 진 주먹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전하, 현재 민심은 전하가 아니라 동녕군에게로 기울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비리를 지닌 신료들을 숙청하고 전하의 사람들로 그 자리를 메꾸어야 합니다. 부디 제 말을 가벼이 넘기지 마소서."
임금은 얼굴이 나와 마주했다. 임금의 깊은 눈동자 위의 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전하, 떨지 마십시오. 잠시 일식이 일어난 것 뿐입니다. 전하는 아직 진 태양이 아닙니다. 현 신료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세요."
"여인네가 못하는 말이 없구나. 당찬게 아주 마음에 든다. 네가 누구의 여인이냐."
"물으시나 마나요. 전하의 여인 아니겠습니까."
임금이 가볍게 미소지으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짐이 지금까지 숨겨왔던 발톱을 드러내겠노라. 하면서도 그 미소가 꽤나 씁쓸해 기분이 착잡해졌다. 전하, 용기를 내셔야 합니다.
"00아, 내가 진정한, 신하들과 백성들이 모두 인정하는 왕의 자리에 오르면, 내 너를 빈의 자리에 앉히겠다. 꼭 너를 중전으로 임명하마."
말없이 임금은 내 품에 고개를 묻었다. 나는 말 없이 임금의 어깨를 토닥였다. 한 나라를 등에 업은 이 어깨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울까.
*
"00아, 내가 왔다. 짐이 왔노라."
자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처소 밖에서 들리는 임금의 음성이 흐물거렸다. 쥐새끼들이 볼 새라 재빨리 문을 열고 임금을 안으로 들였다.
"전하, 옥음이 흔들립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신겝니까."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꾸벅이는 임금을 다그쳤다. 임금은 두 손을 들어 뺨을 살짝 치더니 게슴츠레 감기는 눈을 치켜뜨곤 나를 바라봤다. 그러곤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곤 언성을 높혔다. 목소리는 여전히 흐물거렸다.
"고얀!"
"감히 임금에게 명령이나 하고말야, 어디 한낱 궁녀가 왕에게 명을 하냔 말이다!"
임금은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리곤 내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부스럭대는 속치마 소리가 가벼웠다.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든다, 날 어떡해야 하는거냐,"
"정사를 보다가도, 수라를 들다가도 네 생각이 난다. 잊으려고 약주를 걸치면 더욱이 너의 얼굴이 또렷해진다."
"이를 어찌하냔 말이냐."
나를 바라보며 가슴을 퍽퍽 쳐대던 임금은 거칠게 마른 세수를 하며 나를 더욱 가깝게 잡아당겼다. 임금의 얼굴이 가까워졌고, 알싸한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내가 얼굴을 찌푸리자 임금은 손을 들어 내 미간에 자리잡은 주름을 꾹 눌렀다.
"못생겼다."
나는 임금의 두 뺨에 내 손을 가져다 대었다. 며칠 째 풀리지 않는 나랏일에 피로가 쌓인 탓인지 손가락애 닿는 감촉이 거칠었다. 자신의 얼굴에 닿은 내 손을 아이처럼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던 임금은 살구빛 입술을 깨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전하께서도, 저 못지 않습니다."
꼼지락거리는 임금의 손을 내 손으로 덮었다.
"어허, 나라의 주상에게 못하는 말이 없구나."
그러면서도 임금은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리며 내 손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그리고는 눈동자를 요리조리 움직이며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혹여 제게 하실 말이 있으십니까."
내 말이 정곡을 찌른건지 움찔한 임금은 배시시 웃으며 입술을 열었다. 임금에게 붙잡힌 손이 간지러웠다. 임금의 웃음에 내 마음도 간질거렸다.
"부탁이 있다."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겠나."
평소와 같지 않게 어린아이처럼 어리광이 묻어나는 말투로 임금은 부탁을 해왔다. 그 속에서 임금은 고독했고, 외로워보였다. 어릴 적 부터 본인의 이름이 아닌 세자, 저하. 지금은 주상, 전하로 불리는 사람이다. 용케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이 기특할 정도로 임금은 자신의 이름을 듣는 것이 드물었다. 심지어 임금의 어머니인 대비마마조차 그를 다정하게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임금은 이 넓은 궁궐 안에서 지독하게 추웠다.
"한빈아."
"한빈아, 모두가 네게 등을 돌려도, 나만은 네 편이야."
"그러니까.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전하."
나의 말을 가만히 듣고있던 임금은 흐르는 눈물을 곤룡포의 소매로 훔쳤다. 청색 곤룡포가 바다처럼 넘실댔다.
"고맙구나"
작게 읊조린 임금은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 눈에서 붉은 불꽃이 늪처럼 넘실거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임금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말들은 비장했고, 무거웠다.
"내일부터는 태양을 가로막는 구름들이 없을것이야."
*
어머니, 죄송하지만 지금의 임금이 허수아비라는 어머니의 말, 저는 인정하지 못하겠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어머니의 뜻을 거슬러야 할 것 같아요.
택군은 신하가 왕을 선택한 것, 그러니까 선왕에 대한 역모를 뜻해요. 제목인 밤빛은 어둠 속의 희미한 불빛을 뜻하는 우리말입니다. 어찌보면 누구나 부러워 할 최상의 자리이지만 어찌보면 그 누구보다 고독하고 외로운 자리에 앉은 임금 한빈이에게 여주가 희미한 빛같은 존재라는 걸 표현하고 싶었는데 그게 잘 됬는지 모르겠네요.. 손 가는대로 쓰다보니 글이 제대로 써졌는지도 모르겠고..엉엉 퀄리티 좋은 글은 언제쯤 완성될런지...(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