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설국의 왕은 역사상 잔인하기로 손꼽혔다.
그런 잔인한 아버지 아래 영재는 자라났다. 중전이었던 어머니는 어린 날의, 몇 안 되는 기억을 더듬으면 항상 아팠던 것 같다. 언제나 어머니가 아닌 유모의 품에서 놀았고 이따금씩 어머니를 찾아갈 때면 중전마마께서는 지금 편찮으시옵니다, 하는 상궁들의 아룀에 어머니가 저를 미워하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의구심을 품은 적도 있었다. 그런 기억들이 전부인데, 무어라 원망조차도, 정말 날 미워했냐며 바보같은 질문도 할 수 없도록 일찍이 떠난 어머니였다.
그 날 아버지의 우는 모습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가 망가지기 시작한 것도 이 때였던 것 같다. 영재가 이따금씩 위장을 하고 저잣거리에 나서면 심심치 않게 왕실의 뒷 이야기를 수군대는 백성들을 마주할 수 있었는데, 흔히 하는 말은 중전께서 있으실 때가 좋았는데…. 였다. 현명한 중전이 건재하고 왕이 제대로 된 정치를 하던 그 때의 향수에 취해 있는 백성들이 대다수였다. 영재는 자연히 생각했다. 나라의 어머니가 될 부인을 잘 얻어야 그 자식들인 백성들이 고통받지 않는 거라고, 또 동시에 자신과 같은 외로운 아이도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그랬기에 똑똑하고 수용력을 가진 비강국의 차기 여황제 부군을 뽑는다는 말에 덜컥 지원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권유가 한 몫을 한 것도 있을 테다. 제가 비강국으로 향하기 전날 밤, 웬 일로 저를 직접 찾아와 건넨 말이었다.
비강국을 삼켜라.
참 아버지다운 명령이었다. 영재는 머리가 좋았다. 무슨 의미인 줄 곧장 알아들었다.
성군이 될 겁니다.
부군으로서의 자질을 심사한다며 고지식해보이는 상궁 몇몇과 여제, 그리고 차기 여황제인 공주가 그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뜬금 없이 던져진 질문에 너무나도 당연스럽게 답하자 의외라는 듯 상궁들이 수군거렸다. 공주 역시 제법 놀란 표정을 지으며 영재를 바라보더니 곧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함께한다면, 좋은 동료로 마음을 공유할 수 있겠군요.
저는 좋습니다, 합격! 제법 당돌하게 굴어오는 공주의 태도에 영재가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잡티 없이 하얀 얼굴 위로 발그레한 웃음꽃을 뺨에 틔우는 듯 꽃분홍 색으로 물이 드는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때 묻지 않았구나. 문득 떠오르는 말에 결국 혼자 미쳤다며 표정을 굳혔다. 그러다 다시금 마추친 눈에 피하려고 들자 공주가 집요하게도 그 눈을 따라 오기에 결국 졌다는 듯이 눈을 맞추자 곧 여제가 다시금 꽃을 피우며 입모양으로 벙긋거렸다.
'웃는 게 더 멋져요.'
시간을 넘겼다는 듯 다른 사내가 단상 위로 걸어올라왔고 그대로 미련없다는 듯 몸을 튼 영재의 등 뒤로 공주의 시선이 느껴졌다. 처음의 그 멍한 표정, 방긋 따라 웃는 얼굴에 곧 붉은 입술을 오물대는 모습이 떠올라 슬슬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지 못하고 그저 이유 모르게, 소리죽여 웃었다.
"주상전하께서 일이 어찌 진행되는지 그 경과를 알고 싶으시다 하옵니다."
제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며 그렇게 아뢰는 말에 영재가 서책을 넘기던 손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던 목적이었기에 영재 스스로 자괴감에 빠질 듯 표정을 굳혀갔다. 문득 잊고 있던 일이었다. 영재가 서책을 덮더니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비강국을 삼켜야 한다.
여제를 제 아래에서 제 바짓가랑이를 붙잡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중얼거리다 문득 은근히 상상 안 되는 모습에 슬쩍 미간을 좁혔다.
풋, 뜬금없이 터져나온 웃음에 천설국의 사신이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가 곧 눈이 마주치자 다시금 이마가 바닥에 닿을 듯 조아렸다. 분명 천설국에서는 이러한 복종스러운 자세가 자연스럽기만 했는데, 이제는 비강국의 법도에 익숙해져서인지 부담스럽게 느껴져왔다.
비강국의 사신으로 오셨다고, 제법 머리나 옷에 힘을 준 모습에 잠시 영재가 찬찬히 그를 뜯어보았다. 일부일처제인 천설국에서도 부인이 아닌 다른 여인들 역시 많이 꼬인다 하여 언제나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라 평소에는 꺼리기도 했으나, 당장 그것이 급하지 않았다.
연회가 있는 미시까지는 약 두어 시간이 남아 있었다. 밖의 쏟아지는 눈을 잠시 바라보던 영재가 조용히 물었다.
"…여인의… 마음은, 어찌 얻는답니까."
평생을 돌이켜 그만큼 추운 겨울이 있었나, 싶을 만큼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매서웠다. 십 년을 넘게 양반집의 막내 도련님으로 살던 종업에게는 더욱 가혹한 일이었다. 일찍이 머리가 좋다 근방에 이름이 알려지던 형과는 달리 글 공부에는 흥미가 없어 그 날도 털옷을 따뜻이 껴입고 아마 제 다리보다도 길 아버지의 장검을 몰래 챙겨 나왔었다. 어차피 글만 읽으시는 아버지는 어찌 이런 명검을 버리시는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는 종업이 먼 발치서 다과를 준비했다며 제 방문 앞에서 애만 닳고 있는 몸종을 잠시 지켜보았다. 도련님, 그럼 소인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러고 나서는 곧 제 방에 자신이 없음을 알고 혼비백산에 빠진 그녀를 바라보며 얼마 안 있으면 또 행랑아범이 저를 찾으러 오겠구나 하는 마음에 얼른 뒷산으로 몸을 숨겼다.
쉽게 보기 힘들던 눈이 새하얗게 뒷산을 덮었음에 종업은 더욱 신이라도 난 듯 기쁜 숨을 뱉어내며 산을 올랐다. 그러다 빼꼼 고개를 내밀다 눈이 마주친 검은 눈 회색빛 털의 토끼에 종업이 하아, 하고 잔뜩 들뜬 소리와 함께 숨을 들이키더니 그대로 도망치는 토끼를 뒤쫓았다. 물론 달음질부터가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될 토끼를 쫓아 사냥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종업은 그저 저를 감싸는 맑은 햇살과 덮쳐오는 찬 공기가 기쁜 듯 그저 맑게 웃었다.
그러다 길을 잃었다.
정신 없이 토끼를 뒤쫓다보니 어지러이 밟힌 발자국은 다시금 내리기 시작한 눈에 덮이기 시작했고 행랑아범의 목소리가 아무리 기다려도 들리지 않는 게 이상하다 싶어 돌아갈까 하며 몸을 틀었을 때 이미 제가 뛰어온 길은 지워진지 오래였다.
털신도 눈밭에 젖어 무겁고 차갑기만 했다. 곧 해가 질텐데. 호랑이라도 나타나면 어쩌려고 이러는건지 그제야 종업은 겁이 나기 시작했다. 칼자루를 꼭 쥐고 누가 나타나기라도 할까 잔뜩 겁먹은 눈을 하고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나갔다. 해가 뚝 떨어지고 달빛만이 종업을 비출 무렵 야트막한 경계 근처로 불이라도 타는 듯 일렁이는 온기에 다같이 저를 찾는건가 하는 반가운 마음에 천근같던 발걸음을 또 빠르게 디뎠다.
불질러진 집, 아비규환으로 정신없는 하인들.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형의 모습에 멍하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눈 앞에서 춤추듯 타오르는 불길은 어린 종업의 머리로서는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듯 종업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 마주친 두 눈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자 그대로 가차없이 칼을 들어올리는 장졸의 모습에 기겁을 하며 뒤로 엎어졌다. 푹,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무겁다. 꽉 감았던 눈을 뜨니 울컥 피를 토하는 제 어머니의 하얀 얼굴이 눈 앞에 들어차기에 종업이 더욱 사색이 되어 울먹였다. 품에 안았던 종업을 밀어내며 아이에게 칼자루를 들이밀듯 안겨주니 종업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어린아이임에도 좀처럼 우는 일이 없던 종업의 얼굴이 울먹임으로 번지자 그 어미는 애써 웃음지어주며 아이의 얼굴을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어루만졌다.
너는 비강국 이조판서의 막내 아들 문종업이다. 잊지 말고 살아야 해.
그렇게 말하고는 종업을 밀어내듯 등을 떠미는 손길에 결국 종업이 울음을 터뜨렸다. 살아라, 꼭 살아 아가. 매몰차게 밀어내는 어머니의 손길이 전에 없이 낯설어 떨어지지 않는 발을 애써 떼어내니 다시금 푹 소리와 함께 앓는 소리가 들려옴에 종업은 더욱 내달렸다. 젖어서 무겁던 신발도 아랑곳 않고 서럽게 울며 계속 달려나갔다.
그렇게 며칠을 지냈다. 추운 겨울 쉽게 자신의 집 한 켠의 공간이라도 내어주는 이들은 없었고 보통은 입고 있던 털조끼를 이불 삼아 주막의 솥가마니 근처로 향해 남은 온기로 겨우겨우 얼어죽지 않을 만큼으로 밤을 버티고는 했다. 도망을 치며 벗겨졌던 신발 탓에 동상에라도 걸릴까 머리보다 발을 아궁이 근처로 두고. 날이 밝으면 가끔 운이 좋을 때 제 꼴을 불쌍히 여기던 주막 주인이 남은 국밥을 말아주기도 했지만, 웬만해서는 웬 거지냐며 종업을 몰아내고는 했다. 처음에는 이런 현실을 어린 종업으로서는 계속해서 부정했으나 곧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다 붙여진 벽보에 모든 것을 이해했다. 자신의 아버지와 형이 역적으로 몰려 그 일가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칼자루를 쥐었다. 살아야했다.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잠시 눈을 감았다.
대현아, 대현아. 이 애 좀 봐. 낭랑한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품 안에 숨기듯 품은 장검을 그러쥐고 눈을 떴다. 그렇게 아침부터 마주한 얼굴은 여태껏 봐왔던 얼굴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옆의 까무잡잡한 얼굴의 남자아이는 난감하다는 듯 종업과 여자아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뒷머리만 긁적댔고, 여자아이는 흰 얼굴에 동그란 눈을 하고 종업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이 오물대는 붉은 입술에 제법 날카롭게 세웠던 눈꼬리가 놀란 듯 금세 힘이 풀렸다. 으음 하는 소리를 내던 아이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종종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했다. 또 어딜 가시는거야, 그 뒷통수를 급히 쫓아가는 남자 역시 자리를 뜨자 제법 고급스러워보이던 비단 옷을 떠올리며 종업이 생각에 잠겼다. 제 또래인 것 같은데 양갓집 규슈중에 저런 아이가 있었나. 떠올리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헛웃음을 흘렸다. 그 호기심 어린 눈의 의미를 제대로는 몰라도 대충은 알 것 같았다.
그들도 저를 지나쳐가던 많은 이들처럼 동정의 눈길 한 두번 흘린 게 전부 아니었을까.
"얘!"
그리고 그 생각은,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품 안에다 털신을 꼭 껴안고 뺨을 붉히며 달려오는 아이로 인해 금세 깨어져버렸다.
"종업아, 업아?"
"…아,"
움찔하며 몸을 뒤척인 종업이 문득 시야로 가득 채워져오는 여제의 얼굴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꿈 속에서의 그 날 처럼 여전히 뽀얀 얼굴에 까만 눈을 깜빡임에 눈을 다른 곳으로 굴리자 여왕이 슬쩍 웃으며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창호지가 넓게 발린 창으로 햇살이 쬐어들어왔다. 피곤했나보네, 이렇게 늦게까지 자고. 조잘조잘대는 목소리를 가만히 듣다 문득 평소보다 부어있는 눈두덩이에 결국 울었구나, 하며 그저 말을 아꼈다. 곱게 머리를 땋아 쌓아올리던 평소와는 달리 길게 기른 머리칼을 풀고 그대로 드문드문 꽂은 몇 가지 머리장식이 무겁다는 핑계를 대며 그 어깨에 고개를 기대는 여제에게서 좋은 향이 풍겨왔다.
"업이 너는, 내가 가장 신뢰하는 이들 중 하나야."
정말로….
나른한 듯 느릿해지는 목소리가 곧 멎었고 선잠이라도 든 듯 새근대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종업은 잠시 떠올렸다. 밤 늦게까지 꺼지지 않던 대현의 침소를 안다. 그곳에서 또 위로를 받으셨음을 잘 안다. 여제는 모를 것이다. 제가 걱정을 못 이기고 결국 용국의 침소부터 찾아가 밤새 보슬대는 눈을 맞으며 대현의 침소에 불이 꺼지기를 기다렸음을.
천천히 고개를 틀어 곱게 감긴 눈꺼풀을 바라보았다. 슬쩍 흘러내린 옆머리에 간지럽다는 듯 미간을 좁히자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귀 뒤로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이번에는 제 옆에 가지런히 놓인 장검을 바라보다 제법 익숙한 몸짓으로 그것을 빼 들었다. 쨍 울리듯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검날에 간결한 필체로 적힌 글이 유난히 빛났다.
이조판서 문대균
살아달라 그렇게 외치던 어머니의 음성이 떠올라 눈을 감았다. 저는 잘 살고 있어요, 어머니. 다시 여제를 내려보았다. 다른 이들 앞에서는 보여주지 않을 편한한 표정. 종업은 다시금 칼자루 속에 장검을 넣더니 곧 중얼거렸다.
살아갈 이유도 생겼고요.
티거예용 |
여러분! 1박 2일의 OT를 끝내고 제가 돌아왔습니다 허허 오늘로 모든 멤버들의 에피소드가 하나씩 끝났네요! 사실 영재의 야망야망은 저게 아닌데... 시간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바람에 (암울) 업이의 이야기, 영재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 그리고 구독료 한 번 높여봤어요ㅋㅋㅋㅋ 댓글이 더 많이 달릴까? 싶어서 @''@ (괜한 기대중) 시간이 꽤 늦었네요... 맞아요 부모님 눈치 보임ㅠㅠㅠㅠㅠ 댓글로 우리 더 이야기 많이 해요! ♡ 제 부족한 글을 아껴주시는 모든 분들, 사랑합니다♡ ♥ 워더 / 코난 / 지야 / 메리미 / 마토끼 / 열대야 / 영재꺼 / 리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