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처음 찾아뵙는 독스입니다
빙의글은 처음이라 미흡한 점이 참 많아요
독방에서 멤버별 반응 글을 쓰다가 이렇게 빙의글로 옮겨 왔습니다만,
멤버별 반응 글이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아요 (300개는 채워야죠)
글은 풋풋한 학원물입니다.
졸업 한지가 오래인지라 잘은 기억이 안나지만,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 전개해 보려고요
아마 민윤기를 짝사랑하는 시점이 될 거구요, 그 외에 인물구도와 러브라인은 글로 차차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오글거리는 것도 참 많지만, 최대한 현실감(은 이미 방탄이 나온 것 자체가 없지만) 있게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첫 글임을 감안하시고 재미있게 봐주세요!
참 쉬운 사람 독스 올림
BGM과 함께 읽으시면 훨씬 몰입하실 수 있습니다
방학식은 정말 시시하게 끝이 났다. 교장선생님의 지루한 훈화말씀에 서서 깜빡 졸 뻔도 했다. 고개를 숙인 채 발끝으로 의미 없는 장난을 하고 있는 내 뒷목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고는 ‘무슨 손?’ 하는 박지민은 오늘도 속이 없었다. 내 뒤에 서서 그런 박지민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정호석은 손을 뻗어 박지민의 머리를 잡고 앞으로 돌렸다. ‘안보이냐. 학주가 너 쳐다보고 있는 거.’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매서운 눈으로 우리 쪽을 응시하고 있는 학생주임이 보여 급하게 자세를 고치고 정면을 응시했다. 그래도 여전히 박지민은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웃어댔다. 시선은 교장선생님께 고정시킨 채 박지민에게 물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 그러자 박지민은 ‘오늘 방학하잖아.’ 라고 대답했다.
“이상으로 방학식을 마치겠습니다. 담임선생님들께서는 학생들이 교실로 돌아가서 청소 후에 하교를 할 수 있도록 지도하여 주십시오.”
교무주임 선생님의 말씀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청소라니, 그건 나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소리였다. ‘오늘 가장 태도가 좋았던 2학년 1반 먼저 교실로 가세요.’ 방학식을 시작하기 전에 가장 태도가 좋은 반부터 교실로 보내겠다는 교무주임 선생님의 말이 뒤늦게야 떠올랐다. 1반쪽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환호를 내지르는 사람들 속엔 민윤기도 있었다. 아까부터 눈으로 쫒기에 바쁘던 그 얼굴엔 영락없는 소년의 풋풋함이 드러났다. 기쁜 얼굴로 친구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는 민윤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원했던 건 아니었는데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당황스러운 얼굴로 살짝 웃었더니, 민윤기도 따라 살짝 웃어줬다. 의도치 않게 눈인사를 주고받은 꼴이 되자 얼이 빠져버렸다. 금방 1반이 줄을 정렬하고 강당을 빠져나갔는데도, 나는 여전히 민윤기가 서있던 그 자리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동상처럼 얼어붙었다. ‘식 내내 줄곧 떠들고 까불었던 2학년 3반은 맨 마지막으로 가세요.’ 그 소리에 반 친구들의 박지민을 타박하는 욕지기가 한바가지 쏟아졌는데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 내 심장을 잠깐 움켜쥐었다 또 금방 멀어져버린 민윤기를 떠올리고 또 곱씹으며 반쯤 뜨인 눈만 끔벅 댈 뿐이었다.
Love Like Sugar
W. 독스
01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보자면, 민윤기는 좀 다정한 철벽남에 가까웠다. 다정하게 대해주는 태도에 마음을 놓고 조금이라도 다가가려 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게서 달아났으니까. 흔해 빠진 연애 수작들도 민윤기에겐 먹히지가 않았다. 게다가 눈은 어찌나 또 높은지, 감히 나 같은 게 좋아한다고 말 해 볼 수가 없는 정도였다. 언젠가 지나치듯 들었던 ‘수지도 그냥 평범한 얼굴 아냐?’ 라는 말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한 충격을 안고, 정호석과 박지민의 온갖 부름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 방안에 틀어박혀 삼박 사일동안 나오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수지가 평범한 얼굴이면, 나는 믹서에 넣고 갈아 마셔야 속편한 얼굴이냐고. 민윤기 너 그러다 진짜 독거노인으로 늙어 죽는 수가 있어. 아무리 이를 바득바득 갈아 봐도 여전히 민윤기가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2학년으로 올라와서는 민윤기와 다른 반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작년엔 같은 반이라서 간간히 붙어 이야기도 하고 그랬었는데, 이젠 만나는 횟수마저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왠지 시무룩해져 창밖만 멍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옆에서 박지민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어깨를 툭툭 쳐왔다. ‘저리가.’ 귀찮아서 손을 내저었더니 박지민은 내 손을 잡아 깍지를 껴왔다.
“야, 솔직히 민윤기 어디가 좋아?”
“변태야, 손 좀 놓고 말해.”
“나는 민윤기 잘 생긴지 모르겠는데.”
“너 같은 호구한테는 보이지가 않는 그런 멋짐이라는 게 있어.”
“그건 또 어느 병나라 씨알 까먹는 소린데.”
박지민의 손을 뿌리쳤다. 사내놈 주제에 어찌나 살가운지, 남녀사이에 손을 잡는 게 이상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놈이었다. 툭 떨어져나간 박지민의 손에서 전해지던 온기가 금방 차갑게 식었다. 윤기 손도 저렇게 따뜻할까. 괜히 박지민의 못생긴 손을 보면서 혼자 생각에 잠겼다. 제 손을 빤히 보는 내가 이상해보였는지, 내 얼굴과 저의 손을 번갈아 보던 박지민은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정도면 병이야, 병. 그렇게 중얼거리던 박지민은 손으로 턱을 괴었다. 나를 한심한 듯 바라보던 박지민은 도리어 제가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교무실로 불려갔던 정호석이 뒷문으로 들어오면서 큰 소리로 박지민을 불렀다. ‘박호구! 내 자리에서 꺼져!’
‘아, 이것들이 나더러 왜 자꾸 호구래.’ 궁시렁대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박지민은 내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어디 더러운 엉덩이를 들이 대냐며 엉덩이를 때렸더니, 뭐가 좋다고 헤실헤실 웃으면서 오늘 아침에 샤워를 하고 왔단다. 도대체가 말이 통해먹지를 않는 인간이었다. 괜히 혼자 생각할 시간을 방해받는 것 같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좀 냈더니 어느새 제 자리로 찾아와 앉은 정호석이 내 눈치를 살짝 살폈다. ‘얘 또 왜 이래?’ 박지민한테 보내는 눈빛이 꼭 그렇게 묻고 있었다.
“몰라. 내가 민윤기 잘생긴 거 모르겠다고 해서 그러나.”
“에? 왜 그런 말을 했어?”
“혼자 시무룩해 있길래.”
정호석과 박지민은 또 그것가지고 아옹대기 시작했다. 시무룩해보여서 힘을 좀 주려던 거였다, 멍청아 어디 그게 힘을 주려고 하는 말이냐. 오고가는 말소리가 시끄럽게 귓전을 울렸다. 안 그래도 시끄러운 교실 안에 정호석과 박지민의 더 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여간 옆에 있어서 조용했던 적이 한 번이 없어. 귀를 후비고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게?’ 묻는 정호석의 말에 고개만 저었다.
“담임 금방 온대?”
“아니, 좀 더 기다리라고 그러던데? 왜?”
“담임 오면 전화 좀 해줘.”
“그래, 알았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정호석과는 달리, 박지민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가려고. 화장실가게?’ 그 손을 떨쳐내며 고개를 저으니 정호석은 나를 멀리 밀어내며 박지민을 저지했다.
“그냥 냅둬. 우리 시끄럽나봐.”
다행히도 정호석은 눈치가 빨랐다. 박지민의 입을 틀어막은 정호석은 가보라며 손을 저었다. 정호석에게 고맙다고 눈짓을 하고 교실을 벗어났다. 여느 학교와 마찬가지로, 방학식 당일의 학교는 시장통 마냥 시끌벅적했다.
학교 건물을 벗어나 강당 옆 벤치로 찾아갔다. 볕이 뜨거운 여름에 유일하게 그늘을 만들어주는 강당 옆 벤치는 학생들의 도피처로 안성맞춤이었다. 아무도 없는 벤치들을 보고 안심인지 뭔지 모를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너털거리는 걸음으로 아무 의자로 걸어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늘 안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은 땀을 식혀줄 정도의 선선한 바람이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하니 빈 공간을 응시하다 강당 옆에 있는 빈 농구 코트에 시선이 머물렀다. 순간 아무도 없는 농구 코트 안에 민윤기가 공을 들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던 잔상이 흐릿하게 비춰졌다. 혼자 헛웃음이 터져 나와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민윤기는 농구도 참 잘했다. 매사에 힘없이 다니는 모습과는 참 다르게도 친구들과 어울리는 운동에는 꼭 참여했다. 하얗고 무기력하게 생겨서는 움직임은 꽤나 민첩했다. 그래서인지 그런 모습마저도 반전 매력으로 다가왔다. 셔츠 안에 받쳐 입었던 흰 티셔츠만 입은 채 자기 앞을 가로막는 애들 사이사이로 빠져나와 높이 뛰어 골을 넣었다. 그러고 나서는 꼭 호탕하게 웃으며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는데, 그건 정말이지 내가 걔를 좋아해서 그러는 게 아니고 아주 객관적으로 멋있었다. 여자라면 운동을 잘하는 남자에 대한 어느 정도의 로망은 갖고 있기가 마련이니까.
사실 민윤기랑 첫 말문을 트게 된 것도 농구 때문이었다. 여학생들은 수행 평가로 자유투를 넣으라는 체육선생님의 말씀에 운동에 소질이 없는 나는 인상만 한껏 찌푸렸었다. 골대와 떨어진 곳에 검은 테이프로 선을 긋는 선생님의 뒤통수에 대고 ‘그걸 어떻게 해요! 너무 멀어요!’ 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애들 옆에 서서 소심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있던 내게 들고 있던 공을 건네주면서 ‘너 운동 잘 못해?’ 라고 묻던 민윤기의 그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었다. 민윤기와 나누었던 첫 대화였다. 뜨거운 햇볕을 오래 받아서인지, 아니면 민윤기가 여태 안고 있어서인지 농구공은 참 뜨거웠다. 갑자기 말을 걸어와 당황한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대답을 어물거리다 끝내 아주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 뜨겁고 가슴이 뛰는 순간에, 무슨 호의였는지 민윤기는 내 어깨에 손을 얹더니 ‘그럼 내가 알려줄게. 나 농구 좀 잘해.’ 라고 말했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나는 민윤기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 후로 한동안, 수행평가를 보기 전까지 나는 계속해서 민윤기의 코치 아닌 코치를 받아왔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민윤기는 체육 시간마다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오늘은 조금 더 멀리서 던져보자. 조금씩 뒤로 물러서 던지다 보면 검은 선에서도 던질 수 있을 거야.’ 라고 힘을 북돋아줬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일지라도 내겐 정말 큰 힘이 되었다. 어정쩡한 내 자세를 보고도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던지면 나중에 어깨 아파.’ 라는 말과 함께 자세 시범을 보여주던 민윤기는 정말 자상함 그 자체였다. 덕분에 나는 자유투에서 좋은 점수를 받게 되었다. 5골 중 4골을 넣었는데, 우리 반 여학생 중에서는 가장 많이 넣은 거였다. 좋은 결과를 받고 함박 미소와 함께 민윤기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박수를 쳐주며 살짝 웃어줬다. 그리곤 어깨를 으쓱였다. 그 때문에 나는 완벽히 민윤기에게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후로 간간히 대화도 하고 장난도 쳤지만, 민윤기는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았다. 소심한 성격상 박지민처럼 막무가내로 다가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 겉에서 맴도는 것밖에 하지 못했었던 나의 그 일 년은 그렇게 달처럼 주변을 돌기만 하다 지나가버렸다. 그리고 2학년으로 진학한 후에 손을 모으고 바랬던 같은 반으로의 배정은 마치 꿈에서 깨라는 것 마냥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짝사랑은 말 한번 못해보고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후우…….”
답답함에 꽉 막힌 한숨을 토해냈다. 그때 멀리 계단 쪽에서 웅성거리는 남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무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엔 공을 튕기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민윤기도 보였다. 무조건 반사로 심장이 덜커덩하고 고장 난 기계처럼 엇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늑골을 때리는 느낌이 적나라하게 온 몸에 번졌다.
걸어오던 민윤기는 농구 코트 근처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무 표정 없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리를 벗어나야 하나, 아니 그건 너무 도망가는 거 같은가. 어떻게 해야 하지. 곤란해 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정호석에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여보세요?”
-어디임?
“아, 담임 왔어?”
-아니, 학주가 담임한테 갑자기 급한 일 생겼다면서 정리하고 가라고 대신 종례해줌. 그래서 내가 네 가방까지 가지고 나왔는데. 어디야?
“아, 나 지금 강당 옆. 내가 내려갈게.”
정호석은 딱 좋은 타이밍에 전화를 걸어왔다. 피하지 못하고 있던 시선 끝에 살짝 눈인사를 건네고 재빨리 그 곳을 벗어나려 했다. 아무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민윤기를 보고 있기는 힘이 들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옆을 지나치는 내 어깨를 민윤기가 살짝 잡았다. 놀란 토끼눈으로 멈춰선 나는 나사 빠진 로봇처럼 어색한 몸짓으로 뒤를 돌았다. 민윤기는 옆의 친구들에게 농구공을 던져주며 먼저 가있으라는 식으로 손짓했다.
“청소 끝났어?”
“아, 응. 근데 종례가 늦어져서……. 교실은 좀 답답해서…….”
“아, 그래. 나는 친구들하고 농구 한판 하고 집에 가려고.”
“…아아, 그렇구나.”
“방학 잘 보내. 어차피 곧 보충 시작할 테지만.”
“어, 어. …너도.”
뜬금없이 인사를 건넸다. 원래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황함에 어색한 대답만 하고 있는 내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놓은 민윤기는 친구들에게로 몸을 돌려 가볍게 달려갔다. 나는 그런 민윤기의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키가… 더 컸나보네.”
못 본 사이에 키가 더 큰 것도 같은 민윤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계단 끝에 내 가방을 들고 서있는 정호석이 보였다. 정호석은 다가오는 나를 보며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왠지 그를 보니 긴장이 풀리면서 울음이 터질 것도 같은 기분이었다.
“내려온다던 사람이 이렇게 친구를 기다리게 하면 못써요.”
아무리 오래해도, 짝사랑은 역시 힘들었다.
*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니 아무리 방학이래도 금방 지루해졌다. 쉬는 기간 동안 중학교 친구들을 만나 놀러도 나가고 여기저기 여행도 갈 생각이었지만, 친구 하나가 틀어지는 바람에 모든 일정이 취소되었다. 덕분에 집에서 놀고먹고 하게 된 나는 볼품없는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오늘도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다.
조용하던 핸드폰이 벨소리를 울렸다. 흘긋 본 화면에 박지민의 이름이 떴다. 무슨 일이지 싶어 전화를 받아드니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전해졌다.
-뭐하냐.
“그냥 있어. 왜?”
-심심해서.
“뭐야. 심심하면 정호석이랑 놀아.”
-정호석이랑 같이 있어. 그런데도 심심해.
“나보고 어쩌라고 인마.”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전화를 받으니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나와, 놀자.’ 박지민의 말에 잠깐 귀찮음이 앞섰다가도 집에 있는 것 보다는 재미있겠다 싶어 알았다고 대답했다. 박지민은 영화관으로 나오라고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대낮부터 남자 둘이 영화관에 있다니 참 별 볼일이었다.
대충 옷을 걸쳐 입고 영화관으로 나섰다. 남자친구도 아니고 박지민과 정호석을 만나러 가는 길에 곱게 차려입어봐야 무슨 소용이겠냐 싶어 정말 대충 걸쳐 입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내려 익숙하게 영화관을 찾아 들어갔다. 영화관 로비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박지민의 뒷모습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몰라 다가가 오금을 발로 걷어찼다. 으아― 하고 소리를 내며 휘청거리던 박지민은 뒤를 돌아 나를 바라봤다. 손엔 팝콘과 콜라, 그리고 영화표 두 장을 들고 서있었다.
“정호석은?”
“없어.”
“뭐라고? 같이 있다면서.”
“뻥이야.”
“어? 왜?”
‘왜긴, 우리 못난이랑 둘이 영화 보고 싶어서 그랬지!’ 라며 내 목에 팔을 걸치는 박지민은 조금 들뜬 모습이었다. 좋은 일이 있나 싶어 그냥 관뒀다. 공짜로 영화 보면 좋은 거지― 라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박지민이 들고 있던 콜라 하나를 건네받고 상영관을 찾아 들어갔다. 어두운 영화관에 나란히 앉으니 또 새삼 기분이 새로웠다. ‘너 영화 장르 가리냐?’ 귓가에 다가와 묻는 박지민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더니 다행이라며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액션 보고 싶어서, 액션 영화 끊었거든.”
영화가 시작되어서는 두 사람 다 빛의 속도로 영화에 집중했다. 이런 집중력으로 공부를 했다면 정말 서울대는 껌이요 하버드대까지 노려볼 만큼의 강한 집중력이었다. 영화를 보면서도 박지민은 내가 팝콘을 집기 편하도록 내 쪽으로 들어줬다. 나도 사이다가 먹고 싶다는 말엔 음료까지 제 것과 바꿔주기도 했다. 새끼, 남자라고 매너가 좋네. 그렇게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박지민도 쓸모없는 인간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며 영화관에 조명이 들어왔다. 조금 천천히 일어나자는 내 말에 박지민은 의자에 완전히 몸을 묻었다.
“꽤 재미있지 않았어?”
“응. 남주 완전 잘생겼다.”
“뭐가 잘생겼냐. 부리부리하기만 하던데.”
한 차례 사람들이 빠져나간 영화관은 우리처럼 늦게 일어나는 몇몇의 사람들로 한적했다. 들고 왔던 가방과 쓰레기를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뒷자리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김탄소.”
낯설면서도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그 곳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민윤기가 앉아있었다. 함께 다니던 친구 몇 명도 옆에 앉아있었다. 내 이름을 먼저 불렀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기도 했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멀뚱히 그쪽만 바라보고 서있으니 박지민이 내 시선이 머물러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나만 들을 법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해, 안 나가고.”
뒤쪽에서 나를 밀어대는 박지민의 손에 이끌려 통로로 밀려나온 나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민윤기를 응시했다.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서있던 나는 박지민에게 손목이 잡혀 그렇게 상영관을 벗어났다. 정말 찰나에 변했던 민윤기의 표정이 나만의 오해인지도 모르겠지만, 미묘하게 구겨진 걸 봤다. 그 얼굴은 무슨 표정일까. 왜 나를 부른 걸까. 온갖 이상한 상상들이 내 머리를 덮쳤다.
그대로 쭉 박지민의 손에 끌려 영화관을 벗어났다. 두 시간동안 안에 갇혀 있었건만, 아직 바깥은 환했다. 밖으로 나와서야 박지민은 붙잡았던 내 손목을 놔주었다. 그리고는 잡았던 내 손목을 살피며 빨갛게 올라온 자국을 걱정했다. ‘미안, 내가 너무 세게 잡았지.’ 그 말에 내려다본 손목은 정말 박지민의 손 모양 그대로 붉은 자국이 남아있었다. 됐어, 이 정도 가지고 뭘. 손목을 털고 몇 번 쓰다듬었다. 그런 내 손목을 빤히 보던 박지민은 제가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내 손목에 채워주었다.
“좀 불편해도 하고 있어. 붉은 기 가라앉을 때 까지만.”
“응.”
아무 대꾸 없이 순순히 채워지는 손목시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내 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박지민의 시선도, 좀 전에 내 이름을 부르던 민윤기의 목소리도.
“가자.”
어쩐지 손목에 매달린 손목시계처럼 무거운 기분이었다.
*
“박지민이? 에이, 설마.”
“아니 뻥 아니고. 진짜 윤기가 나를 불렀는데, 완전 무섭게 나 끌고 나갔다니까.”
“왜 그랬대?”
“모르니까 너한테 물어보는 거 아냐. 윤기랑 박지민 사이 안 좋아? 윤기랑 너네 같은 중학교 나왔다며.”
“안 친해봐서 모르겠어. 그냥 이름만 알고 얼굴만 알았지.”
박지민과 영화를 보던 날, 한숨을 푹푹 내쉬던 박지민은 곧바로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고는 절대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경고 아닌 경고를 했다. 당시엔 워낙에 그 얼굴이 무서워서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내가 가진 상식선에서는 절대 이해를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나를 끌고 나왔는지, 왜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 당부를 했는지.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내 손목에 채워줬던 시계도 그대로 두고 가버렸다. 그래서 보충 학습이 시작 되자마자 학교에 나와 정호석을 붙잡고 늘어졌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지가 궁금했다. 예를 들어, 민윤기와 박지민이 서로 사이가 안 좋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정호석은 아는 게 없는 듯 고개만 저어댔다. 왜 모르냐고 아무리 닦달해보아도 여전히 같은 얼굴로 머리를 내젓는 통에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호석은 알 거라 생각했는데. 실망스러운 마음이 컸다. 내 친한 친구와 내가 좋아하는 애가 사이가 안 좋다면 가운데에서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더군다나 내가 여태 박지민을 붙잡고 민윤기에 대해 해놓은 말이 많아서 더욱 그랬다. 싫은 소리를 여태 싫은 내색 없이 들어줬을 박지민을 생각해보면 미안하고 고마운 게 말로 표현이 안 되어서 입술이 댓발 튀어나왔다. 그런 내 입술을 꼬집으며 뭐가 문제냐던 정호석의 표정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있잖아. 아주 만약에 말이야.”
“응.”
“박지민이 윤기를 너무 싫어하는데, 내가 윤기랑 사귀게 된다면. 박지민은 어떻게 될까?”
“뭐가 어떻게 돼.”
“나랑 절교할까?”
“야, 김탄소. 인터넷 소설 좀 끊으라고 했지.”
내 이마를 밀친 정호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귀고 나서 걱정해도 될 문제 아냐?”
“아니, 그래서 만약이라고 했잖아.”
“아무리 만약이래도 그렇지 너무 나갔다. 그리고 박지민이 절교하고 그럴 애냐? 차라리 축하를 해줬으면 해줬겠지. 박지민을 그렇게 모르냐.”
“그런가.”
정호석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교실로 들어오던 박지민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며 ‘방금 박지민 어쩌고 하는 거 다 들었어. 뭐야, 니들 내 욕하고 있었어?’ 라고 물었다. 그에 정호석은 너무나 태연한 목소리로 ‘당연하지.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네 욕 말고 뭐가 있겠어.’ 라고 되받아쳤다. 그러자 박지민은 그게 사실이냐며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봤다.
“아, 아마 그럴걸?”
“이것들이 친구 없다고 뒷담화나 까고 말이야! 안 되겠어 아주?”
교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박지민의 목소리에 정호석이 찰싹 등을 때렸다. ‘나대지 말고 빨리 자리에 앉아. 금방 담임 들어와. 늦은 주제에 말이 많아.’ 아픈 등을 이리저리 문지르던 박지민은 나와 정호석을 번갈아 보면서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런 박지민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다 깜박 잊고 있던게 생각이나 박지민을 불렀다.
“야, 박지민. 이거, 시계.”
“아, 깜박했다.”
내 손에서 시계를 받아간 박지민은 그전에 제가 잡았던 내 손목을 흘긋 보는 것 같았다. 다행히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괜찮아진 손목을 자신 있게 보여줬다. 그러자 박지민은 뭐가 안심이기나 한 건지 크게 숨을 골랐다. 내게 눈인사를 하고 제 자리로 돌아간 박지민이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어쩐지 내가 아는 그 박지민이 아닌 것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느낌을 나만 받은 건 아닌지, 정호석이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거봐, 윤기랑 사이 안 좋은 거 같지? 물었더니 정호석은 혀를 끌끌 찼다. ‘박지민 반칙이네.’ 그리고 그렇게 말했다.
뭐가 반칙인데? 내가 물어도 더는 대답이 없었다. 때맞춰 담임이 교실로 들어오고 교실 분위기는 정돈되었다. 방학동안 잘 쉬었냐는 선생님의 대답에 더 쉬고 싶다고 칭얼대는 소리가 대부분이었다. 그 마음을 잘 안다는 듯 담임은 웃었고, 싫겠지만 앞으로 보충 수업도 열심히 듣기를 바란다며 조례를 마쳤다. 담임이 교실을 나서자 또 다시 짧은 쉬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일주일간 못 본 사이도 뭐가 그리 반가운지 교실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그 사이에 책상으로 엎드린 박지민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참 많이 작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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