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안녕하세요, 백년만에 글을 들고 헐레벌떡 달려온 독스입니다.
(핑계)
새로 직장을 잡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네요.
마지막 글을 올린지가 벌써 한달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도 까마득히 잊고
바쁜 현실에 치여 숨만 헐떡이고 있었답니다
못난 저를 몹시 쳐주세요
몸이 힘들고 마음이 힘드니 역시나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우리 탄소들, 우리 방탄이들
아련하게 기억을 더듬어보다 괜히 너무 늦장을 부리는가 싶어 이렇게 돌아왔어요
글을 오래 쓰지 않아 뻑뻑해진 손가락 마디마디에 기름칠 하고
삐그덕 대며 쓴 글이라 재미는 보장 못해요(울먹)
열심히 할게요 사랑해요(쪽)
-눈치보느라 바쁜 독스 올림
Re:plus - Autumn Leaf
늦어진 하교에 발끝에 차이는 돌멩이를 세게 걷어찼다. 하교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나에게 일을 맡겨놓고 돌아오지 않은 담임선생님 덕분에, 해가 뉘엿뉘엿 저물 즈음에야 학교를 나설 수 있었다. 미안하다며 꼭 보상을 해주겠다던 선생님께는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이고 교무실을 벗어나 미련 없이 운동장으로 나섰다. 터벅터벅 걷는 걸음에 필통과 펜이 부딪치는 소리만 들어있는 게 없는 가방에서 새어나고 있었다.
“어, 아니 이제 끝났어. 방금 교무실에서 나왔어.”
타이밍 좋게 걸려온 박지민의 전화에 있는 그대로 힘없는 목소리로 받았더니 전화 건너편에선 여태 학교에 있었던 거냐며 펄쩍 뛰었다.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그냥 남아서 도와주고 같이 올걸.’ 나만 두고 정호석이랑 먼저 집으로 가버렸던 게 미안한 듯, 박지민의 웅얼거리는 말투에 보이지 않을 걸 알면서도 고개를 모로 저었다. 일이 늦게 끝난 게 문제가 아니고, 담임이 너무 늦게 돌아온 게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지금이라도 집에 가고 있으니까. 내 긍정적인 답에 박지민은 코웃음을 치더니 ‘어울리지 않는 웬 긍정적 마인드냐?’ 면서 비아냥거렸다.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짜증을 부릴 기력도 남아있지가 않아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짜증나게 만들 거면 끊어. 너랑 말장난 칠 힘없어.”
-내가 언제 짜증나게 만들었냐?
“지금 충분히 짜증나게 만들고 있거든?”
‘집에 잘 들어갔는지 걱정을 해줘도 지랄이야.’ 박지민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웃음이 픽 났지만, 이러다간 집에 도착할 때까지 통화가 끊이지 않을 거 같아 대답을 삼켰다. 박지민은 사내 주제에 아줌마처럼 무슨 말이 그렇게나 많은지, 통화를 했다 하면 수다가 기본 한 시간이었다. 한 시간 동안 핸드폰을 붙들고 집까지 걸어갈 수는 없을 것 같아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끊으라는 내 말에 ‘야박한 년.’ 이라 내뱉고 전화를 끊은 박지민은 분명 내 걱정보다는 심심했던 게 확실하단 판단이 내려졌다.
힘없는 걸음으로 교문을 나섰다. 운동장에 울리는 발소리는 참 내가 듣기에도 맥아리가 없었다. 교문을 나서자마자 깊게 한숨을 내쉬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오가는 사람이 없는 학교 앞길을 혼자 걷고 있자니 왠지 쓸쓸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야.”
그때 별안간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미처 보지 않고 지나쳤던 교문 옆쪽에 웬일인지 민윤기가 짝다리를 짚고 서있었다. 반가운 마음 반, 의아한 마음 반으로 얼굴을 밝혔다. ‘무슨 생각이 그렇게 깊어서 옆에 사람이 서있는데도 못 보고 지나쳐?’ 내게 물으며 다가오는 민윤기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가려운 볼을 긁었다. 누군가를 꽤 오래 기다리고 있었던 듯 지루해 보이는 얼굴이라서, 나는 괜히 ‘혹시 나를 기다린 건가.’ 하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고개를 저으며 내 앞으로 바짝 다가온 민윤기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집에 안 갔어?”
“그러는 너는 왜 이제야 나와?”
“나는 선생님 일 좀 도와드리느라.”
“으응, 나는 너 기다리느라.”
“……어?”
“농담이야. 나도 이제 막 나왔어.”
뒤돌아 서있는 나를 자연스럽게 돌리더니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어정쩡한 자세로 민윤기의 팔에 갇혀 걸음을 걷게 된 나는 잔뜩 몸을 움츠러뜨리고 발을 뗐다. 가까이 붙어 선 민윤기에게서는 전에 맡았던 시원한 향기가 나고 있었다. 괜히 코를 킁킁거리다 민망해져 콧잔등을 찡그렸다. 도착한 버스정류장에서 나를 놓아준 민윤기는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정리해 주머니로 찔러 넣었다. ‘선생님이 무슨 일을 시켰기에 일곱 시가 다 되어서 나와?’ 내게 묻는 것 같은 질문에 눈을 들어 민윤기의 얼굴을 바라보니, 민윤기는 내 얼굴을 가만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어 내 눈을 찌르던 옆머리를 옆으로 넘겨주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지만 내색 할 수 없었다. 이제야 겨우 가까워진 민윤기가 다시 달아날까 두려워서였다.
“서류 정리 같은 거.”
“서류 정리?”
“응. 일은 금방 끝났는데, 선생님이 늦게 오셔서.”
“그래서 늦게 나왔구나.”
민윤기의 목소리는 자상했다. 그도 나를 좋아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쉽게 착각이 들 수 있을 정도의 따뜻한 목소리였다. 적당히 낮은 목소리가 목을 울리며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이어폰을 찔러 넣어 볼록하게 솟은 바지주머니를 몇 번 매만지다 둘 데를 몰라 가방 끝을 잡은 손도 시원시원했다. 박지민이나 정호석에 비해 월등하게 하얀 피부색도 어쩐지 여성스럽기 보다는 신비해 보이는 느낌을 전해 주었다. 우리가 새삼 가까이에 서 있었구나―하는 자각이 일어남과 동시에 도로 건너편을 응시하고 있던 민윤기의 눈이 내게로 돌아왔다. 등 뒤로 전해져온 노을에 붉게 물든 민윤기의 머리카락은 살랑살랑 불어오는 저녁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내가 내 옆에 서있는 민윤기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정도가 되었는지 몰라도, 확실히 근래 들어 그와 마주하는 일이 잦긴 했다. 입술을 혀로 축이다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 그의 얼굴을 살폈다.
“왠지 작년 보다 더 가까워진 거 같아.”
“뭐가?”
“그냥, 너랑 나랑 사이가.”
“그야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러지 않을까.”
“노력? 무슨 노력?”
“너랑 한번이라도 더 마주치려고 노력하잖아. 내가.”
민윤기의 대답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이 만들었다. 예고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민윤기 때문에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을 뻔 했다. 찌르르하게 울려오는 명치 끝부분을 부여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민윤기가 너무 좋아서 숨을 쉬기가 곤란했다.
“그거 알아?”
민윤기가 천천히 아주 느린 목소리로 물었다. 왜인지 모르게 쎄― 해지는 기분에, 그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어 올리는 나도 느렸다.
“너는 네 얼굴에 네가 지금 느끼는 모든 감정이 숨김없이 솔직하게 드러나.”
“……….”
“그리고 난 그게 좋아.”
예측할 수가 없었던 말이었다. 솔직히 민윤기가 입을 연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에게서 이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놀란 눈으로 멍하니 저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향해 싱긋 웃어주던 민윤기는 멀리서 다가오는 버스를 확인하며 손을 뻗었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첫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소중하게, 그리고 천천히 흘러 지나가고 있었다.
Love Like Sugar
W. 독스
04
수업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온통 머릿속은 민윤기 생각뿐이었다. 엊그제 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온 민윤기 때문에, 고속도로 위에 큰 바위가 굴러 떨어진 것처럼 모든 사고 회로가 순탄치 못했다. 무의미하게 볼펜을 돌리고 있는 내 손을 툭툭 친 정호석이 수업에 집중하라는 식으로 눈치를 줬지만 난 입술만 삐죽이고 창문 너머로 눈을 돌렸다. 한창인 여름에 쏟아지는 햇볕마저 민윤기의 미소처럼 느껴져서 잠깐 미친 건 아닌지 내 눈을 비비기도 했다.
옆에서 수업을 듣던 정호석은 그런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만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주의를 주는 것도 이제는 지친 모양이었다. 지루한 세계사 수업은 길게만 느껴졌다. 이미 대놓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박지민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갑갑하게 채워진 깁스에 눈길이 머무는 순간 목 끝이 저릿해지면서 지난 날 박지민을 부축한 나를 보던 민윤기의 두 눈이 떠올라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너 박지민 좋아해?’ 어디선가 민윤기의 목소리도 아련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단순히 친해서 했던 행동들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렇게 만은 보이지 않는 건가. 이차, 삼차 적인 걱정들도 함께 떠오르고 있었다.
“……….”
말없이 박지민의 등을 보고 있노라니 여러 복잡한 감성들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것들이 투명했던 내 정신을 잠식하면서 차곡차곡 쌓아놨던 그간의 기억들을 차츰차츰 하나씩 꺼내어 펼쳐놓기 시작했다. 나를 바라보던 박지민의 눈빛과 그런 박지민의 옆에서 활짝 웃고 있는 나.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챙기던 정호석. 꺼내 든 기억 속에 우리의 모습은 생각했던 것 보다는 꽤 묘한 모습이었다. 무심결에 스치듯 지나갔던 모든 상황들은 과연 민윤기가 우리들의 관계를 의심하기에 충분하다 생각이 될 정도였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할 수 있다 생각했던 ‘우정’을 왜 당연하게만 여겼었는지, 정말 당연하다 생각하는지. 어질러진 생각들 위로 박지민과 정호석의 얼굴도 희미하게 겹쳐졌다.
손 안에서 열심히 움직이던 펜을 가만 책상 위로 내려놓았다. 교실 안엔 에어컨의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와 선생님이 칠판 위로 분필을 놀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하얀 분필이 까만 칠판위로 부딪쳐 짓뭉개어지는 소리를 하염없이 듣다 고개를 떨구었다. 세상엔 전부 설명할 수 있는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근심이 가득한 내 얼굴을 힐끔 보던 정호석은 축 쳐진 내 눈을 보더니만 가만히 손을 뻗어 지나간 교과서 페이지를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연필로 책상에 글을 썼다. ‘무슨 일 있어?’ 소리 없이 적힌 글자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 대답이 영 시원치 않았는지 정호석은 내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수업중이라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없는 게 답답했다. 그러면서 모순적이게도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정호석에게 우리 셋의 관계가 마냥 우정인지 아닌지, 물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살뜰히 나를 생각하고 챙기는 정호석에게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음을 털어 놓을 수도 없었다. 언젠가부터 내가 정호석과 박지민에게 민윤기에 대한 말들을 꺼내기가 어려워졌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은연중에 박지민과 정호석에게 민윤기와 관련된 말들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 같은 걸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뭔데 말해봐.”
내게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인 정호석은 역시 꽤 내가 걱정스러운 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내가 웬일로 수업시간에 조는 것도 아니고 근심 가득한 얼굴로 앉아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누구에게서나 찾아 볼 수 있는 흔한 반응도 아니었다. 정호석은 내 일이라면 저의 일 마냥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그 안에서 나는 내 마음의 평안을 찾았고 고민들에 대한 해결도 얻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정호석에게 털어 놓을 수 없을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난 일이니 내 스스로 해결하는 게 좋을 거란 생각이었다.
“아무 일도 없어.”
입 꼬리를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내 대답에 정호석은 영 못미더운 듯 나를 바라봤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날렵하게 선 정호석의 콧날을 바라보다 다시 책상으로 눈을 돌렸다. 어쩐지 나를 배려하며 입을 닫아주는 것 같은 정호석의 행동을 이번엔 분명히 알아차렸다.
평소 같으면 쉽게 지나쳤을 법한 사소한 것들도 크게 다가왔다. 민윤기의 한 마디 이후로 모든 것들을 새로 생각해 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게 투덜대는 내 옆에 박지민과 정호석이 머무는 이유는 뭘까. 또 내게 슬금슬금 문을 열어주는 민윤기의 의도는 뭘까. 어려운 세계사 보다 더 어려운 문제에 머리가 지끈지끈 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괜한 걸 걱정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문득 생각이 들다가도 금방 시름 대던 문제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번 들기 시작한 쓸 데 없는 고민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말없이 펜을 들어 교과서 위로 무의미한 낙서를 시작했다. 반복해서 그려지는 네모모양을 따라 종이가 움푹 파였다. 뜻이 없는 내 손끝을 바라보던 정호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가 내 안에 몰아치는 태풍처럼 쓸쓸해서 나는 괜스레 미안해졌다. 천천히 눈을 감은 내 옆얼굴이 뜨거워짐을 느꼈지만, 눈을 뜰 수 없었다. 왠지 눈을 떠 나를 바라보는 정호석과 눈이 마주친다면 울컥 눈물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 아랫입술만 꾹 깨물었다.
지난 줄 알았던 사춘기가 다시 시작된 기분이었다.
*
“먼저 간다.”
“조심해서 가.”
“집에 들어가면 들어갔다고 연락 하고!”
“알았어!”
자전거를 타고 멀어지는 정호석과 박지민을 향해 소리쳤다. 다친 다리를 쭉 편 채 머리위로 크게 손을 흔드는 박지민을 따라서 흔들어 대던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찾아온 정적이 주변을 메우고 나서야 새삼 우리가 시끄러웠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깨를 으쓱이며 가방을 고쳐 맸다. 실로 오랜만인 것 같은 정시 하교에 애써 밝은 척 걸음을 옮겨보려 했지만 학생들로 우글대는 버스 정류장을 보고서는 한숨이 나오는 걸 막지 못했다. 적어도 버스 두어 대는 그냥 보내야 할 것 같은데. 버스정류장에 서있는 학생들의 머리꼭지를 세어보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래도 우글우글한 사람들로 서있을 자리도 없는 버스를 타고 싶지가 않았다.
정류장에서 몇 걸음 물러났다. 길지 않은 버스 운행 간격을 다행이라 여기며 몇 차례 버스를 보내고 여유롭게 널찍한 버스를 기다릴 심산이었다. 뜨거운 빛을 피해 학교 담장 아래에 기대어 서서 내 앞을 지나쳐가는 수도 없이 많은 학생들을 구경했다. 몇몇 아는 얼굴들과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처음 보는 얼굴들은 신기하게 보기도 하면서 사람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거기 서서 뭐해?]
갑자기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바라보니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와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다 잘못 온 건가 싶어 무시했다.
[나 민윤기야.]
다시금 울리는 진동에 문자를 확인하고서 나는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봤다. 왠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문자 내용에 한참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바로 앞 버스정류장에 제 친구들 틈에 섞여있는 민윤기를 볼 수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민윤기는 제 옆에 있던 친구들에게 잘 가라는 식으로 어깨를 두드리고 내게 다가왔다. 놀란 마음을 아직 진정시키지도 못했는데, 성큼성큼 다가와 어느새 내 앞에 선 민윤기는 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제 나와?’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민윤기는 그런 나와 진득하니 눈을 맞추어주며 살짝 웃는 것으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입을 꾹 다문 채 짓는 미소마저도 눈이 부셨다. 손에 들린 핸드폰이 내 얼굴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내 번호 어떻게 알았어?”
“슬이한테 물어 봤어. 너한테 물어봤어야 했는데 널 만날 겨를이 없어서. 혹시 기분 나쁜 건 아니지?”
“아니, 전혀. 그냥 놀랐어.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와서 나는 잘못 온건 줄 알고.”
“이야기는 하고 싶은데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답답했거든. 이제 저장해놔. 종종 연락 할 테니까.”
민윤기가 제 얼굴 옆으로 핸드폰을 흔들어 보이다가 다시 주머니로 찔러 넣는 모습을 가만히 서서 바라만 보았다. 언제 내가 이 녀석과 이렇게나 친해졌지 싶을 정도로 우리 사이의 거리는 많이 가까워져 있었다. 한걸음만 다가가도 두세 걸음을 달아나던 민윤기는 더 이상 도망을 가지 않았다. 오히려 제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지도 모를 정도로 민윤기는 많이 살가워졌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의아해하며 예전의 그를 상기시킬 정도였으니. 당연히 간격이 좁혀질수록 민윤기를 향한 마음은 걷잡을 수가 없이 커지기 마련이었다. 반면 오직 민윤기를 좋아하는 마음뿐이었던 내 안에 무겁게 다른 얼굴들도 함께 떠오르기 시작했다. 온통 민윤기뿐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걱정스러운 마음도 따라 커졌다. 민윤기 옆으로 나란히 떠오른 박지민의 얼굴에 속이 갑갑해 진 건 누구에게도 말 못할 일이었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어?”
“표정이 별론데? 왜, 내가 너한테 번호 물어본 게 아니라 다른 애한테 물어봐서 그래?”
“아니, 그런 거 아닌데…….”
“너무 급했나봐. 너랑 연락하고 싶은데 번호를 모르니까. 미안해, 앞으로 조심할게.”
다정한 목소리에 아무런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내게 왜 이러는지는 몰라도, 자꾸 내 심장을 쥐었다 놓고 제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었다. 민윤기 때문에 가슴에서 심장이 엇나가며 덜커덩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나를 보던 민윤기는 천천히 내 앞으로 더 다가와 서면서 내 볼을 톡톡 두드렸다.
‘나쁜 습관을 갖고 있네?’ 민윤기가 했던 말이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를 하지 못해 멀뚱히 내 앞에 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민윤기는 ‘입술’ 하고 짧게 말했다. 그제야 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놓아주는 나를 보며 전에 볼 수 없던 미소를 지어주던 민윤기는 ‘말도 잘 들어.’ 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안에서 열심히 제 할 일을 하던 심장이 하마터면 입 밖으로 튀어 나올 뻔 했다. 따뜻했던 손이 지나간 뒤통수를 매만졌다. 머릿결을 따라 흘러내리는 손안에 아직 남은 민윤기의 온기와 다정함이 녹아있었다. 멍하니 저를 올려다보는 나와 눈을 맞춰주던 민윤기는 예측해볼 수가 없는 남자였다. 다정한 철벽남. 새삼 민윤기를 칭하던 별명 같은 꾸밈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옆으로 길게 늘였다.
“박지민은 다리 많이 괜찮아졌대?”
민윤기의 입에서 나온 박지민의 이름에 흠칫 몸을 떨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본 민윤기의 얼굴은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그저 평온한 얼굴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민윤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두르고 있던 붕대를 풀어낸 하얗고 기다란 손엔 군데군데 반창고가 붙어있었다. 내 시선의 끝을 따라오다 제 손을 본 민윤기는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점점 아물어가는 상처의 흔적들을 보여주면서는 ‘이제 괜찮아.’ 라며 나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왠지 모르게 민윤기는 알고 있는 듯 했다. 불편했던 내 마음을.
“박지민은 얼마나 다친 거야?”
“발목 인대가 늘어났대.”
“많이 아팠겠네.”
“원래 자주 아프다고는 했었는데, 무리해서 심해진 건가봐.”
“……역시 친하구나.”
민윤기의 젖은 목소리가 그를 올려다보게 했다. 잔잔히 미소를 띠운 얼굴이 어쩐지 그저 행복하다고는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를 바라보면서 언제나 궁금했던 물음이 하나 떠올랐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은 예감에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있잖아. 박지민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박지민 말로는 중학교를 같이 나온 동창일 뿐이라던데. 그게 전부인 것 같진 않아서.”
내 말에 민윤기는 잠깐 어안이 벙벙한 듯 멍한 표정을 짓다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혹시 내가 말실수를 한건 아닌지,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지만 딱히 기분이 상할 만한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아서 잠자코 민윤기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을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민윤기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리며 ‘박지민이 정말 그렇게 말했어?’ 라며 나에게 되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버버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내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한 그가 마음이 쓰였다. 그저 얼굴만 알고 이름만 알던 사이가 아니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대답을 바랬지만, 민윤기는 고개를 저으며 ‘박지민이 그렇다면 그런 사이였나 봐.’ 라며 입을 닫았다.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도통 그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을 생각인 것 같은 민윤기의 반응에 일찌감치 포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볼에 빵빵하니 바람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민윤기는 내 볼을 콕 찌르며 ‘너 이러는 거 박지민은 자주 보겠지.’ 라며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덥다. 여름이 빨리 지나가면 좋겠어.”
민윤기는 큰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제법 꽤 시원한 바람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의 말에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더니 또 웃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다보았다. 저런 민윤기의 미소는 내 숨을 멎게 했다.
“너도 버스 몇 대 보낼 생각이지?”
“응. 서서 가긴 싫어서.”
“같이 기다려줄게.”
“고마워.”
그늘 안으로 들어온 민윤기는 내 옆으로 나란히 섰다. 머리 하나 차이나는 키도, 손으로 일으키는 손부채질도. 모두가 떨리고 설렜다. 이런 내 마음을 민윤기가 조금은 알아줄까.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정말 내가 그를 마음 편히 좋아해도 되는 건가.
다시 한 번 소리 없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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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진센빠이 / 공감 / 정희망 / 민살랑 / 김치찌개 / 설레는 / 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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빡빡한 스케줄 사이에 기회가 있다면
따스하고 깊은 눈안에 몸 담그고파
* 독자926 님은 저게 암호닉이 맞으신 건가요...?(눈치)
* 다음편은 과연 언제쯤이나 뱉을 수 있는 건가요(오열)(눈물) 너무 늦어서 다들 날 잊으신 건 아닌지...
*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사랑합니다 (쪽) 오타나 탈자는 애교로(찡긋) 댓글로 알려주시면 더욱 좋아요
* 암호닉 신청 방법은 따로 없어요. 그냥 던지고 도망가시면 쫓아가서 뽀뽀해드립니다. 지구 끝까지(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