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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미친놈. 자연스럽게 문 비밀번호를 치고 해맑게 들어 온 박지민은 들어오자마자 우리 엄마에게 안기더라.
옆에 서 있는 나는 안중에도 없는 것인지 우리 엄마랑만 하하호호. 누가보면 내가 아니라 박지민이 친아들인 줄 알겠네.
뚱하게 서있는 나를 발견한 지민이 뒤늦게서야 어색하게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어.
그러더니 이렇게 어머님과 먼저 정을 쌓아두고 그 다음 우리가 사귄다는 중대한 발표를 하는 것이 이득이라며 조잘조잘.
안물 안궁. 내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듯한 반응이자, 사랑이 식었냐며 또 징징.
참 맞춰주기 힘든 아이야. 벌써부터 기가 쭉 빨리는 느낌에 한숨이 절로 나왔어.
내가 고백은 들어주긴 했지만 언제 너랑 사귄다고 그랬냐. 덕분에 강제 커플 2일째를 맞고 있는 나로써는 머리만 아팠어.
물론 싫은 건 절대, 절대로 아니지만. 그렇지, 싫을 리가 없지. 누가 나를 좋아한다는데 누가 싫어하겠어.
뭐 상황과 사람에 따라 틀려지는 결론이긴 하지마는. 그거야 케바케니까.
우리 지민이, 오늘따라 신나 보이네. 뒤에서 엄마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어.
얘가 안 신났던 적이나 있었을까.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휙 돌려서 입을 크게 벌리는 지민의 모습이 포착.
저 주둥이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갈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는 허겁지겁 팔을 뻗어 지민의 입을 막았어.
"엄마, 잠깐만. 나 지민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리고 질질. 발버둥 치는 놈을 겨우 내 방으로 끌고 와서 입을 놔주자 봇물 터지듯 말이 쏟아진다.
왜 우리가 사랑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려던 걸 막냐는 둥, 사랑이 식었다는 둥.
지랄이란 지랄은 골고루 다 떠는구나.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말했어.
"야, 우리 엄마한테 사귀는 거 비밀로 해. 물론 너네 어머님께도."
"왜?"
"그거 말하면 결혼식을 당장 내일 올리라고 할 게 뻔하니까! 우리 엄마 성격 몰라?"
좋네, 우리 내일 결혼할까? 개소리를 해대는 지민의 머리를 한번 내려쳤어.
물론 언젠가는 들킬 비밀 연애이지만, 사귄지 일주일도 안 돼서 혼사 오고갈 집안을 생각하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했어.
분명히 아침에 마주칠 때마다, 어머 미래의 우리 며느리, 하며 반겨주실 지민이네 어머님도 그러했고, 결혼할 여자는 항상 단정해야한다, 뭐다 얘기할 엄마도 그렇고.
그리고 그 장단에 맞춰 같이 술 마시러 다닐 양쪽 아버님들도 한 몫을 하며.
워낙 시원시원한 성격에 다들 초긍정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편이라 내가 궁예질 하는 것은 틀림이 없으리라.
그러다가 헤어지면 이제 완전 장난 아닌거지. 어우, 우리의 미래가 아직 불확실한데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미리 막아놔야하지 않겠어.
당장 저 개소리를 하는 박지민만 봐도 답이 딱 나오는 걸. 무섭다, 무서워.
내가 무시무시한 일들을 상상하며 걱정에 빠져있는데, 지민이 그럼 언제 말하냐고 툴툴 거리더라.
"우리가 정말 헤어지지 않고, 결혼 할 생각을 할 나이 즈음에?"
"그럼 지금이네!"
어이고, 이 등신아. 미쳤어. 나 인생 그렇게 막 안 살았거든. 왜 내 미래를 너가 정해버려.
난 아직 만날 남자가 많단 말이다. 그리고 평생 너 뒤치닥거리 하면서 살기엔 내가 너무 불쌍하지 않을까.
가련한 신데렐라……. 이건 좀 오바다. 아무튼 간에, 너가 사고친거 뒷수습하는 건 지금도 빠듯해.
빨리 말하고 싶다며, 입이 근질근질하다는 박지민의 주둥이를 한번 더 가볍게 쳐주고.
나는 막상 엎질러 놓은 물을 어떻게 수습해야할까 머리를 굴렸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어.
언제까지고 내가 입단속 한다고 해서 말을 안 할 박지민도 아니었고.
툭 건들기만 해도 말이 술술 나오는 새끼인데 비밀은 개뿔이나, 일주일이라도 버티면 용하지.
그렇다고 양 쪽 가족들의 초긍정 마인드를 바꾸는 것도 무리지 않은가.
내가 한숨을 쉬며, 일단은 조금만이라도 비밀로 뻐기자고 자연스럽게 굴자며 말할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박지민은 이미 내 방에서 사라진 뒤였어.
헐 미친.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방에서 뛰쳐나갔을 때엔, 이미 엄마가 흐뭇한 미소로 나를 쳐다보고 있더라고.
그리고 그 옆엔 뿌듯한 표정으로 당당히 서 있는 박지민까지.
엄마는 호호, 웃으며 전화기를 드셨고. 그 발신지는 어딜지 뻔했다.
경악에 물들어 입을 벌리고 있는 나에게 다가온 박지민이 해맑게 말하더라.
"탄소야, 어머님이 당장 결혼하라는데, 어쩔까?"
이 새끼야. 어쩜 이렇게 나쁜 예감은 틀리지를 않을까. 억지로 웃으며 박지민을 다시 한번 내리쳤어.
우리 가족은 너무 예상가는 대로 모든게 흘러가서 문제야. 우리 엄마 성격 급하고 앞서나가는 건 알아줘야지.
그리고 현관문으로 들어오시는 지민이네 어머님까지. 갓 뎀. 벌써부터 귓 속에 미래의 며느리라는 호칭이 박힐 듯한 느낌이 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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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두부 사오래, 로 시작해서 아이스크림 먹을까, 라는 과정을 거친 우리는 사이좋게 장 본 봉지를 하나씩 들고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었어.
깔 거 다 깠더니 이젠 심부름도 같이 보내는구나. 명절 연휴에 놀러가려던 나는 꽉 잡혀서 이렇게 박지민과 함께.
한번 쓱 쳐다 본 지민은 혼자 또 신나 있더라. 너는 아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고 너만 남는다고 해도 아주 해맑게 잘 살거야.
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 나를 눈꼽만치도 눈치 못 챈 박지민은 이제 아주 엇박으로 발을 구르며 뛰고 있다.
뭐가 저렇게 신날까. 덕분에 따라가는 나만 죽을 맛. 같이 가자고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나와 발걸음을 맞추더라.
"되게 좋지 않냐."
"뭐가."
"너랑 나랑 우리 둘이 이렇게 같이 걷는거."
같이 걷는 게 한 두번이야. 학교 갈 때도, 집 올 때도 항상 이렇게 같이 걸었는데 새삼스럽게.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마. 무슨 의미성애자도 아니고. 무거운 봉지에 지친 내가 점점 허리를 수그리자, 박지민이 쓱 보더니 내가 들고 있던 봉지를 가져가더라.
어. 순식간에 가벼워진 손에 지민을 쳐다보니까 어깨를 으쓱.
"왜 가져가?"
"나 아이스크림 다 먹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손이 자유로워서 가져가는 거야."
넌 아이스크림이나 마저 먹어. 근처 쓰레기통에 아이스크림 막대를 뱉은 지민이 말했어.
짜식. 괜히 올라가는 입꼬리를 잠재우며 아이스크림을 마저 먹기 시작하는데, 박지민이 갑자기 웃는거야.
왜 웃지, 하고 쳐다보는데 또 뭐가 그렇게 웃긴지 눈꼬리까지 휘어져 있더라.
"왜?"
"설레냐."
"헐, 아니거든."
설레면서. 나를 팔꿈치로 한번 툭 친 박지민은 다시 씩 웃더니 앞서 나갔어.
많이 컸네, 박지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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