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먹고나서 자고 일어나니까 몸 상태가 정말 괜찮아졌어. 언제 아팠냐는 것처럼.
한층 개운해진 머리를 휘휘 흔들면서 일어나는데, 언제 기어들어온 건지 박지민이 옆에 앉아있더라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내가 일어나니까 휴대폰은 주머니에 넣어두고 나를 쳐다보더라.
"너 언제 왔어?"
"아까."
"아까 언제."
"좀 전에."
그러니까 언제. 조금 됐는데. 몇 분 정도? 두시간. 누가 멋대로 들어오래. 내 맴.
내가 괜찮아졌다고 생각한 건지 바로 시비를 걸어 들어오는 지민.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찌릿 째려보자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휙 돌리더라고. 아무튼 뻔뻔해가지고.
그러고는 갑자기 정적. 아, 잠깐 나 소름 돋았어. 얘 왜 이렇게 조용해?
왜 답지않게 갑자기 진지모드래. 장난을 치긴 하는데, 평소같으면 실실 웃으면서 칠 장난을 그냥 영혼없이 치는 것도 그렇고.
무슨 바람 들었나. 고개를 푹 숙이고 손장난만 하고 있길래 팔꿈치로 툭 치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더라.
이건 또 무슨 신흥 지랄이래. 이런 건 도대체 어디서 배워오는거야. 올해 남자 애들 사이에선 병신짓이 유행인가.
하긴 병신짓은 딱히 유행 안 타고 매년 꾸준히 있었으니까 새삼스레 얘기할 건 없네.
정신 어디다 팔아 먹고왔어. 푹 숙이고 있는 지민의 고개에 맞춰서 나도 몸을 숙여 눈을 마주치는데, 얘가 막 기겁을 하면서 나를 밀어내는거.
무슨 여자애가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냐면서.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거 따졌다고.
"야,"
"……뭐가."
"너 수상해."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냐. 물어보면 또 고개는 절레절레. 그래도 뭔가 수상한데.
야동보다가 왔나. 하긴 혈기왕성한 우리 나이대면 야동 볼 만하지. 이해해줄 수 있는데 왜 저런대.
지민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볼거 못 볼거 다 보고 자란 사이인데 갑자기 무슨 내숭이야. 나도 안 부리는 걸.
다시 한번 팔꿈치로 툭 치니까 그제서야 그만 치라면서 웃더라.
확실히, 정신을 팔아 먹은 게 분명해. 그거 팔아서 먹고 살만하냐.
*
[누나, 오랜만에 만날래요?]
음, 그래. 일단 침착하자. 오 맙소사 침착해 질 수가 없어!
어제 그런 식으로 마지막까지 간호해 준 지민 덕인지 완전히 나아진 몸상태에 기뻐하기도 전에, 문자가 왔었어.
오랜만에 만나자는 정국이의 문자였지. 두근두근.
정국이라 하면 중학교때 동아리 신청 다 놓쳐서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들어갔던 영화감상부에서 만난 애였는데.
후배치고는 되게 싹싹하고 예의 바르고, 무엇보다 잘생겨서 내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던 애였지.
의외로 대화코드도 맞아서 금방 친해졌었는데.
가끔 마음에 안 드는 영화 볼 때면 우리 둘이 몰래 빠져나와서 놀기도 하곤 했거든.
제일 친한 게 박지민이라면 그 다음으로 친하면서 아끼기도 하는 동생이 전정국이었어. 조금 사심이 있기도 했지마는.
박지민한테 소개 시켜줄까, 하다가 말았는데, 이유가 있긴 했어.
덩치도 그렇고, 외모도 그렇고 우리 지민이가 많이 애잔해지는 느낌이 강하니까.
작년 여름까지는 간간히 연락하다가 서로 바빠서인지 연락 못 하고 있었거든.
그리고 나이를 더 먹었는데도 철없음이 점점 레벨업하고 있는 박지민 뒤치닥거리 하느라 정신없었기도 했고.
근데 거의 반 년만인가. 정국이한테 만나자는 문자가 오니까 괜히 설레더라.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햇수로는 삼 년전이니까 얼마나 변했을까 기대도 돼고, 물어볼 것도 많고.
여자친구는 생겼는지, 학교는 어디인지. 그동안 잘 지냈는지.
자주 연락할 걸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아 생기더라.
근데 오늘 만나니까 뭐 일단, 그래 뭘 해야할까. 옷부터 골라야하는데, 옷은 그래 제일 아끼는 거 입고 나가고.
박지민한테 고새 또 카톡이 오길래 약속이 있다고 그러니까 누구냐고 끈질기게 묻는거야.
그래서 그냥 친구라고, 말해도 모를 거라고 대충 대답했지. 돌아오는 대답은 완전 가관이었어.
거의 모든 시간을 붙어있다 싶이 지내왔는데 네 친구가 내 친구고, 내 친구가 네 친구지. 하는거야.
그냥 쿨하게 씹고 나는 나갈 준비를 했어.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도 괜히 웃음이 베시시.
뭐, 그러곤 약속 장소에 시간 딱 맞춰서 도착했는데, 정국이 보이지 않는거야.
좀 늦는건가 싶어서 기다릴 곳을 찾아보려 뒤를 휙 도는데,
"누나, 오랜만."
헐, 미쳤나봐 진짜. 왜 저렇게 잘생겨졌어. 이건 그냥 잘생긴게 아니라 완전 오빠 느낌인데.
나는 오빠는 왜 나보다 어린거야. 내가 멍 때리며 고개만 살짝 끄덕이니까 씩 웃는데 완전 심쿵.
너 못 본 사이에 키가 왜 이렇게 커졌어. 예전엔 그래도 눈 높이가 조금은 맞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느새 훌쩍 커서 저 윗공기를 마시고 있는 정국을 보니 굉장히 놀랍더라. 역시 남자애들은 성장이 빠른 것 같아.
근데 우리 지민이는 왜……. 그래 뭐 남자는 170만 넘으면 괜찮아.
내가 키 많이 컸다며 칭찬을 계속하니까 민망했는지 어색하게 웃는 정국.
얘 운동도 하나봐, 무슨 덩치도 이렇게. 세상에나. 엄마 딸 눈호강하고 있어요, 나 눈물 날 것 같아.
박지민 진짜 미안해. 자꾸 비교하게 되는데 진짜 미안. 이건 어쩔 수 없는 자연적인 현상이야.
내가 계속 속으로 내적 감탄을 하며 정국을 쳐다보는데, 정국이가 또 웃으면서 배는 안 고프냐고 물어보더라.
누나는 네 얼굴만 봐도 배가 부르다. 실없는 농담까지 치면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어.
평일이지만 역시 방학이라 그런지 길거리엔 내 또래의 애들이 가득.
번화가이기는 한데 사람이 유난히 많아졌어. 이러다가 아는 애들 몇 만나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단 생각이 들 정도로.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
연락 좀 자주하지. 많이 바빴던 모양이네. 내가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고 투정부리 듯이 말하니까, 정국이 나를 쳐다봤어.
자꾸 웃는데 그 웃는게 정말 사람 심장 떨리게 하는 설렘 포인트.
자꾸 웃는다고 해서 내가 반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엄청난 오예야. 오예.
계속 웃어줬으면 좋겠다. 어쩌면 저렇게 잘생겼지. 어구, 내 새끼 정말 많이 컸어. 남자 다 됐네.
"저는 뭐,"
"응?"
"누나 생각하면서 지냈죠."
그리고 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어. 웃기고 있네. 어디서 약을 팔아.
바쁜 게 아니라 능글거리는 것만 잔뜩 배워왔구만. 내가 장난치니까 또 들켰네, 하면서 받아치더라고.
확실히 많이 컸어. 예전에는 내가 이런 드립치면 당황해서는 어버버거렸는데. 그땐 참 순둥이였지.
솜털 보송보송해서는 애기가 언제 클려나, 하고 지켜보던게 엊그제같은데. 마음으로 키운 내 아들이네 완전.
근처 카페나 들어갈까, 하면서 우리 둘 다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
등 뒤로 찌릿거리는 시선이 느껴지는 느낌이랄까. 뭔가 싶어서 뒤를 도는데, 김태형이 있더라.
얘는 무슨 홍길동이야 무슨 동서남북 다 나타나. 저번에도 그러더만.
정국이 내 어깨 위로 팔을 두르며 누구냐고 물어왔어. 같은 반 친구, 하니까 아, 하고 짧은 대답을 하는 정국.
그나저나 이 팔 좀 내려놓지. 내가 웃는 표정이지만 어금니를 꽉 물고 말하는데도 신경을 안 쓰더라.
나는 누가 내 어깨에 팔을 얹는 걸 싫어하는 쪽이었어. 키 작은 것도 서러운데 받침대 역할이 돼다니. 이게 무슨 자존심 상하는.
아무튼, 혼자 나온 모양인 김태형은 우리 둘을 번갈아가면서 보더니, 나한테 묻더라.
"남자친구?"
아닌데, 그냥 아끼는 동생.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니까 태형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어.
그런 우리 모습을 보던 정국이 키득키득 웃으면서 내 대답을 정정하더라고.
"그냥 아끼는 동생이 아니고,"
"……."
"좋아하는 동생이잖아요."
자꾸 수식어 빼놓으면 저 되게 섭섭한데. 여전히 내 어깨 위에 팔을 얹고있는 정국이 말했어.
이 새끼가 멋지게 성장한 줄 알았더니 약쟁이가 돼서 왔네. 내가 팔꿈치로 은근하게 옆구리를 밀어내자 또 엄살을 떨더라.
김태형은 애시당초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라 빨리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곤 다시 걸음을 옮겼어.
"너 아까 전부터 자꾸 작업 거는 것 같다?"
"맞는데요, 뭘."
여자들은 그런 거 안 좋아해. 누나는 좋아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럼 누나라고 부르면 안 돼고 형이라고 해야하나. 너 혹시 하루만 사니 정국아.
툭툭 말장난을 하면서 근처에 있는 카페란 카페는 다 들어가봤는데, 역시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다 만석이더라고.
우리 어디로 가야하지 정국아. 길을 잃었다, 어딜 가야할까.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것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으니까 정국이 괜찮다며 나를 툭 쳤어.
그냥 좀 걷다가, 자기가 아는 작은 카페가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는거야.
거기는 사람 없겠냐고 물어보니까, 골목길 사이에 자리를 잘못 잡은 카페라서 사람 별로 없다더라.
그러면서 그래도 거기 분위기는 좋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고.
남자 애가 뭐 이런 걸 잘 알아. 역시 데이트 코스도 연애해 본 사람이 짜야 잘 다니는구만.
내가 뭐라는거야, 데이트는 무슨. 존나 좋네. 하긴 내 마음 속으로는 이미 데이트.
남자 여자 둘이 같이 다니면 그게 뭐겠어, 데이트지.
헐, 그럼 나 박지민이랑 데이트를 몇 번이나 한거야. 그렇게 따지면 박지민이랑 나는 결혼할 사이일 듯.
미친 헛소리까지 나오네. 오늘 기분이 너무 들떠서 그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서 잡생각을 치우곤 다시 정국이한테 말을 걸었어.
"너 학교는 어때?"
"남고가 어떻겠어요."
핑크빛 로맨스 이런 거 바라는 거면 얼른 생각 접으셔야 할 걸요. 아, 딱 걸렸다.
우리 정국이 연애 얘기 좀 들어볼까 했더니만, 못 듣겠네. 내가 입맛을 다시며 아쉽다는 듯이 말하니까 또 웃더라고.
그러면서 누나네 학교로 전학갈까봐요, 하는 농담까지. 아무튼, 센스는 좋아요.
그렇게 계속 걷다가, 슬슬 저녁 때가 되니까 사람들이 어디선가 또 나와서 길거리가 더 복잡해지더라.
사람 많은 곳은 좋아하지만, 내 통행에 방해가 되는 것은 진저리 날 정도로 싫어하는 나였기에 단박에 표정이 굳어졌지.
그걸 또 캐치한 정국이 나를 쳐다보면서 카페나 갈까요, 하면서 묻길래 고개를 끄덕였어.
빨리 가서 민트 모카 먹어야지. 있었으면 좋겠다. 민트 초코 마실까. 아, 민트 너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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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화님, 지렁이님, 봄날님, 보름달님, 이킴님, 꾸탄님, 중전님, 꽃잎님, 짱구님, 취향저격님, 솔님, 정국아누나가미안해님, 권지용님,
민슈가님, 슈가파파론리파파님, 듀드롭님, 청춘님, 꾹이님, 샘봄님, 홍시님, 눈설님, 홉이님, 편순이님, 스웩님, 하얀눈님, 나침반님, 김치찌개님 ♡
아 정말 진도 빼기 싫네요 ^_ㅠ
아무 생각 없이 썼지만 제 감정이 반영이 된 것인지 이번 화는 분량도 그러하고 진도 개똥.
무슨 진도가 이렇게 나가질 모태…… 새로운 인물까지 껴 넣었는데.
정국이가 더 적극적으로 작업을 걸어야하는데… 태형이가 무슨 반응을 보였어야 하는데… (암전)
그래요 제가 그렇죠 뭐. 연애를 안 해봐서 뭐가 뭔지 모릅니다.
사랑을 해야 사랑가사를 쓴다던데 연애를 해야 연애물을 쓸 거 아닙니까, 예?
그러니까 연애 좀 하게 해주세요! 잘생긴 남자를 저에게 주세요!
혼자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함
남자랑 데이트를 해봐야 데이트 씬을 쓸 거 아닙니까 (울컥)
그냥 다 깨져라 커플 다 저리가라 다 망해라 연애는 무슨 새드엔딩으로 끝내버릴거야.
다 미워 이게 말이야 방구야 이게 무슨 일이야.
작가도 연애 못하는데 등장인물들이 연애할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