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내가 좀 심했나. 집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무거워지는 마음에 생각이 많아졌어.
그래 내가 뭐 아끼는 동생 정국이랑 잘 해보려는 마음은 있었지마는, 그렇게 막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도 아니고 그냥 가볍게 생각했던 거잖아.
박지민 성격에 곱게 데리고 나와주신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지. 테이블 안 뒤집은게 어디야.
평소 같았으면 별 소란에 난리를 다 피웠을 게 뻔했는데. 사람 됐네 우리 박지민이.
내가 그렇게 막 화를 낼 일도 아니었고, 그냥 박지민님께서 질투가 나신다는데.
귀엽긴, 짜식. 그래도 금방 자기합리화를 하고 나니까 한결 마음이 편해지더라.
얼른 가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지. 내 사과 한마디에 스르르 풀려서 헤실 거릴 박지민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어.
이런 면으로 보면 참 착한 애이기도 하고. 나쁘게 말하면 단순한 거지만.
내가 안 데려가면 누가 데려가. 저 애물단지. 그래도 십년을 넘게 봐온 내가 거둬가는게 맞는 것 같다.
이런 저런 가벼운 생각들을 하니까 금방 집에 도착하더라.
근데 또 내가 자존심이 있어서 카톡으로 오라고는 못 하겠고, 그러자니 오늘 내에 다시 얼굴 보긴 힘들 것 같고.
잠잠한 휴대폰을 보아하니, 오늘 안에 박지민이 다시 연락 할 것 같지도 않고.
아이고, 이를 어쩐다. 손톱 끝만 잘근잘근 물어뜯다가 결국 우리집을 마주보고 서 있던 몸뚱아리를 휙 돌렸어.
초인종이 바로 눈 앞에 있는데 왜 누르지를 못해.
일단 팔을 들긴 들었는데, 덜덜 떨리는 손 끝이 자꾸 망설여졌어.
아무리 박지민이 단순해도 그렇지 지도 나름 화 날텐데. 만약에 문 열었다가 나인거 확인하고 다시 문 닫아버리면 어떡하지.
아니, 인터폰으로 확인하고 나여서 문 아예 안 열어주면. 나 그러면 그대로 아련하게 집에 들어가야 하는건가.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굽혀서 다시 주먹을 쥐고, 소심하게 문에 손을 가져다 댔어.
그리고 똑똑. 거실이나 문 바로 앞에 있는 게 아니라면 노크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작고 짧게.
그래 반응이 있을리가 없지. 다시 심호흡을 하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초인종 버튼을 꾸욱 눌렀어.
그리고 경쾌하게 울리는 벨. 잠시만요, 하는 소리와 함께 잠김장치 풀리는 소리.
아니, 얘는 인터폰이라도 확인을 하던가.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
"누구세요."
데. 하하. 우리 둘 다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얼음. 서로 굳어서 어색한 공기만 흐르고.
그래, 이러면 안 된다구. 이럴까봐 내가 계속 걱정 했던 거 였는데.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어. 누가 봐도 어색하게 웃는 꼴이었지만.
"너, 너. 그래, 너 우리집, 그, 안 올거야?"
이런 병신아. 밀려오는 민망함에 얼굴을 잠시 찌푸렸다가 다시 어색하게 웃었어.
박지민이 날 병신으로 본다는 표정이 아닌 것 같아서 그건 좀 다행이더라.
아니 첫마디로 꺼낸 말도 웃긴데 말은 더듬긴 왜 더듬어.
뭐 죄 지은 것도 아니고 왜 더듬냐고 거기서. 아 내 흑역사. 인생 최고의 흑역사다 정말.
남들 다 있다는 초등학생 때 흑역사나 중2병도 없었는데 이런 걸로 흑역사가 생기다니.
정말 두고두고 이불킥할 상황이구만.
혼자 민망함에 내적 이불킥을 마구 하고 있는데, 지민이 문에 기대섰어.
휴대폰을 한번 확인하더니, 카톡은 왜 안 하고 왔냐고 묻더라. 그 말에 또 어버버. 꼭 하고 와야하는 건 아니고, 그리고…….
병신도 이런 병신이 또 없어요. 내가 거의 울상으로 웃자 지민은 제 머리를 한번 헝클이더니 나를 다시 보더라.
"오늘은 안 갈거야."
어, 어. 왜? 다시 한번 맹구처럼 말을 더듬었어. 아 나 진짜 죄 지은 건가.
화내지 말 걸. 괜한 후회를 이제와서 해봤자 뭔들 달라지겠습니까. 지금 심정으론 내 머리를 스스로 쥐어박고 싶을 정도였어,
아니 그니까 거기서 화를 왜 내가지고. 그냥 차갑고 도도하게, 시크하게 말했으면 얼마나 좋아.
우리집이면 사족을 못 쓰던 애가 왜 갑자기 안 온대.
진짜 화난 건가, 삐쳤나. 어쩌지. 저걸 또 어떻게 풀어줘야 한담.
집에서 보자고 했는데 그게 너의 집이 아니라 우리집이었고, 그러니까 그게 우리집에서 만난다는 건 너가 온다는…….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이상한건가.
너무 뻔한 전개여서 멋대로 판단하게 된 거잖아. 아니, 굳이 안 물어봐도 박지민은 신나서 우리집 달려오는 게 뭐.
내가 할 말을 못 찾고 그냥 눈만 데룩데룩 굴리고 있는데, 지민이 한숨을 쉬었어.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할 말이라니 무슨. 얘 설마 내 사과를 바라는 건가. 저절로 꾹 다물어지는 입.
아니지, 사과할 목적으로 온 거니까 사과는 해야하겠는데.
또 막상 하려니까, 쪽팔리잖아. 소꿉친구 사이에 사과고 뭐고 그런게 어딨어. 그냥 자연스럽게 다 해결 돼고 하는 거지.
왜 이래 김탄소 정신차려. 자꾸만 멍해지는 정신에 생각이 정리가 안 되더라.
온 목적이 있긴 하니까, 사과는 하자 일단.
사과 하러 온 게 맞으니까 사과를 하고, 그리고 나서 뒷일을 생각하도록 하자.
우물쭈물, 자꾸 들썩거리기만 하는 입술을 어쩔 줄 모르다가, 겨우내 사과를 했어.
"미안."
"뭐라고?"
입꼬리가 씰룩 거리는게, 확실히 내 사과를 들었다. 저 새끼는 내 사과를 들었어.
어쭈, 손으로 입 가린다고 웃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순간 억울한 마음에 발끈하려다가, 그냥 한숨을 쉬면서 참았어. 지금 내가 화낼 처지는 아니니까.
미안해. 내가 다시 한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박지민은 또 어깨를 으쓱하며 못 들은 척을 시전.
진짜 한 대 때리고 그냥 집에 갈까. 왜 자꾸 아까 전부터 내가 손해보는 기분이지.
"……미안해."
"잘 안 들리는데."
"아, 미안하다구!"
씩씩. 이제 됐냐는 뜻으로 쳐다보니까 그제서야 웃음을 터트리면서 고개를 끄덕끄덕.
이거 봐, 완전 사과 한번에 기분 다 풀려서. 그래 한번이 아니지. 다섯번인가.
무튼 박지민은 단순하다니까.
내가 툴툴거리면서 이제 간다, 하고 뒤로 돌아서는데, 박지민이 내 팔을 확 잡아 챘어.
다시 빠르게 돌려지는 몸에 뭔가하고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마주치는 눈.
뭐야, 이 상황. 안 그래도 민망해 죽겠는데 나랑 뭐하자는 거야.
어색하게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덜덜 떨리는 안면근육을 애써 진정시키고.
잡힌 팔을 살짝 비트는데, 남자라 그런지 손 힘이 굉장히 쎄다.
막 아프게 잡힌 건 아닌데, 빼기는 힘든 그런 힘이라고 해야하나.
아 몰라 지금 그런 거 신경 쓸 상황이 아니잖아. 얘는 왜 또 아까 전부터 안 어울리게.
너는 그냥 등신 호구 이미지가 제일 잘 어울린단 말이야.
자꾸 이런 이상한 모습 보여주지마 적응 안 되잖아. 엉엉. 일단 놓고 얘기할래. 나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아.
"너, 아까 내 얘기 들었지."
"무슨 얘기?"
억. 삑사리 났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어.
정국이랑 놀지 말라는 거? 아니면 뭐였지. 이거 놓고 얘기해도 될텐데.
굳이 잡고 얘기 해야할까. 내가 울상을 지으며 팔을 가리키는데 본 척도 안 한다.
아 민망하다, 죽을 것 같다. 이것을 어색함이라고 부르자.
그래 화낸 내 잘못도 있지마는, 이렇게 정국이를 싫어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지민아.
뭐 어떻게 설명해야 횡설수설하는 꼴이 안 될까 하면서 말 할 것을 정리하고 있는데, 지민이 한숨을 쉬면서 다시 얘기를 시작하더라.
"탄소야."
"……."
"난 너 좋아해."
"……."
"이건 장난도, 농담도 아니야."
솔직히 아까 내가 이 말 했을 때, 너가 그냥 화내면서 가길래. 조금 많이 속상했다.
나만 계속 삽질했구나, 싶기도 했고. 하기야, 누가 제 소꿉친구가 자길 좋아한다고 생각하겠냐.
그냥, 뭐. 접어야 하는구나, 생각하고 있었지.
말해놓고 자기도 부끄러운지 자기 앞머리를 한번 헤집는 모습에도 난 멍.
어, 그러니까 박지민이 나를 좋아하고. 좋아하는 건데, 그래서 아까 말한건데.
뭐지, 왜 정리가 안 돼. 하하, 내가 어색하게 웃으니까 박지민이 잡고있던 팔을 놓았어.
"얼른 집 들어가."
"어, 어……."
"내일 놀러갈게."
너네 어머니랑, 우리 엄마도 내일 오신다더라. 좋았는데, 그치.
아, 그럼 이제 나 가면 되는거니. 하도 어색해서 뭔가 하기도 애매한 상황에 내가 가만히 있자, 지민이 쳐다봤어.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 분명 나도 연애를 해봤던 것 같은데.
원래 상대가 좋아한다고 하면 그걸로 끝이었나. 사귀자고 얘기를 했었나.
모든 기억이 포맷 된 기분이네. 뜻밖의 일을 접해서 그런가.
박지민이 나를 좋아한다니, 지나가던 김태형이 웃겠네.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 일인가. 근데 왜 심장을 두근거리고 난리야.
나대지마 심장아. 좀 가만히 있어 봐. 너 때문에 더 정신 없잖아.
"아 맞다,"
또 왜, 또 뭐를 얘기하려고. 무슨 헛소리를 또 하려고.
어떤 정신나간 얘기를 해서 날 또 벙찌게 하려는 거야.
마른 침을 삼키며 다음 나올 말을 긴장해서 기다리는데, 막상 박지민의 입에서 나온 건 김 빠지는 얘기.
"그 전정국, 걔랑 놀지마."
같은 남자가 보기에, 안 좋아. 걔 완전 선수더라.
무슨 작업을 그렇게, 어후. 야, 그냥 만나지 마.
그래 박지민 답다. 이래야 좀 너같지. 조금 풀린 어색함.
내가 웃기지말라고 같은 장난 섞인 말로 박지민을 툭 치며 말하자, 지민도 웃었어.
정국이 착한 동생이라니까. 너도 친하게 지내, 안 그래도 소개시켜 주려고 했었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긴 한데, 자꾸만 입이 귀에 걸린다.
마음이 간질간질. 기분이 왜 이렇게 좋은거지.
"나 들어갈게."
응. 지민이 손을 흔들며 대답했어. 누가보면 좀 떨어진 곳에 사는 줄 알겠지만, 그래봤자 3미터 좀 될까말까하는 거리의 앞집.
왜인지 모르게 자꾸 아쉽게 떨어지는 걸음에 천천히 걸어 집 문 앞에 왔는데, 뒤에서 지민이 해맑게 웃더라.
부끄러워. 뒤를 안 돌아보고 빨개진 얼굴에 손 부채질을 하면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는데,
"우리 오늘부터 1일!"
지랄한다 아주. 피식 터져나오는 웃음에 도어락 잠금이 풀리자마자 집으로 뛰어 들어왔어.
쿵 닫히는 문 뒤로 박지민의 수많은 애정공세 목소리가 쏟아지더라. 명불허전 박지민.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신발을 벗었어.
박지민은 아마, 이 모든 일이 내가 의도한 밀당 중 일부라는 걸 평생 모르겠지.
화낸 건 조금 심했던 것 같지만, 그래도 뭐. 제대로 된 고백 다시 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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