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 올해도 니가 그리운 날
나는 너에게, 한없이 나쁘기만한 사람이었음을.
나쁜 사람
written by. 공화국
나쁜 사람(Bad Boy) 첫번째 이야기
“ 경수야, 나 약혼해. ”
일상적인 말을 건네듯 여느 때와 다름없는 담담한 말투였다. 불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경수의 시선이 제 앞에 서 있던 종인에게로 향했다. 경수의 눈동자가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늘 경수는 종인에게 늘어놓고 싶은 말이 많았다. 오늘 TV를 보는데 우리가 키우는 깜이랑 똑같은 종류의 토이 푸들이 나왔다라던가, 아니면 날씨가 더 추워졌으니 옷을 더 따뜻하게 입고다니라던가. 일기예보를 보면서도 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인에게 더 따뜻한 옷을 입히겠노라 다짐했었다. 그래서 오늘 옷장도 정리했고,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집안 청소도 깔끔하게 해봤는데.
선반 위에 걸어두었던 종인의 베이지색 코트가 눈에 띄였다. 종인은 여전히 경수에게 대답을 갈구하듯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너, 나한테 대체 무슨 대답을 바라는거니.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로 경수는 그렇게 물었다.
“ 축하한다는 말 같은 거? ”
“ …… ”
“ … 그런 걸, 바라니? ”
경수의 빨갛고 도톰한 입술이 처참하게 짓이겨졌다. 제 위용을 드러내며 서 있는 아주 큰 거인 앞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하이얀 민들레와도 같았다. 밟으면 금방 사그러들고 부서져버리는.
난 언제부턴가, 네 앞에만 서면 작아지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 그래. ”
“ …… ”
“ 축하한다고 해주면, 더 고맙고. ”
…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한 글자 한 글자 내뱉는 네 말은 한낱 대못과도 같았다. 여지없이 심장에 쿡쿡 눌러박혀 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축하? 네 약혼에 대한 축하를 해달라고?
“ …… 넌 내가 그렇게 멍청한 새끼로 보이니? ”
“ …… ”
“ … 넌 다르다고 그랬지. ”
“ …… ”
“ … 넌 다른 사람과 다르니까, 믿어도 된다고 그랬지. ”
난 다를 줄 알았다. 다른 사람들이 연인들과의 헤어짐에 울고 웃었을 때도 나만큼은 종인이와 헤어지지 않을거라 생각했고, 다들 한번씩 찾아온다던 지독한 권태기도 우리에게만큼은 해당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너와의 행복만을 생각하며 하루를 살았는데, 넌 나와의 이별을 위해 하루를 살았구나. 네 일거수일투족이라면 다 꿰뚫고 있는 내가 네 그 빌어먹을 약혼 소식을 몰랐던 걸 보면 네가 얼마나 주도면밀하고 치밀하게 준비했는지 대충이나마 알 것 같긴 하다. 종인아, 차라리 이런 식으로 뒷통수를 칠거면 차라리 헤어지자고 하지 그랬어. 그게 덜 놀라웠을 것 같은데.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네가 요새 집을 비우는 시간이 길어지고,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네가 일방적으로 나를 피하고 있었던 것도 알았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나는 네가 금방 다시 제 자리를 찾고 돌아올 줄 알았다. 경수야, 난 역시나 널 사랑하고 있어. 이런 달콤한 말까지 해준다면 더할나위없이 행복할 것 같았다.
그래, 밖에서 여자를 끼고 논다거나 하는 것들쯤이야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었다. 왜, 우리 나이대 남자라면 그런 장소를 찾아간다는 게 꼭 이상한 일만은 아니니까. 그리고 김종인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니까 본능적인 욕구의 해소는 그런 곳에서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백현이가 그렇게 얘기했더 것 같다. 김종인이 딴 여자랑 뒹굴고 다닌다고 생각하면, 기분 안나빠? 무슨 생각으로 유흥업소를 들락날락하게 하는거야?
아아.
김종인이, 딴 여자랑 뒹군다.
백현이 그 말을 했을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좀 대답이 떠오르려고 하는 것 같다.
“ 다를 거 하나없네 너도. ”
“ …… ”
“ 평생 행복하게 살자고 그랬으면서. ”
“ …… ”
“ 누구보다 날 사랑한다고 그랬으면서. ”
진부하기 짝이 없던 거짓말일 뿐이었구나.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네 뻔한 수작이었구나. 너도 수많은 사람들 중 다를 거 하나없는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을 뿐이구나.
경수는 이윽고 종인의 손에 들려있던 하얗디 하얀 카드를 발견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막 나가겠다 이거지.
“ …… 김종인. ”
“ …… ”
“ … 나, 이제부터 울건데, ”
“ …… ”
“ … 나 달래줄거야? ”
네 품에 안고 등을 토닥이면서, 다 괜찮다고 … 속삭여 줄 수 있어?
“ 아니. ”
“ …… ”
“ … 이젠 너 혼자 울어도 돼. ”
…… 그런 말이 어딨어 종인아.
“ 울어도 안 달래줄거야. ”
“ …… ”
“ 혼자 울어. ”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 결국 힘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정말 날 … 버리려고 하는구나.
“ 초대장이야. ”
“ …… ”
“ 다음 달, 17일 크리스탈 호텔. ”
“ …… ”
“ … 이때까지의 정이 있어서 주는거야. ”
이때까지 나누었던 우리의 사랑을 한낱 ‘ 정 ’ 으로 치부해버리다니. 너도 참 독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나도 참, 대단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구나. 흐르는 눈물 사이로 원망스러운 울음이 새어나왔다.
종인은 꿋꿋하게 약혼 날짜와 이름. 장소까지 적혀진 깔끔한 초대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 … 혹시나 해서, 얘기하는거지만. 약혼식장까지 찾아와서 깽판 칠 생각이 있다면,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
“ …… ”
“ 내 여자친구는 행복한 약혼을 원해.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
…… 내, 여자친구.
“ … 경고하는거야. 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
“ …… ”
“ 집은 이주일 이내로 비워 줘. 괜찮지? ”
“ …… ”
“ 네 짐도 모조리 다 가져갔으면 좋겠어.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가도 상관없고. ”
경수의 눈에 허공이 담겼다. …… 내 사랑도, 내 미래도.
“ … 김종인. ”
제 할말은 끝났다는 듯 집을 나서려는 종인을 붙잡은 건 경수였다.
“ …… 나쁜 놈아 …… ”
“ …… ”
“ … 아무리 그래도 …… 정말, 내가 질리고 미워졌다고 그래도 …… ”
“ …… ”
“ … 우리가 함께, 보내온 시간이 있잖아 …… ”
“ …… ”
“ … 네가 나한테, 사랑한다고 이야기 했던, 순간이 있었잖아 …… ”
나만큼이나 너도 잘 알고 있으면서, 왜 모르는 척 해. 내가 널 얼마나 간절하게 사랑하고 원했는지 알고 있으면서 너는 왜 또 나한테 그래야만 해. 너는 …… 너는 왜.
“ … 이런 식으로 이별을 고하는 게 어딨어. ”
“ …… ”
“ … 이런 식으로, 엿먹이는 게 어디있냐고. ”
“ …… ”
“ … 너만 끝나면, 그걸로 끝이야? ”
남아있는 나는?
네 뒷모습만 지켜보며 살아야만 했던 나는? 허비할 수 밖에 없었던 내 시간들은? 너에게 쏟아부었던 내 일생은? 내 20대는?
넌 대체, 나에게 뭘 돌려줄 수 있는데. 대체, 네가 뭘 돌려줄 수 있는데 …… !
“ 너는 뭘 돌려줄 수 있는데. ”
“ …… 종인아. ”
“ 너한테 쏟아부었던 시간? 돈? ”
“ …… ”
“ … 괜히 내 탓할 거 없어. 너나 나나, 돌려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
“ …… ”
“ 난 널, 다시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
종인은 그렇게 문을 닫고 집을 나섰다.